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신실하게 믿음의 글들 191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의 재정이 마침내 바닥이 나 버리고 말았다. 수도원의 뾰족탑이 무너져 내리고 창문들은 깨져 나갔지만 그런 것을 손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깨어져 버린 종마저도 다시 살 형편이 되지 못해 신부님들은 나무 딱다기를 쳐서 기도 시간을 알리곤 했다. 마침 그 수도원에는 고셰라는 이름을 가진 수사가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일이란 고작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일이었다.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수도원의 재정 상태를 능 가슴 아프게 생각하던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의 허가 아래 젖소 돌보던 일을 중단하고 '불로장생주'를 만들기로 했다. 어릴 때 자신을 키워 준 양부모가 불로장생주의 전문가였기에, 그 때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을 기억해 가면서 6개월 동안 밤낮으로 애쓴 결과, 마침내 고셰 수사는 불로장생주를 빚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날부터 고셰 수사는 빚은 불로장새주는 프랑스 전역으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고, 가난에 찌들었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하루 아침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수도원의 건물은 웅장하게 고쳐졌고 뽀족탑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그 모든 것이 고셰 수사 덕분이었다. 그 빛나는 공적으로 인해 고셰 수사는 신부의 서품까지 받게 되었다. 수도원의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날 저녁 신부님들이 모두 모여 경건하게 저녁미사를 드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뛰어들어 괴성을 지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술을 마셨던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자기 자리를 찾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고셰 수사였다. 그는 자신이 만든 불로장생주가 잘 빚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그 술을 시음해 보다가, 그만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다른 신부님들은 술주정하는 고셰 신부를 향해 "사단아 불러가라!"고 외치면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어 버렸다. 그리고 신부님들은 다시 경건하게 미사를 계속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수도원 원장은 고셰 수사에게 앞으로는 성당 출입을 삼가고, 주조장에서 불로장생주만을 빚으면서 거기서 혼자 기도할 것을 명령했다.

  마음씨 착한 고셰 신부는 수도원장의 명령을 따랐다. 매일 술을 빚고 그 술을 시음해 보면서 주소장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원장이 주조장을 찾아왔을때, 고셰 수사는 수도원장에게 눈물로 간청하였다. 이제 술을 그만 만들겠으니 예전처럼 젖소 돌보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고셰 수사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리고 자비로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인즉, 아무 염려 말고 소신껏 수도원을 위해 열심히 불로장생주만을 빚으라고 도리어 격려해 주었다.

  어쩔수 없이 고셰 수사는 계속해서 술을 빚었고, 그 술은 날마다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으며, 수도원은 쉴 틈 없이 돈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매일 미사가 끝날 때에 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사랑하는 고셰 신부를 위해 기도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고셰 수사를 위하여 간절히 축복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고셰 수사의 영혼과 육체는 주조장 안에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의 작가 알퐁스 도데의 꽁트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의 내용이다. 이 작품속의 수도원장과 신부들이 사랑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돈이었다. 주님의 이름과 고셰를 위한 기도는 단지 명분이었을 뿐, 그들이 집착했던 것은 돈이 전부였다. 무서운 이중성이었다. 그 이중성의 틈바구니로 그들의 인생은 새어 나갔고, 그 같은 그들의 삶은 순박한 고셰의 영과 육을 죽이는 흉기였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실상인 것은 아닌가?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단지 자신의 욕망만을 성취하려는 우리 자신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중성 사이로 지금 우리를 스치고 있는 1초 1초 또한 허망하게 소멸되고 있을 뿐이지 않겠는가?                                                      -298p~300p 인용

