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부자
김동호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김동호 목사님의 깨끗한 부자는 돈에 관한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점잖지 못하고 성스럽지 못하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돈에 관하여 설교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내가 김동호 목사님을 존경하는 이유중의 하나도 필요하다 싶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설교하고, 그리고 본인이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이 책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돈과 하나님은 함께 섬길 수 없다. 물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근원이 된다."는 말로 대표되는 기독교인의 가치관은 물질에 대하여 적대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데 과연 기독교적인 물질관이 적대적이기만 한 것일까? 오히려 유교적인 체면치레와 사농공상으로 대변되는 재물에 대한 이중적인 가치관이 기독교의 재물관을 잘못된 길로 들어가게 한 것이 아닐까? 물질이란 가치 중립적인 것일텐데 물질에 대하여 악한 것으로 이해하는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을 볼때마다 씁쓰레하다. 

  기독교인이 물질에 대하여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물질은 은사라는 것이다. 언젠가 물질은 은사라고 설명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더라 설명을 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서 잘못 생각하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 숨을 쉬어본 기억도 있다.  

  김동호 목사님의 청부론이 교회 안에서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가. 청빈이냐, 청부냐를 가지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논란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청부냐 청빈이냐가 아니다. 부나 빈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청이냐 탁이냐, 정직이냐 부정직이냐라는 것이지 않을까? 물론 부자가 깨끗하기 어렵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깨긋하게 부자가 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깨끗한 부자에 대한 롤모델이 없음 또한 사실이다. 얼마전까지 깨끗한 부자라 칭함받았던 박성수회장의 이미지가 훼손된 이후 더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기 때문에 청부는 불가능하다, 기독교인은 청빈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모순된 말이 아닐까? 기독교인은 청빈해야 하는데, 실제로 청빈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으니 기독교인들의 재물관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독교인의 물질관에 대하여 정립해 주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경제적인 수준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문제는 있지만 말이다. 청년들에게 헌금과 물질관에 관하여 교육하기에 이만한 책도 없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을 참하라 - 하 -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백지원 지음 / 진명출판사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왕을 참하라." 

  자극적인 제목에 속아 이 책을 산 나는 이 책의 서평을 똑같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정하고 싶다. 

  "너를 참하고 싶다." 

  이 책의 상권과 하권을 읽으면서 막말이 요즘 트랜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개같은 조선" "요망한 여편네." "암탉"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쓰는 저자의 말투를 보면서 왠지 역사학계의 진중권이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떠올렸다. 옮은 소리를 싸가지 없이 해서 욕을 먹는 진중권에 비하여 백지원씨는 이름값도 없고, 참신성도 없다. 진중권은 참신함이라도 있지만 저자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을 작극적인 말로 늘어 놓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도 자극적으로 서평을 쓸 수밨에. "왕을 참하라. 백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조선은 망해도 진작 망해야 할 나라이다. 왕이 없는 것이 낫다."는 저자의 주장을 보면서 이 양반이 정말 백성의 입장에서 글을 쓰고 있기나 한 것일까 의문을 품게 된다. 그 어디에도 백성은 없다. 실체로서의 백성은 없고 집단과 관념으로서의 백성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치 요즘들어 서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정작 어디에도 서민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과 같다. 왕을 참할 주체는 관념으로서만 남아 있고 현재의 역사관에 그나마 차지하고 있던 그 작은 존재감마저 빼앗겨 버렸다. 정작 백성을 위해 썼다는 책이 백성의 설자리를 빼앗았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다른 것은 둘째치고 저자의 역사관에 몇가지 의문을 던져본다. 요즘 한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상당부분 겹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본인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책을 열심히 읽어본 내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같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 몇가지 집어보자. 

  첫째, 조선의 멸망을 조선 내부의 갈등탓으로 돌린다. 쉽게 말해 조선은 일찍 망해야하는 개같은 나라라는 것이다. 조선의 멸망이란 열강들에 의해서 멸망한 탓도 있지만 일찌기 그 안에 신분제와 붕당이라는 제도적인 요인과 병신같은 왕들의 뻘짓거리로 인해서 애초에 멸망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수가 좋아서 생각보다 오래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일본이 아니더라도 조선은 애초에 멸망할 나라이고, 그중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말아라는 뉴라이트의 이야기와 무엇이 다를까? 정말 조선은 멸망해야만 하는 빌어먹을 세상이었단 말인가? 개같은 나라 그것이 조선의 실체인가? 저자의 역사관에 던지는 첫번째 의문점이다. 

