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I 전망 2009
권순우.전영재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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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다사다난했던 2008년이었다. 총선과 대선,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출발은 2008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07년 말 SERI 전망 2008을 사서 읽었다. 한미FTA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가운데 2008년은 국내외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산업의 형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등 2008년을 전망해보는 책을 읽어보면서 처음에는 난해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생소한 경제 용어와 어려운 주직 관련 용어들은 내가 책을 읽어가는데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2008년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억지로 읽어 나갔다. 그리고 2008년을 살아오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대략적인 방향은 맞춘 것 같았다.  

  2008년은 정말 복잡했던 한해였던 것 같다. 이명박 정부의 출발과 동시에 일어난 광우병 파동, 촛불집회, 언론탑압, 사대강 정비 사업 등등 온갖 사건들이 일어났던 한해였다. 온통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 같은 2008년의 사건을 꿰뚫는 한마디는 신자유주의이다. 세계적인 대세가 되어 자유시장경제를 강요했던 신자유주의가 2008년 대한민국의 한 복판을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였다. 모든 것은 경제로 이야기 된다. “경제만 살린다면”이라는 비아냥이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님을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효율성, 경제성, 자유주의, 자본주의 등 자본의 논리에 의하여 비정규직이 해고되고, 언론이 춤을 추고, 권력이 기업에게 면죄부를 심어 주었던 것이 2008년의 본모습이다. 경제가 어려워진다, 힘이 든다, 그러니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하자는 이야기는 그냥 말일뿐이다. 이 말에 속아 허리띠를 졸라맨 국민들만 바보가 된 것이다. 여전히 빈부의 격차는 넓어지고 있다.  

  과연 2009년은 어떻게 될 것인가? 2008년을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참 괴로운 질문이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오리무중(五里霧中), 딱 이 말이 들어맞는 한해가 될 것이다. 그래도 무엇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SERI 전망 2009를 샀다. 그런데 도무지 이놈이 읽혀지지가 않는다. 온통 어렵다는 이야기뿐이니, 위기라는 이야기뿐이니 읽혀질 턱이 있나? 그저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도무지 깊이가 없다. SERI 전망 2008에 비하여 도무지 깊이가 없는 내용들이 실려있다. 그냥 힘들다는 이야기만 적혀 있고, 그러나 잘 될 것이라는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실여 있을 뿐이다. 차라리 신문의 경제면을 보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는 생각만 든다.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한 금융위기는 금융시스템을 근본에서부터 흔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그 공포감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움직였고, 숫자에 불과한 금융자본은 손에 잡히는 실물경제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 대출 이자율은 높아져갔으며 국가에서 시중에 돈을 풀지만 은행이 이 돈을 다시 국가에 반환하는 기묘한 핑퐁게임이 시작되었다. 환율은 1500원을 치고 올라갔으며, 베이징 올림픽 특수도 끝났다. 잔치가 끝나버린 것이다. 신문에서는 연일 고통분담을 하자고 국민들을 선동한다. 쓸데없이 켜두는 전깃불도 끄자, 물은 아껴쓰자라고 하면서 마치 80년대 분위기를 내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지고 파산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직장에서 해고되는 비정규직들이 늘어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100조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투자하지 않고, 직원들을 자르는 기업들을 보면서 과연 저들의 말대로 저들이 한국을 먹여살리고 있는가 의문을 품어보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SERI 전망 2009는 말한다. 다 좋아질 것이라고. 이제 안정되고 물가도 잡혀가고 있으니 좋아질 것이란다. 비론 전반기는 힘들겠지만 후반기에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근거가 무엇인지? 좋아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저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를 써 놓으면서 다 좋아질 것이니 참고 견디라는 SERI의 이야기는 역시 삼성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환율도 안정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SERI의 이야기와는 달리 다시 1500원대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왠지 SERI 전망 2009를 보면서 맑스가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지금 SERI의 역할이 꼭 이런 것은 아닐는지? SERI에 대한 실망감을 갖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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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4 - 무너진 왕실의 화려한 귀환 한국사傳 4
KBS 한국사傳 제작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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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어떤 분들은 이 이야기가 역사학의 근본부터 흔드는 이야기라고 한다. 자칫 잘못하면 국수주의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이며 역사를 부정하는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반대 예들을 들어 반박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는 순진한 발상이다. 역사는 사람들에 의하여 경험된 사실을 주관적인 관점을 통하여 해석하고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순진함이다.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는가? 이 책에는 역사를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첫째는 객관적인 역사 서술 방식이요, 두 번째는 주관적인 역사 서술 방식이다. 객관적인 역사 서술 방식이라 함은 역사의 사실만 나열하는 서술 방식을 말함이요, 주관적인 역사 서술 방식은 이 역사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는 방식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역사란 철저하게 객관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의 사실만 기록한다고 할 때에도 사실 전부를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건의 경중을 가리고 취사선택을 하여 기록하게 되어 있는데 취사선택이라는 것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이의 주관적인 해석과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과정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역사는 철저하게 기록하는 이들에 의하여 그 해석이 좌지우지 되는 것이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승자일 확률이 크다. 물론 패자가 역사를 기록하는 경우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기록된 역사조차도 승자에 의하여 왜곡될 위험성이 너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역사는 기록, 즉 문자를 통하여 남는 역사를 말한다.) 

