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 -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유기성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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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 2:20)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제목이 책의 모든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유기성 목사는 큰 교회 목사답지 않게 소탈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전병욱 목사같은 쇼맨쉽도 없고, 그렇다고 김동호 목사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지만 끌리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유기성 목사는 이것을 예수가 살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아는 청년에게 선물로 책을 건네주면서 나도 한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런 신앙서적이 대체로 그렇듯이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어느 분들은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책을 가지고 설교한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책을 내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이 책은 기본에 충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하 그렇구나."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는다면 그만큼 실망하게 될 것이가. 특별하게 새롭고 신기한 해석은 없다. 다만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자기 신앙의 고백위에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신앙의 고백이 없이 그저 그런가 보다라는 생각으로 성경을 읽고 교리를 배우고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 저자의 초등학교 4학년 딸처럼 말이다. 그러니 인생의 문제를 만나면 믿음이 흔들린다. 말뿐인 공허한 메시지만이 한국 교회에 가득하다. 빛과 소금이 아니라 빛과 소금인척 한다. 신앙의 자기 고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자기의 신앙 고백에 서서 담대하게 외치는 유기성 목사의 말이기 때문에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가 가진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의 내용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이 돈을 믿고 의지하는 만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의 주인이시고 나의 주인이시라고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만원짜리 만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나의 성질과 이기심과 생각들이 죽고 예수로 살고, 예수님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이고, 우리가 극복해야할 시험이리라. 이 책은 이런 시험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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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무게 믿음의 글들 26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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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 루이스! 누가 뭐래도 그는 이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이다. 철저하게 무신론자였던 그였기에 이렇게 순도 높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어릴 적부터 기독교인이었던 나의 말은 그의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함을 철저하게 통감한다.

  영광의 무게! 그에게 영광의 무게란 비천과 영광이라는 믿기 어려운 두 가능성 사이에서 칼날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치열함일 것이다. 이 시대 기독교는 영광의 신학을 이야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는 것, 그것이 이 시대 교회의 최대의 메시지이고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광이란 말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루이스는 이 사실을 철저하게 직시했던 것이다. 당시 2차대전이라는 혼란스러운 사회 가운데에서 기독교인의 의무를 항상 기억하고 살았던 그이기에 그의 글에선 무게가 느껴진다. 전시라고 할지라도 매일 해야하는 학문의 길을 걸어가야 하고, 모든 사람들이 반전을 이야기할 때 사랑으로서의 전쟁을 선언할 수 있는 그의 입담은 단순히 이상이나 머릿 속의 사고가 아니라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독교는 분명 사랑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종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기독교는 애국도 없고, 그저 다른 사람의 피에 무임승차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더군다나 집총 거부를 외치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기독교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루이스가 이야기했듯이 철저한 개인적인 종교는 없는 것이다. 종교는 사회적인 규약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인 평화를 외쳐야 한다. 광우병을 이야기하고, 미군 기지 철수를 외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빨갱이라 말한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란 쓸데없이 이런저런 일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고 오해한다. 말만 앞서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루이스는 단호히 기독교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내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내가 지옥에 떨어져도 상관하지 않겠노라는 바울의 말을 다시 보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루이스는 이 시대의 바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은 나니아 연대기에 분명히 드러난다. 다른 아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비천에 떨어지는 사자의 모습, 이것이 예수의 모습이고, 기독교의 나아갈 길일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러한 그의 사상이 한국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반지의 제왕에 열광하면서 영웅이 되기를 꿈꾸지만 사자와 같은 비천함을 통하여 다른 이를 사랑하는 나니아 연대기에는 시큰둥하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고,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부디 바라기는 한국 교회가 영광의 무게를 자각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 교회는 결코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여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곳곳에 스며있는 단편적인 그의 이야기는 충분히 숙고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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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트렌드 - 세상의 룰을 바꾸는 특별한 1%의 법칙
