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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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원년의 전두환 전 대통령 시구

    "1920년대 중반에 이르자 축구는 현대화의 상징이 되었고, 곧 정상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란의 역사가 호창 체하비의 비판이다. 축구가 스포츠가 아닌 정치화 되어 권력자들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비단 이란만이 아니다. 축구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스포츠이며 동시에 가장 많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스포츠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예들을 들어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세르비아의 인종주의, 영국의 신교과 구교의 대립, 유대문제, 브라질의 카르톨라스, 우크라이나의 인종차별, 이탈리아의 사회 전반적인 부패현상, FC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중동의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이란의 축구, 세계화에 반대하는 미국의 축구 형오라는 몇 가지 틀에서 축구의 심상치 않은 포스를 지적하고 있다. 오랜 세월 기자로 살아온 저자의 백그라운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통찰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축구에 열광한다. 그러나 축구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는지 아무도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축구로 인하여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다국적 기업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가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축구에 열광할 뿐이다. 피버노바를 만들기 위하여 파키스탄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혹사당하고 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 국가대표 경기,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는 그렇게 열광하면서(실제로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해 보라. 그렇게 많은 여자 관중 가운데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 팬들이 축구의 룰을 알고 열광을 했었는지 생각해 보라.) K-리그는 왜 그리 텅텅비는지 관심이 없다. 박지성의 선발 출장이, 이영표, 설기현, 이동국의 EPL 진출을 연신 입에 올리고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우리가 왜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 모든 일들이 어떠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작동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책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들은 이것이 민족주의라는 이상 열기에서부터 비롯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요, 국위 선양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는가? 오랜 세월 외세의 핍박을 받아온 우리 민족 특유의 혈연의 끈적함을 통하여 프리미어리거나, 국대들과 나를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와 활약이 나의 성공이라 생각하는 대리만족 때문이다. 축구는 특히 이러한 대리만족과 공격성이, 그리고 동일시와 민족주의가 가장 강하게, 그리고 원초적으로 드러나는 스포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렇게 축구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축구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이다. 1997년 박찬호라는 첫 메이저 리거의 역투는 IMF의 한파를 넘고 있는 우리에게 잠시의 쾌락을 선사하였다. 그의 역투는 몰핀이 되어 IMF의 한파에 신음하고 아파하던 우리에게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박찬호의 선발 등판이 있는 날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한국이라는 사회가 모든 일을 팽개치고 멈추어서서 그를 응원했던 일이 있었다.(물론 나도 대학 수업을 빠지고 응원을 했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더 과거로 들어가보자. 우리 나라에 프로 리그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동대문 구장으로 대표되던 고교 야구가 죽고 프로리그가 도입된 시기가 언제인가? 5공시절이다. 불법적인 과정을 통하여 권력을 획득한 전두환 정권이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스포츠와 영화와 성을 이용했음을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프로야구에 열광하는 이들 중에서도 잘 모르는 사실은 우리나라 프로리그의 첫 시구자는 연예인도, 국회 의원도 아닌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축구가 국민들을 단합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일제 시대 많은 한국 사람들의 울분을 풀어준 것은 고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우승이었다.

