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 당대비평, 평화네트워크 공동 기획
노암 촘스키 외 지음 / 삼인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9.11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대명콘도에 있었다. 세미나에 참석한 후 함께 모여 라면을 끓여 먹던 중 텔레비전에서 비행기와 충돌하여 무너져 내리는 쌍둥이 빌딩의 마지막 모습을 중계해 주고 있었다. 무슨 영화가 저렇게 다큐멘터리 화면같이 나오냐라며 투덜거리던 우리는 그것이 뉴스 화면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어린 시절 내가 알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빌딩 목록에 이름을 올리던 그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렸다. 자본주의 제국인 미국의 핵심인 맨하탄에 무너질 것처럼 버티고 서 있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렸다. 이 장면을 기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멍한 상황이 지나간 다음, 각자가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세미나가 끝난 다음 주 수업의 모든 주제는 9.11로 모아졌다. 특히 내가 전공하던 윤리는 더욱더 날카롭게 이것들을 분석할 것을 내게 요구하였다.

  몇주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난 또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것이다. 물증도 없이 자신들의 심증만 가지고 오사마 빈라덴을 9.11의 배후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오사마 빈라덴을 내 놓지 않는 탈레반 정권을 응징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탈레반 정권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들을 포장하였다. 항구적인 자유를 위하여 독재 정권, 반인권적인 정권 탈레반을 무너뜨리는 거룩한 사명을 미국은 자처했던 것이다. 현격한 무력의 차이는 탈레반 정권을 수도에서 몰아 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소련화 맞장떴던 전력이 있던 사람들이다. 소련을 상대하던 똑같은 전법으로 미국을 상대하기 시작하였고 전쟁이 시작된지 7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다. 다음은 사담 후세인이었다. 대량 살상무기가 테러에 사용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 나는 미국이 북한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의 속내는 이라크에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아버지 부시에게 걸프전에서 얻어맞고 이젠 아들에게 조차 얻어맞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이번에는 얻어 맞는 것으로 부족해서 미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판결을 받게 되었다. 재판 결과 후세인은 교수형을 당했다. 죄명은 시아파 학살과 쿠르드족 학살이었다.

  이제 미국은 이란과 북한을 조준하고 있다. 특히 이란에 대한 조준은 그 강도가 심상치 않다. 미국에 대하여 더 강경한 북한에 비하여 덜 강경한 이란을 미국이 정조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은 미국에 하등의 쓸모가 없는 땅이나 이란에는 미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줄 석유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중국 포위라는 거대한 전략을 완성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까지 감안한다면 필연코 차지해야 하는 땅이다. 그러나 미국은 결코 이런 자기들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유와 평화라는 빛좋은 선물로 멋있게 포장해 버릴 뿐이다.

  자유와 평화는 미국이 자기들의 대규모 테러를 포장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이 말에 속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러한 포장지에 의심을 갖는 것은 반민족적이요, 반자유적인 이적행위로 간주되어 버린다. 이미 이 땅에서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요, 우리의 혈맹이요,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프간과 이라크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이라크 재건을 위한 인도적인 차원이라는 말을 써가면서 사실은 미국에게서 무엇인가 단물을 얻어먹기 위함이 아니던가? 어째 하는 짓이 지구촌 양아치 미쿡이 보여주는 모습을 꼭 닮아 있다. 그러니 우리 나라가 미국 똘마니 취급 받는 것이 아니던가?

  진짜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면, 자유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탈레반, 오사마 빈라덴, 후세인을 키워주고 그 위치에 올린 사람이 누구인가? 자유라는 미명하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굶어 죽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슬로건 하에 록히드 마틴을 비롯하여 미국의 군수산업을 먹여 살리고 세계에 무기를 유통하는 이가 누구인가? 이것을 기억한다면 미쿡의 행위가 여지없이 양아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통하여 미국 본토의 안전을 유지하겠다고 한다. 더 강력한 국방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경찰로서의 역할, 두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해 이길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MD체제라는 새로운 장난감을 마련하려고 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반대를 해도 스타워즈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맘에 안들면 약속을 파기하면 되지 않겠나, 내가 하는 일에 신경꺼라, 꼬우면 니들도 힘을 키우던가라는 식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해댄다. 그러면서도 평화를 이야기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이야기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

