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 라면 교양 2
하승우 지음 / 뜨인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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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입막음하듯이 하는 이야기들을 싫어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계속 소리를 질러 댔다. "제발 좀 그냥 놔두세요." 마치 군대에 간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듯한 이야기에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말은 분명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가 그들은 군대에 가는 것을 양심으로 거부한 사람들이라 말하면서 군대에 입대한 사람들은 양심을 가지고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그만 할 일을 잃었다. 누가 군대를 양심을 가지고 가는가? 누가 군대를 나라를 지킨다는 의식을 가지고 가는가? 누가 군대를 의식해서 가는가? 그들은 끌려 가는 사람들이다. 병역 거부로 인하여 형무소에 갇히는 이들은 사회적인 약자라고 그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을 외치기 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병역문제로 인한 사회적인 약자는 군에 입대한 절대 다수라는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가 공감이 안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군대가 좌우한다는 말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특성일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혈연과 지연과 학연으로 똘똘 뭉쳐 있는 나라이다. 심한 경우는 같은 유치원 출신이라는 거사저 연줄로 사용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나라에서 정말 밑바닥을 보여주고 같이 생활했던 군대에 관하여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는 것은 어지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어느 정도 너그러움을 가지고 봐줄만한 이야기이다. 주제를 바꿔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하여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들이 친구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동창회 이야기를 하겠는가? 등산 이야기, 등산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다. 군대라는 공통된 경험을 가진 남자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군대 이야기다. 그런데 왜 군대 이야기가 가끔 인신 공격이나 차별로 이어지는지 아는가? 왜 그리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하는지 아는가? 알아 달라는 것이다. 알아 주지 않아도 좋으니 깡그리 무시하지 말아달라는 이야기다. 군대 갔다온 것만으로 죄인을 만들어 버리는 이 사회에 대하여 병역 문젱 대해서는 우리가 가장 큰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말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 참 좋은 말이다. 개인의 양심을 가지고서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 기술을 익히지 않겠다고, 국가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말,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이 또 다른 차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양심적 병역 거부가 군대에 입대한 이들을 비양심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던 당시 나는 군대에 있었다. 그것도 저자가 제일 싫어하는-물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 늬앙스로 알 수 있다.- 군목으로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상담하고, 종교행사를 집례하는 것이다. 그 당시 병사들은 물론 내 마음까지도 무너지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이다. 군대에 좋아서 온 사람들이 누가 있겠는가? 신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개인의 책임이기 때문에 군대에 입대한 것이 아닌가? 세상이 좁다고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엄격한 규율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참아내고 있었다. 왜 그런지 아는가?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티고 있던 이들에게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은 자기들은 마치 비양심적이라서 군대에 입대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사회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토해내고 있는 그 때에 그들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버텨내고 있었다. 자살하는 이들도 있었고, 사고로 죽는 이들도 있었지만 절대 다수는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는 다르다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무임승차와 똑같다. 정말 혈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병역을 감당하지 않는 무임승차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가? 모든 사람이 병역 거부를 할 수 없다. 그 중간에 분명히 총을 들고 찬 바람 맞아가면서 언 다리 두들겨 가면서 산을 오르고 철책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장소에 가보면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남북화해 모드라는 것은 꿈같이 느껴진다. 가끔 총소리가 들려오고, 지뢰가 터지기도 하고, 불이 나기도 한다. 철책을 바라보면 평화라는 말은 저멀리 사라져 버린다. 그래도 최전선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명예를 주지 못할망정 돌을 던지지는 말자. 위로해 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내버려두자. 군가산점 안받아도 좋다. 대체복무 허용해도 좋다. 그러나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병역의 의무를 감당한 이들에게 돌은 던지지 말자. 그들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슬픈 사람들이다.

추신

1. 상비군 제도가 19세기의 제도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묻노니 로마 군단은 상비군이 아니던가? 각 나라에 존재하던 상비군들은 무엇이던가? 아무리 전시에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상비군은 분명히 있어 왔다.

