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발전을 요구한다 - 장하준의 경제 정책 매뉴얼
장하준.아일린 그레이블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부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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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 자동차 사태가 꽤 오랫동안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노조원들의 생존권 사수를 지지하는 측과 기업의 손해는 국부의 손해라 생각하면서 회사를 지지하는 측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미 쌍용 자동차 사태는 노조와 회사의 다툼이 아니라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으로, 좌와 우의 이념 투쟁으로 번져 가고 있다. 평택에서 최루액과 볼트, 화염병이 날아다니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면 인터넷에서는 노조와 사측으로, 빨갱이와 꼴통 보수로, 전라도와 경상도로, 민주당 지지자와 한나라당 지지자로 나누어져 서로에게 화염병보다 더 거센 감정의 불길을 지피고 있으며 곤봉이나 너트보다 더 치명적인 촌철을 뱉으며 살인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좌우 우로 갈라진 양 진영들은 서로를 도무지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생존권을 부르짖고 한쪽에서는 국가 경쟁력을 부르짖는 시대에 나는 어찌 해야 하는가? 서로가 국미느이 편이며, 서민이라 주장하지만 도무지 진짜 서민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날이 갈수록 대중은 정치에 대하여 무관심 해지고 시니컬 해지고 있으며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설득과 토론을 통하여 타협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이기고 죽이고 없애야 하는 적이 되었다. 이런 모습이 과거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전쟁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돌아서서 한마디 욕하고 말았는데 왜 요즘은 이렇게 서로를 죽여야할 필사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을까? 

  난 신자유주의를 이것으로 이해한다. 이웃을 이웃이 아니라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대상으로 사물화 시켜버리는 것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라 이해한다. 무한경쟁의 논리 가운데에서 단 한번이라도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호의를 베푼다면, 잠시라도 상대방을 이웃으로 생각한다면 상대방은 기꺼이 나를 밟고 올라설 것이라는 두려움을 우리에게 심어주면서 "경쟁은 좋은 것이여."라는 신자유주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자유는 좋은 것이고, 경쟁은 좋은 것인가? 시장은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위대한 손이 되는가? 장하준은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의 신화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도 감정적인 제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서 조목조목. 거기에 더하여 단순한 반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책까지 제시한다. 그것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정말 존경해 마지 않는 경제 대통령 박정희의 정책과 치적을 실증으로 들어가면서.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신자유주의를 복음으로 생각하고, 박정희의 유산을 물려받은 한나라당과 MB정권에서 장하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하준을 친박계로 분류해 놓은 것인가? 

  몇십년전 영국에서 대처 수상이 "대안은 없다."라는 말을 모토로 영국의 경제를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게 재편한 일이 있다. 당시 미국에서는 레이건이 레이거노믹스를 표방하면서 같은 일을 하였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상이 정책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영미식 경제라는 무한경쟁의 경제체제가 생겨났다. 미국의 꼬봉인 우리나라는 박정희의 뒤를 이어 미국의 인정을 간절히 원하던 전통 노통을 비롯하여, YS DJ 놈현을 거쳐 MB까지 이르는 동안 영미식 경제제도를 착실하게 이식하였다. 그래서 왠만한 경제 관료들은 민영화는 좋은 것이며, 경쟁은 사회를 활력있게 만든다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고용 안정보다는 고용으니 유동성이 더 필요하며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하고, 파이가 작으니 파이를 더 키워야 한다면서 4만불 시대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워졌는가? 