  진짜 평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미국같은 양아치 놀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말이 과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미국의 행동은 양아치 딱 그대로이다. 으슥한 곳에 진치고 있어서 지나가는 동네 꼬마들 불러 삥뜯는 양아치다. 자기보다 강자는 건드리지 않고 약자는 철저하게 우롱하고 빼앗는 양아치이다. 문제는 미국보다 강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미쿡이라는 양아치 형님의 똘마니로 들어서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 구역 분할받을 것이라는 부푼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니 지구촌의 평화는 여전히 요원한 일일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발적 복종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지음, 박설호 옮김 / 울력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인간은 독재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이 책은 출발한다. 수많은 인민이 단 한사람의 독재자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리 대중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인가? 독재자가 강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힘으로 굴복시키기 때문인가? 아니다. 독재자가 강한 것은 인민이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인민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유를 망각하고 자기의 눈과, 팔과, 몸과, 삶을 독재자에게 내어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독재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가? 총칼도 필요없다. 그저 자발적인 복종을 멈추면 된다. 독재가가 사용할 땔감을 모두 치워버리면 된다. 그러면 독재자는 스스로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육이다. 스스로 노예 상태에 머무는 것이 행복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교육 때문이다. 교육은 때론 사회 시스템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적인 관습의 모습이나 신분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교육을 깨버릴 때 우리는 진정 자유와 평등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성으로 가능하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선한 것이다. 이 이성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자각하게 된다. 이 책의 과정을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성을 통하여 계몽하게 되고, 계몽된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르쳐 주고, 자유를 알게된 우리는 독재자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결국 이성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억압받고, 이 땅에 독재자가 등장하고 그 위세를 떨쳐가는 이유가 단순히 이성의 부재이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에 대한 희망이 얼마나 쉽게 절망으로 변하였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보지 않았는가?

  중세를 마치면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맞으면서 신학의 대안으로 인문학이 대두외었다. 계시의 대안으로 이성이 대두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발현되기만 한다면, 인간의 이성을 억누르는 억압기재가 사라져버리고, 인간이 자유를 누리기만 한다면 이 땅에 독재자는 사라지에 될 것이고, 인간은 진정 자유하고 행복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행복한 망상이 이 땅에 가득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성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들이 이 땅에 더 많은 분란을 가져왔으며, 이성이라는 것 조차도 독재자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는가?

  르네상스를 끝으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낙관주의가 사라졌는가? 아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전 유럽에 팽배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 개인이 선하고 윤리적으로 산다면 그 사회는 당연히 선해질 것이라는 순진무구한 생각이 전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1차 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이지 않는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출현이지 않는가?

  라 보에티와 인문학자들이 갖고 있던 인간의 이성에 대한 난관론은 그저 맹목적인 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그런 순진한 생각이 오늘날에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인간이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독재자는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구시대적인 발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자발적인 복종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이성이 자발적인 복종을 멈추는 대안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직접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다. 라 보에티는 말한다. 폭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애쓸 필요 없다. 그저 복종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말 이것으로 충분한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복종하지 않는다면 독재자의 폭정은 자연스럽게 멈추어져 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복종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저 침묵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 위안일 뿐이다. 역사적인 일에 대한 책임회피일 뿐이다. 나에겐 오히려 이것이 자발적인 복종이다.

  얼마전 우리 사회에게는 심각한 분열이 있었다. 미국산 소 수입건으로 사회가 양쪽 진영으로 갈라져서 싸웠다. 수입 반대를 외치는 이들을 향하여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가? "맘에 안들면 안사먹으면 그만"이 아니던가? 모든 것은 시장에서 조절이 된다는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던가? 그러니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는 것이 그 말의 이면에 감추어진 의미가 아니던가? 이런 사회에서 그저 침묵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발적인 복종이 아니던가?

  ps. 책이 난해하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고. 더 실망한 것은 보론과 이에 대한 참고 자료가 본문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책의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인 것 같다. 보론을 읽고 나서 더 난해해졌다. 앞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과감히 보론을 생략하는 것이 본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달 전 미국소 수입으로 몸살을 알던 때 정부와 한나라당과 조중동 신문을 비롯한 보수 진영에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던 말이 있다.

