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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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써클실에 그려져 있던 벽화가 있다.(개인적으로 동아리라는 말이 잘 안나온다. 그래서 편하게 써클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전에 한번 서평을 쓰면서 인용했던 기억이 있는데 정확하게 어디에다 사용했는지 잘 몰라서 대충 넘어간다. 아이들이 굴렁쇠를 굴리고 있는 그림 밑에 "멈추면 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집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스무살 대학 1학년이던 시절 고향 선배들이 밥 한번 사주고, 써클에 놀러 오라고 했다. 그렇게 찾아간 지하실에 위치했던 써클실의 분위기는 나로 하여금 절대로 이곳과 친해지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런 나의 생각을 돌려 놓은 것이 있으니 바로 벽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다. "멈추면 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집니다."라는 글귀는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고, 이 써클에는 무엇인가 있다는 기대감을 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써클에서 매일 선배들에게 아메바 취급을 당하면서 변유가 어떻고, 사유가 어떻고, 사구체가 어떻고 등등등...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그 당시 선배들의 소식이 들릴 때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던 적이 종종 있었다. 어떤 선배들은 배움과는 상관없는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어떤 선배들은 김문수의 변신과 맞먹는 변신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씁쓸한 기억은 이런 것이다.

 

  써클의 대선배와 같은 분이 있었다. 86학번이니 대선배이다. 나랑 11살 차이니 거의 우러러봐야 하는 대선배다. 그 선배 부인이 89학번이다. 87학번 선배와 고향이 같았고, 한때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었기 때문에 종종 아이들을 대신 봐주면서 보모 노릇도 했다. 형, 누나로 부르면서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군 제대후 2년 쯤 지나서 전화 통화를 하다가 누나에게 참 씁쓸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촛불 집회가 한참이었는데 형이 뉴스를 통해 그 장면을 접하고 "우리나라는 종북좌파가 넘쳐나서 큰 일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설마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후배들에게 변유, 사유, 맑시즘을 공부시키는 써클에서 촛불집회를 보면서 좌파 운운하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나도 깜작 놀라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즉각 반문했지만 형의 생각은 확고했단다. 그 이후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둘은 이혼을 했고, 형과의 연락은 끊긴 상황이다. 연락처를 안다고 해도 선뜻 연락하기 힘든 상황이기에 굳이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다.

 

  한때는 실망감으로, 한때는 씁쓸함으로, 한때는 배신감으로 다가왔던 형의 변신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왜 그랬을까? 원래 보수적인 사람이라서? 그 사이에 많은 것을 가져서? 생가이 갑자기 확 바뀌어서? 일정 부분 맞는 대답이기는 하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 형이 그렇게 급작스럽게 바뀌게 된 것은 멈추어 섰기 때문이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달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해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를 들면서 자연스럽게 보수주의가 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꼴통 보수가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사고를 유연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적인 색깔이 약간 다를 뿐이지 행동에 있어서는 똑같이 독선적인 모습이 된다. 약간 다른 정치적인 색도 진보냐 보수냐를 나눌 정도가 아니라 급진이야, 약간 급진이냐, 극우냐 우냐를 나눌 정도로 차이가 거의 없다. 그것을 가지고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 운운하는 것은 개미가 웃다가 허리 부러질 이야기이다.

 

  지승호가 김규항을 인터뷰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왠지 그냥 날로 먹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사서 읽은 이유는 김규항과 지승호라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때문이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고, 읽지도 않았을 책인데 여기에 더하여 50% 세일까지 해주시는 알라딘의 따뜻한 배려에 얼른 집어 오게 되었다.

 

  김규항은 참 독특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사상지도에서 가장 좌편에 위치한다는 그이지만 그의 생각이 그렇게 폭력적이지도 않고 위험하지도 않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가장 좌편에 위치한 사람일까 생각이 들정도이다. 그런 그를 가장 좌편으로 밀어 붙인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좌와 우를 가르는 기준이 신자유주의이기 때문인 것 같다. 민주당을 보면서, 열린우리당을 보면서 좌파라고 부르는 한나라당의 공격과 스스로 진보라 부르는 민주당의 모습을 보면서 김규항은 "웃시고 자빠지네"라는 독설을 날린다. 물론 직접적으로 이런 워딩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뉘앙스는 충분하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노무현도, 김대중도 좌일 수 없고, 진보일 수 없다. 시장 자유주의자일 뿐이지 진보나 좌파가 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전부터 노무현 대통령, 민주당을 보면서 진보라 부르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왔던 차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구나라는 위안을 얻게 된 것도 이 책이 주는 하나의 위안거리다.

