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가 전하는 거짓말 - 우리는 날마다 '숫자'에 속으며 산다
정남구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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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무엇인가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수학을 꼽을 것이다. 다음으로 싫은 과목을 꼽으라면 사회학을 꼽을 것이다. 도무지 내 생리에 수학과 사회학은 맞질 않는다. 수학과 사회학이 내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둘다 숫자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이다. 그만큼 나는 숫자를 들여다 보는 것이 너무나 싫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고 숫자 이야기만 나오면 얼른 넘겨버리는 버릇이 있다.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혹시라도 책을 읽다가 통계라도 나오게 되거든 그냥 넘겨버린다. 흘깃보고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넘어간다. 신문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체감하는 사실과 통계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통계자료를 가지고 조중동에서 해석하는 것과 한겨레에서 해석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누가 틀린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의문이 풀렸다. 어느 누구도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해석하는 시각이 약간 다를 뿐이다. 이 약간의 다름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허상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는 무엇인가? 계속 묻고 묻고 물어서 결국 자기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지금 이순간은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끊임없는 의심하여 결국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전제에 이르렀을 때 그의 의심은 끝이 났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 갔다.

  통계를 대할 때 우리도 이런 모습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이 통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고, 누가 만들었고, 이 통계를 통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이것을 묻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통계라는 그럴 듯한 거짓말에 번번히 당할 수밖에 없다. "통계는 심심풀이 장난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지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통계를 조사하고 발표하는 기관이 어디인가에 따라서 통계는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통계를 다루는 사람들의 역할이 그것이다.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원하는 결론을 통계로 뒷받침 해주는 것, 조사 기관의 역할이다. 자기 기업에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 통계 조사를 할 기업이 어디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냐? 그 통계를 의심하는 것이다. 계속 의심하고, 각 항목별로 세부적으로 살펴봐서 어디에서 왜곡이 되어 있고, 원래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통계라는 그럴 듯한 거짓말에 속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50가지의 사례들은 우리가 신문에서 너무나 쉽게 접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데 왜곡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내가 얼마나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 혹은 이익집단들에게 휘둘려 왔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세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되었다.

  책의 구성이 50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고 힘들지 않다. 차근차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통계표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렇기 때문에 중고등학생들이나 사회학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부담없이 읽기에 좋은 책인 것 같다. 매일 신문을 접하면서 나와 같은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읽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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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사로 산다는 것 - 가르치는 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배우는 것이다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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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이 책에 글을 기고한 모든 선생님들의 고민일 것이다. 물론 이 고민은 이 선생님들만의 고민이 아닐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일 것이다. 도대체 역사란 나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이것을 해석할 수 있어야 우리는 제대로 된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된다. 만일 역사를 시험에 나온다고 달달외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역사를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책을 암기하는 사람일뿐이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요, 어느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오늘 내가 살아가는 시대를 과거의 사건을 돌아봄으로 인하여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학생들에게 역사적인 사실을 암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관을 세워가도록 도와주려는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 있다. 이런 선생님들 밑에서 역사를 배운다면 그 아이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일 것이다. 지금이야 비록 티가 나지 않고, 시험에 나지 않아 점수에 반영이 되지 않지만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들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교사는 단순히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역사관을 정립시켜주는 사람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외우게만 시키는 것이 역사 교사의 전부라면 오히려 민영화하여서 학원 강사를 학교를 불러 들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물론 충격적이게도 지금 이렇게 흘러가고 있지만) 역사 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뒹굴면서 말 한마디, 몸짓 하나, 얼굴 표정 하나에도 역사에 대한 진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역사 선생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역사 선생님이 사라지고 있다. 역사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는 여전히 많은데 치열한 고민을 가지고 역사관을 정립시켜주는 교사는 멸종되어 가고 있다. "시험에 안나와요." 한마디면 모든 것이 용납되는 아이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서 그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인 줄 아는 아이들, 황조가 하나 모르면서 연속극 주몽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 태사기의 배용준을 보면서 열광하지만 중원 고구려비를 모르는 아이들, 바람의 나라를 보며 빠져들지만 정작 자명고는 모르는 아이들에게 역사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들에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까닭은 나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오늘날 나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이듯이, 성경을 오늘의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야 하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오랫만에 영혼의 양식이 될만한 책을 한권 만났고, 진지한 물음을 던져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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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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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당 대선 후보 당시 디씨에서 패러디 했던 포스터를 보았다. 옹박의 포스터를 패러디한 그 포스터의 문구는 이랬다. "박정희는 죽었다. 박근혜는 약하다. 건설의 후예 명박" 이 한마디로 이명박 대통령의 모든 마인드가 설명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BBK관련된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을 해도 용납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경제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품고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더이상 한국 경제는 한 사람만의 힘으로 회생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은 것이 아니기에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실업율은 점점 올라가고 IMF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한국 경제를 구하기 위하여 이명박 정권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경제 회생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아파트 건설을 위한 경기 부양과 일자리 창출이다.