  둘째, 조선은 정말 시대의 조류를 읽지 못한 자폐국인가? 저자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선은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혼자 왕따 놀이한 자폐아로 본다.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할 때, 조선은 한심하게 자기들이 최고라는 생각에 빠져서 서로 잡아 먹지 못해서 안달난 지배층의 지배를 받은 나라로 그리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쇄국정책만 고수하니, 아니면 이리저리붙어서 홀로서지 못하니 발전이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런데 과연 조선은 시대의 조류를 전혀 읽지 못했던가? 또한 세계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자신의 것을 버리고 서구화하지 못한다면 후진국이 되는 것일까? 서구화가 과연 만능일까? 세계화 시대의 경쟁력은 자아 정체성과 자기 문화를 지키는 것에 있다는 것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셋째, 저자의 사대의식을 비판하고 싶다. 저자는 사대주의를 비판하다. 오랫동안 명과 청의 속국으로 지내온 조선을 비판한다. 사대주의가 조선을 멸망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대주의를 비판하는 저자의 역사관 밑바탕에도 사대주의가 숨어 있다. 사대의 대상이 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숭미주의라고나 할까?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왕조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며, 시민국가로 흘러가야 한다, 유럽과 미국은 벌써 이렇게 했다는 것, 과학기술을 최우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밑바침은 결국 숭미가 아닌가? 나에게 있어서 숭미나, 숭명이나, 숭청이나, 숭일이나 그놈이 그놈이다. 

  넷째, 백성은 어디로? 저자는 백성의 입장에서 쓴 조선 통사라 주장하지만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난 다음 나의 평가는 지금까지 배워온 엘리트 역사관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천재들의 세기,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심으로 쓴 이야기에 그들의 신비감을 덜어내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인용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역사는 영웅에 의하여 흘러간다. 그리고 시대를 잘못만난 영웅은 얼마나 비참했던가? 이런 이야기는 있지만 당시 백성들의 이야기는 없다. 양반이 잘못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양반이라 말하는 오만함, 버젓이 호를 달아놓은 표지는 자가당착과 엘리트 지상주의를 그대로 대변한다. 

  다섯째, 호칭의 문제. 가장 크게 문제 삼고 싶은 호징은 민비이다. 물론 나도 역사를 민비라는 말로 배워왔지만 지금은 민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명성황후라는 말을 쓴다. 책은 적어도 공식적인 이야기이다. 아무리 싫어도, 그 사람의 행적이 혐오스러워도 공식 명칭을 적는 것이 예의요 도리가 아닐까? 내가 아무리 이명박 대통령을 싫어한다고 해도 책을 출판하면서 명바기, 2메가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책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민비라는 말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사용된 말이라면 말이다. 민비의 정식 명칭은 명성황후이다. 고종은 고종이라 부르는데 왜 명성황후는 민비라고 부르는가? 명성황후의 실정과 척족 정치는 별개로 하고 공식 명칭을 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적으로 민비라 칭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야심에 의하여 사용된 깔보기 식의 민비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자기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를 자학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호칭 하나만으로도 저자의 의도를 알 것 같다.(최소한 뉴라이트의 대안 교과서 한국근현대사에서도 민비라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섯째, 숭무주의! 어찌보면 저자는 숭무라는 말보다 군사독재라는 말에 더 기울어 있는 것 같다. 조선 역사상 군인을 대우한 왕들은 좋은 왕, 아닌 왕들은 등신같은 놈들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위험하지 않을까? 분명 국방력은 중요하다. 저자가 전쟁사가이기 때문이라고 이해도 한다. 그렇지만 너무 무쪽으로 치우쳐서 문의 부분을 이빨까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아닐까? 간단한 예로 "예송논쟁"을 들어보자. 예송논쟁을 저자는 단순히 먹물든 것들의 이빨까기라고 말하지만 예송논쟁은 단순한 이빨까기가 아니다. 왕의 정통성을 다루는 아주 민감한 문제이다. 자칫잘못하면 왕권이 무시되는 정통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했던 것을 단순히 옷입는 문제로,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아니겠는가? 

