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주의 목회 신화를 포기하라 - Good Seed 교회와 목회시리즈 4
유진 피터슨 지음, 차성구 옮김 / 좋은씨앗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예전의 일이다. 학생 때 채플 시간에 한 목사님이 나오셔서 설교를 하셨다. 그날 설교의 주제는 목회에 성공이라는 말이 가능한가였다. 세상에서 많은 목회자들이 성공이라는 말을 꿈꾸고 살아가는데, 그리고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 세속적인 성공이라는 말이 과연 목회와 어울리는 말이더냐는 것이 설교의 요지였다. 이날 채플을 마치고 수업 시간에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다. 내가 전공한 것이 윤리이다 보니 그날 수업의 주제가 여기에 맞추어져 버린 것이다. 수업 시간에 논쟁이 일어나면 대체로 6학기 학생과 4학기 학생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6학기 학생은 일반 학교를 다니다가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신학대학원에 입한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4학기 학생들은 대학교를 아예 신학대학에 들어간 경우이다. 그러다 보니 생각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날도 여지 없이 6학기와 4학기의 논쟁이 불을 뿜었다. 4학기는 목회에 성공이라는 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6학기는 목회에 성공한 분들이 많지 않냐는 것이다. 6학기 생들이 성공한 경우로 꼽는 사람들은 김선도, 김홍도, 김국도, 조용기 같은 대형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목회의 성공이라는 것은 큰 교회를 담임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학교를 다니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성공이라고 끊임없이 세뇌받아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목회라는 말에 성공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길 좋아한다.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담임해야 하고, 자기 말 한마디에 여러 사람이 움직이고, 자기를 떠받들어 주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가 마찬가지다. 다만 얼마나 조심하고 경계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별로 그러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다. 자기 듯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사탄이라고 칭하는 모습은 이제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목회자의 말에 거스르면 그 이야기가 옳고 그른지를 따져보지 않고 거부해 버리는 것이 목회가가 가장 쉽게 따르는 선택이 아니던가? 마치 자신이 사람들에게 얕보이면 하나님이 얕보이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커다란 탑을 쌓는다. 그리고 그 탑이 더 웅장해지고 위엄을 갖도록 교회의 부흥을 바란다. 그런데 그 부흥이라는 것이 대체로 양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렇게 양적인 성장에 매진하다보면 목회자는 필연코 돈과 권력과 섹스라는 함정 앞에 직면하게 된다. 막장이라고나 할까?

  유진 피터슨은 이러한 목회자들의 위험을 자기의 경험을 가지고 우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준다. 요나서의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시스로 가려는 배를 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목회의 길이 아니니 당장이라도 내려서 니느웨로 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니느웨만큼 목회의 현장을 잘 설명하는 말은 없는 것 같다. 가기 싫은 곳, 그러나 가야 하는 곳,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나타나는 곳 이곳이 니느웨이다. 다시스는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없이 내가 존재하는 곳,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곳이다. 우리 목회의 현장은 어느 곳인가? 다시스인가? 니느웨인가?

  요즘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마음이 답답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갈길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하지만 답답함이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다 예전에 사 놓았던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책 내용이 너무 사변적인 곳도 많고 번역이 조잡스러운 곳도 많아서 읽다가 졸기를 반복하다가 집어 던졌던 책이다. 이번 기회에 인내를 가지고 마지막가지 읽게 되었다. 물론 여기저기 거친 부분들도 있고 졸음에 자연스레 빠지게 만드는 부분들도 있지만 읽어볼 만한 책인 것 같다.