  텔레비전을 통하여 이 뉴스를 듣고 나는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건설을 통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기를 부양한단 말인가? 아직도 현대건설 사장인줄 아시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어이가 없어하던 차에 이 책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탐독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불패라는 말이 절대불변의 법칙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집이란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주의 개념인가 아니면 투자의 개념인가? 거주의 개념이면 나누어 써야 하는 공공재일 것이요, 투자의 개념이면 한탕하기 위하여 사재기해야 할 물건인데, 한국에서는 공공재가 아닌 투자의 개념이 더 강한 것 같다. 아니다. 투자라는 말보다 투기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투기의 개념이기 때문에 사재기를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겠지? 집이 없어서 계속 옮겨다니다 결국 쪽방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수십만을 헤아리는 시대에 한 사람이 1083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단돈 몇 만원이 없어서 쪽방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시대에 수십억대의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동산의 편중보다 더 심한 부동산의 편중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돈을 많이 벌어 더 편한 집을 구하고 더 넓고 쾌적하게 살아가는 것을 뭐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누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들에게 왜 나누어 주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쓰냐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지 의무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편중현상이 도무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한번 고착화된 계급이 다시는 변동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이 나는 몇 계급인가 바라보면서 하향계급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아둥바둥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예전에는 실력이 그 사람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척도였다면 이젠 부동산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부동산=계급"인 시대에 집하나 없이 살고 있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집과 땅은 공공재이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투기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아 천박한 자본주의 밖에 배우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집을,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투기의 대상으로 삼고 다른 이들을 쥐어짜고 있다. 과거 조선에서는 탐관 오리가 백성을 쥐어짰고, 지금 한국에서는 집부자, 땅부자들이 서민을 쥐어짜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암행어사가 그들을 처벌했는데 지금은 누가 처벌할 것인가? 서민을 쥐어짜는 이들을 처벌해야 하는 사람들이 땅부자요, 집부자인데 누가 누구를 처벌한단 말인가? 강부자, 고소영 내각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인 이 시대에에 누가 부동산을 공공재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다가 하늘에 커다랗게 선을 그리고 여기는 내 땅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구름을 분양한다는 광고가 나지 말란 법이 있단 말인가? "그냥 놔두면 시골땅 누가 사냐? 이렇게라도 땅을 사주는 것을 고마워해야지, 그래야 시골에 돈이 돌지 않냐?"고 당당하게 외치는 똥관이 형님의 말을 과연 누가 지적할 수 있을 것인가?

  한반도 대운하, 아파트 건설, 분양가 상한 폐지, 주상복합 아파트, 제 2의 롯데월드 등 도무지 이 땅에서는 건설을 빼고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건설이 선이고, 건설이 만병통치약이다. 미분양 아파트가 수도 없이 많은 이 시대에 끊임없이 건축을 한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해도 이윤이 남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40%만 분양되도 돈번다는 소문또한 어느 정도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부동산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천박한 자본주의 시대를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책에서는 거칠지만 나름대로 부동산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을 제시했다. 땅을 국유화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정책으로 삼고 장기 임대를 보장하는 것을 골격으로 삼았다.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말그대로 제시된 대책이 너무 거칠다. 과연 국유화가 가능하기는 할 것일까? 부동산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 이들이 이미 충분히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대책은 이상으로 끝나 버릴 것이다. 이 정책을 갈고 닦아 현실화 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인데 천박한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인들이 과연 이것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면 답답할 뿐이다.