“분명 촛불집회에는 북의 지령을 받고 이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불순한 배후 세력이 있다. 그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들이 오늘 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그리고 촛불집회의 원흉을 찾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다. 북이다, 진보세력이다, 빨갱이다, 민노당이다 등등 케케묵은 색깔 논쟁이 다시 불거져 나왔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층들은 노뽕 좌빨을 외쳤고, 이 땅에 다시 공안정국이 시작되었다. 그 때 아고라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촛불집회의 진짜 배후를 찾았습니다. 가까운 식육점(?)으로 연락해주세요.

◆ 조선일보 (http://chosun.com) 기사
01. "역시 대영제국"… 광우병 파동에 차분히 대처  1996.04.18 (목)
02. 광우병과 CJD 연관성 입증증거 발견..영과학자  1996.04.25 (목)
03. [영국] 광우병소 도살-소각때 토양-지하수 감염우려   1996.06.11 (화)
04. [유럽] 이번엔 가축 `구제역' 파동   1996.07.15 (월)
05. [광우병 파문] EU, 가축성분 포함 화장품 판매금지   1997.01.21 (화)
06. [보건복지부] 광우병 관련 화장품 수입금지   1997.05.27 (화)
07. [영국] 광우병, 신종 뇌질환 유발   1997.09.29 (월)
08. [토픽] 광우병 겁나 도둑질한 화장품 반납   1997.11.10 (월)
09. [복지부] "CJD 오염가능 혈액제제 610명분 수입됐다"   1997.12.16 (화)
10. [인간 광우병] 10-15년 내 유행 가능   1998.02.12 (목)
11. [사설] 광우병, 제대로 알려야   2001.02.07 (수)
12. 광우병 '맥'빠진 맥도널드   2001.03.15 (목) / 신용관기자
13. [시론] ‘No’ 할 수 있는 장관을 ..... 정진홍   2001.03.25 (일)
14. [광우병소 확인] 일본 축산물 전면 수입금지   2001.09.23 (일)
15. [사설2] 광우병 파동 통상마찰 대상 아니다   2003.12.29 (월)
16. "미국에 광우병 소 더 있을 것"   2004.02.13 (금) / 이동혁기자
17. 미국서 태어난 소 광우병 첫 확인   2005.06.26 (일)
18. KBS 스페셜 '인간 광우병' 방송에 시청자들 충격   2006.10.30 (월)
19. 불가사리 콜라겐 화장품 수산과학원서 개발 출시   2006.07.26 (수) / 권경훈기자
20. 초식동물에게 육식 강요한 인간 탐욕의 말로 광우병   2007.03.09 (금) / 이영완기자 21. [심층 분석] 미국 “일본 빼고 가장 까다로워”   2007.09.06 (목) / 김정훈 기자
22. [모닝커피] 한국 곱창시장 재탈환 나선 미국   2007.11.08 (목) / 금원섭 기자
23. 미국 사상최대 쇠고기 리콜   2008.02.19 (화)

◆ 중앙일보 (http://joins.com) 기사
01. 노화방지 크림 광우병 위험  1999.11.03 (수)
02. 영국, 광우병 관련 환자 계속 늘어  1999.12.19 (일)
03. 영국 광우병 발병 매년 20-30%씩 증가  2000.07.19 (수)
04. 광우병 다른 동물 전염 가능성 우려  2000.08.30 (수)
05. 영·불 각료들 광우병 관련 살인혐의로 기소될 듯  2000.12.29 (금)
06. 수입 화장품업계에 광우병 불똥  2001.01.10 (수)
07. 맥도널드 납품 伊도축장서 광우병 의심 소 발견  2001.01.16 (화)
08. 마가린·햄버거도 광우병 감염 우려  2001.01.29 (월)
09. "우리 선조들 광우병 대비했다"  2001.02.07 (수)
10. 노출된 인간광우병 '빙산의 일각'  2001.05.15 (화)
11. EU, "광우병에 성역 없다"  2001.09.11 (화)
12. 맥도널드 저팬, 광우병 파동으로 타격  2002.03.18 (월)
13. 중국, 광우병 우려로 일본제 화장품 수입금지  2002.07.18 (목)
14. "수혈 광우병 감염 환자 사망"  2003.12.18 (목)
15. "美워싱턴주 작년 7개월간 광우병검사 全無"  2004.01.16 (금)
16. 美농무부 '광우병 소' 자료조작 논란 수사  2004.03.04 (목)
17. 英·美 '인간 광우병' 확인  2004.03.17 (수)
18. 英 정부가 감추고 싶은 59가지 진실  2007.03.06 (화)
19. 국민 10명중 7명 "뼈있는 美쇠고기수입 반대"  2007.10.19 (금)