마크 펜, 킨니 잘레스니 지음, 안진환 외 옮김 / 해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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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는 지금 다양성으로 나아가고 있다. Mega-trend는 이미 지나가고 세상은 Microtrends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다수를 위하여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 당연하게 들렸다면 이제는 다수를 위하여 소수가 희생하면 안되는 시기가 되었다. 각자의 생각과 이익에 맞추어 갈갈이 쪼개어지는 것이 전세계적인 추세이다. 메가 트렌드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이 시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메가 트렌드라면 "이 시대는 마이크로 트렌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 이런 모습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전통적인 가족이 붕괴한다. 예전에 가족이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일상적인 가정의 모습이었지만 요즘은 아이들이 없는 딩크족을 비롯하여 결혼하고도 여전히 따로사는 LAT족, 동성으로 이루어진 가족 등 무수히 많은 가족의 혀애가 등장한다. 취미도 달라지고, 애국심이라는 것도 퇴색하여 버렸다. 대량 생산의 대명사인 포드 주의는 이미 쇠퇴하여 버렸고 그 뒤를 도요타 주의가 있다. DIY족이 등장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의학계에도 DIY족이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많은 생각들이 철저하게 부정되고 소수의 취향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는 혼란한 세대가 되었다. 어찌보면 혼란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만 어찌 보면 자유의 확산이라도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분명이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75가지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생소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분명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일들인데 저자는 이것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수로운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을 어떻게 공략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마이크로 트렌드만 해도 머리가 복잡한데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세상은 마이크로 트렌드를 넘어 나노 트렌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노 트렌드만으로도 충분히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멸망시킬 수도 있음을 알카에다를 비롯한 테러 조직을 예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읽을 수 없다는 저자의 말에는 공감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본다. 세계는 마이크로 트렌드로 나아가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과연 마이크로 트렌드로 나아가고 있는가? 여전히 색깔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니던가? 수없이 많은 생각과 정책들이 그 이유와 결과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좌우라는 색깔론에 입각하여 판단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셰계는마이크로 트렌드로 나아가지만 세계화를 외치는 우리는, 특히 정치권은 색깔론이라는 메가 트렌드에 안주해 버리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경색된 사회에서 어찌 창의력이 나오고 경쟁력이 나온단 말인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마이크로 트렌드를 원하는 국민들을 반공이라는 메가 트렌드로 억지로 붙잡아 놓고 있는 형국이 아니던가? 애국, 국방, 반공, 한민족, 경제라는 과거 독재 정권의 메가 트렌드가 여전히 영향력을 드리우고 있는 대한 민국이 세계화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것도 우리의 고유성을 지키면서 나아간다는 것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저자의 생각에 많은 공감을 한다. 그러나 저자의 관심이 정치와 경제에만 가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경영서적의 한계이겠지만 모든 챕터를 마무리지으면서 여기에서 어떻게 지지자를 이글어 내어 권력을 습득할 것이며, 이러한 변화들이 어떻게 시장을 형성할 것인가에 몰두하고 있다. 당장 눈 앞에 잡히는 권력과 돈이라는 실익에 집중한 나머지 책의 격이 떨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 나아가 실용과 경제, 당장 돈이 되는 것에 몰두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단면을 보는 것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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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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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사마리아인을 통하여 장하준이라는 사람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생각에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다 몇달전 국방부에서 선정한 불온 도서에 "나쁜 사마리아인"이 버젓이 이름을 올린 것을 보고 "국방부가 미쳤구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무슨 책인지 읽어보고나 불온 도서로 선정한 것일까? 도대체 어떤 이유로 장하준이라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일까? 그의 책을 읽어 빨갱이의 빨자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보수적인 경제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국가에서 나나서 주도하는 통제 경제, 이것이 장하준이 이야기하는 경제의 모델이 아닌가? 많은 선진국들이 이 경제 모델을 통하여 선진국이 되었고, 아시아의 신흥강국들이 이렇게 발전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후진국들이 발전하기 위해선 이 방법을 기본으로 삼아 각 국에 맞는 경제 발전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이며 보수적인 주장이 장하준 교수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이 좌파적인 불온 사상으로 평가되는 대한민국은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시장만능주의를 믿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발언 때문일까? 여하튼 국방부 불온 도서에 그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장하준의 책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런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더할나위 없이 자랑스럽고, 이런 사람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영국에 눌러 앉아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다리 걷어차기"는 "나쁜 사마리아인"의 원형이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장하준 사상의 출발점이 되는 책이다. 사다리 걷어차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도둑이 파숫꾼으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발전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것이 범법이든, 비열한 짓이든 말이다. 이렇게 발전해서 어느 위치에 오르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아니다. 이젠 더 비열한 짓이 남아 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남아 있다. 과거의 기억을 깨끗하게 세탁해서, 시장의 힘에 모든 것을 맡겨버렸더니 오늘 이렇게 발전했다는 개도 안물어갈 소리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한다. 국가에서 나서서 이것저것 컨트롤하면 될 것도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상대방이 발전할 가능성을 싹부터 잘라버린다. 