2. 군대가 없이도 국가가 망하지 않는 나라로 코스타리카와 스위스와 일본을 꼽았다. 코스타리카야 그렇다고 해도 스위스는 이미 유럽의 용병으로 이름을 날리던 나라다. 산업이 발전되기 전 국가를 먹여 살린 것은 스위스 용병들이 아니던가? 일본에 군대가 없다고? 명칭상 군대는 없지만 우리나라보다 훨씬 윗줄에 있는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다. 물론 헌법을 수정하여 군국주의 부활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다.

3. 먼저 총을 내려놓으면 평화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이야기? 글쎄다. 이상론이다. 극동 아시아에서 총을 내려놓는다? 잡아 먹히기 딱 좋다.

4. 대만에 대체 복무를 함으로 인하여 사회 서비스는 좋아지고 병역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얼마전 신문에 병력이 없어서 부대 위병소에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기사를 본 것 같은데?

5. UN을 믿으면 된다. UN의 약자가 무엇인지 아는가? Unnecessary이다.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그만큼 영향력이 없다는 말이다.

6.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가? 망한다. 물론 해외 파병을 국익과 결부시키는 현재 모습은 위험하지만 군대는 필요하다. 지구가 하나의 나라가 되지 않는 이상. 다른 나라를 침략할 정도로 세지는 않지만 자기 나라를 지킬 정도의 힘은 가진 군대, 이것이 대한민국에 필요한 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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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주의 목회 신화를 포기하라 - Good Seed 교회와 목회시리즈 4
유진 피터슨 지음, 차성구 옮김 / 좋은씨앗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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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의 일이다. 학생 때 채플 시간에 한 목사님이 나오셔서 설교를 하셨다. 그날 설교의 주제는 목회에 성공이라는 말이 가능한가였다. 세상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성공이라는 말을 꿈꾸고 살아가는데, 그리고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 세속적인 성공이라는 말이 과연 목회와 어울리는 말이더냐는 것이 설교의 요지였다. 이날 채플을 마치고 수업 시간에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 내가 전공한 것이 윤리이다 보니 그날 수업의 주제가 여기에 맞추어져 버린 것이다. 수업 시간에 논쟁이 일어나면 대체로 6학기 학생과 4학기 학생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6학기 학생은 일반 학교를 다니다가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대학원에 입한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4학기 학생들은 대학교를 아예 신학대학에 들어간 경우이다. 그러다 보니 생각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날도 여지 없이 6학기와 4학기의 논쟁이 불을 뿜었다. 4학기는 목회에 성공이라는 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6학기는 목회에 성공한 분들이 많지 않냐는 것이다. 6학기 생들이 성공한 경우로 꼽는 사람들은 김선도, 김홍도, 김국도, 조용기 같은 대형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목회의 성공이라는 것은 큰 교회를 담임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학교를 다니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성공이라고 끊임없이 세뇌받아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목회라는 말에 성공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길 좋아한다.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담임해야 하고, 자기 말 한마디에 여러 사람이 움직이고, 자기를 떠받들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가 마찬가지다. 다만 얼마나 조심하고 경계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별로 그러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다. 자기 듯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사탄이라고 칭하는 모습은 이제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목회자의 말에 거스르면 그 이야기가 옳고 그른지를 따져보지 않고 거부해 버리는 것이 목회가가 가장 쉽게 따르는 선택이 아니던가? 마치 자신이 사람들에게 얕보이면 하나님이 얕보이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커다란 탑을 쌓는다. 그리고 그 탑이 더 웅장해지고 위엄을 갖도록 교회의 부흥을 바란다. 그런데 그 부흥이라는 것이 대체로 양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렇게 양적인 성장에 매진하다보면 목회자는 필연코 돈과 권력과 섹스라는 함정 앞에 직면하게 된다. 막장이라고나 할까?

  유진 피터슨은 이러한 목회자들의 위험을 자기의 경험을 가지고 우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준다. 요나서의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시스로 가려는 배를 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목회의 길이 아니니 당장이라도 내려서 니느웨로 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니느웨만큼 목회의 현장을 잘 설명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가기 싫은 곳, 그러나 가야 하는 곳,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나타나는 곳 이곳이 니느웨이다. 다시스는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없이 내가 존재하는 곳,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곳이다. 우리 목회의 현장은 어느 곳인가? 다시스인가? 니느웨인가?