 

  김규항의 또 다른 독특함은 그의 좌파관에 달려 있다. 그는 특이하게 한신대학교 출신이다. 한신대학교 출신이라는 것이 특이한 것이 아니라 좌파 진영에 남아서 운동을 하면서도 한신대학교라는 타이틀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좌파 운동과 진보 운동은 기독교 신앙과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정부 들어 이런 생각은 더 심해졌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 낸다고 할지라도 일단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좌파의 태도인데 김규항은 이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기독교 신앙이 좌파 운동에 큰 에너지를 준다고 말한다. 자기를 끊임없이 성찰하지 않는 진보는 변질되는데 자기에 기독교 신앙은 자기를 성찰하게 만든단다.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혁명가가 만드는 세상은 위험하며 혁명을 도외시하는 영성가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제 심리적 평온뿐"이라는 김규항의 말은 우리가 곱씹어 봐야할 말이다.

 

  요즘 통진당 문제가 시들해졌다. 문제가 해결되어서 시들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질질끌고,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대를 접어서 시들한 것이다.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이석기 의원과 김재연 의원이 있다. 한 사람은 문방위에, 다른 한 사람은 기재위에 배정이 되었다. 비례대표 선출 상의 부정 때문에 통진당 내부에 문제가 있었고, 폭력 사태까지 발생했다. 비례대표 전원이 사퇴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도 두 사람은 귀를 막고 있다. "개는 짖어라 기차는 간다"는 식으로 비례 대표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러는 와중에 비례대표 1번 윤금순 의원이 사퇴하고 서기호 디례대표 후보가 의원직을 승계했다. 기쁘지만은 않다는 그의 인터뷰에서 복잡다단한 오늘의 현실이 읽힌다.

 

  지난 선거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실제적인 이유를 들어 통합진보당을 찍은 내가 우습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고민을 했던 것이고, 최후의 최후까지 진보신당과 통합진보당 사이에서 갈등을 했던 것일까? 고작 이런 상황을 보기 위해서, 고작 이런 사람들을 국회에 보내기 위해서 그렇게 고민했던가 생각하니 우습다. 이석기 의원과 김재연 의원을 보면서 예전에 형에게 느꼈던 씁쓸함을 또 맛본다. 486이니, 운동권이니, 민주화 운동이니 말은 많이 했지만 결국 그들도 자기 성찰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그 결과가 통진당 사태가 아닌가?

 

  김규항이 말하는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라는 말은 어느 지점을 직어 놓고 거기까지라는 말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서 자기들이 처한 포지션이 바뀌게 되니 진보를 꿈꾸고, 좌파가 되기를 원한다면 가장 아래쪽, 즉 가장 낮은 계급의 사람들이 처한 자리까지, 그리고 가장 왼쪽 즉 가장 자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리까지 나아가려는 용기와 결단과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용기와 결단과 자기 성찰이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람은 과거의 삶이 어떠했든지 간에 보수로, 그리고 골통 보수로 휩쓸려 내려가게 될 것이다. 물고기가 항상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그리고 필사적으로 헤엄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 진보의 미래는 없고, 좌의 미래는 없다. 오른 날개로만 파닥거리다 지쳐 떨어지게 될 미래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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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리 2012-07-11 0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아요 x10000 누르고싶어요ㅋㅋㅋ

