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유진 피터슨 지음, 이종태 옮김 / IVP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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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교회의 최고 화두는 영성일 것이다. 영성적인 삶을 위해서 예전같으면 쳐다보지 않았을 가톨릭의 전통과 중세의 수도사들,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고 그들을 해석하려는 것이 요즘 기독교 내부에서 강하게 일고 있는 운동이다. 그런데 그 영성 운동을 보면서 한가지 들었던 의문은 영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것이다. 지금도 물론 같은 생각을 한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영성이 충만해야 한다는데,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데 과연 영성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는것, 기도할 때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영성의 전부란 말인가? 아니면 멀리 산속 깊은 기도원으로 가던지, 돈을 좀 더 들여서 사막의 교부들이 생활했던 곳으로 가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현실에서 떠나서 속세의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것이 영성이란 말인가? 교회 내부에서 일고 있는 영성 운동을 보면서 한심하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내 생각에 영성은 삶이다. 신앙으로 삶을 해석하고 신앙을 삶으로 구현하는 것, 이것이 영성이 아닐까? 삶과 신앙이 분리되어 이중의 잣대를 들이대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것만큼 힘든 영성은 없을 것이다.  

  유진피터슨은 다윗의 일생을 이러한 영성의 눈으로 해석한다. 다윗이 들판에 있을 때에도, 사울의 궁정에 있을 때에도, 사울을 피하여 망명 생활을 할 때에도, 그리고 왕이 되어 승승장구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죄값을 치를 때에도, 죽음이 임박한 인생의 말년에도 신앙의 눈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다윗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유진 피터슨은 훌륭한 스토리 텔러이다. 그것도 영성의 깊이를 간직한 스토리 텔러이다. 다윗의 삶에 역사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내 삶으로 시선을 돌린다. 내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어떻게 발견하고 고백하는가? 영성을 두고 고민하는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던져주는 책이다. 다윗에 관한 책 중 가장 탁월한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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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도의 침묵 - 해양문명의 교차로, 적도태평양을 가다
주강현 지음 / 김영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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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게임 중에 대항해 시대라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의 최고 백미는 싼 값에 물건들을 사다가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그것을 되파는 무역과 닥치는대로 상대방의 선박을 강탈하는 해적질이랄까? 한때 이 게임에 빠져서 밤을 며칠씩 새운 적도 있었다. 그당시에는 참 재미있게 했던 게임인데 철이들 무렵 재미와는 상관없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항해하는 그 어디에도 아프리카 국적의 캐릭터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동아시아의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게임이 서양의 대항해시대를 모티브로 하고 있던 게임인지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겐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나중에 일본과 중국 국적의 캐릭터가 보태지긴했지만(그것도 최근작의 최근작인 대항해시대4PK에서나) 여러모로 보아도 중심캐릭터가 아닌 보조 캐릭터 였음은 분명하다. 물론 그 가운데에도 한국 국적의 캐릭터는 없었다. 아주 황당하게 항해사 한명이 나중에 추가됐을 뿐이다. 게임 하나 가지고 뭘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 반문하겠지만, 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한국과 동남아시의 국가들이 세계 해양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그래도 항해사라도 캐릭터가 추가 되었음에 감사해야 하는것일까? "적도의 침묵"이라는 책에서 다루고 있는 도시들의 캐릭터는 아주 찾아볼 수도 없다. 캐릭터가 무엇이란 말인가? 항구 조차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가끔 외국식 이름의 보급항 정도로만 몇 개가 등장할 뿐이다. 이들이 아예 항해를 하지 않은 것이라면 모르지만 이들의 항해 문명은 오히려 중세 유럽보다 더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주강현씨는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라는 책으로 이미 한번 접해본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선택했지만 솔직하게 책을 읽기가 참 어려웠다는 생각을 한다. 분류상으로는 역사가 분명한데, 기행문이라고도 할수 있는 책의 구조가 이 책을 재미없게 만드는 이유였을 것이다. 적도의 바다를 연구하는 온누리호를 얻어탄 저자가 적도에 있는 섬들을 거치면서 자기가 도착한 섬들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역사에 대하여 서술하는 방식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 폴리네시아, 미크로네시아르는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낯선 문명에 관한 이야기에 대하여 저자가 풀어 놓는 이야기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였으며 그때문에 읽이가 더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흔히 남양군도로 알려져있던 2차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제국주의가 맞부딪혔던 역사의 현장이 실은 강제 징용당한 우리 선조들의 눈물과 애환이 깃든 땅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솔직하게 이 책 가운데 등장하는 섬 가운데 이름을 들어 본 것은 하와이아 난마돌 유적 정도가 전부이다. 물론 하와이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주강현씨가 그렇게도 비판하던 미국에 의하여 상품화된 훌라춤과 가짜 하와이 박물관 정도? 난마돌 유적은 얼핏 텔레비전을 통하여 봤을뿐 더 자세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왜 찬란한 문화 전통에 비하여 이렇게 그들의 역사는 알려지지 않았는가? 저자는 이들의 역사가 침묵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이들의 해양사는 대항해시대라는 철저하게 유럽 중심적인 사관에 밀려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으며 침묵하길 강요당했다. 문자로 남기지 못한 역사는 식민주의라는 침략 행위에 의하여 취사 선택되어 적절하게 변형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문화 또한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에 의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모계사회라든지, 왕권 사회에 대한 정치 체제 또한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하여 급속하게 몰락되어 오늘날에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도록 황폐화 되었다.  