  이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말하면서 밀어붙이는 방식들이 과연 바른 것인가? 합리적인 것인가? 왠지 이 물음에 대하여 자신이 없어지는 것은 내가 애국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순 때문인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가는 감정의 골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다시 발전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장이 만능이 아닐진대 시장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거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 히틀러의 등장과 양차 대전을 불러 일으켰던 역사적인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시장에 대한 막연한 희망, 만능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장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이다. 쌍용차 사태는 이것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으까? 쌍용차 사태를 어떻게 푸는가에 따라 앞으로 한국이 발전할 것인가 퇴보할 것인가가 결정난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무모한 생각인가? 쌍용차 사태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저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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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림토 2009-07-23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을 처음 읽을 때, 카테고리를 잘못 설정하셨구나 싶었습니다.
오늘, 일식이 있었구, MB악법은 통과됐구, 저는 술 한잔 했습니다.
이 글, 안 읽고 잤더라면 후회했을 뻔 했습니다.
신자유주의,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 및 경제에 관한 탄탄한 생각이 단단하게 보입니다.
저는 철학도, 정치도, 이념도 잘 모르지만 탄탄한 글은 제법 구별합니다.

대위님이시네요, 남은 군생활 잘 마치시구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saint236 2009-07-2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2년 전에 전역했구요 사진이 없는 관계로 이 사진을 올려 놓았습니다.^^ 전 기독교인지라 한잔할 수는 없었고요 어제는 정말 울고 싶었습니다. 한나라당이 보수 꼴통이라 싫은게 아니라 그들이 오만하고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싫어하는데 어제는 오만과 독선의 끝을 본 것 같았습니다.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를 리뷰해주세요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윤용인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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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로 나이를 먹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저 그때가 되면이라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고 있다면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나이 먹음을 당한다고나 할까? 말장난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나이를 먹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나이 먹음을 당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나이를 먹는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라면 나이 먹음을 당한다는 것은 그저 철없이 살다 보니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는 느낌이랄까? 능동과 수동, 성택과 강요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찌 되었든 이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갖게 되는 생각은 저자가 부럽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서 마흔의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시간에 따른 피해의식이나 1년만 젊었어도라는 후회가 없다. 그저 주가가 처한 상황이 즐거울 뿐이다. 아니 즐겁지 않더라도 즐겁게 받아들이려하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세월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 데에서 그 사람의 연륜도 경력도, 그리고 지혜도 나올 수 있을테니까!  

  스무살 때로 기억한다. 그때는 그저 멜랑꼬리한 것이 좋았다. 이유도 없다. 그냥 좋았다. 비가오면 비가 온다고 기숙사 방 불을 끄고 포터블에 이승훈의 비오는 거리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걸고 몇시간이고 들었다. 가끔 방으로 들어오던 형들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오다가 깜짝 놀랐던 적이 종종 있을 정도로 노래에 심취해 있었다. 그냥 좋았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왠지 낭만적이라 생각이 들었고, 그때가 되면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결혼해서 아바가 되어 있을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현실적인 감각도 노력도 없이 그저 서른이라는 나이를 기다렸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서른이 되어 보니 황당하다. 아니 허무하달까?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 감상적인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에 걸맞는 노력이 없다면 주책없음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른 둘을 지나 마흔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에게 마흔이란 어떻게 다가올까? 그저 학부형이 되어 있고 중년의 나이, 유혹에 흔들림이 없다는 불혹의 나이를 맞을 수 있을까? 10년을 돌아보면 글쎄올시다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신변잡기를 통하여 가르쳐 주는 저자가 고맙다. 그러면서도 딴지 일보의 경력 대문인지 여전히 딴지를 걸고 있는 저자의 말투 가운데 나이 먹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멋진 마흔을 향하여 지금부터라도 조금식 준비해야겠다. 멋있는 성숙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번쯤은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PS 엄밀히 따지면 심리학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심리학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자기의 생각을 설명하는 에세이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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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의 귀환>을 리뷰해주세요
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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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왕자의 귀환이라? 어린 왕자라는 소설을 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대감을 가지고 펴본 책은 날 당황스럽게 했다. 어린왕자의 귀환이라는 제목에서 나는 따뜻한 동화나 어른들에게 삶에 관하여 생각하게 만드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편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은 만화였다. 그것도 데모하는 현장에서나 볼법한 찌라시에나 실릴법한 만화책은 어린 왕자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너무나 간단한, 그러면서도 대충 그린 것 같은 그림체는 과연 이런 책까지 봐야 하는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나 한장씩 넘기면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잡게 되었다.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결코 가벼운 내용들이 아닌 까닭이다.  

