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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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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절망이라는 말과 행복이라는 말만큼 모순되는 이야기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은 절말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라가 가난하지만 젊은이들을 위해서 막대한 투자를 하기 때문에 젊은들이 행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이 책은 젊은이들이 행복한 이유는 그들이 객관적으로 행복하다는 말이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히려 젊은이들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라고 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그들의 고용은 불안정하다. 말이 좋아 프리터이지 그들은 고용 유연성의 최전선에 서 있다. 신학자 바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독신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독신을 강요당한다. 마초라는 반대편에 초식남이라는 개념을 설정해 놓는다. 초식남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평화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삼포세대 혹은 삼무세대 쯤 되지 않을까?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인데도 그들은 왜 행복할까? 글쓴이는 한 마디로 명쾌하게 그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절망스럽고 눈물겹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음 => 미래에 대한 도전 포기 => 현실에의 안주 = > 현실의 의미 찾기 => 지금 나는 행복하다.

 

  이 책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위와 같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느 일부분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누리는 보편적인 가치가 되어 버린다면 그 때도 그것을 바라보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군에 가본 남자들이라면 모두 동감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들을 군에 보내놓고 걱정되는 부모님들을 초청하여 아들은 생각보다 쾌적한 시설에서 살고 있음을 강변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어머니들이야 아들의 일인지라 어떤 조건에서도 안쓰럽지만 의외로 아버지들은 괜찮다고 아들이 꽤나 좋은 조건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왜 그런지 아는가? 아버지 시대의 내무실하고 비교하기 때문이다. 30여명의 소대원들이 한 내무실에서 군용 모포 덮고 바글거리면서 생활하는 내무실에 비하면 2인 침대를 쓰고 분대원끼리 사용하는 내무실의 여건은 상당히 쾌적하다. 게다가 과거에 3끼를 거친 식사로 때우던 시절에 비하면 오늘날 군용 식단은 꽤나 좋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요즘 군생활 못하겠다고 힘들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은 호강에 겨워서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더한다면 그들의 불평이 이해가 간다. 요즘 대부분의 병사들은 집에서 외아들 혹은 두 명 정도로 생활한다는 것이다. 각자 자기 방을 사용하고, 사춘기에는 방문을 걸어 잠그는 녀석들이 군에 와서 8~10명이 같이 내무실을 쓴다는 것은 꽤나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는 밥을 먹으라고 해도 먹지 않았는데 군에 오면 자기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나오는 모든 음식은 의무적으로 먹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내무 생활이 결코 즐거울리 없다. 과거에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초코파이였던 세대와 콜라와 피자, 햄버거인 세대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을 하던 병사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무실을 편안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왜? 현실에 적응을 하니까? 자기들이 아무리 불평을 해도 내무실이 좋아지지는 않으니까 적응하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이와 비슷하다. 과거에 비하여 객관적으로 본다면 여건은 나아졌지만 상대적으로 느끼는 것들은, 그리고 이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분명히 차이가 있다. 과거에 아르바이트해서 2500원 벌었던 시절과 5000원 넘게 버는 시절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런데 아무리 불평해도, 아무리 도전해도 미래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인간은 현실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스스로 현실은 행복하다고 자기를 속이게 된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이 이렇다.

 

  그런데 더 눈물 겨운 것은 추천자의 글이다. 일본은 절망적이다. 그런데 한국은 더 그렇다는 단 한 마디의 문장 말이다. 오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불안정한 노동현실, 살인적인 주거비용, 무한 경쟁의 시대, 학력은 곧 개인의 브랜드가 되는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의 젊은이들은 과연 행복할까? 아직 이런 조사를 해보지 않았지만 우리의 젊은이들은 행복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이폰이 있으니 행복하고, 친구가 있으니 행복하고, 집이 있으니 행복하고 등등. 행복의 조건들을 많이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야 종교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현실에 감사하라는 것은 종교에서 할 말이지, 사회학자들이 어른들이 할 말은 아니다.