◆ 동아일보 (http://donga.com) 기사 
01. [美 광우병 충격]日, 濠-뉴질랜드産 쇠고기확보 비상  2003.12.25 (목)
02. [美 광우병 충격]뉴욕타임스 ‘쇠고기 안전하게 먹는 법’  2003.12.25 (목)
03. [사설]‘광우병 쇠고기’ 협상대상 아니다  2003.12.30 (화)
04. [자연과학]‘얼굴 없는 공포, 광우병 그리고 숨겨진 치매’  2007.03.10 (토)

  날 미국소 반대론자들이 주장하는 주장들이 그대로 담겨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 기사들이 과학적 근거로 무장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던 시기가 이명박 정부 시절이 아닌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차이가 있다면 당시 광우병을 우려하던 사람들이 마치 공수교대를 하듯이 이제는 광우병은 허구라고 말한다는 것 정도? 2년 후배가 그러더라.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하는데 뭘 그리 야단이냐고, 분명이 불순한 세력이 끼어든 것이라고. 그 후배의 나이가 50~60대냐 결코 아니다. 29살이다. 그것도 여자다. 그 후배는 주로 인터넷으로 기사를 접하는데 조중동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 녀석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설마라는 말을 하더라. 보여줘도 안 믿는다.

  원래 내가 조중동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이중적인 잣대가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한나라당의 편에 서서 사실을 왜곡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헨젤을 잡아 가두고 먹을 것을 잘 챙겨주는 마귀할멈이 있다. 그는 헨젤을 잡아먹기 위하여 살을 찌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헨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모습만 놓고 본다면 그는 집을 잃어버린 어린 아이를 거두어 먹을 것을 주면서 자선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전자나 후자나 동일하게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전자이다. 신문의 역할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지만 조중동은 언제나 후자의 행동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동일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나같이 정부의 시책을 반대하는 것들이었다.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가, 대타협이 필요하다, 비정규직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이냐? 민영화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적 자금을 제대로 회수해야지 뭐하는 것이냐? 국가의 책임을 포기 하냐?” 등등 하나같이 정부의 시책들을 꼬집는 이야기들이다. 오늘날 한겨레나, 경향신문에 실릴 법한 기사들이다. 한나라당이 말하는 경기부양책인 민영화, 고환율 정책, 재산세 인하 등등 어느 것 하나 그냥 놔두는 것이 없다. 하나같이 다 “잘못되었다. 그것이 능사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들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기사들이 여지없이 80%이상 조중동과 문화일보에 실렸던 것들이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렵다. 60개의 기사가 거의 대부분 조중동, 문화일보, 한국일보에 실렸던 글들이다. 어쩌다 가끔씩 오마이뉴스와 말지 경향신문이 나온다. 그 빈도수도 정말 극수소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일어버린 10년 사이에 발표된 글들이다. 그것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는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를 집필한 장하준 씨의 인터뷰 기사들이다. 오늘날 돌아가는 조중동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벌서 오래전에 북의 지령을 받고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불순분자들이라는 말이다. 하나같이 잡아내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불순분자들이다. 참 아이러니다. 자기들이 자기들을 불순분자라 공격하는 것이다. 개혁의 덫이라는 책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가장 큰 개혁의 덫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무조건 비난하고, 이명박 정부를 무조건 편들다 보니 자기들 스스로도 어찌 할 수 없는 덫에 빠져 버린 것이다. 한참을 웃었다. 유머집보다 더 재미있는 책이다. 꼭 읽어보길 권한다. 어느 신문에 났던 인터뷰 기사인지도 곡 확인하길 권고한다. 물론 날짜도 확인해 보시라.