  일곱째, 이상한 사고. 과거가 부끄러워도 지금은 부끄러워하지 말자. 잘먹고 잘살지 않는가? 잘먹고 잘사는 것은 박정희의 작품이다. 우리나라는 한번조 잘살아 본적이 없다. 대충 감이 잡히시는가? 거기에다가 요즘은 정신을 쇄신해야 한다는 저자의 결론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900페이지 넘게 물질의 중요성, 실학의 중요성과 정신세계와 명분에 경도된 성리학을 비판하더니 결론은 윤리관이라는 성리학적인 명분을 꺼내는 것인가? 그저 우스울 뿐이다. 결론을 읽고 "그럼 나는 900페이지가 넘는 부분을 왜 읽었지?"라는 황당함을 맛보았다. 

  이 외에도 이 책을 비판하자면 한도 없겠지만 가장 위험한 것은 뉴라이트의 사고와 왠지 상당히 흡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상당히 읽을만한 구석들이 많다. 역사적인 사료도 많이 인용하였다. 그렇지만 비판의식을 갖고 읽지 않는다면 조금은 위험할 수 있는 책이다. 읽어볼만한 책이기는 하지만 강추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그저 패관문학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시라. 열하일기와는 격이 많이 다른 패관문학!! 베스트 셀러가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을 참하라 - 상 -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 우리역사 진실 찾기 1
백지원 지음 / 진명출판사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성들 편에서 본 조선통사"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왕을 참하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인지라 어느 정도 기대감을 가지고 봤다. 역사란 정말 재미있는 학문이라는 저자의 말에 십분 동의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조선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그런 개같은 나라였다는 평가를 가지고 조선을 평가해가겠다는 그의 직설화법에 마음이 끌렸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한권당 400페이지가 넘으며 두권 합하여 90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분량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들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조선의 역사에 관하여 300페이지 안팎의 한권짜리 책들을 많이 접해왔기 때문에 많은 분량만큼 내용에 더 충실하겠꾸나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서 솔직하게 실망하게 된다. 내용이 부실해서 실망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은 재미있다. 역사적인 사료들도 충분하게 사용한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실망하는 이유는 조선사에 대한 참신한 해석이라는 부분에서 충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왕을 참하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나왔지만, 백성들 편에서 본 조선 통사라는 말은 하지만 정작 백성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조선 멸망의 가장 큰 원인으로 성리학을 꼽는데 성리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비판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때가 있다. 저자가 성리학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이 성리학에 정통하여서라기보다는 서구적인 사고로 동양적인 것들은 구시대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과 그렇게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니라고 부정하겠지만 그의 글을 읽다보면 과연 이렇게 비판하는 것이 합리적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성리학적인 명분 때문에, 주변에 강력한 라이벌이 없었기 때문에, 당쟁때문에 조선이 멸망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던 사실이 아니던가? 도대체 여기 어디에 참신한 역사적 해석이 들어 있단 말인가? "선비들의 배반"같은 책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시각이 아니던가? 그저 말투가 참신하다는 것 정도? 역사책에 어울리지 않게 깐족거리는 말투가 참신하다면 참신하달까? "참신한"이라는 말을 뺀다면 이 책은 읽을만한 책이다. 이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백성들 편에서 본 조선통사"라는 부제 또한 이 책에 안 어울리기는 마찬가지이다. 백성들의 시각에서 봤다는데 과연 무엇이 백성들의 시각이란 말인가? 민중의 눈으로 백성의 눈으로 바라본 것보다는 그저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지배층들을 절단하고 평가한 것이 전부가 아니었던가? 그러면서도 백성의 시각이라고 말한다. 읽다보면서 "백성은 과연 어디있는가? 왕을 참할 주체는 어디 있는가?"하는 의문을 던진다. 그저 자신의 견해를 백성의 견해로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시각으로 제단하고 깎아 내리는 것이 왕을 참하는 것이 아니던가? 차라리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밣힌다고 하는 것이 더 솔직했으리라. 