  이 책은 침묵당하길 강요받은 적도의 역사와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가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주강현씨가 침략국인 일본인이나 미국인이 아니라 침략당하고 역사의 변형과 왜곡, 그리고 침묵할 것을 강요받았던 경험이 있는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쉬운 것은 그가 적고 있는 명칭이라든지, 그가 지나오면서 겪었던 오늘날의 모습들이 철저하게 미국에 의하여 재편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주강현씨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현재 그들의 국가와 삶은 서구 열강에 의하여 정형화된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잊혀진 역사의 아픔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으로서 주강현씨의 기독교에 의한 문화의 파괴라는 측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서구 열강이 건네 준 것이 다 나쁜 것일까?(물론 그네들의 의도가 불순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기독교가 전통 문화를 파괴해서 이들의 삶을 피폐화 시킨 것 뿐일까?"라는 의문을 품어보게 된다.   

  철저하게 서양적인 사고로 동남아시아를 바라보고 해석한 "향료전쟁(가일스 밀턴/생각의 나무)"와 함께 읽어 본다면 더 흥미 진진하지 않을까? 그리고 오타가 많은 것도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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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2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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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돌발영상 고정화면> 

  작년 7월 경 YTN의 사장이 구본흥씨로 바뀌었다. 언론 통제라는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주주회의를 강행했고 구본흥씨를 사장으로 인선했다. 많은 기자들이 반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까만 양복을 입으신 분들을 앞에 모셔 놓고 AT필드(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그 AT필드)를 쳐가면서 사장 인선을 마쳐버렸다. 그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AT필드(Asloute Terror Field)가 저것이구나 생각을 했다. 주주총회를 지켜보면서 언론의 독립을 외치던 기자들과 노조들에게 주주총회 자리는 절대적인 공포의 장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무력감으로 당을 쳤을 것이며, 믿었던 선배들의 꺾여진 기자 정신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모든 울분 때문일까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젊은 기자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고 그들의 아픔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구본흔 사장으로 YTN의 사장이 교체되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조만간 돌발 영상이 사라지겠는걸? PD수첩이라든지 2580이라든지 시사 프로그램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들렸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설마 가장 인기 있는 코너를 없애지는 않겠지? 본인은 뉴스채널을 YTN만 고수했으며 그 이유는 전적으로 돌발영상 때문이었다.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아 돌발영상은 자리를 감추었고, 나는 텔레비전 채널을 MBN으로 고정시켜 버렸다. 왜냐고? 팝콘영상 때문이다. 기자의 편집이 최소한도로 들어가 현장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전해 주는 것이 돌발영상과 팝콘영상의 매력이 아니었던가? 아마 MBN의 팝콘 영상마저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뉴스채널을 그다지 관심있게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개콘보다 더 재미있었던 돌발영상이 폐지되고 난 후 왜 그렇게도 언론탄압이라는 말을 썼었는지 알 것 같았다. YTN의 뉴스를 가만히 살펴보면서 묘하게 지금까지와는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대놓고 정부 편을 들지 않지만, 묘하게 촛불집회에 관하여 부정적인 뉘앙스를 던지는 말들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던 가운데 촘스키의 책을 읽게 되었다. 1권은 며칠에 걸려서 읽었지만 2권은 단숨에 읽어 내렸다. 언론에 대한 그의 생각이, 민주주의와 기업과 정권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내 가슴에 막혔던 체증들과 의문들을 다 풀어 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상당히 과격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도 물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이야기과 생각은 그의 이름값을 할만했다. 