(이글과 맞닿아있는)저의 생각인데요, 학교다닐때 할수있는만큼 극단까지 가볼껄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완전 라디컬하게ㅋㅋㅋ그땐 뭐가 무서워서 몸을 사렸는지..-_- 학교에 있을때, 학생 신분일때 양쪽의 끝을 가볼껄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만약 지금그때로 돌아간다면 더 쎄게, 차라리 한신대에 가겠다 이런생각도 들고ㅋㅋ 뭐 이런얘기할때마다 주변에선 아직 늦지않았다고 말씀하시지만요ㅋㅋ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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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가운데 22번째 자살자가 나왔다. 얼마 전에는 밀양에서 한 할아버지가 분신했다. 조금 더 멀리 보면 한진 중공업의 85호 크레인에서 목을 맨 사람도 있다. 더 멀리 보면 전태일의 분신도 있다.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의 자살에 대해 故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은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가 아니다."라는 싸늘한 멘트를 날렸던 기억도 있다.

 

  비단 노동만이 아니다. 얼마전 카이스트에서 한 학생이 자살했다. 1년전 같은 학교의 교수와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학생만이랴?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불과 몇 달 전 괴롭힘에 견디다 못한 중학생이 목숨을 끊었고, 일진을 무력화 시키겠다고 경찰에서 한창 시끄럽게 학교를 들쑤시고 다녔었다.

 

  생활고에 견디다 못한 일가족이 목숨을 끊는 일도 낯선 일이 아니다. 부모가 목숨을 끊기 전에 자식들을 먼저 죽이는 비전한 현실 앞에서 그저 할말을 잃을 뿐이다. 한편에서는 부모가 너무 비정하다 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죽 했으면 그랬겠냐고 말한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들의 죽음은 자살로 통계가 잡힌다.

 

  한국의 자살율이 OECD국가 중에 1위라고 한다. 그리고 세계 2위라고 한다. 얼마나 되나 싶어서 자살율 통계를 찾아 봤다. 위키백과 사전에서 데이터를 옮겨 왔다.

 

 

  보통 자살율은 10만명 당 몇명 꼴로 기준을 잡으니 파란 그래프는 자살율을 그 좌측에 있는 숫자는 실제 자살자 숫자를 의미한다. 무측에는 하루 평균 자살자 숫자를 의미한다. 이 데이터를 가지고 계산해 보면 2010년 하루 평균 42.6명 자살은 2시간당 3.55명으로 단순 계산하면 40분에 한명 꼴로 자살한다는 말이다. 내가 서재에 글을 남기는 시간이 평균 40분 정도이니 글을 하나 남길 때마다 한명이 자살한다는 말이다. 이 글을 마무리 짓고 등록하기를 누르는 순간 1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이니 무섭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한국이 자살율이 이렇게 높은 이유가 무엇일까? 연예인들이나 유명인들이 죽어서 이를 모방하는 베르테르 효과? 심신의 연약? 실연? 한국의 자살율이 높은 이유에 대해서 평한 한 블로거의 글을 링크해 본다.(http://huntsun.tistory.com/153) 이 글은 한국의 자살율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글인데 이 책의 내용을 한국적인 상황으로 분석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흥미가 있는 분들, 혹은 이 책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글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한국의 자살율이 높은 이유는 흔히 생각하듯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물론 개인적인 문제로 자살을 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정확하진 않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구석까지 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위에서 열거했던 경우들로서 이들의 죽음은 통계상 자살로 잡히지만 그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살이 아닌 타살이다. 그것도 살인범이 존재하는 개인적인 살인 사건이 아니라 이 사회가 살인자인 사회적인 타살이다.

 