비열한 짓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상대방의 발전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물론이요 상대방의 생존권마저 위협해 버리고, 상대방을 착취하기 위하여 온갖 비열한 짓을 서슴치 않는다. 잊네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과거 자기들의 행태는 모드 잊어 버리고서 말이다. 오늘 대한민국이 세계 사회에서 졸부 취급 받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니던가? 선진국들이야 자기들의 과거를 이미 깨끗하게 세탁해 버렸다지만, 대한민국은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의 모습을 기억하는 국가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대한민국에 민영화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쓸만한 공기업들은 다 팔아버려야 한다고 한다. 팔아서 민간에 맡겨야 경쟁력이 살아 난다고 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장하준 교수는 분명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공기업 매각은 소수의 기득권층에게 부를 더 몰아주는 일일뿐이라고 말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기업을 키워 그것을 헐값에 대기업에 넘겨주는 것이 민영화의 핵심이 아니던가? 그 가운데 오가는 웃돈이란 부수입일 것이고. SK가 대표적인 예가 아니던가? 누가 돈으로 기업을 만들었고, 그 기업의 열매는 누가 가져갔는가? 이 책이 불온 서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힘이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국제 사회에서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사다리 걷어차기는 계속되고 있다. 부의 사다리를 아둥바둥 대면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꼭대기에 앉아서 그것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어느 정도 올라온 사람들을 걷어차 버리는 사람들, 그래서 세상은 아수라장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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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예수 - 톨스토이 스토리 바이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동진 옮김 / 해누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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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라는 러시아의 대문호가 성경을 새롭게 썼다. 그 부제만으로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너무 두거워서 읽기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문고판인 관계로 가지고 다니기도 쉽고, 내용도 그렇게 빡빡하지 않았던 관계로 읽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다.그러나 그 내용이 머릿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책들이 아니고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작가의 상상력과 철학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일 뿐인데 왜 이리 읽기가 어려운 것일까? 마지막까지 책을 읽고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인생의 문제를 만나 종교에서 답을 찾고자 했던 톨스토이의 자서전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만난 기독교, 그가 발견한 성경의 진리, 그가 가진 철학과 신학이 이 안에 녹아 있기 때문에 쉬운 문체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너무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에 치우쳐 버렸기 때문에 읽기가 더 난해한 것이다. 

  이 책은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의 신비를 배제하고 있다. 서론에서 기독교의 복음서들이 그 안에 잘목된 가르침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겠다는 포부를 접하면서 톨스토이의 생각의 단면을 알게 된다. 성경의 율법적인 부분들을 빼내어 하나로 재구성하려는 노력들이구나. 아니나 다를까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분명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을 조금식 변형시켜 놓았을 뿐인데 왠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신비와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버리고 그의 사역과 말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잇었다. 십계명을 대체하려는 듯한 예수의 5계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의 계명과 가르침이란 구약과 대립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톨스토이의 시각이 내 신경을 계속 긁고 있다고 할까? 원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교회가 만들어온 역사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그의 신앙관은 순수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신앙관이 절대로 원시 기독교의 가르침에 가까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도 원시 기독교에 가가워지려고 노력하면서도 왜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신앙의 신비와 부활이라는 신비의 사건과 구원을 빼버렸단 말인가?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낙관주의의 한 단면을 여기에서 바라보게 된다.

  성경은 분명 윤리와 율법을 그 안에 품고 있는 책이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전부는 아니다. 성경의 본질이 윤리이고 도덕이라면 차라리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고 변화가 된다는 것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성현의 가르침이나, 윤리적인 지침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비한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꿈꾸었듯이 윤리적으로 살기 때문에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분명 이 책은 지금까지 게으름을 피워온 기독교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힘이 있다.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뒤로 하고 지위를 높이고, 재물을 모으고, 권력을 지향하는 성공을 꿈꾸는 오늘날의 교회에 원시 공동체가 품어 왔던 삶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한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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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2011-10-23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혼어쩌구 하는데 톨스토이도 결국 중요한걸 배제한듯한 유물론적인 냄새가나네요.
머리말을 읽고서 뭐가 그리 문제가 될까 상당히 주목했는데
흠.. 읽는 도중입니다만 좀 위험한 책임.
톨스토이는 구원을 얻었을까 의문이네요 ㅎ

saint236 2011-10-24 01:34   좋아요 0 | URL
윤리와 신비! 믿음과 행함! 둘 중 어느 하나라도 포기되는 순간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게 됩니다. 톨스토이의 성경은 지나치게 윤리와 행함으로 치우친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이부분만 감안하고 읽는다면 오히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삶이 따르지 않아 손가락질 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만 톨스토이가 한쪽 편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만 분명히 기억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