  혹시 프로그램에 목말라하고, 조급증이 일어나는가? 왜 교회가 안커지냐고 불안해 하고, 맡겨진 자리가 답답해지는가? 내가 아니면 안될 것처럼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있는 것이다. 잠시 멈추어 삶을 돌아보고 니느웨로 가는 배로 갈아타야 할 것이다. 이 책이 당신의 여정에 지도가 되어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으로 신실하게 믿음의 글들 191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의 재정이 마침내 바닥이 나 버리고 말았다. 수도원의 뾰족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은 깨져 나갔지만 그런 것을 손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깨어져 버린 종마저도 다시 살 형편이 되지 못해 신부님들은 나무 딱다기를 쳐서 기도 시간을 알리곤 했다. 마침 그 수도원에는 고셰라는 이름을 가진 수사가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란 고작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일이었다.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수도원의 재정 상태를 능 가슴 아프게 생각하던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허가 아래 젖소 돌보던 일을 중단하고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다. 어릴 때 자신을 키워 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의 전문가였기에, 그 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해 가면서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애쓴 결과, 마침내 고셰 수사는 불로장생주를 빚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날부터 고셰 수사는 빚은 불로장새주는 프랑스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가난에 찌들었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하루 아침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수도원의 건물은 웅장하게 고쳐졌고 뽀족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그 모든 것이 고셰 수사 덕분이었다. 그 빛나는 공적으로 인해 고셰 수사는 신부의 서품까지 받게 되었다. 수도원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날 저녁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경건하게 저녁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어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자기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고셰 수사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불로장생주가 잘 빚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그 술을 시음해 보다가, 그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다른 신부님들은 술주정하는 고셰 신부를 향해 "사단아 불러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버렸다. 그리고 신부님들은 다시 경건하게 미사를 계속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수도원 원장은 고셰 수사에게 앞으로는 성당 출입을 삼가고, 주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을 빚으면서 거기서 혼자 기도할 것을 명령했다.

  마음씨 착한 고셰 신부는 수도원장의 명령을 따랐다. 매일 술을 빚고 그 술을 시음해 보면서 주소장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장이 주조장을 찾아왔을때,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에게 눈물로 간청하였다. 이제 술을 그만 만들겠으니 예전처럼 젖소 돌보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고셰 수사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리고 자비로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인즉, 아무 염려 말고 소신껏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만을 빚으라고 도리어 격려해 주었다.

  어쩔수 없이 고셰 수사는 계속해서 술을 빚었고, 그 술은 날마다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으며, 수도원은 쉴 틈 없이 돈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매일 미사가 끝날 때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 수사를 위하여 간절히 축복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고셰 수사의 영혼과 육체는 주조장 안에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의 꽁트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의 내용이다. 이 작품속의 수도원장과 신부들이 사랑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돈이었다. 주님의 이름과 고셰를 위한 기도는 단지 명분이었을 뿐, 그들이 집착했던 것은 돈이 전부였다. 무서운 이중성이었다. 그 이중성의 틈바구니로 그들의 인생은 새어 나갔고, 그 같은 그들의 삶은 순박한 고셰의 영과 육을 죽이는 흉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실상인 것은 아닌가?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단지 자신의 욕망만을 성취하려는 우리 자신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중성 사이로 지금 우리를 스치고 있는 1초 1초 또한 허망하게 소멸되고 있을 뿐이지 않겠는가?                                                      -298p~300p 인용

  한국 교회에 불어 닥치는 붐은 더 높이 더 크게인 것 같다. 다른 교회보다 더 크게 지어 올리는 것이 마치 자기가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너무 많다. 서울의 유명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는데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가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자기 형제들이 모이면 이렇게 말한단다. "누구 교회가 세상에서 제일 큰가?" 이 말로도 성이 안차셨는지 안돌아가는 영어 발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Whose churchis the biggest in the world?"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런 것으로 자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도 영어까지 곁들여서 자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기가 막혀서 한참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있다. 대저 한국 교회의 모습이 이러하다. 목회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반 신도들이라고 다를 것인가? 여의도에 있는 모 교회, 강남에 있는 모교회, 압구정에 있는 모교회 등등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를 다니는 신자들 또한 자기 교회보다 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매 주일 예배가 드려지고, 기도회가 열리지만 그것들은 구색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크기이다. 크기에 집착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갈보리 언덕을 오르고 계시는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대학의 한스 로크마커 교수가 쓴 <예술은 변병을 요하지 않는다>는 책 속에는, 1800년대의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후쿠사이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후쿠사이를 찾아와 수탉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수탉을 그려 본 적이 없는 후쿠사이는 친구에게 일주일 후에 오라고 했다. 일주일 후에 친구가 찾아오자 후쿠사이는 이번에는, 이주일 후에 보자고 했다. 이주일 후엔 두 달, 두 달 후엔 6개월-이런 식으로 약속을미루다가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3년째가 되는 날에도 후쿠사이는 또 약속을 미루려 했다. 친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후쿠사이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후쿠사이는 말없이 종이와 물감을 가지고 오더니, 그 즉석에서 순식간에 수탉을 그려 주는 것이었다. 완성된 그림이 얼마나 완벽한지 마치 살아 있는 수탉을 보는 것 같았다. 그 그림은 친구를 기쁘게 만들기보다는 도리어 그의 화를 더욱 돋우고 말았다. 친구는 후쿠사이에게, 이처럼 순식간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을 왜 3년씩이나 기다리게 했느냐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후쿠사이는 말없이 친구를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크나큰 화실의 사방 벽 앞에는, 3년 동안 후쿠사이가 밤낮으로 습작한 수탉의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후쿠사이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수탉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3년간 밤낮에 걸친 훈련의 결과였다. 그래서 로크마커 교수는,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안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은 기본이요, 그 기본 위에 후천적인 훈련이 중단 없이 수반될 때에만 한평생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술가의 작품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훈련에 정진했다면 명품일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명품일 까닭이 없다.