  “무너진 왕실의 화려한 귀환”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한국사전 4권을 받았을 때 갑자기 영화 반지의 제왕 3편이 떠올랐다. 왕이 귀환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화려하게 귀환하는 아라곤을 그리고 있는 통쾌함이 이 책에 담겨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책을 열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그러한 기대감은 사라지고 역사의 저 너머로 사라져간 왕실 사람들의 고뇌와 슬픔을 접하게 되었다. 4권에 기록된 사람들의 면면은 “광해군, 위덕왕, 우씨 왕후, 공민왕과 노국공주, 혜경궁 홍씨, 흥성대원군”이다. 이들의 특징이 있다면 분명히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사람들임에도 이상하리만치 역사적인 평가가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폭군의 대명사 광해군, 이름조차 희미한 위덕왕과 우씨 왕후, 사랑놀음으로 정신 이상이 되어 고려를 말아먹은 공민왕과 노국공주, 슬픈 인생을 살면서 가슴 속에 한을 쌓다간 혜경궁 홍씨, 시대착오적이며 독선적인 흥선대원군! 이상이 위에 기록된 사람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역사적인 평가이다.  

  이 책에서는 “과연 그런가? 이것이 이들의 전부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들을 재조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철저하게 매장되었던 이들의 존재가치를 다시 살려내기 시작한다. 현실정치, 국가를 위한 대의 명분, 정치적인 파트너를 잃은 슬픔 등 이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역사의 저편으로 매장당한 이들에 대한 기억을 다시 살려낸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사전 4권은 참 볼만한 책이다. 우리로 하여금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 인물을 해석하는 가운데 있어서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해서든 주인공을 미화하려는 인위적인 모습들이 들어 있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책을 만든 출판사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원래부터 한국사전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과정 가운데에서 나타난 문제점일 것이다. 주인공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바꾸려다 보니 그들의 실책과 냉정함까지 바라보지 못했으며, 이로 인하여 또 다른 승자의 역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혜경궁 홍씨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 혜경궁 홍씨만큼 논란의 대상이 될만한 사람이 없다. 책에서는 혜경궁 홍씨를 왕실의 여인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현실 가운데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고, 친정이 역적으로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살다 한중록을 남긴 한 많은 비운의 여인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혜경궁 홍씨에 대한 정반대의 시각이 존재한다. 혜경궁 홍씨는 세자비로 간택되어 왕실에 들어가면서부터 철저하게 친정의 이익을 위하여 정치력을 발휘한 사람이라는 해석도 있다. 사도세자가 소론이었다면 혜경궁 홍씨는 노론의 중심이었다. 노론이 소론을 없애기 위하여 사도세자를 몰락시켰어야 했으며(물론 몰락은 죽음을 말한다.) 이 과정 가운데 큰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이 헤경궁 홍씨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사도세자를 몰락시키기 위하여 애썼으며 정조를 세자의 직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하여 세자는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는 발칙한 이야기를 거론한 것도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었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물론 이 책에서는 이런 부분들은 축소하였지만 말이다. 반대 의견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다면 사도세자의 고백이라는 책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대체로 역사가 이렇다. 역사는 해석이다. 우리가 역사를 읽고 즐기는 이유도, 역사에서 무엇인가 배울 수 있는 이유도 역사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저 받아들이려하면 역사는 죽어 박제화 되어 버린다. 그러나 즐기려고 하고 해석하려고 한다면 역사는 살아 숨쉬며 우리의 일상으로 걸어들어 올 것이다. 역사를 즐기게 해준 한국사전 4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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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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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촘스키는 좌파다.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며 본인 스스로도 자신은 좌파라고 선언한다. 촘스키는 본인이 좌파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좌"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북한을 떠올리며 빨갱이 타도를 외치는 우리 나라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일이기에 부러울 뿐이다. MIT의 석좌 교수를 지내고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이요 어찌 보면 기득권자인데 그의 생각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행동하길 원한다. 그리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 정부에게 있어서 촘스키만큼 골치 아픈 존재는 없을 것이다. 존재감이면 존재감, 명예면 명예, 명성이면 명성 그 어느것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 미행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하니 말이다.  

