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지음 / 김영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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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가 국회의원들의 싸움으로 시끄러운 가운데 전 세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때문에 시끄럽다. 오랜 세월을 이끌어온 증오심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마스의 로켓 공격과 이스라엘군의 공습은 당사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이스라엘대 아랍권이라는 대형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커져만 가고 있다. 여전히 이스라엘을 편드는 미국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아랍권의 행동을 보면서 전쟁이 쉽사리 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에 관한 기사를 검색하다가 옆에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30일 이스라엘이 가자 접경 지구로 기갑부대를 배치하는 가운데 한 병사가 기도하고 있다. 그의 기도하는 모습 가운데 절박함과 독실함이 뭍어 나는데 과연 그는 무얼 위해 기도하는 것일까? 로켓포를 들고 공격하는 하마스에 대하여 공군의 폭격으로,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돌팔매에 탱크로 대응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어떤 마음이실까? 하나님은 돠연 어떤 마음으로 그의 기도를 들으실까? 아니 듣기나 하실까? 오랜 세월 동안 박해를 받는 자신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고백했던 이스라엘이 박해자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것을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과연 그들과 함께 계시기는 하는 것일까? 어쩌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기갑부대의 맞은 편에서 돌팔매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계실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가운데 아무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면 미국은 물론 한국 교회에서도 이스라엘을 편드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진다. 로마서와 서신서를 설교하면서 그렇게도 이스라엘의 율법적인 모습들을 지적하고 비난하던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유대인과 아랍권의 대결이라는 구도에서는 이스라엘을 편드는 입장을 취한다. 내가 보기에 유태인이든, 아랍인이든 모두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비켜나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마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교회 안에 성공주의가 들어오면서 일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석학들, 기업가들 가운데 유태계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교회가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축복해줘서라고 설교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자는 메시지를 선포하는데 조근조근 따져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 것이다. 예수에 대한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일진대 그 고백까지 포기하면서 유태인과 같이 축복을 받자는 말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이스라엘을 편드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라는 단편적인 예를 들었지만 작금의 한국 교회는 무언가 상당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덩치불리기에 어느 정도 성공해서 외형적인 모습은 거대하지만 그 기반은 아주 빈약한 이상한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예수 대신 맘몬을 섬기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선언한다. 죄인을 정죄하는 율법을 공격했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다른 죄인을 양산해 내고 있다. 나누고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더 높은 건물, 더 큰 건물을 바벨탑처럼 쌓아가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 선전하면서 자신들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교회 가운데 중앙, 제일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 있는지 살펴본다면 교회야 말로 가장 오만하고 독단적인 조직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도대체 어느 조직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중앙과 제일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증발해 버리고 교리적이고 교조적인 십자가만 남아 있는 한국 교회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때 십자가를 지고 가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면서 십자가 밑에 바퀴를 달아 구설수에 올랐던 한국 교횡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깊이 이해하기는 할까? 자기 부인과 자기 비움이라는 십자가의 의미를 실천할 수나 있을까?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면 다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려고 하지 않으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 답답하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교회인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다 보면 후배들에게 미안하고, 예수님 앞에서 죄송하고, 세상 앞에서 죄인이 되어가는 기분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없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목처럼 예수님이 없어도 사는 한국 교회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내가 가는 길에 걸리적 거리면 예수님마저 부정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 예수의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없어지고 대신 십자군과 같은 승리 지상주의와 영광의 신학만 남아 있다.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자신을 비우는 비천의 신학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면서 왕관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셨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광의 관이 아닌 가시관이요, 상위 1%와 친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위 1%를 위하여 기꺼이 낮아지는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이다. 예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예수의 사랑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가 예수없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는 없어도 예수는 있는 집단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회의 원래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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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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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 "괴물"이라는 영화가 있다. 천만이 넘는 인원을 동원한 영화 중의 하나인데 한 때 괴물을 보지 않으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었다. 내 나라 땅이 아니기에 내 알바 아니라는 미8군은 오폐수를 무단으로 방류하였고, 이 때문에 한강에 괴물이 단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돌연변이였던 이 생물은 몇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 Monster로 성장하였다. 어느날 한강 둔치를 습격한 괴물에 의하여 사랑하는 딸이자 손녀요, 조카인 현서를 빼앗긴 가족은 현서를 찾기 위하여 하나의 가족으로 뭉쳤다. 사랑하는 손녀를 찾기 위해 희생하는 할아버지, 온갖 어려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아버지, 삼촌과 고모 이들의 사랑의 힘은 괴물을 물리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랑하는 현서를 잃어버린 가족은 현서와 함께 붙잡혔던 남자 아이를 현서 대신 아들을 삼아 기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한강을 떠나지 못하고 매점을 하는 아버지는 항상 총을 가지고 있으며 괴물의 재등장에 긴장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이 내리는 가운데에도 괴물에 대한 두려움은 이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가족의 사랑과 상당한 볼거리가 적절하게 뒤섞여 있는 영화는 한국에서 성공한 괴물 영화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화려한 볼거리에 마음을 빼았겼었는데 괴물의 탄생이라는 책을 보고 난 후 새로운 시각으로 영화에 접근하게 되었다. 괴물의 탄생은 누구의 책임인가? 미 8군인가? 아니면 미 8군의 불법 행위를 제지하지 못한 행정당국의 책임인가? 그것도 아니면 미 8군에게 기지를 제공하고 눈치를 보기만 하는 정부의 책임인가? 그것도 아니면 상사의 명령에 의해 오폐수를 무단방류하는 이름없는 군무원의 책임인가? 분명한 것은 괴물이라는 영화 그 어디에도 괴물의 탄생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감독이 괴물의 탄생에 대한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해 둔 것은 모두의 책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괴물의 탄생은 일부 사람들의 욕심과 대다수의 무관심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며 괴물에 의한 피해는 무관심했던 다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괴물이라는 영화가 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국에는 괴물이 탄생했다. 미군의 비호를 받아 반공을 부르짖는 이들, 이들의 이데올로기에 넘어가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한 사람들, 정치와 교묘하게 야합한 경제인들, 언론인들, 상위 1%의 사람들, 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한국이라는 괴물일 것이다. 이 괴물의 탄생에 대한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한국이라는 괴물의 단물을 다 차지하고 있는 상위 1%의 사람들인가, 아니면 정치에 무관심하고 학연과 지연에 따라 표를 던지는 이해하지 못할 대다수의 사람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리붙었다 저리붙었다 하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기위해 온갖 불법과 불의도 서슴치 않는 이들의 것인가? 괴물의 탄생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한국이라는 괴물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승자 독식이 극도로 발생한 모양일 것이다. 원래 일본에서 시작된 서열화의 모습이 한국에 수입되었고, 그것이 극도로 발전하고 세련된 곳, 그리고 그러한 서열화를 부추기고 정책화 하는 것이 괴물의 척추일 것이다. 이 척추에 SKY라는 학연을 오른팔로, TK라는 지역 감정을 왼팔로 삼아 앞을 향해 전진한다. 여기에 반공이라는 굳건한 다리를 가지고 있고, 부동산이라는 먹이를 포식하는 것이 한국이라는 괴물이다. 언론은 이런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이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박정희라는 망령과 한나라당이라는 수구꼴통 세력들은 자기들이 괴물의 주인인양 행세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괴물의 주인 자리를 빼앗긴 민주당(열우당인지 무너지 도무지 모르겠다.), 주인이 되기를 꿈꾸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칭 진보세력(그러나 전세계적인 모습으로 볼 때 중도 우파에 속하는) 민노당, 아 옛날이여를 외치는 자유선진당, 한발 살짝 걸쳤다가 벼랑끝으로 몰린 창조한국당은 괴물의 주인 자리를 놓고 아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식으로 관전하고 있으며 내 알바 아니라는 듯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한국이라는 괴물의 현 상태이다. 게다가 이 괴물은 아주 잘 큰다. 북핵과 간첩, 미국을 계기로 매일매일 쑥쑥 크고 있다. 이 괴물이 이대로 자라면 세계의 돌연변이가 국민을 잡아 먹는 MONSTER로 성장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아니 이미 한국이라는 돌연변이는 IMF를 기점으로 국민을 잡아 먹는 MONSTER로 탈피하였다.  