 

  요즘 것들은 감사를 모른다, 배고픔을 모른다고 매도하기 전에, 그들이 제발 행복하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주저 앉지 않게 해 주는 것이 기성 세대의 몫이 아닐까? 절망의 나라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만" 있는 것, 이것은 이미 이 사회가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이리라.

 

  * 이 서평은 알라딘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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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3-07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본 `달관세대`라는 기레기 떡밥같은 글이 떠오릅니다. 그런 식으로 물타기 광고를 하면 정권에서 참 이뻐하겠죠?

saint236 2015-03-09 16:38   좋아요 0 | URL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던 맑스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조선은 대한민국의 암이다라고 하겠지요. 달관세대가 무엇인가 기사를 찾아 읽었는데 황당하네요. 지들은 왜 달관하지 못하는지
 
오! 당신들의 나라 - 1%를 위한 1%에 의한 1%의 세상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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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바라 애런라이크의 책은 재미가 있다. 긍정의 배신,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같은 배신 시리즈, 지금 이 책은 애런라이크가 생동감있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부조리를 밝혀내고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이 책이 넘어가지 않더라. 정말 오랜 시간동안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책을 거의 두달동안 읽었던 것같다. 세훨호 사건이 벌어질 때쯤 읽어서 한참이 지난 이후에도 이 책과 씨름했던 기억이 난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무엇인가 끄적거리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바쁜 것도 있지만 마음이 많이 지켰기 때문이리라. 이미 당신들의 나라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 사건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일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한 어머니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이 난다. 이 기사를 읽었을 때쯤에 난 이책을 감히 펴지 못했었다. 기사의 내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출처는 4월 23일자 CBS 노컷 뉴스이다.(http://nocutnews.co.kr/news/4012274)

 

"내가 참 못난 부모구나, 자식을 죽인 부모구나. 이 나라에서는 나 정도 부모여서는 안 돼요. 대한민국에서 내 자식 지키려면 최소한 해양수산부 장관이나 국회의원 정도는 돼야 해요. 이 사회는 나 같은 사람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사회에요".

"저 동정받을 사람 아니에요. 나 60평짜리 아파트 살아요. 대학교에서 영문학 전공했고, 입시학원 원장이고 시의원 친구도 있어요. 이 사회에서 어디 내놔도 창피할 사람 아니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저주스러워요. 우리 딸 나오길 기다리는 한 시간 한 시간이 피를 말려요".

김 씨는 이제 더는 정부도 믿을 수 없었다.

"능력이 없어서 못 하면, 한 명이라도 구하겠다고 애쓰면 저 사람들도 귀한 목숨인데 감사하죠. 그런데 구조 매뉴얼도, 장비도, 전문가도 없다면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헬리콥터 10대를 띄웠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어서 가족 대표가 가보면 1대도 없었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와서 잠수부 500명을 투입했네 해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내 자식을 놓을 수가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다리면 또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날이 지나서 애들 다 죽었어요".

꼼짝도 않는 정부에 던진 달걀이 바위를 더럽히지도 못하는 심정. 김 씨는 대한민국을 버리겠다고 말했다.

"다 정리하고 떠날 거에요. 나 대한민국 국민 아닙니다. 이 나라가 내 자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내 나라를 버립니다".

 

  인터뷰 기사 곳곳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아픔이 묻어 있어서 읽어 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이 나라에서는 나 정도여서는 안되요."라는 대목이다. 본인 스스로 말하듯이 남부러울 것 없고, 동정받을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자식하나 구해낼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라서? 아니다. 이 빌어먹을 국가를 움직일 정도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 만약 국회의원의 자식이, 혹은 재벌가의 손자가 빠졌다면 그렇게 가만히 있었을까? 바닷물을 퍼내서라도, 간척사업을 벌이고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건지려고 하지 않았을까? 당장이라고 국가가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호들갑 떨었을 것이며, 국가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도 기업 차원에서라도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을까?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지금까지 국가에 충성하면, 나라를 사랑하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지만 아니다. 미국은 탈영 논란이 있는 병사도 몇년이 지나도록 귀환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우리 나라 정부는 알량한 돈 때문에 구조하지 않았다. 전국민이 텔레비전을 통하여 300명의 국민이, 그것도 대부분 어린 학생들이 산채로 수장되는 모습을 지켜봤다. 국민들이 어떤 마음을 품겠는가? 국가가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 나를 보호할 것이라는 생각을 품을까?