  이렇듯 정치와 스포츠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대로 스포츠는 일차적으로 국민들의 체력을 길러 국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의도로 사용된다. 북한과 우리나라의 병사들의 체격차이를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스포츠는 국민에게 단체적 생활의 질서를 가르치기 위하여 사용된다. 학교 체육이 추구하는 가장 큰 목적이 이것이다. 학교 체육이 입시 정책 때문에 약화되고 유명무실화 되면서 소위 말하는 싸가지 없는 학생들, 무법자를 동경하는 학생들이 늘어난 사실은 우리에게 심상치 않은 시각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스포츠는 선동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지금 스포츠의 가장 큰 역할은 이것이다. 정치적인 선동을 위하여 사용되는 스포츠는 역사상이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너무나 쉽게 발견된다. 독일의 게르만 우월주의를 나타내기 위한 11회 올림픽인 베를린 올림픽(고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여 히틀러와 악수한 올림픽)이 가장 큰 예이다. 이 올림픽을 통하여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더 선동하였고 이는 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스포츠 정치학은 이러한 스포츠 이해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스포츠의 선동의 기능을 주목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이하게도 자기가 좋아하는 축구(미국인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정말 특이한 일이다.)를 통하여 스포츠 정치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상술과 스포츠를 도구화 하는 사람들의 야합이 맞아 떨어져 지금 축구는 전 세계를 정복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축구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이다. 미국이 축구를 거부하는 것은 미국 나름대로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야기는 참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세계화=미국=다국적 기업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였고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이었지만 저자는 세계화=다국적 기업은 옳지만 이것들과 미국이 동일한 것은 아니라 말한다. 일견 옳은 말인듯 느껴지지만 왠지 설득력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진 자의 불만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사족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축구라는 운동이 어떻게 세계화를 이끌어 냈으며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는지 생각해보고 살펴보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세계화를 반대하고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축구를 행하거나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축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축구란 종목이 가진 기이함이 아닐까? 축구만이 가진 그 둥글둥글함, 그리고 광기, 에너지, 열정의 힘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고 난 후 이런 모순적인 내 모습을 발견하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여전히 축구를 좋아하고, 맨유의 경기를 보며 열광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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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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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6일 인수위에서 새정부의 조직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세부적으로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그 골자는 작은 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인력감축 및 혹독한 공직계의 구조조정이다. 지금까지 공직계의 무사안일주의, 사보타주가 국민들의 비난을 샀기 때문에 이명박 당선자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여기에는 쌍수를 들어 환영을 하는 마당이다. 물론 나도 공직자들의 대충주의와 불친절, 철밥통이라 말하는 여러가지 관행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던터라 꼭 필요한 수순이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인수위의 다음 말이다. 앞으로 우체국을 비롯해서 몇개의 공사를 민영화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공무원들의 수를 줄여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무원 신분은 유지하여 줄 것이다. 무슨말인가? 내가 이해한 바로는 앞으로 공무원을 뽑을 문이 훨씬 줄어든다는 것인데, 지금가지 있던 사람들 정년 줄이는 방식으로 계속 줄여나가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공무원들을 등용하는 길을 줄여나간다는 말인데,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당황스럽고 아연실색케 만든 이야기는 "작은 정부"이다. 지금가지 많은 규제들로 한국의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었다. 공무원을 줄이는 것도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이다. 정부의 역할을 최소한도로만 주장하는 이명박 정권의 결론은 경찰국가, 즉 초기 자본주의가 활개를 치던 당시의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설마하는 마음에 기사를 검색하다가 모든 규제를 풀어주겠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기업의 규제, 자본을 억누르는 모든 규제를 풀어주겠다는 이명박 정권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보면서 내 가슴을 내내 누르던 답답함과 불안함의 정체가 무엇이었는가? 여기에 있었다. 종종 뉴스로 보게되는 이명박 당선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알게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던 것이다.

  장 지글러는 세계의 많은 이들이 굶주리는 이유에 대하여 사막화, 전쟁, 부의 편중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어서 지적하고 있지만 그 가장 밑바탕에 흐르는 가장 큰 원인은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시카고의 곡물 거래소를 장악하고 세계 곡물의 가격을 제맘대로 결정하는 다국적 기업, 세계 금융의 실체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곡물은 지금 인구의 2배인 120억을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 많은데 왜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한명식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먹기싫다고, 맛없다고 꼬마 녀석들이 투정하면서 버리는 그 음식들이 없어서 수없이 많은 국가에서 그와 같은 나이 또래의 꼬마들이 죽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먹기 싫어 버림과, 없어서 죽음 사이의 간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받아들여야 하며, 메워야 하는 것인가? 정당한 가격을 주고 네슬레로부터 우유를 사서 칠레의 아동들에게 무상 지원하겠다건 아옌데 정권의 몰락이 누구의 술책인가? 네슬레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과연 이것만일까?