  내가 아는 한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가벼우면서도 쉽게 설명한 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중고등 학생들에게 신자유주의를 설명하기에도 적합한 책이며, 대학생들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신자유주의식 경제를 설명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책이다. 비교우위론, FTA, 그 안에 담겨진 독소 조항들, 민영화와 같은 것들에 대하여 이렇게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니 대단히 존경스럽다. 만화에 덧붙인 우석훈의 주해가 만화에 깊이를 더했다고 할까? 

  그러나 한편으론 아쉬움을 느낀다. 만화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무겁다. 시사만화는 현실을 비꼬아 그 안에 촌철살인의 즐거움을 담아야 하는데, 이 만화는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동원된 느낌이 강하다. 만화가 없다고 할지라도 내용이 이어진다면 만화책으로서의 가치는 많이 반감될 수밖에. 만화라고 보기에는 내용이 무겁고, 책이라고 보기에는 내용이 너무 가벼운 것도 이 책이 가지는 아쉬움이 아닐까?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주로 좌로 치우치거나 우로 치우친 책들에는 재미가 없다. 어려운 말을 늘어 놓고, 그것들을 사상적으로 설명하려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내용을 가볍게 할지라도 만만치 않다.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이 책이 가지는 한계 또한 마찬가지다.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촌철살인의 유머가 약하다.   

  마지막으로 책의 제목이 왜 어린 왕자의 귀환일까 생각을 해봤다. 아무리 읽어봐도 어린 왕자의 귀환보다는 어린 왕자의 실종 내지는 멸종, 혹은 변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함에도 말이다.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결국 어린 왕자는 로또에 당첨이 되어 멀리 사라져 유유자적하고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그런데 왜 어린 왕자의 귀환이라고 했을까? 어린 왕자의 귀환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 왕자를 귀환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린 왕자를 귀환시키고 싶다는 작가의 꿈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 아닐까?

                    

  어린 왕자를 어린 왕자로 만드는 것은 순수함이다. 그 순수함이 때묻는 순간 어린 왕자는 이미 어린 왕자가 아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어린 왕자를 어린 왕자가 아니게 만든가.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순수함 대신에 자본의 논리에 때묻고 쫓겨서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장미의 존재 가치를 배우기 전에 교환 가치아 사용 가치를 먼저 배워야 하는 어린 왕자들에게 어떻게 장미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도록 만들어 줄 것인가?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절대 약자일 수밖에 없는 어린 왕자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존재의 중요성을 말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인가? 좀더 솔직하게 말해서 어린 왕자가 멸종된 시대에 어떻게 어린 왕자를 다시 귀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얼마짜리냐?"는 대답 대신에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고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린 왕자의 실종 시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린 왕자의 멸종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고민이어야 하지 않은가?

  위에 있는 사진을 보면서 다시한번 다짐한다. 생활 전선에서 자신을 상품화하는 것을 배우기에는 아직 어린 저 아이에게 다시 한번 웃음을 찾아 주자고. 다시 한번 어린 왕자로 꿈꿀 수 있도록 하자고. 아니 평생 어린 왕자의 꿈을 꿔보지 못한 저 아이에게 세상이 이렇게 상품 가치로 결정되는 냉혹한 곳이 아님을 알려 주겠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유니세프 회원이며, 유니세프 회원이 되도록 권한다. 그리고 열심히 책을 읽는다. 