 

  어버이 연합 어르신들이, 온갖 보수단체 회원들이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고 한다. 종북 빨갱이들이 수십만이네 수백만이네 외친다.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국가의 행위에 대해서 정당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것이, 혹은 전시에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이 종북 좌빨의 모습이라면, 국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종북 좌빨의 기준이 된다면 아마 그 종북 좌빨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국가일 것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이념논쟁화 시켜서 선거에 이용했던 정치인들, 의지도 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야권들,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세월호 특별법을 좌절시키려는 여권들! 그들은  "다 정리하고 떠날거예요. 나 대한민국 국민 아닙니다. 이 나라가 내 자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내 나라를 버립니다."라는 학부모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모든 국민의 평등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1%의 특권층도 99%의 비특권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음을 기억할 수 있는 상식이 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이들에게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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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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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한번 봤던 그림일 것이다. 누가 했는지 기가 막히게 잘 그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공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그림이 생각났다. 오늘날 20대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아마도 나랑은 다른 이야기를 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저 씁쓸해졌다. 이 그림이 공감을 받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공감의 능력!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동감은 아니더라도 공감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성품이고, 이것은 이 사회를 살만하게 만들고,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리프킨이 공감의 시대라는 장문의 책을 냈겠는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글자를 꼽자면 소통일 것이다. 명박 산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불통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한다. 불통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파고든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공감의 부재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정치인들이 소통을 말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불통을 말했던 것은 정치인들이 국민의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 책은 더 나쁜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 불통, 즉 공감의 부재가 정치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에 보편적으로 퍼졌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지금까지 자기가 만났던 젊은이들의 삶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사회 정의에 대해서 말하면서 같이 데모에 참석했던 이들도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월세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약자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말만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나름대로 그 문제에 대한 원인도 분석하고 있다. 자기 계발의 논리에 경도되어 있음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고개를 끄덕였던지 아직도 고개가 뻐근하다.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열심히 스펙을 쌓는 이들도 있고, 꿈을 가지고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마냥 기특하지만은 않다. 저자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열심히 스펙을 쌓고 공부를 하고, 독서를 한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고민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나도 과거 이러한 벽에 부딪혔었고, 그래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요즘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자기를 더 채찍질한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자위한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야! 그래봐야 소용없어. 너희들이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해. 그 부분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노력할수록 더 힘들 뿐이야!"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대신 "열심히 해봐. 언젠가는 누가 알아주겠지!"라는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돌아서서 안쓰러움과 미안함, 답답함에 고개를 숙인다.

 

  이 책에서도 많이 말했던 책이 있다. 천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다. 나도 이 책을 몇번 읽었고, 선물도 많이 했지만 그러면서도 "꼰대 정신에 투철한 책"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당장 아픈데 이 순간만 넘기면 괜찮아진다는 공허한 위로가 얼마나 그 친구들에게 공감이 될까?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꼰대짓 같아서 미안하다.

 

  맑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는데 나는 자계서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별히 20대의 아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난도, 이지성, 혜민 등등의 글을 보면서 참 쉽다는 생각, 그리고 옐로우 페이퍼보다 더 해롭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렇게 자계서를 읽고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에 투철한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냥 답답해서 적다보니 끄적거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 두서도 없다. 그러면서도 끄적거리는 이유는 젊은이들이 공감의 능력을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그들에게는 꼰대짓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을 더 이상 괴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더 답답할 것 같아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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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 -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NHK 무연사회 프로젝트 팀 지음, 김범수 옮김 / 용오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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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my opinion, all men are island.