  촘스키는 미국을 중심으로 정부와 기업과 언론의 검은 카르텔에 관하여 이미 지적한바 있다. 이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 창"라는 책을 보길 권한다. 촘스키는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라 생각하는 것들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 손상되고 변질된 민주주의라고 단언한다. 그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을 따름이지 실제적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오히려 지금 정치체제는 귀족주의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과거의 귀족 대신에 지금은 기업과 자본가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다르달까? 과거에는 혈통에 의하여 엘리트와 비엘리트가 구분지어졌지만 지금은 자본에 의하여 엘리트돠 비엘리트가 구분지어 진다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어찌되었던 촘스키는 기업과 이를 지원하는 정부(사실상 기업과 정부는 한통속일 뿐이다. 사익을 대놓고 추구하느냐 공익으로 포장해서 챙기느냐의 차이만 있을뿐이지)는 현대 기술의 총아인 언론을 이용하여 국민을 세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뇌라는 말이 과격하다면 달래고 있다고 할까? 아니면 전체를 보지 못하게 일부만 보여주면서 자기들이 정해놓은 방향으로 여론이 몰리도록 통제하고 있다고 할까? 왜 이렇게 군사력과 물리력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방법을 두고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매커니즘을 사용하는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더 효과적이며 그 효과가 거의 반영구적이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그 예로 지금까지 미국이 사용해왔던 과거의 정책들을 들고 있다. 베트남, 니카라과, 브라질, 멕시코, 라오스, 칠레, 이스라엘, 그리고 한국 등등 이러한 예들은 수도 없이 많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면 이라크를 들 수 있을 것이며, 조만간 북한과 이란도 그 예에 들어가지 않을까? 미국은 항상 민주주의를 대의 명분으로 내세운다.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서라면 민가에 폭격을 하는 것도 허용이 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어린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쯤이야 감수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지라도 타협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국미느이 투표에 의해서 선출된 지도자마저도 쿠데타를 통하여 갈아치워야 한다. 이것이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다. 이것이 미국이 세계에 뿌려놓은 민주주의의 실체이다. 그러나 이게 정말 민주주의인가? 이것이 정말 대중을 위한 민주주의인가, 아니면 엘리트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그 대답은 누가 봐도 뻔하다.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는 민주주의, 헤지펀드를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이것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현실이 아니던가? 이러한 현실을 언론을 통하여 교묘하게 조작한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결코 전체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이러한 조작에 사람들은 쉽게 넘어간다. 그리고 언론이 선전하는 민주주의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것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자기에데 돌아올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국의 사회체제는 어느새 삼각형에서 마름모를 지나 팔자형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미 제3세계에서는 실행이 완료 되었으며, 한국은 이미 많이 진행이 되었고, 미국마저도 거의 완성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 금융위기는 이 현상을 부추기는 촉매제 역할을 할뿐이다. 금융위기라고 하지만 위기는 중산층까지의 위기이지 상층의 위기는 아니다. 위기를 딛고 상층으로 올라가는 중산층은 기회가 될 것이지만 대다수의 중산층은 하층으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그렇다. 이것을 바꾸려면 촘스키는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직적인 움직임을 엘리트들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을 통하여 방해한다. 여기에 속지 말고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것이 촘스키가 말하는 세상의 권력이다.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제목을 따왔다. 신 망상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들어진 미국식 민주주의가 되었것, 미국식 민주주의의 망상이 되었건 이대로 간다면 대안은 없다. 그저 비정치적인 모습을 가장한 권력의 포기만이 있을 뿐이다. 요즘 대한 민국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대안을 세우는데 가장 필요한 책이 아닐까? 부디 미국식 민주주의가 만병통치라는 과대망상에서 우리가 깨어 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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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傳 5 - 위기를 기회로 바꾼 진정한 승자들의 역사 한국사傳 5
KBS 한국사傳 제작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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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새해가 되면서 이명박 대통령께서 신년 정책 연설을 하셨다. 연설의 내용은 자세하기 생각나지 않지만 유달리 위기라는 말이 많았던 것 같다. 2009년 현재 대한민국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위기하고 할 수 있다. 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고, 공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으며, 가정이 위기를 맞고 있다. 도무지 위기가 아닌 곳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경제에만 위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장 피부로 느끼는 것이 경제이기 때문에 그렇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너무 물질에만 매여 살아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입맛이 쓰다.  