  요즘 경기부양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정책들이 이 책에서는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참 쉽다. 내용이 깊지 않다. 그래서 얻을 것이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의 삶에 엔돌핀이 팍팍 돌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놀이 탐구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음, 이상원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책장을 넘기기 전에 내 눈을 확 잡아끄는 것은 조금은 민망한 표지이다. 개인적인 민감함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 모르겠지만 누드모델의 뒷모습을 찍은 책표지를 대하면서 가장 처음 느끼는 것은 민망함이다. 하고 많은 것들 중에서 하필이면 왜 이런 민망한 표지일까? 무엇인가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구성이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여전히 책을 읽기 위해서 책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민망함이 몰려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아직까지 나는 이 책에 마음을 열지 못했나 보다.

  표지 디자이너가 하고 많은 그림 중에 왜 하필 누드모델 그것도 여성의 뒷모습을 턱하니 첫 페이지에 올려놓은 것일까? 그것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상상하게 만드는 뒷모습을 말이다. 아마도 표지 디자이너는 책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이 사진을 통하여 이 책이 말하는 놀이의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먼저 이 책을 접하고 당혹해 할 나 같은 사람에게 자신이 얼마나 사회적인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는지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결코 당혹스러울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혹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사회적인 통념에 내가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이것이 창조력에 얼마나 치명적인 독이 되는지 알게 된다.

  한 아이가 자라서 자유분방한 시절을 보내다가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사회화 과정을 밟게 된다. 사회화 과정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창조력을 죽이는 대신 사회가 원하는 관념 체계로 무장된 인간을 대량생산하는 공정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학교라는 곳을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습득하게 된다. “친구와 싸우면 안 된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안 된다,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되어 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 시스템에 잘 적응하면 모범생이라는 딱지를 붙여준다. 마치 숙제를 잘 해온 아이에게 “참 잘 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 주듯이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내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본다. 나는 그래도 비교적 깨어 있는 선생님들을 많이 만난 편이다. 전교조인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전래 동요와 쟁가를 가르쳐 주셨다. 지금이야 사계라든지,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민중가요들이 힙합 버전으로 리메이크 되어 불린다지만 당시에는 접하기 힘든 문화였으며, 왠지 붉은 색으로 매도되는 문화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4살의 나이에 노찾사를 접하고 노래마을을 접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역사는 돈이라는 강력한 동인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간단하면서도 직설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대학생이 되고 마르크시즘을 접하고 난 뒤에 그것이 유물론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고등학생 시절, 그것도 대학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3 시절에 유물론을 접했다는 것은 큰 매력이었다. 그분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의식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딱한 사유체계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배우는 즐거움에 빠져보라는 것이었다. 그런 영향일까,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여 역사를 좋아했고, 국문을 좋아했고, 남들이 잘 안 외우던 서경별곡, 청산 별곡 같은 고전문학을 좋아해 외우고 다녔다. 내가 즐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좋았던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즐기라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놀이를 즐기는 호모 루덴스라는 말이다. 딱딱한 호이징거의 이론을 생각하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기의 어린 시절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창조력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사교육으로 대변되는 교육 시스템의 횡포 때문에 아이들이 노는 즐거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참 놀 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저 노는 것은 컴퓨터 게임이다. 가수 콘서트를 따라다니며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농구 축구를 열심히 하지도 못한다. 역사와 인문학을 즐기지도 못한다. 오직 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실용이다. 시험에 출제 되는가 출제되지 않는가, 대입에 유리한가 아닌가, 취직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모든 일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냥 즐겁고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창조력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준화가 진리가 된 시기에 예측 불가능한 창조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 책의 표지가 함축하고 있는 두 번째 의미는 상상하라는 것이다. 표지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드는 민망함이라는 감정의 뒤를 이어 오는 감정은 호기심이다. 뒷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앞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능이다. 본능에 충실 하라는 것이다. 호기심은 인간의 본능이다. 제우스신이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보내면서 상자를 하나 주었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단서와 함께. 그러나 어디 신화에서 절대 금기가 지켜지던가? 판도라는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해서 상자를 열었고 그 상자에서부터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질병을 비롯하여 온갖 악들과 고난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단순히 악인가? 아니다.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창조를 위한 파괴를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그것들을 접하고 그것들을 뛰어 넘고 있는 그대로 포용할 때 비로소 인간은 예술이라는 경지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하라. 호기심을 가져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려움들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포용하라. 그 단계를 넘으면 당신의 지평은 더 넓어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표지를 보고 느끼는 것은 가식을 벗어 버리라는 것이다. 옷이라는 가식을 벗어버리고 날 것 그대로 서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날 것 그대로 직면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가면을 쓰는 방법을 배운다. 그러나 가면은 우리의 본성을 죽이는 첩경이다. 모든 가식을 벗어버리고, 페르조나를 벗어버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직면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놀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놀이는 가식이 아니다. 직면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창조적인 능력에 대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인생을 움직여가는 가장 강력한 동인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은 즐기는 존재이다. 유희의 인간이다. 내가 서평 쓰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면 이 시간은 피하고 싶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이 거의 유일한 취미가 되어버린 지금, 서평을 작성하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놀이가 된다. 즐겨라. 자기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직면하라. 거기에 진실한 당신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당신은 결코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호모 루덴스! 이 보다 더 인간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 어디 있을 것인가?