 

  휴 그랜트를 꽤나 좋아하거나, 크리스마스에 잔잔한 로맨틱 코미디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꽤나 친숙한 대사이리라. 본조비의 "No man is an island"라는 말을 비웃으면서 시작하는 독신남의 독백은 이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 섬으로 존재하던 사람이 결국은 섬이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바다 밑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이다. "섬"으로서 존재하던 사람이 "사회"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가는 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잔잔한 교훈이다.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흐름도 이런 것이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우연한 계기를 통하여 사회에 편입하게 되고, 고독한 상태에서 벗어나 관계를 맺어가는 것! 그 과정을 살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힘이 되고, 삶에 대한 큰 위안이 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세상이 그렇게 말랑말랑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음을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이 책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책은 NHK의 기획 다큐멘터리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미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어어서 1인가구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관계로부터 축출되고, 혼자 죽어가는 지를 보여준다. 고향을 더나서 도시 속에서 고독하게 살다가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고독하게 죽어간다. 이런 경우는 대개 죽고나서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발견된다. 심한 경우는 시신이 상당히 부패가 진행된 뒤에 발견되기도 한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사라져가고, 정년 퇴직, 명예 퇴직이라는 온갖 합법적인 제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 혹은 아직 제도가운데 머문다고 할지라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느껴서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섬들은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외로운 섬으로 인생을 마무리한다.

 

  마침 이 책을 읽을 때가 한참 바쁘던 시기였다. 매일 집에 들어가도 아내는 아이들과 자고 있고, 혹은 자고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잠시 후에 잠자리에 들면 내 옆이 아닌 아이들 옆으로 간다. 부모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서 혼자 잠자리에 들 때의 기분은 정말로 "고독"하다는 것이다. 한번은 아내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말했더니 이해해달라,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산다고 한다. 아내의 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운한 것은 서운한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나도 이런 고독을 느끼는데 이 책의 주인공들이 느꼈을 고독이라는 것이 얼마만한 무게로 이들의 마음을 짓눌렀을지는 약간이나마 상상이 된다.

 

  이 책은 일본의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일본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우리나라도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이상태로 몇십년이 흐르면 지구상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멸종해 버릴 것이라는 우스개소리는 공포를 조장하는 쓸데 없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피부에 와닿는 현실이 된지 오래다.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삼포세대라고 부른다. 집이 없고, 자동차가 없고, 결혼이 없는 세대라는 말이다. 혹은 초식남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연애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 세대가 오늘의 젊은이들이며, 오늘도 구직자로 답답한 하루를 보내는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이미 은퇴해버린, 혹은 은퇴가 몇년 앞으로 다가온 젊은이들의 부모 세대들이다. 출산율틀 높이기 위해 현상금을 건다면서 온갖 난리 법썩을 떨지만 젊은이들은 좀체로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가지 해왔던 대로 고독을 강요받으면서, 섬으로 존재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고독사는 점점 늘어만 간다. 부모의 조의금을 받고 시신은 남겨둔채 떠나버린 자식들의 몰상식과 비도덕적인 행위를 지탄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고 누구에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장례식은 가족들이 치러줬으니 말이다. 무연고자라는 한 어 속에 오늘도 많은 이들이 소리없이 고독하게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 시신은 안식을 찾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떠돈다.

 

  스스로 가족을 떠나는 출가가 아니라 고독을 강요받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대안을 마련할 것인가? 그저 한 숨만이 나온다. 다만 이 책의 마지막 주인공이 살아갔던 삶의 궤적이 작은 위안과 희망으로 다가온다. 세상의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표류하는 김씨들에게 어떻게 하면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인가? 더 늦기 전에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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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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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달 전에 종로 알라딘에 갔다가 경험했던 일이다. 난 마음이 답답하면 서점을 찾는다. 교보 문고도 가고, 알라딘 종로점도 가고, 알라딘 대학로점도 간다. 무엇인가 뚜렷하고 사고 싶어서 간다기 보다는 답답하니까, 기분이나 풀어보려는 마음으로 가는 것이다. 여러 책들을 열어보면서 내가 사고 싶었던 책들이 과연 살만한 것인가 점검을 해보기도 하고, 꽤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답답했던 마음들이 풀어지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서점에 들리려고 노력을 한다.

