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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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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 대학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하버드와 MIT를 이야기하겠지만 팟캐스트를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약간 다른 대학의 이름이 나온다. 솔직하게 나도 이 대학이름은 팟캐스트를 통해서 들었다. 그 대학의 이름은 "존스홉킨스 대학"이다. 김용민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대묘사를 하면서 이름을 읊어대던 그 대학, 그리고 팟캐스트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초청 강연을 했던 바로 그 대학이다. 그 대학에서 수십년 동안 강의한 교수들이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라는 이름의 묘한 책을 냈다. 이름만 봐도 이 책이 충분히 정치색이 짙겠구나, 한발 더 나아가서 빨간 물이 든 책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책을 한장한장 읽어가면서 미국의 정치 구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미국의 정치제도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왔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꽤 방대한 분량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이 그냥 빨간 책이네하고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이 책은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자세하게 제시함으로 자기들이 주장하는 것이 신뢰해도 좋은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게 자세하게 제시해 놓은 근거들 때문에 책을 읽어 나가는 것이 여간 피곤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역사적인 상황과 정치적인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본문과 각주를 오가다 보면 책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조차 까먹기 일쑤이다.

 

  46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민주주의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가 효율적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기 위하여 전문적인 관료조직을 만들어 내면서부터 사람들은 정책에서 자발적으로, 또한 비자발적으로 거세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움직이기를 원하고, 그렇게 이끄는 방향으로 정책을 만들어 왔고 그 결과 어떤 사안에 대해서 집단적인 정치행위가 이루어지는 대신에 개별적으로 소송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마저 국민보다는 법원의 판결에 더 의지하게 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국민은 정치적인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기업의 고객으로 전락해 버리고, 본인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정책에 대해서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는, 그리고 정치인들은 국민의 동원을 최소한 억제하여 예측가능한 범위 안에 두고 싶어한다. 이게 이 책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책을 덮으면서 이것이 남의 나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지난 총선과 대선을 통하여 이미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목격하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십대들의 우발적이고 철없는 치기라는 결론이 내려진 디도스사건, 터널 디도스사건, 투표시간 연장 논란 등은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 유권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들은 과거 3공이나 5공시절처럼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국민들의 투표율을 올려서 서로가 예측 가능한 범위를 뛰어넘는 위험을 무릅쓰는 대신에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로 나누어서 각자의 지분만큼 가져가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자기들의 기득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누리당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당도 마찬가지고, 다른 당들도 마찬가지다. 미국처럼 정당이 정치색에 기반하기 보다는 한국처럼 지역색에 기반을 두게 될 때 이러한 현상은 더 두드러지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입니다. 꼭 투표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투표를 방해하기 위한 고난이도의 수법들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투표 인증샷을 올리면 그들을 칭찬하고 독려해도 부족할 판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명목하게 투표 인증샷을 올리는 것에 대해 심적인 부담감을 갖게 만들어 놓지 않는가? 심적인 부담감은 안할 확률을 높이는 것이며, 이것은 투표율 저하로 이어짐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지 않는가?

 

  한국의 정치인들도 국민을 국민으로, 대화와 소통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동원의 대상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시혜를 베풀어야하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혹은 가끔 자기들이 언론 앞에서 비장한 모습으로 국민의 뜻을 따르겠다는 말을 할 때 악세사리로 등장할 뿐이다. 선거철마다 시장에 가서 손을 잡아 주면 그저 감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존재로 남아 있기는 바라는 지도 모른다. 이런 정치 풍토 속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도 다운사이징 되고 있고, 혐오감이 팽배하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꽤나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내지 않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조금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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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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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섭이 대세다. 과거에 간학문, 학문간의 대화라는 말을 통섭이라는 세련된 말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이 어느날 갑자기 뚝떨어진 것은 아니다. 과거 학문이 오늘날처럼 세분화 되기 전에는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과학자 안에서 이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우리가 과학의 대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철학과 인문학, 예술과 같은 일에도 조예를 보였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과학자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철학자나 예술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수도 있다. 대가들 안에서 과학과 인문학이, 철학이, 그리고 예술이 정리가 되어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서 전혀 새로운, 그리고 놀라운 이론과 업적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더 발전할수록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세부적으로 구분이 되기 시작했다. 물리와 화학이, 생물학이 구분이 되기 시작했고, 각 분야도 여러가지로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똑똑한 바보들이 양산되기 시작됐다. 자기 분야에서는 천재적이라 할 수 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무지한 사람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과학의 세분화는 일반과 과학의 괴리까지 불러오기 시작했다. 과학은 머리아픈 학문, 혹은 천재들만 하는 학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호기심이 사라진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과거 어린 시절에 카메라, 시계 수도 없이 뜯었던 기억이 있다. 그냥 궁금했다. 이게 왜 찍히지? 이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지? 뜯은 다음에 재조립 하지 못해서 버렸던 시계도 한두개가 아니며 이 때문에 부모님께 혼났던 것이 얼마던가? 나중에는 비디오, 카메라, 텔레비전까지 관심을 넓히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서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원리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마 그 모습 그대로 성장했다면 과학자가 아니면 고물상 둘 중에 하나는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전제품을 뜯어보는 장난들을 통해서 과학이란 우리의 삶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도, 마법처럼 신비로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었고, 일상과 과학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지나가면서 신기한 물건을 보면 저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것일까, 저 건물에 실린 하중은 얼마나 할까 등등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는데 요즘 아이들의 대화는 조금 다르다. 호기심과 경이감은 사라져 버리고, 얼마일까, 신제품이네라는 생각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다. 과학적 사고의 출발인 호기심은 이미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아마 이런 위기의식이 이 책을 의도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과학이란 일상과 괴리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건물, 가전제품, 심지어는 장난감에도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혹은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서 서로에 대해서 자극을 주어 창의력을 계발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이런 시도는 실패로 보인다. 똑똑한 놈 둘이 만나서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그것을 지켜보는 일반인들까지 그 이야기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풀어줘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대담집이라는 특성답게, 더군다나 오랜 시간에 걸쳐서 여러가지 대화의 주제를 가지고 행해졌던 대담들을 모아 놓은 책답게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책장은 넘어가지만 계속 내가 왜 읽고 있을까라는 의문만이 들 뿐이다.