PS.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대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부동산을 깊이 파고든 첫번재 책이라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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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 새사연 신서 3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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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는 말 그대로 깡촌이다. 그러나 다른 곳보다 한 세대는 뒤떨어져 있는 것 같은 환경은 나와 내 동무들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컴퓨터 게임기와 오락실이 동네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영화관이나 비디오 대여점도 버스를 타고 30분은 나가야 만날 수 있었지만 그것들 때문에 하루를 즐기는데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자치기, 연날리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머루와 다래, 칡뿌리 등은 어린 우리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는 놀이들이었다. 이런 동네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100명이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학교였다. 원래부터 이 학교가 작은 곳은 아니었지만 농촌 인구의 감소, 그로 인한 취학 아동의 감소는 학교를 점점 작게 만들었다. 더 이상 이사 올 아이들도 없고, 이사 갈 아이들도 없이 6년을 같이 보고 지내는 친구들은 나를 포함하여 13명뿐이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학교를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되지 않아 학교는 분교가 되었고, 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한동안 교육청의 물건을 쌓아놓는 창고와 동네 주차장 노릇을 하던 학교가 얼마 전에 가보았더니 바뀌어 있었다. 깨끗하게 수리를 하고 온갖 컴퓨터와 기자재를 가져다 놓고 “농촌 원어민 학교”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오직 서울에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2박 3일짜리 영어 캠프를 여는 프로그램이었다. 교육청에서 하는 것도 아닌 교육청의 인가를 받은 관광단체에서 하는 행사였다. 학생들을 잔득 싫은 관광버스가 학교로 들어갈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도대체 농촌하고 원어민 학교가 무슨 상관이지? 쟤들은 무엇 때문에 이 시골까지 영어를 배우러 오는 것일까?”

  내가 어릴 적 자란 동네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아산시와 천안시가 많이 발전을 하고, 삼성전자와 현대 자동차가 내려와 있어서 일자리를 구하기 그리 어려운 지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발전되는 두 섹터의 중간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곳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세 가지가 있다. 동네 어귀에 있는 모텔과 앞서 이야기한 농촌 원어민 학교, 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골프장이다. 고령인구만 남아 있는 농촌에 골프장이 왠 말이며,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는 형편에 모텔은 또 무엇이며, 영어라곤 자녀들이 학교에서 사용하는 것 외엔 외국인들조차 거의 볼 수 없는 시골에서 원어민 학교는 무슨 말이더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세 가지가 동네에 함께 자리 잡은 이유가 무엇인가? 이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시골 동네에 골프장 들어서고, 우너어민 학교 들어서고, 모텔이 들어섰다고 무슨 거창하게 신자유주의까지 입에 올리는가 반문하겠지만 이게 신자유주의이다. 생태학적인 모습, 농산물을 만들어 내고, 전통을 지키는 농촌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천박한 자본은 자기의 이익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도시이든 시골이든 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시골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농촌 땅 가운데 과연 얼마나 그 지역 주민들의 소유일 것인가? 그렇게라도 시골 땅 사주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던 똥관이 형의 오만한 말이 빈말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들기까지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온갖 신자유주의 물결을 접하고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켈로그의 콘프라이트로 밥을 먹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출근하는 길에 파견 근무하는 청소 아주머니를 만난다. 출근해서 만나는 직장 동료 중에 파견근무 나온 이도 있고,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수학과를 나왔지만 커피를 타고 있는 여직원이 있고, 경영학과를 나와서 복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고 들어가는 길에 이마트에 들러서 먹을 거리를 사간다. 그 늦은 시간에도 기계적으로 웃는 주차 요원을 보면서 마트에 들어가서 물건을 들고 계산대로 간다. 기계적으로 가격을 찍는 캐셔들도 피곤해 보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전히 입에는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말을 달고 있다. 집에 들어오니 동생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다니는 학원에서 막 돌아온다. 조금 있으면 학원을 마치고 아들 녀석이 돌아올 것이다. 이마트로 출근한 아내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위의 이야기들은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의 평균적인 모습이다. 이 가운데에는 비정규직의 문제, 농촌의 문제, 사교육의 문제, 자영업의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신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이 무엇이냐? 존재를 실용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실용정부를 표방하는데 이는 자기들이 신자유주의자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실용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실용은 철저하게 이익이다. 실용이라는 말은 존재를 존재가 아닌 이익을 창출하는 재화로 보는 것이다. 이익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사람도, 문화도 모두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폐기처분당하는 사람들이 이 당에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가? 1%의 사람들을 위하여 99%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쥐어 짜내고 있는가? 만약 쥐어 짜낼 것이 떨어졌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폐기처분 밖에 없다. 과거 정권에도 이런 흐름들이 있어 왔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더 첨단화되고 세련되게 바뀌어 버렸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대안은 무엇인가? 과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삶과 동떨어진 진보만이 공허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386임을 자처하면서, 진보세력임을 자처하면서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의 노선을 걸어온 참여정부를 경험한 우리에게 허울 좋은 진보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다. 진보가 없어서 이 땅에 신자유주의가 활개치게 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이것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지금가지 정책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진보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면서 오늘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이렇게까지 깊이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를 대안적인 실현 주체가 없다는데 두고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들이 삶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에 멈추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지금가지 진보라는 이들이 구태의연하게 87년식 운동체제와 조직체계를 가지고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전방위적인 대안주체들의 각성이라고 말한다. 노동자가, 대학생이, 자영업자가, 중소기업인이, 모든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며, 여기에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희망의 조건들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반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그 불이 꺼질 뿐이다.