  코트디부아르의 상카라는 왜 몰락했는가? 왜 남미에서 민중들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게 열광하는가? 그리고 그에게 당신은 "아옌데 같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라."경고하며 걱정하는가? 그들은 막연하게나마 알기 때문이다. 다국적 기업과 세계 금융, 그리고 북반구의 잘 사는 국가들이 자신들이 기근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좋아하지 않는가? 착취하고 뜯어낼 구석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들이 기근에 처해 있어야 먹을 것으로 달래고 위협하지만 이들에게 식량이 주어진다면 이들은 꼼짝도 않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세계의 절반을 굶주림에 처해서 죽어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과 자본의 증대를 위해서.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그냥 굶주림에 처하게 놔두는 것이 아니라 기근의 상황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며 학교에서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지오 언급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들은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동시에 나머지 세계의 절반으로부터 격리된 존재들이다.

  지글러는 이러한 오늘날 기근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말한다. 인간성의 회복이란 멜서스 주의의 종말을 말한다. 멜서스 주의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봉되어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이론이다. 지금 수없이 많은 기근과 이로 인한 사망은 자연이 인구를 조절하기 위한 자동적인 방어기재라는 것이다. 이말을 좀더 따라 들어가면 그렇기에 우리는 기근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이들을 기근에서 탈출하게 도와주는 것은 환경을 고갈시키는 일이며 지구를 파괴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멜서스 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기근에 대하여 눈멀고 귀먹고 모르는체 하라." 그리고 그 사이에 그들은 기근에 빠진 사람들을 쥐어짠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는 북반구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나라를 선진국이라 착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다른 절반에 속해 있다. 철저하게 쥐어짜임을 당하고 가난을 대물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보다는 더 교묘하게 그러한 상황에 청해 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권 이래 역대 정부들은 문민-국민-참여라는 정부 이름으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집중과 선택이라는 그럴싸한 논리로 포장한 신자유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IMF와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은 하지만 그래도 미사여구라는 가면은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눈치볼 것이 없어졌는지 이명박 정권은 규제 철폐를 자신들의 사명으로 천명하였다.

  어제 장례식장을 갔다가 매제를 만나 이야기를 했다. 한전에 말단 사원으로 있는데 한전 분위기가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만간 매각된다는 이야기가 인수위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비단 매제의 문제만도 아니고 한전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젠 규제와 첼폐가 없는 완전 자유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살아남을 사람들은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 도태될 뿐이다. 국가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세금을 거두기만 하면 된다. 국가의 역할은 사후 수습일뿐이지 적극적인 개입은 아니라는 것이 인수위의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알다가도 모를 일은 그렇게 대단한 학문을 닦으신 분들께서 왜 장자크 루소의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는 사회계약론의 구절을 떠올리지 못하시는 것들일까?

  그렇게도 천명하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선두주자인 대처리즘도, 닉스노믹스도, 레이거노믹스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바이블인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 모형은 이미 문제점이 드러나 수정의 수정을 거듭하여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왜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까? 인수위에서 주위를 둘러봤으면 한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많은 국가들이 실은 자신들부터 자유주의가 아닌 규제와 통제를 통하여 그 정책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이다. 이미 그네들의 나라에서는 죽어버린 신자유주의가 우리나라에서는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20:80의 법칙(인구의 20%가 소득의 80%를 차지하는 기현상)을 강화하는 인수위의 모습이 이내 마음에 걸린다. 신자유주의의 그 높은 파고를 어찌 넘을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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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감성 마케팅
김영한.임희정 지음 / 넥서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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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벅스 감성 마케팅!!!

  책 제목은 거창하지만 그 내용은 과연 그런가? 이 책을 접했을 때, 그리고 책 제목을 보고 그 페이지를 넘길 때 "정말?"이라는 호기심이 일었다. 개인적으로 스타벅스 커피를 좋아하는지라 스타벅스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을 선택했을 때 "내가 왜 스타벅스를 좋아할까?"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이 책이 해결책을 던져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감성마케팅이라는 말을 접했을때에 정말 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책을 넘겨보면서 갖는 생각은 "에이 정말!"이다. 앞의 정말이 기대감의 표현이라면 책을 덮고 난 후의 정말은 불만의 표현이다. 그리 큰 기대를 가지고 볼만한 책은 아니라 생각을 한다.

