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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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비야?  

  나에게 있어서 그녀는 처음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한 이름이었다. 조금 그에 대하여 알아가게 될 즘 그저 책으로만 알게된 등산개? 그러나 그 한비야의 이야기를 꿈이있는 교회 목사님의 "즐거운 인생"이라는 영화 설교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이 책에도 기록되어 있는 케냐 안과 의사와의 에피소드가 바로 그것이다. 

  월드비전에서 일을 할지 말지 결정을 하게 될 즘에 케냐의 긴급 구호 현장에서 만난 안과 의사에게 이해되지 않아서 그녀거 물었다고 한다. 여기와서 있는 그 시간에 병원을 운영하면 더 큰 돈을 벌텐데 왜 여기 와 있냐는 물음에 그 의사가 이렇게 말했단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재능을 돈 버는 데에만 쓰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내 가슴을 몹시 뛰게 하기 때문이예요." 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그 후로 긴급 구호의 현장 어디에나 긴급히 달려가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 가슴뛰는 일은 무엇일까? 청년을 담당하고 매일 만나는 청년 담당 목사로서, 과연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러나 때론 그것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찌들어서 그것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비야는 너무나 부러운 대상이다. 자기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일 것이다. 

  한비야의 그 생활이 부러워서 이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푹 빠져버렸다. 실리의 계산이 아닌 사랑의 모습으로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이곳저곳으로 뛰어 다니는 그녀의 열정과,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긴급구호 현장의 난민들의 슬픔들은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럼 나는? 내가 할 일은 무엇이냐?" 참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 책이며,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책이다. 현실의 부조리 대문에 불편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 후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내가 너무 가식적인 것 같아서 불편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한번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큰 결정을 내렸다. 유니세프 후원금을 1만원 더하여 3만원을 내기로 한 것이다. 작년부터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여기에 1만원을 더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큰 일이다. 이 1만원이 어떤 이에게는 생명을 다투는 큰 물질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꽤 커다란 부분이다. 그러나 내 것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무슨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겠다는 당돌한 생각을 하는 것이냐라는 생각에 포기한다. 조금만 덜먹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종과 종교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 삶의 문제, 생존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 생존이 나에게는 매우 쉽게 허락이 되어 있지만 세상에는 그 생존의 문제 대문에 오늘 하루도 벼랑끝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와 가장 가가운 피붙이가 죽었음에도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아둥바둥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구차하다고, 꼭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 반문하겠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을 향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냐? 그들이 삶의 끈을 놓지 않도록 응원해 주고 내게 있는 것은 조금만이라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삶을 한번 돌아보고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 책이다. 

  먼 훗날 아니, 5~10년이 지나고 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그 사랑이 나를 여기까지 끌어 왔노라고 고백하면서 살고 싶다. 마지막으로 설교를 준비하다가 읽은 책의 구절을 인용하고 마치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은 기도 이상의 것을 나에게서 찾으신다." 

  내가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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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비판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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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협씨는 "밖에서 본 한국사"라는 책을 통하여 처음 접해본 분이다. 밖에선 본 한국사를 읽으면서 솔직히 그분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서 비판하는 서평을 적었던 기억이 있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다는 말로 혹평했던 기억이 있어서 만약 이 책이 그분이 쓴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나 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분의 이름을 본 것이 아니라 "뉴라이트 비판"이라는 책 제목만 보고 이 책을 구매했다. 작가의 소개를 통하여 그분이 그분이었구나 알게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 열심히 읽기 시작하였지고 이분에 대하여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분의 생각에 일부 동의하기도 하고 일부는 비판하기도 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과연 이 땅에 건전한 보수(이 책에서는 합리적인 보수라 칭한다.)가 존재하는가?"이다. 언제부터인가 미친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리뷰 100편 이상을 기록했다면 나름대로 열심히 읽었다고 자부한다. 종교에서부터 사회과학가지 닥치는대로 읽었다. 내가 이렇게 책을 읽기 시작할 때쯤이 아마도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 쯤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도무지 이 놈의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기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미친 사회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답을 책에서 찾고자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특히 세리보고서, 사회과학서적, 경제 분야는 열심히 읽었다고 자부한다. 처음에는 버벅거리면서 읽기가 힘들었지만 어느새 지금은 쉽게 술술 넘어가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 같다. 그동안 많은 것들을 배웠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땅에 건전한 보수는 존재하는가?" 