  믿음도 이와 같아서 믿음 역시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을 때에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다 같은 크리스천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보기에 민망한 크리스천 또한 부지기수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기본이라면, 매사에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신실하고 참다운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철저하게 훈련의 문제이다.  

                                                - 392p ~ 393p 인용

  교회 안과 밖의 삶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말로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욕먹는 이유, 비난당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불교의 가르침과 많이 다르다. 불교는 아직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교회를 다녀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답지 못하면 바로 비난이 들어오는 것이다. 왜 이렇게 크리스천답지 못한 크리스천이 많은가? 기독교 신앙을 도매금에 넘겨 버리는 목회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거저라고, 공짜라고, 예수님 이미 지셨으니 믿기만 하면된다고 하는 설교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두루뭉실하게 넘어간다. 그러다보니 신앙은 그저 종교적인 생활을 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 주에 한번 교회가면 그것으로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건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언제부터 이렇게 싼 것이 되었던가? 세상에서 제일 비싼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평생 자기 삶을 바쳐서 지켜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인데 그것이 어떻게 쌀 수가 있단 말인가? 믿믿음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곱씹어 보아야할 말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어던 변명도 필요없다. 그저 우리의 삶을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이렇게 무분별하게 살아가는 자칭 크리스천들이 넘쳐날 것인가?

  본질에 대한 신실한과 크리스천답고자 하는 삶에서의 끊임없는 훈련이 우리를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게 있는 것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는 목사님 홈페이지에서 이 그림을 발견하고 "뭐지?"라는 생각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글 같은데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다보니 이 책이었다. 나도 몇번 읽었던 책인데 이 그림을 기억해 내지 못하다니 헛읽었구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화끈 거렸다. 다시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신앙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스페인 화가 고야의 작품 중에 '이빨 사냥'이 이 있다. 한 여인이 교수형으로 사형당한 시체의 입으로부터 치아를 뽑아내려는 그림이다. 본래 짐승에게만 해당되는 ‘이빨’이란 단어를 그림 제목의 우리말 번역에 동원한 것은, 그것이 죽은 시체의 치아를 가리키기 때문인 듯하다. 그림 속엔 죽은 사형수의 시체가 교수대의 줄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다. 그 앞에서 한 여인이 무서움에 떨며 시체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얼굴을 뒤로 돌린 채, 한 팔만을 뻗어 시체 입 속의 치아를 뽑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죽은 사람의 시체, 그것도 교수형으로 사형당해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시체라면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왜 무서움을 무릅쓰면서까지 한낱 시체의 치아를 사냥하려는가? 고야가 살던 18세기 스페인에 만연해 있던 미신 때문이었다. 즉 사형당한 시체의 치아엔 신통한 힘이 있어 그것을 지닌 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미신이었다.