 

  대체로 이런 대담집이 지니는 한계일것이고, 더군다나 과학이라는 조금은 딱딱한 내용을 주제로 다룬다면 그 한계는 더 분명해질 것이다. 각 장별로 다루고 있는 내용도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기보다는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다가 지나가버린다. 결국 사이언스 이즈 컬쳐라는 제목이 전하고자 한 과학과 문화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은 사라져 버리고, 과학자와 문화 쪽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노가리만 남았다. 제목만 좋은 책이랄까?

 

  알라딘 서평단을 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울 때가 이런 때다. 원하지 않는 책인데 읽고 서평을 써야하니 시간도 못지키고, 충실도도 약하고... 솔직하게 별 하나도 아까운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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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3-0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은 그냥 과학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목이 화려할수록 외면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마 그래서 놓치는 책들도 많을겁니다. 하지만 본질은 따로 있고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의 노가리만 남았다는 saint님 말씀에 공감부터 가는걸요.

saint236 2013-03-06 22:44   좋아요 0 | URL
정말 노가리만 남았습니다.

transient-guest 2013-03-10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는 요즘 특히 한국에서는 조금 과도하게 인용되고 회자되는 느낌입니다. 사실 이분은 꾸준히 같은 얘길 계속 해왔는데 말이죠. 과학이야기에도 이용되는줄은 몰랐네요.

saint236 2013-03-10 12:54   좋아요 0 | URL
아무 곳에나 촘스키를 가져다 붙이고 세일즈를 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22장*2이면 44명의 대담자인데 그 중 한명인 촘스키를 저자로 떡하니 내세운 것은 다분히 불순하다고 하겠죠...

transient-guest 2013-03-12 03:52   좋아요 0 | URL
제가 그렇게 속아서 산 책이 있어요. 촘스키처럼 어쩌고였나?ㅎㅎ 보다가 말았습니다. 촘스키스러운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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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책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역시 공지영이라는 감탄사를, 어떤 이들에게는 빨갱이라는 색깔론을, 어떤 이들에게는 쌍차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책이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책가운데 이정도로 파장을 일으킨 책이 몇권이나 될까? 그것도 문학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말이다. 그뿐이겠는가? 이 책을 더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바로 저작권 문제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덮고 가야한다는 쪽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는 양쪽이 팽팽하게 맞섰다. 난 아직까지도 도대체 뭐가 옳은지 모르겠다. 다만 공지영씨가 조금만 더 민감하고 겸손하게 반응했더라면 좋지 않았게나 싶다. 어찌되었거나 공지영씨는 글로 먹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상위 클래스에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공지영씨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더 느긋하게, 조금만 더 여유있게 반응했었더라면 이 문제로 소모되었던 에너지를 쌍차 해고자들에게 더 실어 줄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냥 아쉬워서 하는 말이다. 쌍차 문제가 아닌 저작권 문제로 시끄럽게 되면서 난 이 책을 읽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아마 그 문제가 그렇게 크게 불거진 것은 논점을 흐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풀린 것은 아닐까라는 소설을 써본다. 그 문제로 이 책을 읽기를 주저하거나 혹은 포기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책 가방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만지작 거리던 책을 당구장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는 사이에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구, 골프, 야구와 같이 작은 공은 절대로 가지고 않겠다는 쓸데없는 똥고집을 가지고 있는 내가 당구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독서와 후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당구장에서 준 음료수를 축내는 것밖에 없었다. 옆에서 친구들이 2:2로 당구를 치고 있을 때 지루해진 나는 의자놀이를 폈다. 그리고 정확히 20초 후 천장을 바라보면서 눈을 심하게 깜빡거렸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얼마나 당황스러운 시츄에이션이겠는가? 친구들이 옆에서 당구치고 있는데 30중반의 남자가 당구장에서 책을 읽다가 눈물을 뚝뚝흘린다면, 그리고 펑펑 울어버린다면.. 이틀동안 열심히 읽었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쌍차 해고자들의 삶과 고통이 손에 잡힐듯 했다. 당장이라도 대한문으로 달려가 함께 울고 싶었다. 물론 아직까지 대한문에 못나갔지만 그렇다고 쌍차에 대한 내 관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에 대한 내 관심이 더 깊어져 가고 있다. 쌍차라는 말만 나오면 유심히 기사를 살펴본다.