  1년이 조금 넘는 그 시간 동안 내가 얻은 결론은 비극적이게도 이 땅에는 보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좌파도 없고, 주도파도 없고, 보수도 없다. 오직 수구만이 있을 뿐이다. 그 수구의 최선봉이 행정부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을 위시한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요, 정계에서는 한나라당이요, 시민단체에서는 뉴라이트이다. 언론은 두말할 것 없이 조중동이다. 요즘 문화일보가 추가되어 조중동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동안 교회에서 황당한 사건을 겪어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인격적이고 샤프하신 목사님이 이상하리만치 한나라당과 조중동의 편을 들면서 이명박 대통령 추종자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뭔가라는 의문을 던져 보기도 했다. 기독교 복음이 언제부터 반공이었는가 반문을 해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내린 결론이 이 땅에 건전한 보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로 나의 성급한 결론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지금은 목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은 철저하게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학생 운동을 하면서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둘고 양키 고 홈을 외쳐본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노당의 지지자였으며, 민노당의 체제화를 비판하면서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 한나라당의 이야기는 정말 딴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군목으로 복무했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내가 나의 생각을 펼치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좌로 몰아 붙인다. 내가 보기에 나는 지극히 보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좌로 평가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을 비판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사물화 되어 가는 것을 비판하기 대문일까? 아니면 한나라당을 비판하기 때문일까? 

  이런 나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들이 과연 보수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들과 전혀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당을 뽑아가면서 반공을 외치고 친미를 외치는 지인들을 보면서 황당하다 못해 말을 잃은 적이 몇번이던가? 이제는 이렇게 서평으로나마 내 할말을 할뿐이지만 말이다.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발생했을까? 왜 김진홍 목사님이 뉴라이트를 이끌면서 기독교가 수구 꼴통으로 인식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자기 정당성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 땅에 건전한 보수가 없는 것은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트라우마와 자기 합리화가 아닐까? 

  뉴라이트의 논리는 과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에서 과거로 올라갈 뿐이다. 이 과정에서 말도 안되는 아전인수와 역사적인 왜곡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을 놓고 싶지 않아 한다. 그래서 그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는 논리를 반공에서 찾았다. 유일한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반공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반공을 이념으로 내세우니 북한의 경제체제 붕괴와 한국의 경제적 약진을 비교한다. 그러면서 박정희와 이승만을 영웅화 한다. 그리고 이들이 받아들인 친일 인사들도 반공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과거를 용서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길러내고 이 당에 경제와 자본주의를 발생하도록 기간 시설을 마련해 놓은 일본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북한이 정반대의 길을 택했기 때문에 이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민족은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세계화의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뉴라이트는 이것을 조금 더 세련되게 만들었을 분이고, 이명박 정부는 이것을 무식하게 노가다 정신으로 밀어 붙이는 차이만이 존재할 뿐 그 본질에서는 동일하다. 그런 이들이 자신들을 건전한 보수로 선전한다. 뉴라는 말은 수구가 아니라는 자기 최면이요 가면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 국민들이 잘 속는다. 왜 그럴까? 나는 아니겠지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힘과 권력과 재물을 자기도 소유한 사람이라는 말도 안되는 자위가 아닐까? 마치 여자 친구를 두고 군에 입대한 병사들처럼 말이다. 군에 입대해서 99%의 커플이 깨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1%이겠지라고 자위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가? 그 마지막은 결국 파탄이 나지만 말이다.  