  의사 제임스 길리건은 자살과 폭력에 대해서 꽤 흥미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 연구의 결과가 이 책이다. 200페이지 분량의 짧지 않은 책, 그것고 의사가 기록한 전혀 정치적이지 않을 것 같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매우 정치적인 책이다. 미국의 자살과 폭력을 단순히 개인의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꽤 흥미롭다.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했을 때 미국의 자살율과 폭력에 의한 살인율이 올라가는 것과 민주당이 백악관을 차지했을 때 자살율과 폭력에 의한 살인율이 내려가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라는 책 제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길리건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공화당의 정책은 실업과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고 이 수치심이 내부로 향할 때는 자살로, 외부로 향할 때는 살인으로 나타난다고 해석한다. 반면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 양극화를 약화 시키고 팽창 경제 정책을 진행할 때 수치심이 약화되거나 혹은 수치심을 느끼더라도 직업이라는 지지대가 있기 때문에 자살율과 살인율이 내려간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표라는 행위는 단순히 주어진 권리를 행하는 차원을 넘어서 개인이 죽고 사는 문제까지 결정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행위라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고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한 가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기형적으로 높은 한국의 자살율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길리건은 미국의 폭력 치사의 기준을 19.4명으로 잡았다. 폭력 치사는 자살율과 살인율을 합산한 수치이다. 길리건이 19.4명을 기준으로 잡은 것은 의사답게 전염병을 기준으로 잡은 것이다. 기준선 이상을 넘어서 25~26명 선에 육박하게 되었을 때 이는 꽤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는 길리건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옮겨온다면 한국의 2010년은 거의 자살 공화국 수준이다. 폭력 치사도 아닌 자살율만 놓고 볼 때에도 한국은 이미 31명을 넘어선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길리건의 해석을 따르자면 한국의 정치지형은 철저하게 공화당편에 서 있다는 말이 된다. 양극화의 심화, 실업의 증가, 수치심의 강화(특히 한국 사람들은 수치심을 강하게 느끼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니 자살율이 내려올리가 없는 것이다. 진보를 자청하면서도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故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한국의 지형과 사회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실업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수치심 때문에, 존재 이유의 상실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 사회가 모두 공범인 사회적인 타살이라는 말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떤 위로를 할 수 있으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권은? 언론은? 교계는? 그리고 한국 교회는 과연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 것인가? 자살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말로 그들을 두번 죽일 것인가? 약자라 도태된 것이라면서 자기 갈 길을 바브게 갈 것인가?

 

  총선을 치렀고, 대선을 치를 우리는 이들 앞에서 진지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참고로 다른 나라의 자살율도 첨부한다. 이 또한 위키 대백과 사전에서 가져 온 것이다.)

 

 

  한국이 단연 TOP이다. 참고로 2010년 세계 자살율 1위는 리투아니아로 31.5명이다. 한국의 자살율은 OECD 평균의 3배이며 노인과 청소년 자살의 비율이 높다. 청소년 사망 원인 2위는 교통사고이고 1위는 놀랍게도 자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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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2-05-07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살고 싶지 않은 사회...사람에 대한 가치가 없는 사회니까요..

saint236 2012-05-08 00:24   좋아요 0 | URL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요즘 심각하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잉크냄새 2012-05-07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는 자살을 개인의 영역으로 치환시켜 버리고 마네요.

saint236 2012-05-08 00:2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자살자는 의지박약으로 낙인찍어 버리죠. 책임회피요 유체이탈 화법입니다.

transient-guest 2012-06-01 0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멘붕상태로 몰아가는 것에 대한 책임이 더 클텐데 말이죠. 자살하는 그 당시의 심리상태는 이미 정상상태가 아닌거죠, 의지의 문제를 따질 수 없는...

saint236 2012-06-05 11:14   좋아요 0 | URL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역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부분을 인정할 때 국가가 감당해야할 영역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12ㅂㅈ 2012-06-03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람이 살고 싶지 않은 사회... 공감가는 대목이네요..

saint236 2012-06-05 11:14   좋아요 0 | URL
대한민국이 사람이 살고 싶은 사회가 되기를 원하는데 자꾸 반대로 가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합니다.
 
진보의 재탄생 - 노회찬과의 대화
노회찬 외 지음 / 꾸리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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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泥田鬪狗!

 

  쉽게 말해 개싸움이라는 말이다. 원칙도 없고 서로를 물고 뜯기에 급급한 개싸움!