  요즘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마음이 답답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갈길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지만 답답함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다 예전에 사 놓았던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책 내용이 너무 사변적인 곳도 많고 번역이 조잡스러운 곳도 많아서 읽다가 졸기를 반복하다가 집어 던졌던 책이다. 이번 기회에 인내를 가지고 마지막가지 읽게 되었다. 물론 여기저기 거친 부분들도 있고 졸음에 자연스레 빠지게 만드는 부분들도 있지만 읽어볼 만한 책인 것 같다.

  혹시 프로그램에 목말라하고, 조급증이 일어나는가? 왜 교회가 안커지냐고 불안해 하고, 맡겨진 자리가 답답해지는가? 내가 아니면 안될 것처럼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있는 것이다. 잠시 멈추어 삶을 돌아보고 니느웨로 가는 배로 갈아타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당신의 여정에 지도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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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신실하게 믿음의 글들 191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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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의 재정이 마침내 바닥이 나 버리고 말았다. 수도원의 뾰족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은 깨져 나갔지만 그런 것을 손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깨어져 버린 종마저도 다시 살 형편이 되지 못해 신부님들은 나무 딱다기를 쳐서 기도 시간을 알리곤 했다. 마침 그 수도원에는 고셰라는 이름을 가진 수사가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란 고작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일이었다.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수도원의 재정 상태를 능 가슴 아프게 생각하던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허가 아래 젖소 돌보던 일을 중단하고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다. 어릴 때 자신을 키워 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의 전문가였기에, 그 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해 가면서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애쓴 결과, 마침내 고셰 수사는 불로장생주를 빚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날부터 고셰 수사는 빚은 불로장새주는 프랑스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가난에 찌들었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하루 아침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수도원의 건물은 웅장하게 고쳐졌고 뽀족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그 모든 것이 고셰 수사 덕분이었다. 그 빛나는 공적으로 인해 고셰 수사는 신부의 서품까지 받게 되었다. 수도원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날 저녁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경건하게 저녁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어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자기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고셰 수사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불로장생주가 잘 빚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그 술을 시음해 보다가, 그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다른 신부님들은 술주정하는 고셰 신부를 향해 "사단아 불러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버렸다. 그리고 신부님들은 다시 경건하게 미사를 계속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수도원 원장은 고셰 수사에게 앞으로는 성당 출입을 삼가고, 주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을 빚으면서 거기서 혼자 기도할 것을 명령했다.

  마음씨 착한 고셰 신부는 수도원장의 명령을 따랐다. 매일 술을 빚고 그 술을 시음해 보면서 주소장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장이 주조장을 찾아왔을때,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에게 눈물로 간청하였다. 이제 술을 그만 만들겠으니 예전처럼 젖소 돌보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고셰 수사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리고 자비로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인즉, 아무 염려 말고 소신껏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만을 빚으라고 도리어 격려해 주었다.

  어쩔수 없이 고셰 수사는 계속해서 술을 빚었고, 그 술은 날마다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으며, 수도원은 쉴 틈 없이 돈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매일 미사가 끝날 때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 수사를 위하여 간절히 축복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고셰 수사의 영혼과 육체는 주조장 안에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의 꽁트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의 내용이다. 이 작품속의 수도원장과 신부들이 사랑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돈이었다. 주님의 이름과 고셰를 위한 기도는 단지 명분이었을 뿐, 그들이 집착했던 것은 돈이 전부였다. 무서운 이중성이었다. 그 이중성의 틈바구니로 그들의 인생은 새어 나갔고, 그 같은 그들의 삶은 순박한 고셰의 영과 육을 죽이는 흉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실상인 것은 아닌가?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단지 자신의 욕망만을 성취하려는 우리 자신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중성 사이로 지금 우리를 스치고 있는 1초 1초 또한 허망하게 소멸되고 있을 뿐이지 않겠는가?                                                      -298p~300p 인용