  이 땅에 건전한 보수가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말도 안되는 사람들이 자신은 건전한 보수라고 국민을 기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산층이라는 단어가 서민이라는 애매한 말 대신 사용되는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 그리고 국민들이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진짜 정치적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예전 선배가 내게 해줬던 말로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20대에는 마르크스에 미쳐야 하고 30대 이후에는 보수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20대에 보수에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3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마르크스에 미쳐있으면 그것은 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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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의 '죽음준비학교' - 삶의 소풍을 즐기고 있는 이들을 위한
유경 지음 / 궁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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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88234!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들앓고 사흘째 죽는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죽음의 모습이 아닐가? 연로하신 분들 앞에서 죽음을 가르치고 준비하자는 것은 어뜻 보면 그분들을 모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연로하신 분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과 사의 경계선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류가 삶에 관한 질문을 던진 것만큼이나 죽음에 관한 질문 또한 오래 되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죽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래로 현자들이 죽음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던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관한 문제는 삶에 관한 문제만큼 건강하지 않다. 죽음이라는 것은 차마 입에 올리기도 힘든 주제이며, 성에 관한 것만큼이나 음성적으로 이야기되어져 왔다. 이 책은 이러한 죽음에 관한 문제를 솔직 담백하게 까발리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죽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뇌사? 아니면 신체 기능의 정지? 그것도 아니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지는 기억의 소멸? 글쎄다. 무엇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다. 저 불로장생의 꿈을 꾸었던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으며, 막강한 권려을 휘두르고 사후의 세계마저 자신의 권력하게 두려던 이집트의 파라오마저 죽음을 맞이하여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본다면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평등한 것은 삶보다는 죽음이 아닐까?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누렸다고 할지라도, 명예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죽고 나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평등한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먼저 가느냐 나중에 가느냐 정도가 아닐까? 

  사람에게 이만큼 중요한 죽음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본다. 누구나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고 살아가지는 못한다. 죽을 것은 알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죽음이 이렇게 빨리 다가 올지 몰랐다는 것이 죽음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죽음이 임박해서 급해진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지난 삶을 반추하기 보다는 죽기 싫어 몸부림치다가 떠난다. 어찌보면 허무하기까지 한 우리들의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웰빙에 많은 관심을 갖고 많은 물질을 쏟아붓는 시대에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겸손이 아닐까?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자각, 그리고 남겨진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살자는 것이 웰다잉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삶을 반추해본다. 나는 과연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가? 죽음을 접하여 나는 과연 의연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생의 소풍을 마치고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절대자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솔직하게 자신이 없다. 그간 무엇을 하며 살아왔던가? 왜 그리 부질없는 삶을 살았던가 후회해도 늦기 전에 내 삶을 정비해 본다. 올해의 계획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나의 삶을 계획해 본다. 

   그러면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려 본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겠는가? 죽음이 아니겠는가? 죽음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현실에 충실하다. 언젠가는 이 세상의 것들을 훌훌 털고 떠나야 할 것을 알기에 더 그렇다. 모래시계에 모래가 다 덜어지면 미련없이 사우나 실을 나오는 사람처럼 내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모래가 다 떨어지면 내가 세상을 살면서 얻었던 것들을 훌훌 던지고 절대자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삶이란 그 날을 의식하면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열심히 준비하자. 최대한 열심히 살자. 그리고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다 주고 떠나자. 인생의 설거지를 하자. 아름다운 죽음이란 아름답게살아가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천상병 시인의 소풍을 음미해 보며 나의 삶을 다잡아 본다. 

소풍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과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 놀다가 구름 손직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내 삶이 아름다운 소풍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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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digilog - 선언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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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다. 글이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이 책이 분류상 경영이라니 경영으로 넣으면서도 뭔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차라리 인문학 쪽이 아닐까? 여하튼 각설하고 책의 서평을 써보자. 