  끊임없이 경제가 어렵다고 하니 경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쓰겠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은 동일한 원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언제 우리나라 경제가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겠냐만 지금처럼 온 국민이 위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적은 IMF금융체제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가 싸늘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대학 5학년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으며 청년 실업은 필수라고 한다.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은 이미 오래전의 말이 되어 버렸다. 요즘은 이퇴백(이십대에 퇴직을 결정한다.-인턴제를 비꼬는 말), 십장생(십대도 장차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위해 조직적으로 무엇인가 해 주지는 않는다. 그저 참으라는 말만 한다. 위기는 기회이니 실력을 닦으면서 기회를 기다리면 분명 길이 열릴 것이라는 말을 한다. 물론 기회는 열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열리지는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요 아픔이다.  

  각설하고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가 우리의 화두이다.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나에게 한국사전 5권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진정한 승자들의 역사"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의 지침이 되어 주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은 의지의 문제임을 이 책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기회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의 문제임을 기억하라는 것이 이 책의 메시지이다. 홍역 치료의 달인 이헌길,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암행허사 박문수, 문화재 지킴이 전형필, 혁명주의자 허균, 세종의 손 장영실, 여자 의병장 윤희순,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삶을 하나하나 집어보면 그 어느 누구하나 쉬운 시대를 살다간 적이 없다. 개중에 가장 낫다는 장영실마저도 명의 눈치를 보면서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었던가? 기술자들이 천대받는 시기가 아니었던가? 이들이 살다간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의 광해군 시절, 혼탁한 세도 정치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긴 시절, 7년간의 왜란을 감내하던 시절, 역사상 가장 불우했던 시절이다. 이런 시기에 과연 이들은 어덯게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던가?  

  이들의 굳건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이 위기의 때를 살다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바꾼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이다. 혼탁한 시대에, 주어진 환경에 휩쓸려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위기에 파묻혀 버리지만 굳건히 버티면서 자기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승천할 수 있는 좋은 때가 위기의 때이다. 단기적으로 보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면서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쫓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것 이것이 위기의 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야구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고 한다. 게임이 다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도 역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며, 이 가능성을 믿고 전력투구 하는 이들에게 실제로 꿈은 이루어졌다. 물론 오늘같은 사회에서 개인의 실력과 의지만 가지고 위기를 넘어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 마저도 없는 사람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조용히 숨죽이고 목표를 명확히하고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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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 전망 2009
권순우.전영재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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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다사다난했던 2008년이었다. 총선과 대선,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출발은 2008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07년 말 SERI 전망 2008을 사서 읽었다. 한미FTA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가운데 2008년은 국내외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산업의 형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등 2008년을 전망해보는 책을 읽어보면서 처음에는 난해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생소한 경제 용어와 어려운 주직 관련 용어들은 내가 책을 읽어가는데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2008년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억지로 읽어 나갔다. 그리고 2008년을 살아오면서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대략적인 방향은 맞춘 것 같았다.  