 

  통합진보당의 현 모습이 딱 이렇다. 원칙도 없다. 진보라는 말에 걸맞게 원칙이나 도덕도 없고 오로지 자기 계파의 실익을 위해 물고 뜯는 통합 진보당의 개싸움은 많은 이에게 실망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기 때문에 무슨 상황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 동생 페이스북에 들어가니 왜 이러냐, 실망이다는 멘트를 봤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댓글을 검색하다보니 동생의 지인인듯한 사람이 PD들 하는 짓 변하지 않았다는 독설이 적혀 있었다. 순산 발끈해서 "NL도 마찬가지! 문제는 NL이냐 PD냐가 아니라 어설프게 봉합되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따"는 요지의 짧은 댓글을 달아 놓고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시간이 나자 뉴스를 검색하기 위해 DAUM에 접속했다. 찾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보수 언론에서 이때다 싶어서 통합 진보당을 깎아 내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번 사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는, 그래서 이렇게 늦은 시간 할 일을 뒤로 미루고 끄적거리고 있는 이유는 예비군 훈련에 들어가서 진보의 재탄생이라는 이 책을 봤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놓고 보지 못한책 읽겠다고 자뜩 싸들고 들어가서 3권 일고 왔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책이다. 대담집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그래서 장하준을 타이틀로 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사지 않았다) 대담의 주인공이 노회찬이었기 때문에 구입했고, 약간은 지루하지만 끝까지 읽었다. 책은 노회잔과 김어준, 변영주, 진중권, 김정진, 홍기빈, 한윤형, 홍세화의 대담에 노회찬을 응원하는 노회찬의 팬 우석훈의 글이 적혀 있었다. 노회찬의 일상을 물고 늘어지면서 노회찬의 드라마가 노회찬이라는 정치인 나아가 진보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김어준의 가볍지만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이 땅의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묻는 홍세화와의 철학적인 대담까지 약간 지루하긴 하지만 어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꼭지들로 가득차 있었다. 일식집 요리사에게 특별 대접까지 받는 정치인은 노회찬 밖에는 없을 것이라는 우석훈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괜시리 눈물이 났다. 이 땅에 참 괜찮은 정치인이 하나 있구나라는 자기 위안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나는 노빠다. 노무현의 노빠가 아니라 노회찬의 팬 노빠다. 그렇지만 난 노회찬의 모든 것을 추종하는 노빠는 아니다. 그의 잘못은 충분히 잘못했다고 비판하는 비판적인 노빠다. 개인적인 생각인지 모르지만 노회찬에겐 이런 노빠가 더 잘 어울인다. 대부분의 노회찬을 지지하는 노빠들은 이런 사람들이리라.

 

  내가 노빠라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의 말 가운데 두 가지만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다. 여기에 내가 기꺼이 그를 지지하면서도 비판하는 노빠가 되려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87년에는 정치 민주화를 이야기하는 6월과 요즘의 화두가 되는 경제 민주화를 말하는 7월과 8월이 분리가 되어 있으며 7월과 8월은 87년애서 철저하게 지워졌다는 말이다.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만약 당시 독재 정권을 물리친 기쁨에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자각이 있었더라면 민자의 탄생도(요즘 이슈가 되는 민자는 아니다) 없었을 것이다. 설혹 있었더라도 그렇게 속보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저하게 고립된 7월과 8월은 과연 어디로 갔으며 그 일을 위해서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 7월과 8월을 등에 업고 그저 자파의 실속을 차리기 위하여 욕해대던 그들과 동일한 궤적을 걸어오지 않았던가? 그나마 7월과 8월을 의식하고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온 사람을 꼽자면 정치권에선 노회찬 심상정 정도가 아니겠는가? 그들이 오늘까지 서민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87년 7월과 8월에 빚진 마음을 가지고 그 완성을 위해서 아직도 투쟁하고 있는한 나는 노회찬의 노빠요 심장정의 심빠가 될 것이다.

 