  이 책의 내용은 스타벅스의 성공요인을 77가지로 분류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공 요인들은 여러 면에서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77가지를 만들기 위하여 억지로 쪼갠 듯한 느김을 받는다. 이 책의 저자가 삼성전자, 휴렛팩커드에서 30년간 마케팅 실무를 경험했기 때문인지 스타벅스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타벅스 일부 매장에서 발견된 몇 가지 좋은 점들을 포장하여 전체적으로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바리스타와의 대화를 통한 메뉴 선택이라든지, 그날의 커피라든지, 무료 시식회라든지 이런 것들이 마케팅 차원에서 그리고 문화적인, 인간적인 차우너에서 고객들을 끌어모은다 말하지만 4~5년을 스타벅스를 줄기차게 애용해온 나는 왜 그러한 것들을 한번도 못봤는지 모르겠다. "바리스타와의 친절한 대화, 문화를 파는 곳, 감성 세대의 감성을 자극한다." 등등의 이야기들은 전혀 현실감으로 와닿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 책을 보면서 "찌라시"라는 말이 떠 오르는 것은 왠 일일까? 스타벅스에서 마케팅 차원에서 아웃소싱하여 무료로 배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렇게 저렇게 포장하여 고객들이 돈 주고 사가게 만드는 광고지같은 느낌은 무엇일까? 책을 사고 "낚였다"는 말을 떠 올리게 된다. 스타벅스가 파고든 이유는 이것이 아닐 것이다. 결코 감성 마케팅이 아니다. 고도의 전략이며 쥐어짜기이다. 이 책의 입장이 아니라 개인이 바라본 입장에서 스타벅스 성공의 실체에 대하여 분해해보겠다. 이즘 되면 서평이 아닌 이상한 부분으로 변하게 되지만....

  스타벅스는 요즘 여자들의 트렌드이다. 물론 나처럼 특이하게 젊은 남자들이 애용을 하기도 하지만 3:7정도로 남자보다 여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곳이 스타벅스이다. 이것은 어느 커피숍을 가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는 속칭 별다방 혹은 우주벌레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게 그 가격은 식사 한끼에 필적한다. 그래서 나는 흔히 커피한잔 하죠라는 말 대신에 커피 한끼하죠라는 말로 인사를 건넨다. 내가 줄기차게 마시는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가 3800원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저렴한 커피이다. 물론 숏 사이즈로 내려가면 2000원 아래로 내려가겠지만 내체로 그렇게 시키지는 않는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이것저것 넣는 톨 사이즈를 시키는 사람이라면 4000원은 훌쩍 넘어가 버린다. 그런데 왜 스타벅스가 뜨는가? 서비스? 개뿔 말도 안되는 소리다. 뜨는 이유는 명확하다. 이미지, 패스트 푸드, 익명성 이 세가지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이윤을 보장해 주는 것은 자본의 논리로 커피 농가를 착취하는 것이다. 그 어디에서 맛과 서비스는 없다. 솔직히 기억해 보면 알 것이다. 스타벅스 커피가 많이 쓰다. 어른들은 마시지 못할 정도로 쓰다. 이디야 할리스 커피에 비하면 쓰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타벅스를 찾는다. 중독된 것처럼...