  행동하는 양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 인터뷰집이라 그렇게 딱딱하지 않다. 그렇다고 가볍지 않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다 망라하고 있어서 그의 생각과 말을 전부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신문을 빠짐없이 읽어야 하며, 기업과 권력의 관계, 국제조직의 동향과 세계의 전쟁에가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힘들고 번잡스럽고 어려운 과정을 감내하고 난 다음 그의 책을 접하는 순간 우리는 신문 기사의 행간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조중동을 애독하며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한국의 많은 이들에게 나는 촘스키를 기꺼이 권해주고 싶다.  

  첫번째 인터뷰의 원제는 "The Common Good"이다. 공공선이라고 번역할 수 있으려나? 공공선이란 "개인이 아닌 국가나 민족, 인류를 위한 선"이락 사전에 정의 되어 있다. 공공선에 관한 촘스키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현재 사회에서는 공공의 선이라는 것은 말만 남아 있는 상황이란다. 실제 공공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존재한다고 언론이 믿게 만들뿐이다. 우리는 언론의 말을 듣고 그저 공공선이 존재하는구나 착각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란다. 이 사회에 남아 있는 것은 공공선이 아닌 기업이나 권력을 위한 선이라는 것이다. 권력과 기업이 결탁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얻어내고 이렇게 얻어진 이익을 창출해내기 위한 결손은 국민들이 감당하고 있으며, 기업들은 언론을 통하여 이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 촘스키의 생각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내린 분석인데 묘하게도 이 분석이 한국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얼마전 이슈가 되었던 종부세 환급에 관한 법률이 딱 그예이다. 

   노무현 정부가 어떤 정부였는지에 대하여 많은 이견들이 존재한다. 나는 노무현 정부가 흔히 이야기하는 좌파 정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는 철저하게 우익 정부이다. 어쩌다가 빨갱이 정부로 몰리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한나라당이 아니라서 그럴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해 왔던 정책들은 철저하게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고, 민족주의적인 패권을 확립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이런 노무현 정부의 정책 중에 그래도 내가 생각하기에 공공선을 위하여 구색이나마 갖추었구나 생각하는 것이 바로 종부세이다. 종부세에 관해 반대하는 것은 참 이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종부세는 결국 형평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종부세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폐지가 되었다. 그리고 과도하게 걷은 종부세를 환급해 주겠단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다. 국민적인 합의를 거치지 않은 세금을 걷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란다. 그런데 말이다. 종부세 환급에 관하여 국민적인 합의를 본인들은 거쳤는지 묻고 싶다. 건설자본과 그렇게 밀착되어 있는 이명박 정부가,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라 이름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나라당이 종부세를 환급해야 한다는 정책을 밀어 붙인 것이 도대체 수상쩍다. 누구를 위한 환급인가? 

  한나라당에서 환급받은 세금이 700만원이란다. 도무지 이 말을 우리더러 믿으란 말이가? 더군다나 그것을 불우이웃 돕기를 위하여 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종부세 환급이 한두푼도 아니고 국민의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했다고 한다. 나라 살림 살이야 뻔한 것이고 분명히 환급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려면 깎이는 부분도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종부세 환급을 위하여 깍인 부분이 어디인지 아는가? 아동복지, 사회 복지를 위한 재정이다. 그럼 정리를 해보자. 재산이 6억이상인 사람이 냈던 종부세를 환급해 주기 위하여 밥 한끼 목먹는 아이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없애버린다는 것이 과연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분명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결과가 그렇지 않는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는 맞는가? 가연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공공선에 대한 개념은 가지고 있는가? 