  7월과 8월을 등에 업고 출발한 민주노동당에 대해 내가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첫번째 계기는 권영길이었다. 그가 3번째로 민노당의 대권 후보로 나왔던 순간 엄청나게 실망했다. 마치 자기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의 교만함이 느껴져서 일까? 만약에 노회찬이, 심상정이 이런 길을 밟아 간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이다. 오늘날 그들의 위치는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7월과 8월의 지속을 바라보면서 나아가 완성을 바라보면서 만들어준 자리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민노당의 분당과 통합 진보당으로의 합당, 그리고 개싸움이다. 첫번째가 지지의 이유라면 두번째는 비판의 이유이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의 민노당 탈당과 진보신당의 창당은 솔직하게 이변은 아니었다. 그저 올 것이 왔다는 정도? 진보가 할 일이 NL계열의 일만 있겠느냐, 왜 PD계열의 이야기들은 전혀 들리지 않느냐라면서 민노당에 실망해 갈 때 일심회 사건이 일어났고 그 일을 처리하는 민노당을 보면서 실망을 넘어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철저하게 자기 편을 살리겠다는 패거리주의를 보면서 민노당이 한나라당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 반문했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분당했고, 노회찬 심상정 모두 18대에서 떨어졌다.(김어준의 말대로 역전의 노회찬이 젠틀한 이미지의 엘리트 홍정욱에게 진 것이다) 그렇지만 노회찬 심상정은 김어준의 말대로 떨거지가 되었지만 신념을 지키는 모습이 좋았다.

 

  그런데 약한 진보 세력을 더 약화시키는 몹쓸 사람들로 욕까지 먹어가면서 정치적인 신념을 가지고 진보신당을 만들었는데 뚜렷한 이유도 없이 통합 진보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였다. 진보신당과 민노당의 조합만큼 노회찬과 유시민의 조합도 뭔가 이상했다. 정권 창출을 위해서는 야권 연대를 해야한다는 필요성에 의해서 어설프게 봉합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노회찬에 대해서 처음으로 실망했다. 결국 평당원으로 남길 원했던 홍세화가 대표를 맡으면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 진보신당은 3%의 지지율을 얻지 못하고 해체될 위기에 처해 있다. 위헌 소송을 냈지만 지금까지의 선례에 비추어 본다면 진보신당의 해체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눈을 부릅뜨고 이 책을 뒤져봐도 노회찬이 통합에 반대하는 진보신당의 당원들을 버려두고 통합 진보당에 합류한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반MB라는 요청에 어설프게 봉합되었다는 느낌만 더 강해질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사태가 커졌다. 언론이 사안을 더 키워가고는 있지만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파 사람은 반드시 살린다는 패거리 주의가 더 기승을 부릴 뿐이다. 가카의 꼼꼼함을 비난하려면 꼼꼼하면 안된다. 새누리당의 패거리 주의를 비난하려면 최소한도로 본인은 패거리 주의를 청산해야 한다. 그런데 청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게 과연 진보인가? 진보의 재탄생을 말하는 노회찬의 모습일까?

 

  난 지금이라도 노회찬 심상정이 진보신당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진보신당을 지지하지만 어쩔 수 없이 통합 진보당을 찍은 내가 차마 면목이 없어서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대담했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본인은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고. 생각이 다른데 진보라는 바운더리 때문에 억지로 연합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맞는 말이다. 진보는 분열해야 한다. 니체의 말대로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을 닮아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진보가 분열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새누리당과 싸우다가 새누리당을 닮아가는 진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계속 초심으로 돌아가게 만들기 위해서는 진보 안에도 기존의 진보에 대한 견제의 기능을 하는 또 다른 진보가 있어야 한다. 이게 진정한 진보의 재탄생이 아닐까?

 

  개싸움에 이래저래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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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5-0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본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번 이정희 의원과 통진당 사건 관련하여 그 진실된 진위에 대하여 읽어볼만한 내용이나 사설이 있을까요? 제가 기본적인 앎이 부족하다 보니 지금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하여 접하게 되는 내용의 진위조차 구별이 힘드네요.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saint236 2012-05-08 00:29   좋아요 0 | URL
아마 이번 호 시사인에서 다루지 않았을까요? 일간지보다는 주간지가 좀 더 깊이 다루고 있으니 주간지를 추천합니다. 기사 검색도 일심회 사건(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의 직접적인 원인)과 당권파에 대한 기사도 두루 검색해 보세요. 내일 나올 시사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노보 찬가 - 정글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조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일 읽다가 문득 전우익 선생의 책 제목이 생각이 났다.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나칠 정도로 경쟁에 노출 되어 있다. 어려서는 형제들과의 경쟁에, 조금 커서는 학우들과의 경쟁에, 성인이 되어서는 수없이 많은 타인과의 경쟁에 노출되어 있다. 경쟁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차지하지만 경쟁에서 지면 모든 것을 잃는 승자 독식의 체제에 너무나 친숙한 나머지 잘 살기 위해서 한없이 경쟁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노래했던가?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무한 경쟁의 사회 속에서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결코 멈추려 하지 않는다. 물건에 등급을 메기듯이 아이들에게도 등급을 메긴다. 1등급에서부터 13등급까지! 요즘은 바뀌었는지 몰라도 등급을 메기는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남보다 고작 1점이라도 더 얻는 것이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라 생각하면서 오늘도 아이들은 박터지도록 공부에 매진한다. 그뿐이랴. 성인이 되어서는 직장에, 진급에 목을 맨다. 남보다 연봉을 더많이 받는 것이,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요, 잘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쟁 속에서 전우익 선생의 이름답지 못한, 전혀 우익적이지 않은 진지한 물음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그렇게 잘 살려고 노력하는데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인가?