ps. 호이징거의 호모 루덴스를 같이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나도 다시 읽고 서평을 쓰련다. 그 시간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즐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교의 절망과 희망 정용섭의 설교비평 3
정용섭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목사에게 있어서 설교는 그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아니 그 사람 자체이다. 설교를 두려워하는 목사는 이미 목사가 아니다. 설교는 참 아름다운 종합 예술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설교는 무엇인가 묘하게 뒤틀려 있다. 저자의 말대로 설교가 어느 샌가 심리학에 물들어 버렸다. 설교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하는 제약이 되어 버렸다. 설교 시간은 조는 시간 내지는 심리 가연 시간이 되어 버렸다. 시골 시장의 약장수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강압적인 설교를 한다. 만병통치약을 팔고 있다. 이 교회에 다니면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카피 문구가 교회마다 넘쳐난다. 삶의 고민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설교가 텅 비게 되고, 텅 빈 설교에 은혜를 받는 성도들을 보면서 필자가 느꼈을 절망이 어느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당당하게 외치는 것이다. 기라성 같은 목사들의 설교를 거침없이 난도질하면서 말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들아 외치며 독설을 퍼붓고 있다. 분명 저자는 세례 요한같은 사람이다. 이 시대의 설교자들에게, 그리고 설교 예비자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외치고 있다. 본질로 돌아가라 외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교수의 말은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분명 귀담아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꼭 필요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본질이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판넨베르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교수의 설교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알고 있는가? 판넨베르그의 설교에도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의 context가 우리의 context와 다르다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절대 기준이 설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각 사람이 처한 context가 다르기 때문에 text에 대한 해석을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설교학을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기초지식이다. 그러나 정교수는 이것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분명 들을 것이 있는 그의 비평이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독선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국 교회 강단의 설교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몇 사람의 설교를 듣다보면 거기에서 거기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아는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 축구와, 신용카드와 설교의 공통점은 돌려막기라고. 같은 예화, 같은 포맷, 같은 설교문을 가지고 품앗이 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신학 서적보다는 설교집이 많이 팔린다. 전병욱 목사의 설교집은 그 중에서도 베스트셀러이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서 먹힌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고,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서글프게 만든다.

  목회자는 삶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설교도 중요하지만 설교한대로 살아야 한다.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 그 사람의 설교와 삶이 일치가 되느냐가 내가 목사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생각이 많이 다른 김동호 목사를 나는 존경하는 것이다. 최소한 그 분은 자기가 설교한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말이나 제대로 하라는 정교수의 비판은 한국 교회 설교의 절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이다. 왜 말한 대로 못사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나 제대로 해라, 설교나 제대로 하라는 말은 바닥을 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일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한국 교회 설교의 절망을 보았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희망은 무엇일까? 설교에 대한 비평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을 한국 교회에서 갖게 되었다는 것이 한국 교회설교의 희망이다. 그리고 묵묵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늘도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부여잡고 고민하는 젊은 목회자들의 삶이 설교의 희망이다. 그들이 있기에 아직 한국 교회에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송기득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보수적인 설교비평이 나왔다면 이젠 진보적인 설교 비평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설교비평이 독선으로 흐르지 않게 될 것이고 더 발전적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이번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부록일 것이다. 특히 거침없이 변론하는 조헌정 목사님의 변론은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벌써부터 4권이 기다려진다. 누가 대상이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변론들이 올라올 것인가? 이것이 설교의 희망이 되길 간절히 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