  이 사태에 대하여 언론이 무엇이라 말하는가? 조중동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잘하는 짓이라고. 헌재의 판결도 난 것이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지금까지 잘못되어 왔던 일들을 바로 잡은 것이라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촘스키가 말한 권력과 기업과 언론의 관계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자. 촘스키는 펜타곤과 기업과 언론의 관계를 말한다. 펜타곤을 통하여 미국민의 세금으로 군수기업을 먹여살린다. 군수 물자를 만드는 기업의 주머니를 국민의 세금으로 채워준다. 언론은 이를 은폐한다. 사실을 100% 보여주지 않고 일부만 보여주면서 국민으로 하여금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민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게 촘스키가 말하는 공공선이 결손되는 과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들어보자.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을 건설 기업으로 바꿔놓기만 하면 된다. 권력은 국민의 세금으로 건설기업 및 대기업의 주머니를 채워준다. 이들과 한편인 조중동의 재벌 언론들은 이 사실을 은폐한다. 물론 없는 말을 꾸며내지 않는다. 다만 진실을 100% 다 보여주지 않을 뿐이다. 국민은 언론에 속아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 이 과정에서 국민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무엇이 다른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종부세 환원은 공공선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일 뿐이다. 단지 우리는 이것이 공공선을 위한 일이라 속고 있을 뿐이다. 지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체로 이렇다. 이런 시선으로 사회를 살펴보라. 놀랍도록 날카로운 촘스키의 지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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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과 도쿄대 1 - 현대 일본을 형성한 두 개의 중심축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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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황과 도쿄대라는 두 가지 단어는 일본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단어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를 가지고 일본 현대사를 날카롭게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능력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두번 놀란다. 첫번째는 자국의 현대사를 이렇게 날카롭게 인식하고 서술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일본의 그것과 한국의 그것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그런 과정을 밟았다는 것이고, 그 기간이 일본에 비하여 훨씬 짧았다는 정도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에게 있어서 천황과 도쿄대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한국인인 나에게 있어서 일본이란 나라 자체가 거부감의 대명사이기 때문에 천황이라는 말과 도쿄대라는 말은 가급적이면 언급하고 싶지 않은 단어들이다. 게다가 "텐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카미카제식 공격을 감행했던 황군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천황이라는 말에 대하여 더욱 반발심을 갖게 만들었다.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한국인에게 천황은 일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천황에 대한 존중도 없고, 경외도 없고, 오직 원수를 대하듯이 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일본 사람에게 있어서 천황이란 대단한 존재감을 풍긴다. 우리가 단군을 우리 나라의 국조로 여기듯이 일본에게 있어서 천황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신이다. 그 어떤 부당한 권력에도 정당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인물이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일본이 사분오열하여 오랜세월 전란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힘과 명분이다. 명본의 최고점은 천황이며 이것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천황가 자체가 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천황은 철저하게 약자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한국에 왕가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국에서 왕가란 힘으로 나라를 취하면서 시작되고, 그 힘을 잃었을 때 왕조가 교체된다. 일본은 천황이 아닌 막부가 그런 역할을 감당했다. 이게 천황이 오늘까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천황이 명분의 최고봉이라면 도쿄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도쿄대는 간판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딸 수 있는 간판의 초고봉이 도쿄대가 아닐까? 물론 간판이라 함은 실력이 아니라는 말이다. 도쿄생이 최고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 시스템 가운데에서만 작동하게 되는 간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도쿄대생들을 찻잔이라고 부른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떤가? 한국에는 물론 천황이라는 명분은 없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다른 면분이 있다. 그것은 반공이다.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씌운다면 모든 것이 무사통과이다. 교호에서도, 정치에서도, 심지어는 경제에서도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우리 국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이 힘이 얼마나 거대한가? 대통령마저도 탄핵할 정도로 대단하다. 어디로 보나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빨갱이요 좌파로 몰아서 오늘날까지 우려먹고 이쓴 것을 보면 대한민국에서 반공은 천황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럼 도쿄대는 무엇인가? 서울대이다. 서울대느 그 태생부터 도쿄대와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경성제대가 서울대의 전신임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던가? 실력은 둘째 치고 한국에서 달 수 있는 최고의 간판이 서울대 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거칠지만 이런 구도로 이 책을 읽고 한국 사회에 대입한다면 너무나 흡사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더군다가 학교에서 주도하여 관료를 키우는 것이 도쿄대의 가장 큰 목표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수한 인적 자원을 길러낸다는 서울대의 이념이, 각계 각층에 포진하고 있는 서울대 인맥이 도쿄대의 인맥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좌와 우의 개념조차 국익을 추구하는 태도에 따라 갈린다는 것까지 어쩜 그리 똑같은지. 서울대 출신들의 좌냐 우냐라는 것 또한 국익, 좀더 자세히 말하면 전체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임은 두말하면 잔소리 일 것이다. 