PS. 신자유주의 전도사 역에 봉이 김선달을 캐스팅 한 것은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적절한 말발로 사기치는 봉이 김선달이나 신자유주의가 최고라고 말하면서도 자기들은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이들이나 동일한 부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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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리뷰해주세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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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검찰의 수사를 받으면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신문의 1면을 장식하던 가운데 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그를 무책임한 사람으로 몰아갔고, 이에 합세하여 유력 일간지들은 그를 범죄자로 낙인찍었다. 일각에서는 검찰의 표적 수사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정치적인 타살설을 제기하였고, 소위 진보적이라는 신문들은 여기에 합세하여 현 정권을 성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처음으로 맞이한 전 대통령의 자살을 바라보면서 국민들은 얼이 빠져버렸다. 경상도에서는 잘 죽었다, 남자 같지도 않은 놈이라는 말이 강하게 돌았다는 댓글도 있었고, 내가 살고 있는 잠실에서도 물론 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창피하게도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는 자살은 죄이니 노무현이는 지옥으로 갔을 거라는 막말을 하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의 마지막을 보면서 한 가지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본다.  

  우리는 노무현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역사상 정말 별종같은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닐까? 고졸출신에(그것도 상고), 노사모라는 팬클럽을 통하여(이를 컨닝해 박사모라는 단체가지 생길 정도니 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대통령이 된 사람, 바보, 말 실수가 많은 대통령, 준비 안된 대통령 등 그에 대한 평가는 좌에서부터 우까지 대단하다.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배신자로. 보수진영은 보수진영대로 빨갱이로 몰아가면서 그를 압박했다. 많이도 외로웠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표지에 있는 그의 얼굴이 자신에 차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서 노무현이란? 글세다. 진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좌파라고는 할 수 없다. 국방에 많은 것을 투자한 것과 이라크 파병,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그의 정책을 보면서 때론 유럽의 좌파같다는 생각마저 한다. 나에게 노무현은 좌냐 우냐가 아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무현은 권위주의 해체자일뿐이다. 어떤 사람과도 계급장 떼고 싸우는 투쟁심, 가진 권력과 줄을 내려놓고 오직 개인의 실력으로만 승부하려는 고집스러움이 바로 노무현의 특징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그리도 노무현이 비난을 받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한국 사람들을 보면 때론 신기할 때가 있다. 정말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맞나 의심이 든다. 너무나 쉽게 권위에 복종하고 줄과 빽을 찾는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대표되는 3연은 바로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도대체 왕정이 무너진지 언젠데 아직가지도 대통령을 나랏님으로, 영부인을 국모로 이해한다. 국모가 고졸출신이라는 것이 쪽팔리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를 신문 기사를 통해 보고 그냥 웃어버렸다.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수학여행 보낸 말이기 때문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개나 소나 대통령을 보고 명박이 명박이 한다고 화를 내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난 노무현을 생각한다. 그의 가장 큰 작품이 이것이 아닐까? 

  대통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것,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생각한다. 감히 대통령을 욕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며 그저 복종만 외치면 서슬푸른 군사독재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대통령이라면 하나님과 동기동창생이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지 않았는가? 이런 우리의 잘못된 사고의 틀을 그는 과감히 자신을 던져서 깬 것이다. 권위주의를 깬 짱돌이 바로 노무현이다. 

  언론, 시장, 국가, 공무원 등등 우리 주변에는 복종하기를 강요하는 권위주의가 너무나 많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권위와 다르다. 깨야 한다. 노무현은 그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준 사람이다. 감히 대통령이 자살한다는 생각을 했겠는가? 결국 그도 인간이요, 고뇌를 가진 한 시민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아니겠는가?  