  스타벅스의 성공 요인은 이미지이다. 스타벅스를 마시는 사람은 뉴요커 내지는 성공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마치 초딩 사이에서 닌텐도 DS가 없으면 따당하는 것처럼 20대가 스타벅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저급한 사람으로 취급당하도록 이미지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2000원짜리 김밥을 먹고도 커피는 4000~5000원짜리 커피를 마시게 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한 때 된장녀 논란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 스타벅스 커피를 즐겨마신다였다. 미국에서는 스타벅스가 따듯한 곳인지 몰라도 한국에서 스타벅스는 기이한 곳이다. 밥보다 비싼 커피를 즐기는 곳이며 이상한 용어들이 사용되는 곳이다. 이젠 영어로 안되니 이탈리어까지 동원하여 메뉴판을 장식하는 곳이다. 도대체 그란데와 톨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러나 스타벅스에서는 차별하여 사용한다. 영어를 사용하는 것도 부족하여 낯선 이탈리아어까지 사용하여 우리는 이만큼 고급이다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동경보다 1천원이나 더 비쌀 이유가 없다. 스타벅스는 고가 제품, 명품이라는 이미지는 한국에 뿌려 놓고 그 이미지를 소진하도록 소비자를 우롱하는 것이다.(물론 나도 여기에 넘어가지만...T.T)

  둘째는 패스트 푸드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이 말이 진리임을 믿는다. "커피는 공을 들인만큼 맛있다."  드립커피보다 에스프레소가, 에스프레소보다 사이폰이, 다음으로 워터 드롭이 맛있는 것은 시간과 공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너무나 쉽게 커피를 뽑는다. 저자는 스타벅스가 여러가지 면에서 이런저런 선택의 폭을 넓혀 놓았다 말하지만 스타벅스는 표준화 메뉴얼, 스피드로 대표할 수 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그렇다 포디즘이다. 이미 끝나버린 포디즘이 스타벅스에서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 빨리만든 커피가 비싸게 팔리고 있는 것이다. 어디 가나 맛이 동일하다는 것은 특징이 없이 누가 만들든지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커피는 아닐 것이다. 내가 혼자 끓여마신느 커피도 그때그때 다르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만드는 것이 모두 같다니. 어불 성설이다. 언뜻보면 다양하지만 철저하게 메뉴얼화하여 사용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익명성이다. 스타벅스 매장을 본인이 많이 가는 이유는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여러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않고 제각각 말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식사집 방에 들어가도 옆방 말소리가 들릴때가 있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여러가지 소음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가 들을 염려가 없다. 내 앞에 있는 사람만이 듣을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스타벅스의 매력이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기에 손에 스타벅스 잔만 든다면 뭔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같이 느껴지는 익명성 때문이다.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하지 않는다. 그 친절하다는(?) 바리스타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것이 스타벅스의 진정한 매력이다.

  마지막 자본의 논리가 스타벅스를 먹여살린다. 자본의 논리라는 말을 사용하니 빨갱이다 선입견을 갖겠지만 열대 과일 장사와 커피장사는 혹독한 수탈이 동반되는 장사이다. 적당한 가격을 주고 최고의 아라비카산 품종만 사용한다는 말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적당한 가격이라? 물론 스타벅스에서 공정무역을 가장 먼저 도입한 커피 전문점이기는 하지만 그 페센티지는 그렇게 높지 않다. 물론 다른 기업에 비하여 공정무역 커피를 도입한 것도 대단하다 말할 수 있지만(51P에 나오는 Fair trade blend는 공정무역 커피를 가리킨다.) 한국에서 공정무역 커피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막내 동생이 스타벅스에 들려서 하는 일이 "공정무역커피 있어요?"하고 묻는 것이다. 그런데 대답은 놀랍게도 "No"가 아니다. 아예 모른다. 정말 어쩌다 간혹 있는 사람들도 수지타산이 안맞는다는 말로, 자기들 이익이 줄어든다는 말로 갖다 놓지 않는다. 그러면서 적당한 가격을 준다는 말은 어이없음을 넘어서 거짓부렁이다. 다른 커피 회사들보다 더 주겠지만 스타벅스 커피도 그리 많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싼 값에 사다가 더 많이 남겨야 한다. 이 우너칙에 충실한 것이 스타벅스요 할리스이며, 이디야이고 커피전문점이다. 돈되는 것에 집중해서 최대한 많이 뽑아낸다. 이것을 위해서는 소비자들에게 브랜드라는 이름하에 비싼 커피를 제공하고, 최대한 싸게 커피를 사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스타벅스의 일들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스타벅스를 이용하는 나도 웃기고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이런 것들을 이해한다. 원래 그런데 나는 이만큼을 주고 이것을 이용한다 말하는 것이다. 돈주고 그만큼 가치가 있다 생각하기에 사용한다. 자기가 돈 주고 만족하면 그것으로 1차적인 문제는 해결이 된다. 그 다음으로 2차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오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내가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것은 이 책에서처럼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은 과대포장이 아니라 거짓부렁이다. 내 경험에, 그리고 내가 아는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에 의거하면 말이다. 물론 내 경험이 100% 진실이다 말할 수 없지만 그 어떤 사람들도 스타벅스가 서비스가 끝내줘서 계속 이용하고 싶어한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그렇게 말한다. 사실을 적절하게 포장하고 왜곡해서 마치 그러 것처럼 믿게 하는 것 이것이 찌라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난생 처음 찌라시를 돈 주고 사서 읽었다.