  우리는 지금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예전에 어느 CF에서 그랬던가? 디지털을 이야기하는 젊은이에게 좌판에서 물건을 파시던 할머니께서 "돼지털?"을 반문하셨따. 그때에는 그저 웃고 지나갔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이게 세대차이라는 것이구나 느꼈다. 나도 젊은 세대이다. 컴퓨터를 필수품으로 여기고 살아가면, 학교 숙제도 아래한글로 작업해서 제출했던 세대이다. 원고지라고는 고등학교 이후로는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쓸 때에도 초안을 잡고 그것을 다시 다듬어서 올리는 귀찮음을 감수하기는 만만치 않다. 대개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그것을 바로바로 한글로 표현해야 직성이 풀린다. 예전에 도대체 원고지에 어떻게 작업을 했는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말이다. 가끔은 예전에 연습장에 글을 쓰고 수정을 한 다음 정성스럽게 한글자 한글자 옮겨쓰던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글쓰기가 어려워지고 맞춤법이 "막춤법"으로 변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대학 리포트와 시험 답안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코티콘을 적어 넣었던 후배를 보면서 황당하다 못해 기가 찰 지경이었던 경험까지 겪고 난 후에는 더욱 그렇다. 아직 내 안에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남아 있어서 일까? 

  사람은 어릴적 접한 것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는 교육철학적이고, 아동심리적인 이야기는 둘째치고 숫자로 표시되는 차가운 디지털보다는 물흐르듯이 끊임없이 흐르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여전히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일이다. 요즘나온 고가의 디지컬 카메라들은 하나같이 사진을 찍으 ㄹ때 셔터음이 들리도록 되어 있다. 디지털 사진기에 셔터음은 솔직하게 필요없다. 그러나 그 셔터음 하나로 인해, 찰칵하고 넘어가는 그 효과음 하나로 인해 사진을 찍는 맛이 달라진다. 그렇다. 아날로그는 이어령씨가 지적한대로 맛의 문제이다. 멋의 문제이다. 차가운 디지털적인 감성으로는 느낄 수 없는 인간미, 정, 따스함, 멋, 맛 이런 것들이 아날로그적인 요소가 아닐까? 한국의 먹거리와 식문화를 가지고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화를 이야기하는 이어령씨의 글을 읽으면서 참 글을 맛있게 쓰는구나?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구나하는 존경심이 절로 나온다. 

  이 책의 결론은 간단하다. 독불 장군은 없다는 것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사람들은 극과 극의 개념으로 양립이 불가능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인들은 먹거리를 통하여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디지털의 효율성을 삶에서 체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의 효율성과 아날로그의 감성이 만나 디지로그를 이룰 때 그것들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물론 뻔한 결론이다. 누가 이런 것을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이 책을 정신없이 읽어내려갔던 이유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글을 쓰는 이어령씨의 감성 때문이다. 제멋대로 글을 쓰는 긔여니 세대에 이런 글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 아닐까? 진정한 글멋과 글맛에 대해서 할게 해준 이어령씨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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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4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4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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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카롭다. 서둘러 지식e 시즌 4를 펴고 읽어가면서 가장 처음 받은 느낌이다. 날선 검 하나가 비수가 되어 이 시대를 살피고 쪼개고 고발한다. 왠만한 시사 프로그램보다 더 시사적이고, 보수적인 언론들의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을 철저하게 까발린다. 그래서 나는 시종일관 이 책을 경건한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사라져 버리고 오직 이 책과 나 만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 가운데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세상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의 테두리 밖에서”, “세상의 결을 따라”, “다시 삶의 테두리 속으로”라는 제목을 달고 구분된 각 부분을 따라가본다.  

  “일상의 테두리 밖에서”에서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 세상이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흑인 운동가, 사회적인 지위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앨런 튜링”, 서구 중심의 이데올로기로 충만한 세상을 벗어나 자신만의 기도를 그린 “아르노 페터스”, 1%의 미적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90%의 생존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가진 재능을 디자인에 올인하는 디자이너들, 명예가 아니라 삶의 존재 의미를 설명하기 위하여 무술을 택한 이소룡, 정치풍자의 달인 샤를 필리봉 이들은 시대의 이단아들이다. 자신이 가진 재능들을 자신의 삶을 위해 사용했다면, 현실에 순응했다면 평탄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겠지만 이들은 그편을 택하지 않았다. 무모하게도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프레임을 깨는 도전을 했다. 일상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시대의 돈키호테가 되었다. 그리고 무익하고 쓸데없는 상상력이라 평가를 받았지만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나비의 날개짓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솔직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첫 발걸음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나 일상적인 습관에 젖어 산다. 혹은 세상의 불의를 목격하지만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다고 판단하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지식e 제작팀은 말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런 무모함이라고 말이다. 온갖 정쟁과 말도 안되는 복잡하고 기인한 현상이 일어나는 2009년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것은 돈키호테의 무모함이라는 말이 아닐까?  

