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 새사연 신서 3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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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는 말 그대로 깡촌이다. 그러나 다른 곳보다 한 세대는 뒤떨어져 있는 것 같은 환경은 나와 내 동무들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컴퓨터 게임기와 오락실이 동네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영화관이나 비디오 대여점도 버스를 타고 30분은 나가야 만날 수 있었지만 그것들 때문에 하루를 즐기는데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자치기, 연날리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머루와 다래, 칡뿌리 등은 어린 우리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는 놀이들이었다. 이런 동네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100명이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학교였다. 원래부터 이 학교가 작은 곳은 아니었지만 농촌 인구의 감소, 그로 인한 취학 아동의 감소는 학교를 점점 작게 만들었다. 더 이상 이사 올 아이들도 없고, 이사 갈 아이들도 없이 6년을 같이 보고 지내는 친구들은 나를 포함하여 13명뿐이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학교를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되지 않아 학교는 분교가 되었고, 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한동안 교육청의 물건을 쌓아놓는 창고와 동네 주차장 노릇을 하던 학교가 얼마 전에 가보았더니 바뀌어 있었다. 깨끗하게 수리를 하고 온갖 컴퓨터와 기자재를 가져다 놓고 “농촌 원어민 학교”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오직 서울에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2박 3일짜리 영어 캠프를 여는 프로그램이었다. 교육청에서 하는 것도 아닌 교육청의 인가를 받은 관광단체에서 하는 행사였다. 학생들을 잔득 싫은 관광버스가 학교로 들어갈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도대체 농촌하고 원어민 학교가 무슨 상관이지? 쟤들은 무엇 때문에 이 시골까지 영어를 배우러 오는 것일까?”

  내가 어릴 적 자란 동네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아산시와 천안시가 많이 발전을 하고, 삼성전자와 현대 자동차가 내려와 있어서 일자리를 구하기 그리 어려운 지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발전되는 두 섹터의 중간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곳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세 가지가 있다. 동네 어귀에 있는 모텔과 앞서 이야기한 농촌 원어민 학교, 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골프장이다. 고령인구만 남아 있는 농촌에 골프장이 왠 말이며,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는 형편에 모텔은 또 무엇이며, 영어라곤 자녀들이 학교에서 사용하는 것 외엔 외국인들조차 거의 볼 수 없는 시골에서 원어민 학교는 무슨 말이더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세 가지가 동네에 함께 자리 잡은 이유가 무엇인가? 이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시골 동네에 골프장 들어서고, 우너어민 학교 들어서고, 모텔이 들어섰다고 무슨 거창하게 신자유주의까지 입에 올리는가 반문하겠지만 이게 신자유주의이다. 생태학적인 모습, 농산물을 만들어 내고, 전통을 지키는 농촌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천박한 자본은 자기의 이익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도시이든 시골이든 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시골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농촌 땅 가운데 과연 얼마나 그 지역 주민들의 소유일 것인가? 그렇게라도 시골 땅 사주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던 똥관이 형의 오만한 말이 빈말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들기까지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온갖 신자유주의 물결을 접하고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켈로그의 콘프라이트로 밥을 먹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출근하는 길에 파견 근무하는 청소 아주머니를 만난다. 출근해서 만나는 직장 동료 중에 파견근무 나온 이도 있고,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수학과를 나왔지만 커피를 타고 있는 여직원이 있고, 경영학과를 나와서 복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고 들어가는 길에 이마트에 들러서 먹을 거리를 사간다. 그 늦은 시간에도 기계적으로 웃는 주차 요원을 보면서 마트에 들어가서 물건을 들고 계산대로 간다. 기계적으로 가격을 찍는 캐셔들도 피곤해 보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전히 입에는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말을 달고 있다. 집에 들어오니 동생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다니는 학원에서 막 돌아온다. 조금 있으면 학원을 마치고 아들 녀석이 돌아올 것이다. 이마트로 출근한 아내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위의 이야기들은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의 평균적인 모습이다. 이 가운데에는 비정규직의 문제, 농촌의 문제, 사교육의 문제, 자영업의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신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이 무엇이냐? 존재를 실용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실용정부를 표방하는데 이는 자기들이 신자유주의자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실용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실용은 철저하게 이익이다. 실용이라는 말은 존재를 존재가 아닌 이익을 창출하는 재화로 보는 것이다. 이익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사람도, 문화도 모두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폐기처분당하는 사람들이 이 당에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가? 1%의 사람들을 위하여 99%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쥐어 짜내고 있는가? 만약 쥐어 짜낼 것이 떨어졌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폐기처분 밖에 없다. 과거 정권에도 이런 흐름들이 있어 왔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더 첨단화되고 세련되게 바뀌어 버렸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대안은 무엇인가? 과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삶과 동떨어진 진보만이 공허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386임을 자처하면서, 진보세력임을 자처하면서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의 노선을 걸어온 참여정부를 경험한 우리에게 허울 좋은 진보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다. 진보가 없어서 이 땅에 신자유주의가 활개치게 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이것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지금가지 정책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진보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면서 오늘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이렇게까지 깊이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를 대안적인 실현 주체가 없다는데 두고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들이 삶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에 멈추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지금가지 진보라는 이들이 구태의연하게 87년식 운동체제와 조직체계를 가지고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전방위적인 대안주체들의 각성이라고 말한다. 노동자가, 대학생이, 자영업자가, 중소기업인이, 모든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며, 여기에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희망의 조건들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반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그 불이 꺼질 뿐이다.

  그러나 묻고 싶다. 과연 이들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줄 동력을 누가 제공해 줄 것인가?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에 분명히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잠깐의 여유랄까, 숨통을 틔어주는 일이랄까 이런 역할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달기만 하면 모든 이들이 일어날 것인데 말이다. 나는 아직 여기에 대한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386이 이런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런가?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전도자가 된 세력들이 386이 아니던가? 과연 누가 이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아직 여기에 대한 답변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 눈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내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PS. 말이 좀 어렵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 원한다면 좀더 쉬운 표현들을 찾아서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 또한 읽히지 못하고 소수의 사람들만 돌려 읽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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