  누구의 책임인가? 이것을 묻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괴물을 만들어 낸 것은 편가르기와 학연, 혈연, 지연에 집착했으며 정치에 실망하고 무관심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지금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괴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괴물을 다시 돌연변이로 돌려 보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성장을 제어하고 길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한가? 이게 한국이라는 괴물을 바라보는 나의 근본적인 질문이요, 이 책이 던지는 화두이다. 이 책은 하나의 방법으로 3부문을 이야기한다. 시민의 견제와 기업과 정부 사이의 민간부분을 괴물을 길들이는 하나의 현실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상당히 거칠기는 하지만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부와 기업이 키워 놓은 한국이라는 괴물은 정부와 기업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이미 지난 역사에서 경험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괴물을 길들이기보다는 괴물을 키우는데 집중한다. 괴물을 키워 괴물의 힘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결국 괴물을 길들일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길들일 필요를 느끼는 것은 괴물에 의해 피해를 보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할 수 밖에 없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머리를 맞대야 한다. 만약 이대로 방치한다면 괴물은 더 커질 것이고 더이상 잡아 먹을 것이 없는 불가사리같은 존재가 되어 스스로 소멸하고 말 것이다. 자기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소멸시킨 다음에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떨지는 남미와 아프리카를 관찰하면 대략적이나마 예측할 수 있게 된다. 

