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는 것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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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목사님 홈페이지에서 이 그림을 발견하고 "뭐지?"라는 생각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글 같은데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다보니 이 책이었다. 나도 몇번 읽었던 책인데 이 그림을 기억해 내지 못하다니 헛읽었구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화끈 거렸다. 다시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신앙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스페인 화가 고야의 작품 중에 '이빨 사냥'이 이 있다. 한 여인이 교수형으로 사형당한 시체의 입으로부터 치아를 뽑아내려는 그림이다. 본래 짐승에게만 해당되는 ‘이빨’이란 단어를 그림 제목의 우리말 번역에 동원한 것은, 그것이 죽은 시체의 치아를 가리키기 때문인 듯하다. 그림 속엔 죽은 사형수의 시체가 교수대의 줄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다. 그 앞에서 한 여인이 무서움에 떨며 시체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얼굴을 뒤로 돌린 채, 한 팔만을 뻗어 시체 입 속의 치아를 뽑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죽은 사람의 시체, 그것도 교수형으로 사형당해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시체라면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왜 무서움을 무릅쓰면서까지 한낱 시체의 치아를 사냥하려는가? 고야가 살던 18세기 스페인에 만연해 있던 미신 때문이었다. 즉 사형당한 시체의 치아엔 신통한 힘이 있어 그것을 지닌 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미신이었다.

고야가 그 미신의 내용을 소재로 ‘이빨사냥’을 그린 것은, 그처럼 하찮은 미신에 빠진 어리석은 여인 한 사람을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여인을 통해 모든 크리스천들을 비판하려 함이었다. 당시 가톨릭이 국교였던 스페인의 모든 국민은 크리스천이었다. 집집마다 성상으로 장식되지 않은 집이 없었고, 주일마다 성당에서는 거룩한 미사가 드려졌다. 사람들은 성당에서나 집에서나 자기 소원 간구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생활은 전혀 딴판이었다. 자기 욕망을 성취하는 길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마치 시체의 이빨을 사냥하고 있는 그 미련한 여인처럼 말이다. 고야가 보기엔 그들이 참된 크리스천일 수가 없었다. 결국 고야의 ‘이빨사냥’ 역시 그릇된 선택을 당연시하고 있는 인간 어리석음에 대한 한탄-주님의 한탄에 맥이 닿아있는-이었다.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의 이 한탄으로부터 자유로운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113p 인용

  이것이 비기독교인만의 문제가 아님은, 크리스천인 우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예배에는 경건한 모습으로 어김없이 참석하지만, 실생활 속에서는 ‘이빨사냥’ 속의 여인처럼 욕망의 성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 자신 말이다.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한 알의 밀알이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킨 공범으로서의 우리 자신 말이다.  -114p 인용

  우리는 생존의 차원을 넘어 선진국이 되기를 원하는 단계에 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단호하게 부정직과 결별하징 낳으면 안 된다. 바른 선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선진국은 돈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의 선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거짓된 선택의 되풀이로는 선진국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계속 주님의 한탄거리가 될 뿐이다. 마치 '이빨 사냥' 속의 여인처럼 말이다.         -115p 인용

  나폴레옹은 일평생 자기 야욕과 야망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다. 그는 자기 야망을 위해 무려 100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전장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에서 죽은 뒤엔 그곳에 매장되었다가, 20여 년이 지나서야 한 줌의 재가 되어 앵발리드 성당에 안치되었다. ‘불구의’ ‘쓸모없는’ ‘무효의’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프랑스어 형용사 앵발리드(invalide)는 ‘부상자’ 또는 ‘상이군인’을 뜻하기도 한다. 그 성당의 이름이 앵발리드인 것은, 지금은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주위 건물이 본래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나폴레옹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앵발리드 성당에 안치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 야망의 노예로 살던 그의 삶 자체가 세상에서는 황제로 군림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는 불구의 삶이요, 아무 쓸모없는 무효, 즉 앵발리드의 삶이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턱을 고이고 생각에 몰두해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그 너머 나폴레옹의 앵발리드 성당-그것은 참으로 묘한 대조였고, 심오한 영적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자신을 꾸며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앵발리드’일 수밖에 없다. 말씀 안에서 생각지 않는 자는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인간의 중심 그 자체로부터는 죽음 이외의 것-참된 것은 솟아나지 않는다. -135p 인용

  나는 이 재철 목사님 설교를 참 좋아한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그 분의 설교집을 좋아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분의 살교 테잎을 구해서 듣기는 했지만 설교집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이분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갖는 생각은 참 박식하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와 사회적인 모습들, 뉴스 등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고 하나씩 짜맞추어 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코너까지 몰려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길이 결코 기분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에 이런 분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뿌듯해 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의 책이 나오면 모두 사서 몇번을 읽는 것이다. 장담컨대 내가 설교집을 이렇게 열심히 읽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재철 목사님을 보면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이 떠오른다. 황제의 논리와 믿음의 논리를 비교하면서 황제의 논리가 아닌 믿음의 논리를 따라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지만 이 시대 대다수의 청년들이 믿음의 논리가 아닌 황제의 논리를 추종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믿음의 논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미련한 모습같아 보이지만 이분은 미련한 그 길을 선택하셨다. 왜 그럴까? 씨뿌리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 씨도 뿌리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것이 이 분이 택하신 길이 아닐까? 언젠가 의의 푸른 나무가 가득한 세상을 꿈꾸면서 말이다.

  이빨 사냥이라는 이야기가 참 머리에 남는다.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는 더이상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다. 천덕꾸러기요 이익집단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물론 아직까지도 세속에 물들지 않은 다수의 신앙인들이 있지만 힘을 쓰는 소수들이, 대형교회의 소수들이 철저하게 이익집단화 해버렸다. 장로 대통령을 말하고, 마귀 새끼를 말하고, 빨갱이를 말하는 교회가 어찌 복음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복음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복받는 이야기, 출세하는 이야기, 성공하는 이야기만 넘쳐난다. 마치 다단계 프로그램을 듣는 것처럼 내가 어떻게 기도해서 복받았는가하는 이야기만 넘쳐 난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예수 믿고서 어렵지만 그래도 예수 때문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다. 분명 후자가 믿음의 본질일텐데 우리는 전자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러니 이빨 사냥에 치중할 수밖에.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에 참석하지만 그 안에 진정한 경건이 있는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신앙이 사회를 바꾸어 가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요,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천덕꾸러기인가? 당신의 믿음의 자리를 살펴보라. 믿음의 논리가 무엇인지, 믿음의 자리가 어디인지, 내 믿음의 원천은 어디에서부터 나며, 내 믿음의 틀은 어떠한지 철저하게 돌아보라. 시간이 가면서 내 신앙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돌아보라. 황제의 논리와 주님의 논리 중 나는 무엇을 선택했는지 돌아보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본인도 유구무언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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