고야가 그 미신의 내용을 소재로 ‘이빨사냥’을 그린 것은, 그처럼 하찮은 미신에 빠진 어리석은 여인 한 사람을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여인을 통해 모든 크리스천들을 비판하려 함이었다. 당시 가톨릭이 국교였던 스페인의 모든 국민은 크리스천이었다. 집집마다 성상으로 장식되지 않은 집이 없었고, 주일마다 성당에서는 거룩한 미사가 드려졌다. 사람들은 성당에서나 집에서나 자기 소원 간구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생활은 전혀 딴판이었다. 자기 욕망을 성취하는 길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마치 시체의 이빨을 사냥하고 있는 그 미련한 여인처럼 말이다. 고야가 보기엔 그들이 참된 크리스천일 수가 없었다. 결국 고야의 ‘이빨사냥’ 역시 그릇된 선택을 당연시하고 있는 인간 어리석음에 대한 한탄-주님의 한탄에 맥이 닿아있는-이었다.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의 이 한탄으로부터 자유로운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113p 인용

  이것이 비기독교인만의 문제가 아님은, 크리스천인 우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예배에는 경건한 모습으로 어김없이 참석하지만, 실생활 속에서는 ‘이빨사냥’ 속의 여인처럼 욕망의 성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 자신 말이다.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한 알의 밀알이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킨 공범으로서의 우리 자신 말이다.  -114p 인용

  우리는 생존의 차원을 넘어 선진국이 되기를 원하는 단계에 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단호하게 부정직과 결별하징 낳으면 안 된다. 바른 선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선진국은 돈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의 선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거짓된 선택의 되풀이로는 선진국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계속 주님의 한탄거리가 될 뿐이다. 마치 '이빨 사냥' 속의 여인처럼 말이다.         -115p 인용

  나폴레옹은 일평생 자기 야욕과 야망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다. 그는 자기 야망을 위해 무려 100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전장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에서 죽은 뒤엔 그곳에 매장되었다가, 20여 년이 지나서야 한 줌의 재가 되어 앵발리드 성당에 안치되었다. ‘불구의’ ‘쓸모없는’ ‘무효의’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프랑스어 형용사 앵발리드(invalide)는 ‘부상자’ 또는 ‘상이군인’을 뜻하기도 한다. 그 성당의 이름이 앵발리드인 것은, 지금은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주위 건물이 본래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나폴레옹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앵발리드 성당에 안치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 야망의 노예로 살던 그의 삶 자체가 세상에서는 황제로 군림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는 불구의 삶이요, 아무 쓸모없는 무효, 즉 앵발리드의 삶이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턱을 고이고 생각에 몰두해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그 너머 나폴레옹의 앵발리드 성당-그것은 참으로 묘한 대조였고, 심오한 영적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자신을 꾸며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앵발리드’일 수밖에 없다. 말씀 안에서 생각지 않는 자는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인간의 중심 그 자체로부터는 죽음 이외의 것-참된 것은 솟아나지 않는다. -135p 인용

  나는 이 재철 목사님 설교를 참 좋아한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그 분의 설교집을 좋아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분의 살교 테잎을 구해서 듣기는 했지만 설교집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이분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갖는 생각은 참 박식하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와 사회적인 모습들, 뉴스 등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고 하나씩 짜맞추어 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코너까지 몰려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길이 결코 기분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에 이런 분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뿌듯해 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의 책이 나오면 모두 사서 몇번을 읽는 것이다. 장담컨대 내가 설교집을 이렇게 열심히 읽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재철 목사님을 보면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이 떠오른다. 황제의 논리와 믿음의 논리를 비교하면서 황제의 논리가 아닌 믿음의 논리를 따라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지만 이 시대 대다수의 청년들이 믿음의 논리가 아닌 황제의 논리를 추종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믿음의 논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미련한 모습같아 보이지만 이분은 미련한 그 길을 선택하셨다. 왜 그럴까? 씨뿌리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 씨도 뿌리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것이 이 분이 택하신 길이 아닐까? 언젠가 의의 푸른 나무가 가득한 세상을 꿈꾸면서 말이다.