  마지막으로 저자가 대단한 역사학자인 것은 충분히 알겠다. 사료들을 비판하고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가져다 쓴 노력 또한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료라지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사용한 부분이 많은 것은 필자의 자가당착이 아닐까? 간단한 예로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은 것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안 지었을 수도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다음 문단에서 "허균은 서얼들의 한을 마음에 품고 그들 입장에서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단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 사료를 비판하면서 이런 오류가 쉽게 나타난다. 차라리 솔직하게 이런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이런 견해가 있으니 이 견해를 따르겠다고 확실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 놓아서 이 책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책은 몇 가지 사실들만 감안하고 본다면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사료에 충실하다는 것과 분량이 900페이지를 넘어갈 정도라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전체적인 평은 하편을 읽은 다음에 하겠지만 역사를 재미있게 만드는 힘은 충분히 가진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의 마스터 - 성경에서 배우는 리더의 시간관리
한홍 지음 / 비전과리더십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읽었던 책이다. 한때 한홍목사님의 책을 전부 구해서 읽었던 적이 있는데 그 대 읽었던 책이다. 기독교 서적이면서도 비기독교인이 읽어도 부담이 없을 좋은 책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담고 있는 책이다. 기타 일반 자기 관리 서적은 자기 관리를 통하여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지만 이 책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세울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책이 아닐까? 

  우리는 속도의 세상을 살고 있다. 마치 군대 훈련소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숨막히게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꾸역꾸역 밥을 채워 넣고 숨돌릴 시간도 없이 러시 아워를 겪는다. 그리고 무엇에 쫓기듯이 하루를 마감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가지만 과연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는가? 내 인생의 목적과 시간 관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저 집 평수를 한 평 더 늘리고, 통장 잔고를 조금더 채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내 시간의 의미인가? 분명 그것은 아닐 것이다. 시간 관리가 의미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무엇을 위해 시간 관리를 하는가라는 것이다. 축구 선수들은 하프 타임에 후반전을 위하여 체력을 비축한다. 오직 그날 경기의 승리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하여 힘을 축적하는가? 여기에 시간 관리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숨막히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한 숨돌리는 것이 시간 관리는 아니다. 시간 관리는 그런 저급한 차원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시간 관리의 목적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쓸 시간을 축적하는 것이 아닐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쓸데없이 군살만 붙어있는 자기 욕심의 시간을 잠시 내려놓고 한숨 돌리면서 그것들을 남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조율하는 것 이것이 시간 관리의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있도록 군살을 빼는 것 이것이 기독교인의 시간 관리일 것이다. 얼마나 길게 살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밀도 있게 살았는가가 우리가 시간 관리하는 가장 큰 목적이 아닐까? 인생의 방향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다. 나는 과연 하프타임을 무엇을 위하여 소비하는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물음이다. 청년들에게 꼭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뉴라이트의 위험한 역사 인식에 맞닥뜨려 오늘, 대한민국을 돌아보다!
역사교육연대회의, 김종훈 외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록위마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진시황의 아들 호해가 환관 조고와 짜고 자기 형 부소를 죽였다.그렇게 황제의 자리를 탈취한 호해인지라 항상 정당성의 문제를 안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호해를 황제로 올려 놓은 조고의 힘이 세어질 수밖에. 환관 조고의 힘이 강해지다 어느날 호해를 능가하게 된다. 자기의 권위를 과시하고 싶었던 조고인지라 하루는 꾀를 내어 사슴 한 마리를 가져다가 놓고 무엇이냐고 호해에게 물었다. 호해는 당연히 사슴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조고가 이번엔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조고의 힘을 두려워한 신하들은 그것이 말이라고 대답하였다. 정당성을 잃어버린 황제의 권력의 덧없음과,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진실을 호도하는 조고와 살기 위해 진실에 눈감아야 하는 신하들의 비겁한 행동을 바라보면서 어지 그리 오늘과 같은지 모르겠다. 이래서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탄생했는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박정희, 김영삼 대통령 모두 정당성을 획득하였던가? 국민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던 사람들이었는가? 당시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세월이 지나고 그들의 권력이 지고난 다음 후세의 평가는 어더한가? 정당성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아닌가? 자기의 영달을 위하여 조국의 분단마저 우습게 생각했던 이승만! 말해 무엇하랴. 일본 만주군 출신인 박정희! 신군부 세력인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위해 국민의 염원마저 버리고 노태우와 손을 잡은 김영삼! 과연 그들의 정당성은 어디에 있는가? 일부 영남 인사들, 일부 반공주의자들, 일부 극우파에서 그들의 정당성을 찾지 않았는가? 그들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본주의를 자유주의라 말하면서 호도하고, 북한의 위협을 들먹이면서 반공을 외치던 것이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시켜 주던 제도가 아니었던가? 더이상 그 약발이 먹히지 않았을 때, 김대중,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던 것이 아니던가? 권력의 정당성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초등학교 사회만 제대로 들었더오 알게 되는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무시한 결과가 아니던가? 