  한국 교회에 불어 닥치는 붐은 더 높이 더 크게인 것 같다. 다른 교회보다 더 크게 지어 올리는 것이 마치 자기가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너무 많다. 서울의 유명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는데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가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자기 형제들이 모이면 이렇게 말한단다. "누구 교회가 세상에서 제일 큰가?" 이 말로도 성이 안차셨는지 안돌아가는 영어 발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Whose churchis the biggest in the world?" 초등학생도 아니고 이런 것으로 자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도 영어까지 곁들여서 자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기가 막혀서 한참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있다. 대저 한국 교회의 모습이 이러하다. 목회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반 신도들이라고 다를 것인가? 여의도에 있는 모 교회, 강남에 있는 모교회, 압구정에 있는 모교회 등등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를 다니는 신자들 또한 자기 교회보다 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매 주일 예배가 드려지고, 기도회가 열리지만 그것들은 구색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크기이다. 크기에 집착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은 점점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갈보리 언덕을 오르고 계시는 것이다.

  네덜란드 자유대학의 한스 로크마커 교수가 쓴 <예술은 변병을 요하지 않는다>는 책 속에는, 1800년대의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후쿠사이에 대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후쿠사이를 찾아와 수탉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수탉을 그려 본 적이 없는 후쿠사이는 친구에게 일주일 후에 오라고 했다. 일주일 후에 친구가 찾아오자 후쿠사이는 이번에는, 이주일 후에 보자고 했다. 이주일 후엔 두 달, 두 달 후엔 6개월-이런 식으로 약속을미루다가 어느덧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3년째가 되는 날에도 후쿠사이는 또 약속을 미루려 했다. 친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후쿠사이에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후쿠사이는 말없이 종이와 물감을 가지고 오더니, 그 즉석에서 순식간에 수탉을 그려 주는 것이었다. 완성된 그림이 얼마나 완벽한지 마치 살아 있는 수탉을 보는 것 같았다. 그 그림은 친구를 기쁘게 만들기보다는 도리어 그의 화를 더욱 돋우고 말았다. 친구는 후쿠사이에게, 이처럼 순식간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을 왜 3년씩이나 기다리게 했느냐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후쿠사이는 말없이 친구를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크나큰 화실의 사방 벽 앞에는, 3년 동안 후쿠사이가 밤낮으로 습작한 수탉의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후쿠사이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수탉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3년간 밤낮에 걸친 훈련의 결과였다. 그래서 로크마커 교수는,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안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은 기본이요, 그 기본 위에 후천적인 훈련이 중단 없이 수반될 때에만 한평생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술가의 작품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훈련에 정진했다면 명품일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명품일 까닭이 없다.

  믿음도 이와 같아서 믿음 역시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을 때에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다 같은 크리스천인 것은 절대로 아니다.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보기에 민망한 크리스천 또한 부지기수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기본이라면, 매사에 구원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신실하고 참다운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철저하게 훈련의 문제이다.  

                                                - 392p ~ 393p 인용

  교회 안과 밖의 삶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말로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욕먹는 이유, 비난당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크리스천다운 크리스천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데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불교의 가르침과 많이 다르다. 불교는 아직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은 교회를 다녀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크리스천답지 못하면 바로 비난이 들어오는 것이다. 왜 이렇게 크리스천답지 못한 크리스천이 많은가? 기독교 신앙을 도매금에 넘겨 버리는 목회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거저라고, 공짜라고, 예수님 이미 지셨으니 믿기만 하면된다고 하는 설교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두루뭉실하게 넘어간다. 그러다보니 신앙은 그저 종교적인 생활을 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 주에 한번 교회가면 그것으로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건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언제부터 이렇게 싼 것이 되었던가? 세상에서 제일 비싼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평생 자기 삶을 바쳐서 지켜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인데 그것이 어떻게 쌀 수가 있단 말인가? 믿믿음은 변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곱씹어 보아야할 말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 어던 변명도 필요없다. 그저 우리의 삶을 내놓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이렇게 무분별하게 살아가는 자칭 크리스천들이 넘쳐날 것인가?

  본질에 대한 신실한과 크리스천답고자 하는 삶에서의 끊임없는 훈련이 우리를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