  한국 교회에 불어 닥치는 붐은 더 높이 더 크게인 것 같다. 다른 교회보다 더 크게 지어 올리는 것이 마치 자기가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너무 많다. 서울의 유명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는데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가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자기 형제들이 모이면 이렇게 말한단다. "누구 교회가 세상에서 제일 큰가?" 이 말로도 성이 안차셨는지 안돌아가는 영어 발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Whose churchis the biggest in the world?"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런 것으로 자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도 영어까지 곁들여서 자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기가 막혀서 한참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있다. 대저 한국 교회의 모습이 이러하다. 목회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반 신도들이라고 다를 것인가? 여의도에 있는 모 교회, 강남에 있는 모교회, 압구정에 있는 모교회 등등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를 다니는 신자들 또한 자기 교회보다 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매 주일 예배가 드려지고, 기도회가 열리지만 그것들은 구색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크기이다. 크기에 집착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갈보리 언덕을 오르고 계시는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대학의 한스 로크마커 교수가 쓴 <예술은 변병을 요하지 않는다>는 책 속에는, 1800년대의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후쿠사이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후쿠사이를 찾아와 수탉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수탉을 그려 본 적이 없는 후쿠사이는 친구에게 일주일 후에 오라고 했다. 일주일 후에 친구가 찾아오자 후쿠사이는 이번에는, 이주일 후에 보자고 했다. 이주일 후엔 두 달, 두 달 후엔 6개월-이런 식으로 약속을미루다가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3년째가 되는 날에도 후쿠사이는 또 약속을 미루려 했다. 친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후쿠사이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후쿠사이는 말없이 종이와 물감을 가지고 오더니, 그 즉석에서 순식간에 수탉을 그려 주는 것이었다. 완성된 그림이 얼마나 완벽한지 마치 살아 있는 수탉을 보는 것 같았다. 그 그림은 친구를 기쁘게 만들기보다는 도리어 그의 화를 더욱 돋우고 말았다. 친구는 후쿠사이에게, 이처럼 순식간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을 왜 3년씩이나 기다리게 했느냐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후쿠사이는 말없이 친구를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크나큰 화실의 사방 벽 앞에는, 3년 동안 후쿠사이가 밤낮으로 습작한 수탉의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후쿠사이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수탉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3년간 밤낮에 걸친 훈련의 결과였다. 그래서 로크마커 교수는,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안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은 기본이요, 그 기본 위에 후천적인 훈련이 중단 없이 수반될 때에만 한평생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술가의 작품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훈련에 정진했다면 명품일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명품일 까닭이 없다.

  믿음도 이와 같아서 믿음 역시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을 때에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다 같은 크리스천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보기에 민망한 크리스천 또한 부지기수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기본이라면, 매사에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신실하고 참다운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철저하게 훈련의 문제이다.  

                                                - 392p ~ 393p 인용

  교회 안과 밖의 삶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말로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욕먹는 이유, 비난당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불교의 가르침과 많이 다르다. 불교는 아직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교회를 다녀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답지 못하면 바로 비난이 들어오는 것이다. 왜 이렇게 크리스천답지 못한 크리스천이 많은가? 기독교 신앙을 도매금에 넘겨 버리는 목회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거저라고, 공짜라고, 예수님 이미 지셨으니 믿기만 하면된다고 하는 설교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두루뭉실하게 넘어간다. 그러다보니 신앙은 그저 종교적인 생활을 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 주에 한번 교회가면 그것으로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건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언제부터 이렇게 싼 것이 되었던가? 세상에서 제일 비싼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평생 자기 삶을 바쳐서 지켜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인데 그것이 어떻게 쌀 수가 있단 말인가? 믿믿음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곱씹어 보아야할 말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어던 변명도 필요없다. 그저 우리의 삶을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이렇게 무분별하게 살아가는 자칭 크리스천들이 넘쳐날 것인가?

  본질에 대한 신실한과 크리스천답고자 하는 삶에서의 끊임없는 훈련이 우리를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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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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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유럽을 만든 스페인 내전을 살펴보자. 20% 이후 진도가 안나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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