   2008년 책을 30권 읽겠노라는 결단으로 시작했다. 참 열심히 읽으려고 했지만 때때로 무너지는 결심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준것은 이명박 대통령이다. 내 의지가 약해질 때마다 한건식 해주시는 바람에 독서에 대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질문 때문에 시작한 일이 오늘 나를 50권이 넘는 책을 읽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이런 내가 마지막을 괴물의 탄생으로 장식했다는 것은 참 공교로운 일임과 동시에 의미심장한 일이다. 내 앞에는 SERI2009가 놓여 있다. 괴물이 2009년에는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시작으로 나는 다시 괴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내가 괴물의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변질될지, 아니면 어찌할 수 없는 괴물의 힘 앞에 절망할지, 아니면 용기를 가지고 괴물을 제어하기 위하여 덤벼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관심한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 믿기에 다시 새해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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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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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항상 안대로 눈을 가리고 한 손엔 날선 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저울은 법의 형평성을 의미하며, 날카로운 검은 법의 엄정한 집행을 의미한다고 한다. 눈에 안대를 하고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람들의 형편이나 권력이나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양심에 따라 판결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양심과, 공평과 엄정성이 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이러한 외국의 모습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한국적인 모습으로 바꾸겠다고 해서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고, 안대를 하고 있지 않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는 온갖 법률 비리가 넘쳐나고 있다. 판사의 양심에 따라 판결하였다는 말을, 적어도 재벌과 연관되어 있는 사건에 한해서는 한국의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는 법관들조차 믿지 않고 있다. 그러니 한국에 이런 비리와 불법이 자행되는 것은 법원 앞의 디케상이 안대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얼마전 연수원생들이 디케의 눈에 안대를 해 주는 퍼포먼스를 계획했던 일이 있다. 물론 선배들의 제지로 무산되었지만 이런 행위의 의미는 너무나 명확하다. 한국에서는 법원이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삼성의 특검을 통하여 이 사실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법이라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법률은 일단 어렵다. 판결문도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읽고 난 후에 결국은 몇 년 형이라는 말만 알아들을 뿐이다. 쓸데없이 어려운 말을 쓰는 법률과 판결문은 일반인으로 하여금 법이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시에 목숨을 건다. 일단 사시 합격이 되고 나면 인생 역전이 되기 때문이다. 내 주위에도 사시에 목숨을 걸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들이 몇 있다. 그들을 보면서 이젠 법이 법이 아니고, 판사가 암행어사 박문수나 솔로몬이 아니라 고수입을 보장하는 하나의 직업이 되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한국에서 법조인은 고수입을 보장하는 전도유망한 일류직업이다. 그러니 안대를 하고 싶어하겠는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김앤장이다.

