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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진다 - 전후 70년, 현대 일본을 말하다
우치다 타츠루.시라이 사토시 지음, 정선태 옮김 / 우주소년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자유한국당 민경욱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4+1 협의체가 취약층의 마스크 지원 예산 114억 원을 삭감하면서 한국당에 설명도 없이 날치기 통과 시켰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국민들의 불안감에 묻어 가면서 정부를 비판하기 위한 전형적인 행태이다. 그런데 이 글은 부메랑이 되어 자한당에게 돌아갔다. 자한당에서는 전액 삭감을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뿐이 아니다. 사태를 제대로 콘트롤하지 못하는 문재인 정부를 비난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몇년 동안 꾸준히 방역 예산을 삭감하고, 방역 인력 충원에 딴지를 걸어서 충분한 인력이 충원되지 못하게 했던 과거의 행태들이 들어났기 때문입니다.
자한당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많은 국민들이 자한당에 대해 미련을 버린지 오래다. 물론 비교적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여전히 자한당을 지지하고, 보수 성향인 사람들도 자한당을 지지하지만 그것은 자한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대안이 없어서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명박이 싫었던 사람들이 정동영을 중심으로 뭉쳤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한당이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습게 생각한다. 한때는 여당이었고, 많은 국민들이 지지했던 정당이 왜 이렇게 쪼그라들었을까? 나는 여기에 대한 답을 '사쿠라 진다'라는 책에서 발견했다. 반성이 없기 때문이다.
패전 후 일본의 현대사는 묘한 모습을 갖게 된다. 주변 국가들은 사과하라고 말하고,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왜 사과하라고 하느냐면서 떼쓰지 말라고 말한다. 일본 국민들이 양심이 무뎌서 그런가? 아니다. 못 배워서 그렇다. 못 배웠다는 말이 무식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배우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패전 후 일본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한 가지 꼼수를 쓴다. 그것은 패전이라는 사실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다. 있었던 사건이 어찌 없어지겠는가? 그것도 수 천년, 수 백년 전의 사건이 아니라 불과 몇 십년 전의 사건인데 가능하겠는가? 일본 지배층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없앨 수 없으니, 일본 국민의 머릿 속에서만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패전이라는 말 대신 종전이라는 말을 쓴다. 2차 대전에서 일본은 연합군에게 패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세 나라는 분명한 패전국이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로 종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전쟁에서 패했다는 말로 패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전쟁은 있으나 그 전쟁에 왜 일어났은지, 그 전쟁에서 누가 패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사실이 사라진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서 일본은 맥아더와 합의를 하는데 천황제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실제적인 정치는 내각에서 하더라고 일본의 상징적인 의미로 천황제는 유지하자는 그럴듯한 논리로 맥아더를 설득했다. 물론 미군이 순진해서 여기에 넘어간 것이 아니다. 소련의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한 교두보로 일본을 이용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안정된 일본이 필요했기 때문에 용인한 것이다. 그런데 천황제 유지가 일본 지배층의 뻔뻔함에 면죄부를 주었다. 독일의 전쟁 주범은 누구인가? 히틀러이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그러면 일본은? 일본의 전쟁 주범은 모호하다. 일본의 A급 전범들이 처벌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상징적인 주범이 없다. 그 주범이 누구이겠는가? 천황이다.(천황이라고 쓰니 기분이 나쁘지만 어쩔 수 없다. 일본의 황제에 대한 정식 명칭이라) 그런 천황을 계속 옹립하고 있으니 자신들의 전쟁에 대한 반성이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전쟁에 대한 반성이 없으니 이후의 행동도 거침이 없다. 양심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른다. 되려 큰 소리 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러면서 주변 국가들을 떼쓴다고 몰아 부친다. 미국의 옥수수는 기꺼이 사주면서 한국에는 물건을 안 팔겠다고, 너희같은 것들에게는 팔 수 없다고 큰 소리 친다. 일본이 속해있는 동아시아에서는 고립되어 가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오직 미국에 가 있다. 그리고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오직 미국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고,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말은 무시한다.
반성이 없는 역사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반성은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그것을 반추하면서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 잘못이나 부족함이 없는지 돌이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미래로 향하기 위해서 반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만 그런가? 한국도 그렇다. 험난한 한국의 현대사는 적폐청산의 시간마저 주지 않았다. 친일은, 친미로, 다시 친러로, 그리고 다시 친미로 돌아섰다. 그 사람들은 변검의 명장처럼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있으며, 적폐청산이라는 말 앞에서 빨갱이라면서, 분열을 조장한다면서, 당시 전 국민이 친일이 아니냐면서 반성을 거부한다. 그 전략이 주효한 것 같다. 어느새 그들의 과거를 알던 이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패전을 모르는 일본 국민처럼 그들의 과거 행적을 모르고 오늘날 그들의 모습만 지켜본 이들에게 반성은 무엇이며, 적폐청산은 무엇이냐는 말이 심심지 않게 나온다. 그런데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하냔 말이다.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안 새는가? 반성을 모르는 그들의 행적은 요즘에도 반복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행적은 잊힐 수 있어도 최근의 행적은 잊힐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이 그들의 과거 행적을 모두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쿠라 진다라는 책은 일본의 현대사의 기묘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기묘함에 대해서도 말한다. 저자의 의도가 아닐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