PS 그냥 기대하지 않고 그런가 보다 하면 꽤 괜찮은 내용들이 많다. 그런데 시장경제,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보지 말라.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소비자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뽑아 낼까 하는 것이기에. 감성을 자극하는 마케팅이라는 말에 그 실체가 정확하게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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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하워드 슐츠
    from [로처의 사랑방] 2008-02-02 17:38 
    스타벅스! 여러분은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 저는 커피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한 번 가보았을 뿐입니다. 이런 저에게 가장 먼저 연상되는 단어는 '비싸다' 입니다. 아직 저는 '고급커피' 라거나 '좋은커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스타벅스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아래에는 우선, 이 의문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하려 하고요, 둘째는, 최근의 스타벅스 변화에 대한 기사를 링크합니다. 셋째는, 이 책에..
 
 
로처 2008-01-30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스타벅스를 막연히 좋지 않은 시각으로 보아오다가,
관련 책 두 권 읽고 꿈처럼 마냥 좋아하던 중에 이 글을 읽었습니다.
정신이 확 드네요.
전 책을 머리로 읽지 않고 혀끝으로 읽나 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 경제, 공정 무역
마일즈 리트비노프.존 메딜레이 지음, 김병순 옮김 / 모티브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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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 때 정말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게임이다. 코에이에서 나온 "대항해 시대2"라는 게임이다. 만일 XP에서 이 게임이 무난하게 돌아간다면 아직까지도 하고 싶은 게임이다. 이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주인공이 드 넓은 바다를 중심으로 모험을 하면서 무역을 하고, 맘에 안들면 해적질도 하면서 많은 돈을 모으고, 모든 퀘스트를 클리어 하며 성공하는 게임이다. 어린 나이에 참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지만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너무 섬뜩한 게임이다.

  아직도 생각나는 게임의 꼼수가 있다. 모든 게임이 마찬가지이겠지만 돈이 많으면 한결 게임이 수월해 진다. 그래서 도박을 해보기도 하고 나름 무역을 하기도 하는데 무역을 하다가 발견한 무역 코스가 유럽과 아프리카와 신대륙을 잇는 것이다. 나름 이 항로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세상을 가진 것 같았지만 실제 이 항로가 노예를 실어 나르던 노예 무역 항로라는 것을 알 았을 때 마치 내가 노예 상인이 된 듯 씁쓸한 기분이었다. 무역만으로는 돈을 쉽게 벌 수 없다. 한가지 방법을 더 사용해야 하는데 이 방법을 병행하면 백발 백중 부자가 될 수 있다. 도깨비 방망이 같은 방법은 물가 조작이다. 물가를 조작하여 최대한 싼 가격에 사서 최대한 비싼 가격에 판다. 이 게임을 하면서 자랐기에 지금 내 입장에서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라는 시장 논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 책을 보기까지는.