  이빨 사냥이라는 이야기가 참 머리에 남는다.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는 더이상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다. 천덕꾸러기요 이익집단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물론 아직까지도 세속에 물들지 않은 다수의 신앙인들이 있지만 힘을 쓰는 소수들이, 대형교회의 소수들이 철저하게 이익집단화 해버렸다. 장로 대통령을 말하고, 마귀 새끼를 말하고, 빨갱이를 말하는 교회가 어찌 복음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복음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복받는 이야기, 출세하는 이야기, 성공하는 이야기만 넘쳐난다. 마치 다단계 프로그램을 듣는 것처럼 내가 어떻게 기도해서 복받았는가하는 이야기만 넘쳐 난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예수 믿고서 어렵지만 그래도 예수 때문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다. 분명 후자가 믿음의 본질일텐데 우리는 전자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러니 이빨 사냥에 치중할 수밖에.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에 참석하지만 그 안에 진정한 경건이 있는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신앙이 사회를 바꾸어 가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요,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천덕꾸러기인가? 당신의 믿음의 자리를 살펴보라. 믿음의 논리가 무엇인지, 믿음의 자리가 어디인지, 내 믿음의 원천은 어디에서부터 나며, 내 믿음의 틀은 어떠한지 철저하게 돌아보라. 시간이 가면서 내 신앙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돌아보라. 황제의 논리와 주님의 논리 중 나는 무엇을 선택했는지 돌아보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본인도 유구무언인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일생 믿음의 글들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청년아,

  그대가 만약 그대 욕망의 궁을 짓는 데 그대의 일생을 걸면, 그 궁이 무너지기도 전에 그대 자신이 먼저 그대의 모든 것을 잃고 모두와 단정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의 궁을 스스로 허물고 진리의 전을 복원하는 데 그대의 일생을 바치면, 그대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얻게 될 것이다. 그대가 다윗의 일생을 통해 이 사실을 터득하고 그대 일생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대 인생을 사랑하고 아끼는 길이요, 그대로 인해 새로워질 조국과 인류의 미래를 사랑하고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군중이 아니라, 깨어 있는 한 인격을 당신의 도구로 쓰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9p 책을 열며에서 인용

  서해에서 잡히는 생선이 중국 배에 잡히면 중국산이 되고, 우리나라 배에 잡히면 국산이 된다. 똑같은 곳에 살아도 어느 배에 잡히느냐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그 이유는 생선이란 얼마나 신선하냐에 그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선(生鮮)이다는 말이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 갈겼다. 결국 신앙이란 소급의 대상, 즉 영적인 신선도를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판가름난다는 말이 아니던가? 비전의 사람에서 바울을 발견했다면 인간의 일생에서는 다윗을 발견했다. 많은 설교가들이 다윗에 관하여 이야기했지만 내가 즐겨보고 공감하는 책은 딱 두개이다. 하나는 유진 피터슨의 "다윗 이야기: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인간의 일생"이다. 이 두 책은 다윗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결코 식상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가지 내가 모르고 지나갔던 혹은 간과하였던 것들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 해준다. 유진 피터슨의 책이 나에게 다윗 이야기를 상상력을 동원하여서 읽어야 함을 가르쳐 줬다면 이 책은 나에게 다윗의 일생을 그 등장에서부터 마무리까지 어떻게 영적인 신선도를 유지하는지 살펴보며 평가하는 법을 가르쳐 줬다.

  역사의 지평이라는 챕터에서는 다윗의 등장을 준비하는 룻과 보아스에 관하여, 홀로, 더불어라는 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과 다른 이들과 더불어 선다는 것의 의미를, 베레스 웃사에서는 영적인 신선도를 아직 잃지 않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다윗을, 에덴과 아단에서는 거듭된 성공으로 영적인 신선도를 잃어가는 다윗을, 퇴장과 등장에서는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 한 맹세와 자기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다윗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윗의 이야기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각 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한 마디를 하기 위함이다.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며 살아라."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함이다. 다윗은 결코 흠이 없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일생은 피로 점철된 인생이다. 골리앗과의 전쟁, 장인과의 전쟁, 자식과의 전쟁, 자식들 간의 암투 등 모든 것들을 지켜 보며 살아온 인생이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내 성전을 지으실 수 없다고 선언하셨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인생이요, 모든 왕들의 기준이 되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그의 인생관에 달려 있다.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을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하여 하루하루 힘겨운 싸움을 하였기 때문이다.