  2008년은 정말 복잡했던 한해였던 것 같다. 이명박 정부의 출발과 동시에 일어난 광우병 파동, 촛불집회, 언론탑압, 사대강 정비 사업 등등 온갖 사건들이 일어났던 한해였다. 온통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 같은 2008년의 사건을 꿰뚫는 한마디는 신자유주의이다. 세계적인 대세가 되어 자유시장경제를 강요했던 신자유주의가 2008년 대한민국의 한 복판을 관통하는 이데올로기였다. 모든 것은 경제로 이야기 된다. “경제만 살린다면”이라는 비아냥이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님을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알 것이다. 효율성, 경제성, 자유주의, 자본주의 등 자본의 논리에 의하여 비정규직이 해고되고, 언론이 춤을 추고, 권력이 기업에게 면죄부를 심어 주었던 것이 2008년의 본모습이다. 경제가 어려워진다, 힘이 든다, 그러니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하자는 이야기는 그냥 말일뿐이다. 이 말에 속아 허리띠를 졸라맨 국민들만 바보가 된 것이다. 여전히 빈부의 격차는 넓어지고 있다.  

  과연 2009년은 어떻게 될 것인가? 2008년을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참 괴로운 질문이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오리무중(五里霧中), 딱 이 말이 들어맞는 한해가 될 것이다. 그래도 무엇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SERI 전망 2009를 샀다. 그런데 도무지 이놈이 읽혀지지가 않는다. 온통 어렵다는 이야기뿐이니, 위기라는 이야기뿐이니 읽혀질 턱이 있나? 그저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다. 도무지 깊이가 없다. SERI 전망 2008에 비하여 도무지 깊이가 없는 내용들이 실려있다. 그냥 힘들다는 이야기만 적혀 있고, 그러나 잘 될 것이라는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가 실여 있을 뿐이다. 차라리 신문의 경제면을 보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는 생각만 든다.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한 금융위기는 금융시스템을 근본에서부터 흔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그 공포감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움직였고, 숫자에 불과한 금융자본은 손에 잡히는 실물경제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 대출 이자율은 높아져갔으며 국가에서 시중에 돈을 풀지만 은행이 이 돈을 다시 국가에 반환하는 기묘한 핑퐁게임이 시작되었다. 환율은 1500원을 치고 올라갔으며, 베이징 올림픽 특수도 끝났다. 잔치가 끝나버린 것이다. 신문에서는 연일 고통분담을 하자고 국민들을 선동한다. 쓸데없이 켜두는 전깃불도 끄자, 물은 아껴쓰자라고 하면서 마치 80년대 분위기를 내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지고 파산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직장에서 해고되는 비정규직들이 늘어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100조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투자하지 않고, 직원들을 자르는 기업들을 보면서 과연 저들의 말대로 저들이 한국을 먹여살리고 있는가 의문을 품어보기도 한다. 

  이런 복잡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SERI 전망 2009는 말한다. 다 좋아질 것이라고. 이제 안정되고 물가도 잡혀가고 있으니 좋아질 것이란다. 비론 전반기는 힘들겠지만 후반기에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근거가 무엇인지? 좋아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저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를 써 놓으면서 다 좋아질 것이니 참고 견디라는 SERI의 이야기는 역시 삼성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환율도 안정이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SERI의 이야기와는 달리 다시 1500원대에 육박하기 시작했다. 왠지 SERI 전망 2009를 보면서 맑스가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지금 SERI의 역할이 꼭 이런 것은 아닐는지? SERI에 대한 실망감을 갖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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