  그러나 묻고 싶다. 과연 이들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줄 동력을 누가 제공해 줄 것인가?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에 분명히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잠깐의 여유랄까, 숨통을 틔어주는 일이랄까 이런 역할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달기만 하면 모든 이들이 일어날 것인데 말이다. 나는 아직 여기에 대한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386이 이런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런가?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전도자가 된 세력들이 386이 아니던가? 과연 누가 이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아직 여기에 대한 답변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 눈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내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PS. 말이 좀 어렵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 원한다면 좀더 쉬운 표현들을 찾아서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 또한 읽히지 못하고 소수의 사람들만 돌려 읽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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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들 -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전사들의 '이기는 기술'
프랭크 맥린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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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신 중에 야누스라는 신이 있다. 옆의 그림에 나오는 신이 바로 야누스인데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가진 신으로 유명하다. 1월을 January라고 부르는데 이는 바로 Janus라는 신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년의 시작이자 끝과 같은 양면의 큭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나? 두 얼굴의 사람을 가리킬 때 우리는 야누스 같은 사람이라고도 부른다. 로마 사람들은 갈림길에 서 있는 이정표에 야누스 신을 조각해 놓길 즐겨했단다. 또 야누스 신은 종종 아테네 여신과 함께 조각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심상치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테네 여신은 지혜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이기도 하다. 용기를 가지고 나가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을 수호하는 여신으로 유명하다. 헤라클레스, 페르세우스, 테세우스 등 유명한 영웅들은 대개 아테네 여시의 수호를 받으며 그 여신으로부터 지혜를 얻어 훌륭한 영웅이 되었다. 이러 ㄴ아테네 여신과 두 얼굴의 신 야누스가 같이 조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영웅은 야누스같은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전사들,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전사들의 이기는 기술"이라는 책 제목이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아 살가 망설였던 책이다. 기이하게도 우리 나라에는 자기 개발서가 넘쳐난다. 서점에 가보라. 왠만한 것은 거의 다 자기 개발서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스티브 코비의 책이 우리 나라에서 얼마나 많이 팔렸으며,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안다면 이상하리만치 뜨거운 우리나라의 자기 개발에 대한 열망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을 사지 않으려고 했지만 다루고 있는 등장 인물들이-스파르타쿠스, 코르테스,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틸라, 사자왕 리차드, 나폴레옹-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무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사람들을(심지어는 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는 코르테스를 포함하여)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단 말인가? 순전히 이런 궁금증에서부터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한페이지씩 읽어가면서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책 제목을 왜 전사라고 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차라리 책 제목을 전사라는 의역이 아니라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월씬 낫지 않았을까? 솔직하게 "영웅 그리고 악당"이라고 말이다.