  처음 신앙 생활을 쉽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구원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이 죽기 전에 영접하고 죽는 것이라 하는 농담은 빈말이 아니다. 그만큼 영적인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성공한 다음에는 말해 무엇 할 것인가? 게다가 사람들은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려는 노력 또한 하지 않는다.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기 보다는,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하루하루 힘겹게 투쟁하기 보다는 그 욕망을 풀어 놓아 버린다.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내버려 둔다. 그리고그 욕심에 충실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Let it be!"를 외치면서 하루하루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이것을 위해 신앙과 하나님마저 이용한다. 이런 세상 가운데에서 프로 크리스천이란 어던 모습인가?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인간의 등장과 퇴장은 무엇인가? 이 책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여, 프로 크리스천이 되라."

PS. 이 책 또한 참 많이 산 책이다. 앞으로도 쭉 사서 나누어 줄 생각이다. 그리고 몇번씩 곱씹어 가면서 돌아본다. 나는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고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전의 사람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비전이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합니다. 야망의 노예가 되면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으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그분을 비전으로 삼아,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자에게 섬김과 봉사를 다하는 진정한 크리스천, 참된 목사가 되십시오. 그때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이 우리의 마지막 장도를 박수로 환송해 줄 것입니다. 아니 그 순간,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우리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박수로 친히 맞아주실 것입니다.    -201p 인용

  장담하건대 지금까지 나만큼 이 책을 많이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재철 목사님을 참으로 신실하게하는 책을 통하여 접하게 되었고 그분의 설교에 매료되었다. 그 후 난 그분의 열성팬이 되어 그분의 책을 모두 구해 읽게 되었다. 몇번씩이나 되풀이 해서 읽고,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기회가 있을 대마다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던 책 목록 가운데 꼭 들어가 있던 책이다. 내가 왜 이렇게 이 책에 천착하게 되었는가? 이 책이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는 책이기 때문이었다.

  비전의 사람! 이 말은 내 인생의 화두였다. 무엇이 비전인가? 지금까지 그저 꿈을 갖고 살면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비전과 꿈은 다른 것이라고, vision이란 effort가 요구되지만 dream은 그저 머릿속의 생각에 멈추고 마는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나는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위 친구들에게, 청년들에게 선물로 주게 되었다. 비전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내게 있어서 신앙을 풀어가는 화두가 되기 대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은 야망이거나 망상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던 이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그 굼을 성취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자기가지도 죽이고 마는 야망인 경우가 많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간 삶의 끝이 대부분 이렇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이루었는데 허망하다는 느껴지는 경험. 아마도 욕망을 충족되고 난 다음 느끼는 허탈감일 것이다. 이런 것은 비전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인이 따라야 하는 비전은 더더욱 아니다. 또 어떤 이들은 거창한 꿈을 꾸지만 꿈만 꾸다 끝나버린다. 시작을 안하기 때문이다. 평생 계획만 하다가 이루는 것 하나 없이 끝나버린다. 야망에 몸을 맡기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노력은 도외시한채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서, 내게 주어진 환경이 좋지 않아서라며 핑계를 댄다. 이런 종류의 신앙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변명의 도구로 사용해 버린다.

  이 책은 사도 바울의 인생을 4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신의 야망을 좇아 살아가는 눈먼 사람으로서의 사울, 자신의 현실이 어던 것인지 깨닫고 자기의 죄를 발견하는 비늘벗은 사울, 말씀으로 바로서고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 신앙을 바로 정립하는 성전의 사람 바울,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비전을 향하여 흔들리지 않고 달려가는 비전의 사람 바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울을 본받으라 권한다. 특별한 존재 바울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전혀 다를바 없는 바울의 모습,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비전의 사람이 될 것을 권한다. 이 책의 설득력과 파워는 바로 솔직한 자기 고백과 바울의 모습을 잘 해석한 저자에게서부터 연유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특히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곡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이 이 책을 구매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기회가 있는대로 이 책을 권해주려고 한다.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의 마음으로. 이시대 젊은 크리스천들이여 성공이나 야망에 눈을 팔지말고 비전에 목숨을 걸어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