 

  그날도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알라딘 종로점을 찾았고, 이책 저책 뒤적거리다가 최근 6개월 신간 코너에서 평소 내가 관심이 있었던 책들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대 두명의 젊은 처자들이 들어왔다.(왠지 아가씨라고 하면 오해를 살 것 같은 마음에 처자라고 표현한다.) 아마도 대학생, 취업을 앞두고 있는 졸업반인것 같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두 처자가 내 옆에 와서 서더니(결코 나를 보러 온 것도 아니고, 내 가슴이 설렐리도 없는 상황이다.) 인문학 책들을 뒤적거리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재미없고, 취업에도 도움이 안될 것 같은 책들을 뒤적거리는 둘을 보면서 마치 알라디너를 보는 것 같아서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채 3분도 못되어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옆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대화 때문이다.

 

  "OO아 너 그 책 읽어 봤어?"(책 제목이 정확하게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꽤나 재미없는 인문학 책이었다는 것만은 기억한다.)

  "아니. 넌 읽었니?"

  "응 읽었어."

  "그래? 재미있어? 왜 읽었어?"

  "재미는 별로인데 선배들이 읽으라고 하더라고. 취업하는데 도움이 된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인문학이 취업하는데 도움이 된다니...이 무슨 자다가 봉창 뜯는 이야기만 말인가? 그런데 말이다. 이 이해 안되는 상황이 두 사람만의 특별한케이스가 아니라는 것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요즘들어서 인문학이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꽤 읽히는 편인데 그 이유가 취업을 위해서란다. 영어도, 봉사활동도, 인턴 쉽도 모두 고스펙이다 보니까 이젠 인문학이 변별력을 가지게 되었다나 뭐라나...참으로 대단한 자본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인문학마저도 스펙으로 취급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말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복잡한 정의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네이버에서 검색을 해봤다. 네이버 지식 대백과 사전에서 인문학을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영역"이라고 정의해 놓았다. 복잡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이런 저런 이견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인문학이란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학문의 주제로 삼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내 주변에서 사람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심심해서, 재미있으니까, 좋아서라고 한다. 그렇다. 인문학은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출세를 하려고 한다면, 돈을 벌려고 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웃기는 상황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으로 광고를 하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똑같은 생각을 해본다. 자칫 잘못하면 이 책이 사람들에게 성공하려면 인문학을 공부해라는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웅현이라는 걸출한 광고 기획자가 내놓은 광고들(현대인의 생활백서라든지, 박카스 광고라든지)은 광고만으로도 다른 광고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사람들이 광고를 몇번씩이나 들여다 보게 만든다. 나도 박웅현의 광고를 몇번이나 유튜브에서 검색해서 찾아보기도 했다. 박웅현의 광고의 이런 차별성이 어디에서 오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각에서 온다. 그가 남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원인이 무엇인가? 본인은 독서, 특히 문학과 인문학 분야의 책을 깊이 읽는데서 온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인문학 서적을 읽으면 생각의 깊이와 폭이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생각이 커지니 세상을 달리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가 문학과 인문학 책을 읽은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 읽은 것인가? 아니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그가 독서를 열심히 한 이유는 그가 할 일이 없어서였다. 뽑아 놓고 분위기 흐린다고 다른 소리 한다고 일을 주지 않았고,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서 한권씩 읽다보니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의 독서가 그의 일에 도움이 된 것이다. 열심히 책을 읽어도 업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하는 일과 그의 독서가 궁합이 맞았던 것이다. 이러한 전후 맥락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성공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라는 황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요즘 그런 황당한 결론을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해서 책으로 판매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정론이라기 보다는 권도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인문학으로 광고를 한다는 책 제목은 내 마음 속에 껄쩍지근함을 남긴다. 차라리 할 일 없는 자여 인문학책이라도 읽어라가 낫지 않을까? 꽤나 읽어볼 만한 구석들이 있는 책이지만 책 제목에서 느껴지는 얇팍한 성공 지상 주의 때문에 오히려 더 손이 안가는 책이다. 나처럼 할 일없이 읽는 사람, 그냥 좋아서 읽는 사람에게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불온 도서로만 보일 뿐이니 말이다. 또한 인문학이라는 타이틀은 달고 나왔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내용이 전혀 인문학과는 상관이 없다는 판단이 들기 때문에 인문학이 아닌 사회과학으로 분류한다. 광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읽어볼만 하지만 성공을 꿈꾸는 자에게는 자게서보다 못한 책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웅현의 광고가 남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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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1-2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이 경쟁력인 듯 말하는 책을 보면, 인문학 책을 읽으면 다 그리 되는 것처럼 나오지요. 사실 뭔가 결과와 과정을 이상하게 이해하는 것 같아요. 유MC말마따나 한국의 현 사고로는 '창의'해라! 하면 '창의'가 되는 줄로 오해하는 것처럼 인문학 열풍도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saint236 2013-11-29 15:39   좋아요 0 | URL
스티브 잡스같은 인물도 키워낼 수 있다고 믿는 사회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oren 2013-11-30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웅현 님이 몇 해 전 '책은 도끼다'로 붕~ 뜰 때 우연히 그 분의 '강의'를 한 시간쯤 들은 적이 있었어요. 물론 자발적 참여는 아니었고 등 떠밀리다시피 가봤던 강의였는데, 다른 건 몰라도 '어린아이와 같은' 독특한 감성이 유난히 뛰어난 분이로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인문학은 우리의 삶을 속세적 성공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기 보다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깊이있게 가꿔주는 데 가장 큰 보탬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게 곧 인문학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독서의 힘'이겠죠. (매우 길지만) 오래전에 읽었던 신문 칼럼 하나 덧붙여 봅니다.