  인생 무상이라고 했던가? 김대중, 노무현의 같은 실책은 결국 이번에 이명박 정부로 권력을 넘겨 주게 되었다. 이제 다시한번 예전에 먹혔던 마스터 카드를 꺼내기 시작하였다. 소위 말하는 지록위마의 방법 말이다. 대체 에너지 개발이 빠진 하천 정비와 건설 산업 육성을 녹생산업이라고 부른다. 대책없는 민영화를 경영합리화라고 말한다. 임원들의 연봉은 그대로 두고 신입사원들의 연봉을 삭감하여 신규채용을 늘리는 것은 일자리 나누기, 고통분담이라고 한다. 이정도면 지록위마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는지, 화룡점정으로교과서 시비가 붙었다. 

  교과서 포럼의 대안 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역사에 대한 반성을 좌파라고 몰아붙이면서 자기들이 답이라고 한다. 대안이 아니라 대체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자신들은 여러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한다. 과연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사슴이라고 해야하는가, 아니면 말이라고 해야하는가? 권력에 아부하기 위하여 중심을 잃은 자칭 역사학자들과 보수 언론의 띄우기는 차치하고 대한 상공 회의소의 주장은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들이 역사에 대하여 무얼 그리 많이 아는지 검인정을 거친 교과서를 난도질하고 고치라고 한단 말인가? 여의도와 청와대의 조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게 사슴을 강요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지록위마라는 말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들은 신하들의 소시민적인 태도때문이 아니던가? 아닌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당장 내게 피해가 오지 않아야 한다고 진실을 부정하고 거짓을 말했기 때문인가? 단 한사람만이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사슴이라고 했다면 사슴이라는 진실을 묻히지 않았을 것이다. 목숨걸고 진실을 말할 수 잇는 단 한사람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애쓴다는 생각을 해봤다. 사슴을 말로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저런다고 사슴이 말이 되는가 생각했다. 그런데 잘하면 말이 될 것 같다.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한다면, 우리 모두가 소시민적으로 대응한다면 사슴이 말이 될 것 같다. 금성교과서 사태를 바라보면서 이미 한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목숨 걸 한 사람, 진실을 위해서 타협하지 않을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가운데 한 이름을 발견했다. 나도 역사학자가 아닌지라 감정적으로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사 교육의 현장에서 역사를 가르치시던 그분들이 성명서를 낸 것이다. 자랑스러운 그 이름을 보다가 한 이름 앞에 멈추어 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찾앗다고 하는 것이 맞다. 고등학교때 나를 가르치셨던 역사 선생님의 이름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찾아 냈다. 내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한때 나로 하여금 역사학도의 길을 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던 그 분의 이름을 찾았다. 비록 내가 역사학도가 되지는 않앗지만 역사에 관심을 갖고 이 사회에 대하여 눈을 부릅뜨고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선생님의 이름이 거기 있었다. 이 이름이 내게 많은 힘을 주었다. 그분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분에게 영향을 받은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사슴이 결코 말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힘이 났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분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이다. 그분의 그 작은 이름이 그 위치를 고수할 수있도록 지지하는 것이다. 힘을 보태는 것이다. 나도 사슴을 말이라고 하지 않도록 결단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나에게 던져준 큰 가르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