  두서없이 썼다. 아직 2권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한번 읽어보라.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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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그 불만 - 前세계은행 부총재 스티글리츠의 세계화 비판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송철복 옮김 / 세종연구원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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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3년 멕시코의 칸쿤에서 농민 운동가 이경해씨가 할복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고 이경해씨는 세계화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 세계화의 부조리에 대하여 경종을 울렸다. 미국 언론들은 고 이경해씨의 고향을 찾아가 그의 삶에 대하여 조명했으며 반대에 부딪힌 세계화에 대하여 심도있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조중동을 비롯한 국내 메이저 언론사에서는 북한의 지령을 빧아 빨갱이 사상에 물든 빨갱이가 조국을 국제적으로 망신시킨 사건으로 보도했었다. 내가 조중동을 비롯한 메이저 언론을 싫어하는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농민운동가 조지 보베가 한국에 들어왔다가 농민 운동이 사라져 버린 것을 보고 깜작 놀랬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야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은 여전히 언론이 통제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론이 통제되는 사회가 아니라 농민 운동에 대하여 관심조차 갖지 못하는 사회이다. 농업은 천하지대본이 아니라 그저 경제성 없는 천덕꾸러기 산업일 뿐이다. 자동차 한대를 더 팔기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되어야 하는 천덕꾸러기로 취급받은지 오래이다. 노동 운동에서도 심도 있게 농민 운동에 대하여 다루지는 않았다. 그저 인원 동원을 위한 기구 정도의 위상만을 가진 것이 오늘날 농민 운동의 현주소가 아닐까? 이런 처자에 뜬금없이 고 이경해씨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계화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비판과 불만을 읽으면서 고 이경해씨의 할복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스티글리츠는 그 악명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 인물이지만 철저하게 제도권 안의 사람이다.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도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우익인 사람이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 고문 역할을 감당했으며 세계은행 부총재를 역임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만한 사람이 작금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 그저 빨갱이 사상으로 치부해 버릴 사안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오랫동안 제도권 안에서 일해 온 사람이고, 세계 은행 부총재의 직물르 감당하면서 계속적으로 IMF와 함께 일해왔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지금의 세계화는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유감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세계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의 말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그는 세계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이 왜 세계화 비판의 선봉장이 되었는가?  

  그의 판단에 의하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세계화는 소탐대실을 하고 있는 근시안적인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절대빈곤을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투자자금을 회수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는 근시안적이고 권위적인 IMF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IMF가 상식선에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IMF 스스로 실수 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며, 실수로 판명난 사안들에 대하여 반성할 줄 알아야 하며 각 나라의 특성에 맞는 구제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각 나라마다 체질이 다르고 정체가 다를텐데 세계화는 어느 나라에든지 들어맞는다고 굳건히 믿는 만병통치약을 제시한다. 울타리를 낮추고, 지출을 줄이며 내핍 경제를 통하여 빨리 빚을 청산할 것을 요구한다. 단순한 요구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IMF는 요구가 아닌 명령을 내리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피해는 고스란히 채무국의 국민들이 떠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빨리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기거이 희생을 감수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희생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 대다수의 국민에게 강요되니 문제이다.  

  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식에서 벗어난 미치광이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얼마전 종부세를 완화하면서 초과한 종부세를 환급해준다는 정부의 정책이 발표되었다. 막대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정부는 IMF와 같은 방식을 취했다. 줄일 것은 줄인다면서 허리띠를 졸라맸던 것이다. 그러나 줄인 곳이 문제였다. 종부세를 환급해 주기 위하여 아동복지와 사회복지 지출을 줄였던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하는 의문이 드는 일이지만 IMF는 이일을 밥먹듯이 한다.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운다. 그것들은 자기들 권한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빚을 빨리 받아내야 한다고 말하면 할말이 없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될 것을 기어이 나서서 망쳐 놓기 일쑤이다. 소탐대실, IMF의 정책을 이만큼 잘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IMF를 I am F라고 부르면서 반대하는 지도 모르겠다. 

  만약 세계화의 기수 IMF가 현재의 정책을 고수한다면, 비상식적인 행보를 계속한다면 전세계적으로 들끓는 반세계화의 물결은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세계화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스키글리츠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상식적인 세계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세계화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세계를 빈곤에 빠뜨려 지배하기 위해 IMF가 일부러 이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음모론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음모론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IMF의 독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이런 IMF의 방식을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배워와서 자신들을 방어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소탐대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포식자와 피포식자의 균형이 무너지면 생태계가 붕괴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소탐대실로 끝을 볼 것이냐, 아니면 상생의 길을 찾아갈 것이야 세계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부딪치는 딜레마일 것이다. 

  세계화를 비판하는 사람일지라도 꼭 한번은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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