  노무현을 추억하는 모든 이들이여, 쓸데없는 권위에 복종하지 말라. 대화하고 토론하고, 타협하라. 지배당하지 마라.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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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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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이 책은 내 취향이 아니다. 서평단 도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사지도 읽지도 않았을 책이다. 겉멋이 들어서인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에세이나 신변잡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까닭이다. 오죽하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외에는 읽어본 에시이 집이 손에 꼽을 정도가 되겠는가? 그런 이유로 의무감을 가지고 책을 읽기시작했다. 간간이 보이는 사진들, 책의 넓은 공백이 있었다면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이 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커피 때문이다. 차를 즐겨마시던 나이지만 군 전역 후,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난 후 차를 마실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커피를 달고 살기 시작했다. 접근이 용이한 스타벅스에 가서 원두를 사오고, 일렉트로럭스 커피 메이커를 책상에 올려 놓고 매일 커피를 내린다. 가지고 있던 전동 그라인더는 리콜 제품인지라 반품시켜 버렸고, 결국은 매일 스타벅스 매장에 신세를 지고 있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주, 그리고 소량의 커피를 스타벅스 제품에 한해서 갈아준다는 것이다. 그라인더가 없는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일주일에서 이주일치 분량만 갈아서 보관했다가 그것이 다 떨어지면 다시 가서 갈아오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상황 가운데 가장 신선한 커피를 마시는 방법이다. 언젠가는 더치커피를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자주 워터드롭을 인터넷으로 찾아본다. 아직 돈이 없어서 쳐다만 보고 있다.(나는 솔로가 아니다.) 또한 에스프레소 머신에도 혹해 있다. 그러나 역시 워터드롭과 같은 이유로 침만 삼키고 있을 뿐이다. 이런 처지의 나에게 저자의 커피머신과 바는 꿈에 그리던 물품들이니 내가 책에 빠져드는 것이야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책을 보노라면 자연스럽게 풍겨오는 커피 향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몸 안에 카페인을 충전하곤 한다. 언젠가는 나도 워터드롭과 에스프레소 머신을 장만하고 말리라는 다짐과 함께. 

  오디오 편을 보고 있노라면 당최 무슨 말인지 못알아 먹겠더라. 그래서 다시 책임감 모드로 돌입했다. 그러다 "내 이름은 톤팔이, 실은 나 불안하다."라는 제목에서 눈이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다. 저자가 작업실이라는 동굴을 마련한 이유도, 오디오와 판에 미친 이유도, 커피에 꼭지가 돈 이유도, 내가 이 책에 빠져들게 된 이유도 다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실은 불안했던 것이다. 내 삶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안하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불안했던 것이다. 매일의 일상이 줄타기이다. 사람들이 내 뜻대로 안된다. 힘들다는 이야기만 하면서 내 자신감과 자존심과 자존감은 애초에 무너졌고, 그저 악으로만 버티는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불안이다. 남아야 하는가, 옮겨야 하는가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해도 불안했던 것이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아내가 있고, 연년생인 두 아이가 있지다. 그들을 정말 사랑하지만 때론 혼자만의 시간이 한없이 그리울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냥 나혼자 뒹굴거리다가 책이나 잔득 읽다가, 그것도 아니면 문명이나 삼국지 같은 게임을 하면서 천하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순간 의기양양해 하는 그런 유치한 삶을 누려보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아내오 아이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을 때가 1년에 한두번은 있다는 것이다. 나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정신줄을 놓고 싶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김갑수씨가 부럽다. 작업실에서 말 그래도 산수갑산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점하고 있는 갑수씨가 부럽다.  물론 그의 커피머신이 한없이 부럽다. 이게 욕심인가? 

  오덕후의 기질로 불안을 달래고 그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한없이 부럽다. 내게 이런 것이 무엇일까? 나에게 작업실은 어떤 것일까? 불안을 달래고, 그 불안 안으로 들어가서 불안과 함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약간은 건설적인 오턱후질이 무엇일까? 현재로서는 책이 아닐까? 아직 읽을 책이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이 꽂히는 책이라면 일단 지르고 보는, 그리고 꽂아 놓고 언젠가는 보리라 다짐하면서 혼자 흐뭇해 하는 책질이 나에게는 작업실이 아닐까? (물론 이런 짓때문에 1년에 50~60권 정도의 책은 읽지만) 

  오디오질이나 커피질을 좋아하는 사람, 오덕후질로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은 권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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