 

  얼마전 대기업이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오죽하면 신자유주의자의 신봉자 MB께서도 경고를 했던가? 대기업의 빵집 진출, 떡볶이와 순대 판매 진출에 대한 경고였다. 대기업이 자동차를 만들어 팔면서 국민들을 호구로 생각할지라도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불평등을 감수했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렇게 혼자만 다 쳐먹다가 탈난다는 국민들의 분노가 마음에 걸렸던지, 아니면 MB 가카께 밉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슬그머니 골목 상권에서 물러났다. 그렇지만 정말로 물러났는가? 아니다. 여전히 SSM 규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규제에 대하여 대단하신 홈플러스 임원께서는 안국 경제는 수박경제라는 둥, 겉은 파랗지만 속은 빨간 좌파 경제라는 둥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잘나신 그분들에게 묻고 싶다.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가 있는가?

 

  조국은 보노보 찬가를 통하여서 무한 경쟁에 몰입해 있는 한국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경쟁 일변도로 나가는 것이 과연 답인가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진지한 성찰을 해 볼 때이다. 자기 무리들도 공격해서 모든 권력을 독식하는 침팬지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작지만 공존의 의미에 대해서 태생적으로 알고 있는 보노보의 삶의 방식을 소개한다. 좌와 우로 갈리어서, 피아를 구별하면서 상대방을 찍어 내리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은 멀리 보지 못하는 단견이라는 그의 주장 앞에서 보수도 진보도 깊은 성찰을 해야할 것이다.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을 중시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도 웃어넘기며 상대를 끌어안고, 자기 정파의 이익을 먼저 양보하는 포용력과 넉넉함을 보고 싶다는 말랑말랑한 힘을 발휘하는 진보가 보고 싶다는(78p) 조국의 말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직까지는 가야할 길이 멀어 보인다.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은 친이와 친박으로 패를 갈랐으며,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도 자기 정파의 사람들에게 당선을 안겨 주기 위해서 온갖 치졸한 방법들을 동원했고, 민주통합당은 야당의 맏형이라는 간판 아래 자기 당의 이권을 위해 연합의 대상을 깎아 내리고 협박하더니 친노와 비노로 패싸움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러한 정치권을 보면서 실망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을 수 없어서 뛰어든 저자와 시민단체 인사들의 허탈함이,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배신감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아서 더 안타까운지도 모른다.

 

  잘 사는 것 중요하다. 경제적인 번영도 중요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에 앞서서 인간이기를 원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적자생존의 정글이 아니라 약자를 보듬어 안는 따뜻한 사회가 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2012년 한구 ㄱ사회에 더 이상 서울의 찬가가 아니라 보노보 찬가가 울려 퍼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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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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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설(直說 straight talk)!

 

  "바른대로 혹은 있는 그대로 말함"

 

  쉽게 말해 대놓고 말한다는 의미다. 이리저리 뱅뱅 돌리고, 이런 저런 비유를 통해서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고도 간결하게 의견을 표명한다는 뜻일텐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무슨 말이야? 그래서 어쩌라구?"라는 비비꼬인 반응이다.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라는 거창한 부제와는 달리 뭐하나 제대로 씹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고, 쏘지도 못했다. 탈춤의 말뚝이를 기대했지만 말뚝이의 가면을 쓴 양반이다. 왠지 한홍구와 서해성에게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이런 젠장이다. 이 시대의 지성인, 사상가, 정치인들 36명을 불러서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고 했으나 글쎄다. 직설 후기에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고 쓰고 있으니 그런가보다 넘어가지만 글을 통해서는 뜨거운 논쟁은 고사하고 차가운 이성적인 대립도 느낄 수가 없다. 그냥 술먹고 한둘이 모여서 야부리푸는 정도, 딱 그정도이다. 