  “세상의 결을 따라”라는 부분에서는 세상의 논리와 프레임을 따라 가면서 그 모순들을 고발한다. 제주 해녀의 삶, 소통 부재의 모습들, 정권에 의해 이용당하고 강제로 불임 수술까지 당한 한센인들,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해 가는 독일과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일본, 온갖 토론이 난무했던 민주주의의 산실 아고라, 부자가 아닌 경제적으로 소외당한 패배자들을 위한 뉴딜정책, 공포를 매개 삼아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지는 금융자본들, 다른 이들의 위기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거대 자본들,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프레임 신봉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뒤에 달려 있는 해설들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2008년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수없이 많은 정책과 이슈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마치 세상의 결을 한켜한켜 벗겨내겠다는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벗겨나간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 무엇을 바라보고,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혹시 나는 프레임 신봉자가 되어서 이것이 삶이고, 진실이요, 불가항력이라고 나를 설득시키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이 책은 그것을 묻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돈키호테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무엇이냐? 찬성도 반대도 아니다. 지지도 모욕도 아니다. 무관심이다. 돈키호테의 행동이 이슈가 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를 꺾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마치 오늘날 한국 사회처럼 말이다.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획일화 되어 있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로의존성을 버리지 못한다. 반공, 경제, 학력 등 이 시대에 걸맞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의존성을 버리지 못한다. 세상은 이미 그것들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돈키호테가 생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건을 만드는데 나도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삶의 테두리 속으로”는 우리를 삶의 자리로 초대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초대된 우리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세상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세상을 바라본 우리들이기 때문에 다시 삶의 한복판으로 초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과거의 내가 될 수 없다. 이미 나는 세상 밖을 경험했다. 돈키호테가 되어 보았고, 세상이 나에게 던져주는 경쟁의 논리와 효율성의 논리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을 주문처럼 외우고 신봉하며 받아들일 것을 강요받던 나였지만 그것의 허구를 깨닫는 순간 나를 골리앗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다윗이 된다. 기륭전자의 복직 투쟁자들이 된다. 감자굴의 상학이가 되고, 494,011개의 꿈을 키워가는 공고생이 된다. 세상에 가장 싼 가격에 밥을 나눌 수 있는 사장님이 된다. 세상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만이 무모한 도전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밥을 나눌 수 있다. 부당하게 쌀직불금을 받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녹색 산업이라는 미명하에 토목 건설을 주도하는 이들이 아니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직업을 나누자면서 신입사원들의 월급을 깎는 집단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진정 내가 가진 밥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될 때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지식e 시즌 4를 읽으면서 돈키호테를 떠올린다. 어릴 적 내 기억에 그는 우스꽝스러운 기사였다. 세상 모르는 철부지였고, 시대의 반항아였으며, 시대의 발전에 뒤떨어진 구닥다리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신했다. 그는 구닥다리가 아니다. 세상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시대의 선구자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할지라도 진정 가치 있는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구닥다리로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 구닥다리가 한없이 소중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한 부분을 적어 본다. 내 마음 속에 남은 가장 구닥다리이지만 간직해야할 이 한말을 말이다.  

“스킨 스쿠버? 그게 있으면 한 사람이 백 명 일도 할 수 있다며? 근데 그렇게 하면 나머지 아흔 아홉은 어떻게 되나?”<물이 되는 꿈 139p>  

  기업과 정부의 Job sharing이라는 말보다 더 가슴에 깊숙이 박히는 말이다.  

후기 

1. 날카롭다. 그 날카로움이 좋다.  그러나 지난 권들에서 보여주었던 넉넉한 푸근함이 그립기도 하다.  

2. 각 장의 말미에 참고 도서 목록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 도서 목록을 보고 몇 권 사봤던 기억이 있었는데. 다시 목록이 추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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