  이 책을 보면서 예전 게임이 떠 오른 것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심한다고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어느새 자본의 논리, 시장의 논리에 빠져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대학원까지 나왔고 대학원에서 윤리를 전공한 사람인데 왜 이러한 생각을 못했을까? 최소의 투자가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그렇게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대처리즘을 비난하면서도, 이명박씨의 실용정부를 비판하면서도 왜 나는 내 소비가 윤리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다른 이에게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아주 소중한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이 사실을 아는 순간 내가 참 부끄럽더라. 매일매일 사용하는 물건들이, 그리고 내가 그렇게 즐기는 스타벅스 커피들이 얼마만큼 제3세계 빈농들을 쥐어자서 만들어낸 것들이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얼굴이 뜨거워지더라. 스타벅스 커리 한잔, 내가 주로 마시는 것이 아메리카노인데 그란데 사이즈면 3800원이니 이 가운데에 생산자들 손에 쥐어지는 돈은 멀마나 될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최소한 20%에서 30%는 되어야 한다. 이것도 엄청나게 불합리한 가격이다. 커피를 위해 지불하는 돈 가운데에 최소 700~1000원은 커피 생산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경제의 차원을 떠나서 단순 계산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커피 농민들에게 주어지는 돈은 1%인 38원이란다. 이보다 더 낮을 수 있다더라. 순간 화가 나더라. 나같으면 안짓는다. 차라리 굶어죽지. 그러나 그들은 빚을 지면서 농사를 짓는다. 38원을 얻기 위해서. 내가 지불하는 커피값의 3762원은 어디로 가는가?

  커피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외에 여러가지 물품들, 코코아, 옷, 가구, 열대 과일, 바나나 등 온갖 종류의 농산물들과 생산품들이 턱없이 낮은 가격에 팔려간다. 그러나 그것을 사는 사람들은 결코 낮은 가격이 아닌 꽤 많은 돈을 주고 그것들을 구입한다. 그렇다면 구입가와 판매가 사이의 괴리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돈들은 어디로 가는가? 단순히 중간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중간 상인이 먹는거다. 불로소득도 이런 불로소득이 없으며 날강도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단순히 중간에 끼어서 70%이상이 되는 돈을 갖는 것이다. 이게 네슬레고, 이게 스타벅스고, 이게 다국적 기업의 진실이가. 우리가 매일 접하는 물건들의 진실이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는 것들은 자유경제, 시장경제라는 그럴듯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람들을 쥐어짜는 구조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교육받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이것을 고발하고 있다.

  인수위의 정책들이 발표되었다. 선심성 정책들은 역시나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다.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으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계속되는 정책들은 이 땅에 다시한번 박정희식의 발전과 그것을 위한 민초들의 무한 희생을 강요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MB의 성공을 지켜본 SH는 동대문 구장을 헐었다. 그럴듯한 건물 하나 지어 무한경쟁을 다시 강화하고 이것을 통하여 청와대 입성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치열한 제로섬 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한미FTA, 한유FTA는 이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러나 왜 모르는 것일까? 시장의 논리에 충실하는 나라는 개도국뿐이라는 것을. 시장 논리를 전하는 미국조차도 이미 시장 논리를 반대하는 여러가지 정책들을 가지고 있음을. 이름뿐인 시장경제를 따르고 있음을 왜 모를까? 시장 경제에 충실하다보면 시장 자체가 붕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른다. 왜냐 한국에서 자본주의=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로 통하기 때문이다. 이 교묘하지만 말도 안되는 논리로 제로섬게임이 시작되었다. 이제 함께 개미지옥에 떨어질 일만 남았다.

  이를 뒤집을 방법은 하나뿐이다. 싼게 좋은 것이 아니라 정당한 값을 주고 소비하는 윤리적인자세를 갖자는 말이다. 우리의 소비는 사회를 바꿀 힘이 될 것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공정무역은 한가지 화두와 해결책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소비는 힘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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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빈 설교 꽉찬 설교 정용섭의 설교비평 1
정용섭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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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에 가시가 걸렸나 보다.