 

  직설법의 가장 큰 장점은 있는 사실을 팩트에 근거해서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다. 까발리다 보면 사람들에게 욕도 먹을 수도 있고, 억울하게 비난을 당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고수익 고위험이라고 이정도의 리스크는 떠 안아야 말에 힘이 실리고, 생명이 깃든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꼼수라고 할 수 있겠다. 김어준, 정봉주, 주진우, 김용민 나꼼수 4인방은 빙빙 돌리지 않는다. 발언하기 전에 몇번을 법률적으로 검토해 보겠지만 일단 말을 내뱉기 시작하면 결코 빙빙 돌리지 않는다. 정면승부한다. 나꼼수를 두고 견제가 들어가고, 고소하고, 심지어는 무리수지만 감옥에 가두기도 한다. 그래도 그들은 쫄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러한 리스크를 떠안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꼼수에 열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이 내뱉은 말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청자가 판단할 몫이다.

 

  직설에는 이런 것이 없다. 고경태씨의 말처럼 책을 읽다가 주먹을 불끈 쥘 일도 없다. 사람을 불렀으면 뒷담화를 하든, 격렬한 토론을 하든 확실해야 하는데 꿔다 놓은 보릿자루다. 시종일관 서해성과 한홍구가 떠든다. 가끔 양념으로 초대 소님의 말이 들어간다. 몇 시간짜리 대담을 단 몇페이지로 줄이는 것이 힘든 일임은 분명하다. 방대한 양을 논점을 흐리지 않으면서 간단하게 추려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문어체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어려운 말 쓰지 않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혹은 재미있도록 정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직설이라는 대담한 제목을 달고 나왔으면 쉽지 않은 그 일을 해내야 한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다. 논점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말이 구어체도 아니다. 구어체 형식을 빌린 문어체이다. 물론 어려운 말도 사정없이 사용한다. 다시 한번 이런 젠장이다.500페이지가 넘는 이 재미없는 책을 끝까지 읽어낸 내가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책의 제목이 잘못되었다. 直說이 아니라 稷雪이 맞다. 싸락눈을 북한에서는 稷雪이라고 부른단다. 싸락눈의 특징이 무엇이냐? 다른 눈에 비해서 개별적인 눈 결정은 단단하고 크다. 눈에 확 띈다. 그렇지만 안뭉친다. 응집력이 없다. 또한 눈도 눈인지라 시간이 지나고 햇볕을 받으면 녹아버린다. 그러니 싸락눈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각 챕터 초대 손님은 대단하다. 이름 석자만으로 흥미를 유발한다. 리영희, 고은, 박지원, 홍준표, 박원순 등등! 하나같이 굵직하다. 그런데 응집력이 없다. 이 사람들을 초대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모르겠다. 다음 장을 읽으면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까먹는다. 존재감이 대단한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진다. 그러니 싸락눈 稷雪일 수밖에!

 

  졀점 두개 중 하나는 순전히 빵가게님의 직설 때문이다.

 

  "신간평가단 탈락을 기념하며...saint님께 보내드립니다."

 

  이게 더 직설적이지 않은가? "놈현 관장사"라는 말을 두고 절독을 선언한 유시민도, 여기에 호응한 노사모도, 그리고 사과문을 낸 한겨레도, 시껍해한 서해성과 한홍구도 쿨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노무현의 공과 사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야당 노릇 제대로 못하는 민주통합당(당시 민주당)에 대한 직설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어디있겠는가? 직설은 4화로 죽어버리고 그저 싸락눈만 날리고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기꺼이 리스크를 떠안지 못했으니 이런 직설을 들어도 할 말이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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