  법률사무소 김앤장, 혹은 그냥 김앤장이라고 불리는 이름은 공적자금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나와 관련이 없는 전문용어이다. 그럼에도 이 말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부정적인 의미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삼성, 현대, 한화, 론스타, 한미은행 등등 왠만한 재벌 기업들의 일에는 꼭 김앤장이 끼어 있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판결들이 내려질 때마다 속으로 생각해본다. "법관은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정신은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냐? 어떻게 저런 판결을 내릴 수 있지?"  이 책을 보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막연하게나마 누가 돈 먹인거 아냐, 로비한 거 아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배후로 김앤장을 지목한다. 단순한 카더라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집어가면서 배후를 지목한다. 여기에 이 책의 무서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데블스 어드보킷이라는 영화가 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재판에서 반드시 이기는 승률 100%의 변호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앤장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닐까? 한국판 데블스 어드보킷이 바로 김앤장이 아닐까? 고객의 이익을 위하여 공정을 불공정으로 바꾸고, 수억의 돈을 쏟아부으면서 인맥을 형성하고 그것을 통하여 불법 로비를 벌인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약자를 억압하고 철저하게 강한자의 편에 선다. 이게 법이고, 이런 사람들이 법조인인가? 제목도 기억이 안나는데 얼마전 종영된 드라마 가운데 법조인을 다룬 드라마가 있었다. 저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야, 현실은 안그래 하면서 즐겨 보지 않았는데 마지막 엔딩을 어떻게 보게 되었다. 그 대사의 대략 적인 내용이 그랬다. 법관은 형평성을 가지고 판결해야 하는데 사실 완전한 공평이라는 것은 불편등이다. 완전한 평등을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이나 약자의 편으로 저울 추가 기울어 있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냉소주의다. 나만이 아니다. 이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그렇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디케의 안대를 벗기고 눈을 뜨게 만들었는가? 어떻게 디케의 눈에 안대를 다시 씌워줄 것인가? 이 책이 이 질문에 대한 아주 작은 대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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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허허 2011-12-31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데블스 어드보킷이라는 영화를 보고 김앤장을 떠올린다라... 거기 가서 엑소시즘이라도 해보시는게...........
 
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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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안소니 홉킨스 주연의 새도우 랜드라는 영화가 CS 루이스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욱이 섀도우 랜드가 헤아려본 슬픔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군다나 모를 것이다. 혹시 헤아려본 슬픔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함께 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루이스, 지성인이자 대학교수이자, 무신론자였던 루이스가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것은 한국에서 이어령 교수가 세례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신자가 된 루이스는 기독교를 대변하는 최고의 변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루이스는 사랑에 관하여서는 이야기하지 못하는 반족짜리 신앙인일 뿐이다. 기독교인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빼고 난다면 무엇이 남을까? 이런 루이스에게 조이는 당돌한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 사랑을 아는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면서 기독교에 고나한 책을 쓰는가?" 이 말을 들은 루이스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니 가르쳐 달라고 말했고, 60이 다 된 나이에 1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조이와 결혼하게 된다. 사랑의 힘이 위대했는지 3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결국 조이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홀로 남겨진 루이스가 자신의 슬픔을 돌아보면서 끄적거렸던 일기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너무 산만하기도 하고, 대론 문맥이 맞이 않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서 이 책은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슬픔에 못이긴 나머지 하나님을 원망해 보기도 하고, 부정해 보기도 하면서 루이스는 좀더 성숙한 단계로 성장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용운님의 님의 침묵이 생각이 났다.