  분명히 실체는 있다. 비평이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의 설교가 100% 옳을 수는 없다. 아니 옳다고 믿는 것은 교만이다. 그러나 비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린드 답답하다. 껄끄럽다. 왠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김기동, 김기석, 김남준, 김동호, 김진홍, 박영선, 박옥수, 박종화, 윤석전, 이수영, 이재철, 임영수, 조용기, 하용조" 이렇게 14명의 목사들의 설교를 비평한다. 한국 교회에서 정통이든 이단이든 모든 것을 떠나서 막강한 영향력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아니 좀더 정확한 표현에 의하면 영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휘두르며 한국 교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거물들에게 대하여 필자는 일어나서 당당하게 돌을 던지고 있다. 비평이 필요할 것이며 본인의 비평을 통하여 한국 교회가 더 발전하기를, 개혁되기를 원한다며 거침없이 비평을 한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 읽어갈 수록 비평은 사라지고 비판만이 남은 기분이다. 아니 어느 부분에서는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존재할 뿐이다. 설교가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면이 날카롭게 들린다. 그러나 그 날카로움이 비꼼의 모습을 입고 등장할 때에는 목에 가시가 걸린듯이 답답하다. 이렇게까지 해야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누워서 침뱉기의 모습이 아니라 신학자의 교만은 아닐런지 생각해보게 된다. 비평은 좋지만 비꼼이 개입되는 순간(내가 잘못보았으면 정확한 지적을 바란다. 내가 잘못 보았기를 원한다 등등) 그의 날카로운 비평은 사라져버린다. 이 책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본인은 설교가들이 자기의 비평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고 귀를 기울이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판단하는 견지에서 그것은 열린 마음이 아니라 무던히 낮아지는 마음,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려는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서 모든 것에서부터 초월하는 마음을 가져야 비로서 가능한 것이리라. 그러나 거론된 목사들은 예수가 아니다. 고로 설교 비평을 가장한 비난이 마음에 계속 짐이 되고 불편함이 될 것이다.

  "속 빈 설교 꽉찬 설교"라는 제목을 통해서 설교가들의 교만을 필자는 지적한다. 설교에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성령의 역사는 없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이야기와 인문학적인 소양만이 남아 있다 비판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니므이 영에만 너무 매달려 있어서 인문학적인 소양이 없는 모습을 비판하기도 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것인지? "개개의 사실이 옳다고 해서 설교가 바른것은 아니다."라는 필자의 말대로 개개의 글이 논리적인 기준을 가지고 적절하게 비평을 한다고 해서 책 전체가 논리적이고 적절한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시가 목에 걸린 듯한 느낌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해 졌다. 설교비평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가지고 많은 설교가들 설교를 비판하고 나아가 비난하고 비꼬는 모습이 나에게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는 필자의 관심에 오르지 못할 겅도로 피라미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누군가가 나의 설교를 이렇게 비난한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노파심에서이다. 안티를 위한 안티? 이것이 이 책의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필자의 말대로 설교는 text를 context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라면 과연 설문을 읽고 설교만 보고 그것을 비평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솔직한 심정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설교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설문을, 설교문을 비평하는 인문학적인 작업일 뿐이다. 이러한 인문학적인 과정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재단하고 운운하는 것은 오만이 아닐까? 본인도 설교를 들을 때에 비평하고 비판은 한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없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설교다라는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말이 아니라 본인과 설교자가 갖는 생각의 차이는 이것이구나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제약한다는 생각이 들정도라면 침묵하거나 피할따름이다.

  필자의 설교비평이 왠지 안티를 위한 안티요, 신학자 특유의 오만으로 느껴지는 것은 2권을 읽고 1권을 읽은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생각이다. 오직 세상에 자신이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렸다는 생각, 이러한 신학자의 오만이 책의 곳곳에 숨어 있다. 긍정이 20%이라면 부정과 지적은 70%요 이꼼과 비난이 10%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 본 정용섭 설교비평의 모습이다. 또한 곳곳에 사용된 언어들이 필자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서양학문을 배운 인문학자들의 오만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충분히 한국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섞어 쓰는 모습은, 철학적인 용어를 씹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은 신학을 전공한 본인에게도 낯선 것이며 피하고 싶은 것이다. 좀더 지혜롭고, 좀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더 적어봐야 나도 똑같은 입장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의 서평을 보고 똑같은 말을 할테니 말이다. 책을 읽으며 겸손함도 같이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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