* * *

독서와 항심(恒心)

운세가 좋지 않을 때는 독서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홀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독립불구’(獨立不懼: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음)하고 ‘둔세무민’(遁世無悶:세상과 떨어져도 근심이 없음)할 수 있는 힘은 바로 독서의 습관에서 나온다. 독서를 통하여 불운을 견딜 수 있었던 사람 가운데는 중세 피렌체 공화국의 서기관이었던 마키아벨리도 포함된다.

마흔셋의 나이에 반체제 사건에 연루되면서 잘 나가던 인생이 곤두박질친다. 직장에서 잘리고, 10년 봉급에 해당하는 액수의 벌금을 물었는가 하면, 감방생활을 거쳤다. 그는 피렌체에서 쫓겨나 시골의 허름한 산장에서 처자식과 함께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였다.

낮에는 주막집에서 시골의 장돌뱅이들과 어울렸지만, 밤이 되면 흙으로 더러워진 평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책이 가득한 서재로 돌아가 독서에 몰입하곤 하였다.

시오노 나나미는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한길사)에서 그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예절을 갖춘 복장으로 몸을 정제한 다음, 옛 사람들이 있는 옛 궁전에 입궐하지… 그곳에서 나는 부끄럼 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물어 보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답해 준다네.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네.”

만약 마키아벨리가 독서하는 습관이 없었더라면 이 시절에 자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양의 식자층들은 어땠는가. 중국 당나라의 관료들은 관청에서 퇴근하면 부인 자식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에 곧바로 서재로 들어가곤 하였다.

가장이 한번 서재로 들어가면 누구도 그 독서를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정년 퇴직을 하면, ‘그 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이제야 마음놓고 실컷 읽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더욱 독서에 몰입하였다고 한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조기 퇴직이 대세이다. 항산(恒産)도 없는데, 항직(恒職)도 없으니, 항심(恒心)도 어려운 ‘삼난항’(三難恒)의 시대가 된 것이다. 삼난항의 시대에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으려면 책을 붙잡아야 한다.

saint236 2013-11-30 20:32   좋아요 0 | URL
저도 답답하면 서점을 찾는 이유가 여기 있지요. 제가 알라딘에 글을 한두편씩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당시 너무 힘들어서 책을 붙잡게 되었지요. 책 읽고 글 쓰고 그러면서 버텼습니다. 물론 글의 퀄러티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요. 다만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끄적거린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책을 붙잡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