  "영웅 그리고 악당"이라는 원제에 맞게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는 점에서는 영웅들이다. 대제국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 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인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예술가적인 영감을 떠나서 당시 노예의 신분으로 로마에 맞장을 떴던 그의 용맹함은 높이 존경할만하다. 아즈텍 문명을 멸망시킨 코르테스, 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정말 비열한 사기꾼이다. 그러나 그는 아즈텍 문명을 무너뜨리고 백인들에게 멕시코를 가져다 준 무자비한 강도였다. 비열하고 음흉하기라면 코르테스와 상벽을 이룰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2인자의 자리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시간이 마치 자기편인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의 경쟁자들이 사라져가고 제일 약했던 그가 천하의 대권을 차지 했다. 다케다 신게, 우에스기 겐신, 오다 노부나가, 이마가와, 호조,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이에야스보다 더 쟁쟁하게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지만 그는 결국 살아남았다. 그리고 천하를 차지했다. 유럽인들에게 오늘날까지 악명높은 아틸라, 여전히 유럽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명사이다. 비열하고, 음흉하고, 무자비한 존재 아틸라는 독일민족의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반지에도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군테르 왕과 브룬힐트 왕비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지그프리트의 아내 크림힐트가 청혼한 사람이 바로 핀족의 아틸라이다. 아마도 이 모티브는 훈족의 왕 아틸라가 서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의 누이 유스타 그라나 호노리아로부터 청혼받은 사실에서 따온 듯 하다. 스릴을 즐기고 남자 다운 그리고 당시 최고의 전사라고 칭함받던 사자왕 리차드, 그에 대해서는 온갖 유명한 전설들이 많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전사로 머물러 있을 때 가장 빛나는 사람이었다. 왕으로 태어난 것이 그 인생의 가장 큰 실수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나폴레옹,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철저하게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살았던 독재자이지만 그는 평생을 프랑스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사람이다.

  저자는 6사람의 인생에 관하여 그들의 약점과 장점을 동시에 살펴본다. 한편으로 추켜 올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깎아 내리지도 않는다. 심지어는 강도같은 코르테스와 마피아같은 아틸라조차 그들의 인생에 영웅적인 모습들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추켜 올리지도 않는다. 영국 사람이어서 그런지 사자왕 리차드에 대해서는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에 대해서도 무조건 추켜 세우지만은 않는다. 이 책이 역사책이 아니라 자기 개발서로 읽힐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역사의 페이지를 장식하고 떠난 영웅은 영웅의 모습과 악당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장점과 동시에 약점 또한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악당의 모습을 영웅의 모습으로 가릴 수 있는 이유는 그 약점에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영웅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장점을 마지막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자기의 약점에 매몰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에게 있어서 영웅와 악당은 한 끝차이요, 야누스같은 존재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도나 그림 자료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400페이지에 이르는 책 중에 지도는 딱 한번만 나왔다. 아무리 자세하게 그린다고 할지라도 그림이나 지도가 한 컷 들어가 있는 것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두번째는 책이 너무 두껍다는 것이다. 글씨가 조금 큰 것 같기도 하고 조금만 더 얇게 만들었다면(내 생각에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가방에 넣고 다니기도 쉬웠을 것이고, 책값도 조금은 싸지지 않았을까? 18000원이라는 책값은 책의 내용에 비해서 조금은 비싼 듯 느껴진다. 하드커버도 불필요하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다보면 중언부언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어느 순간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을 정도로 심해지기도 한다. 세 가지가 책을 읽으면서 아쉬운 점이지만 그런대로 만족할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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