님의 침묵(한용운)

님은 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빗을깨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키쓰>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 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希望 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
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난 뒤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에 사로잡혀 버린다. 나도 아버지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는데 그 때 같은 심정이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한 느낌에 방황했고,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라는 회의 때문에 방황을 했었다. 정말로 기독교 신앙을 거의 포기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루이스와 같은 과정을 밟아 갔다. 세상에 대한 회의,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지는 순간들, 마치 그것이 아버지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 같아서 답답해 미칠 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 ㄴ단계가 지나자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바로 아버지를 추억하는 것이며, 내 삶을 통하여 아버지의 삶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때 루이스를 만났더라면 방황을 덜 했을지도 모르겠다.

  뜻밖의 이별을 만나 놀라고 슬픔이 터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다시 맡겨진 일을 시작한다는 한용운 님의 글과 어찌 그리 일맥상통하는지... 님을 보냈지만 그때 비로소 님을 영원히 더나보내지 않았다는 역설이 이 책의 핵심이리라. 루이스가 이후 더 정력적으로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별한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겨진 내가 그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더 깊이 들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슬픔의 원래 목적이 아닐런지?

  헤아려 본 슬픔을 읽는 것은 루이스의 슬픔을 아는 것임과 동시에 그의 사랑의 방식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서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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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집쟁이들
박종인 글.사진 / 나무생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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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인터넷으로 재미있는 뉴스를 보았다. 정확한 내용은 생각이 안나는데 네덜란드인가 노르웨이에서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쉬위를 벌였단다. 시위의 주된 내용은 1050교육 정책이었다. 학생들은 하루에 8시간씩 1년에 1050시간을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보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보고 한참을 웃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겟다. 한국에서는 이미 1년에 3000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학원에서 밤 늦도록 공부에 시달리는 우리 나라 학생들의 모습에 비하면 천국에 살고 있는 이들이 투정 부리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고등학생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학생들이 겪고 있는 그 일들이 전혀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아쉽다면 교약이 아니라 대학 입시를 위한 지식에 너무 편중되어 있다는 것 정도일까? 이니 나에게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박히도록 들어 온 이야기는 공부잘 하라는 것이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납이 되었다. 공부만 잘하면 약간은 품행이 불량해도 이해가 되었다. 공부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돈 많이 벌고, 돈 많이 벌면 행복하다는 것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다. 좋은 대학에 가야, 소위 말하는 SKY에 가야 내 인생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SKY를주문처럼 외우고 살았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랬으며 오늘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이렇게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부자라는 것에 올인하는 대한민국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딴 나라 이야기이다. 동생 집에서 한국의 고집쟁이들이라는 범상치 않은 제목을 보고 책을 집어 왔다. 집어 온 책을 앉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몇 시간만에 다 읽었다. 짧은 기사들을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이 짧다고 해서 감동이 짧은 것은 아니다. 어느 사연은 마음 한구석에 뭉클한 감동을 주고, 어떤 사연은 눈물 짓게 만든다. 어느 사연을 읽으면 웃음이 나오고 어떤 사연은 내 마음을 숭고하게 만든다. 자세를 고쳐잡기를 몇번이던가? 도를 닦는 마음으로 접했던 책을 아쉬운 마음으로, 그러나 만족하면서 내려 놓는다.

  세상이 어두운 곳을 밝히는 불시 한 자락으로 고집스레 살다간 사람들, 스스로 천직을 선택해서 전통 복원과 유지에 힘을 쏟는 사람들, 세상이 뭐라고 해도 자신의 신념을 따라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면서 전진하는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는 고집스럽지만 숭고한 이야기다. 그들의 삶에서는 인간 냄새가 솔솔난다. 사람 사는 이야기인데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는 것이 무에 대수라 생각하겠지만 요즘 사람 사는 곳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돈냄새, 쓰레기 냄새, 이기적인 냄새가 가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인 줄 할면서도 나는 이 책에 눈毒을 들인다. 그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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