 

  의자놀이라는 제목이 기가 막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감이 있으니 공지영이라는 작가의 책이 대중에게 읽히는구나 싶었다. 쌍차의 상황을 이렇게 정확하게 비유하고 있는 단어가 또 어디있겠는가? 어릴적 누구나 다 한번씩 해봤던 놀이다. 사람수보다 한개씩 의자를 적게 놓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의자 주위를 돌다가 사회자의 신호에 맞추어 자리에 앉는다. 자리가 없는 사람은 탈락이다. 사회자가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놀이를 진행한다. 최후의 승자는 사회자로부터 아주 소소한 선물을 하나 받고 박수를 받으면서 게임이 끝이 난다.

 

  이 게임을 가만히 뜯어 보면 게임을 유지하는 룰이 상당히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낀다.

 

  먼저 사회자를 살펴보자. 세상의 어떤 일이든지 리스크를 가지고 있다. 다만 리스크가 미미하냐, 커다랗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게임을 진행하고 탈락자를 설정하는 사회자는 그 어떤 리스크를 가지고 있지 않다. 탈락의 위험도 없고, 심지어는 주변을 도는 수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어떤 사람을 아웃시킬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사람들의 행위와 분위기를 보면서 탈락시키고 싶은 사람에게 불리한 타임에 신호를 줌으로 그 사람이 안고 있는 탈락의 리스크를 극대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의 참가자들은 오로지 사회자에게 집중하고 사회자의 신호에 일사분란하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즉 사회자는 그 어떤 리스크도 없이, 그 어떤 수고도 없이 게임을 지배한다.

 

  쌍차 해고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투쟁의 대상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힘을 휘두르고, 룰을 지배하는 사회자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그 어던 리스크도 감당하지 않는다. 리스크가 무슨 말이냐? 오히려 그 위기 속에서도 절대적으로 이익을 추구한다. 결국 모든 리스크와 비용은 게임처럼 사회자가 아닌 가장 큰 피해자들이 탈락한 순서대로 감당하게 된다.

 

  다음으로 게임이 진행되어 갈수록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 심화된가는 것이다. 10명 중에 한명을 탈락시키는 것은 그렇게 큰 경쟁이 아니지만 의자의 숫자가 줄어갈수록, 의자의 갯수를 줄여가는 사회자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함게 의자 주변을 도는 이들을 적으로 간주해 버린다. 함께 멈추어서 게임 끝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파블로프의 개처럼 사회자의 신호에 무비판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반응해 버린다. 만약 의자가 아닌 총이 주어졌다면 기꺼이 그 총을 상대방에게 겨누고도 남았을 것이다. 산자와 죽은자로 편을 가르고 사측에서 노측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 구사대 등이 그러한 모습들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큰 리스크를 안고 게임의 승자가 된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이 고작 껌이나 사탕같이 소소한 것들, 커봐야 문화상품권 한장 정도라는 것이다. 내 친구들의 엉덩이를 밀어내고 넘어뜨리면서까지, 매 단계마다 살아남았다는 희열을 맛보면서 가슴을 졸인 결과가 고작 그 정도라는 것이다. 쌍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이 무엇인가? 사람도 잃고, 긍지도 잃고, 평화도 잃었다. 이웃도 잃고 공동체도 잃었다. 대신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더 열악한 작업환경, 삭감된 월급통장, 마을 주민끼리의 반목과 갈등이 아닌가? 그들이 목숨걸고, 친구들과 친지들까지 잃어가면서 지키려고 한 것이 인상된 월급도 아닌 동결 혹은 삭감된 월급이요, 복지였던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바락바락 애쓰면서 경쟁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찌 해야하는가? 당장 게임을 멈추고 룰을 개정해야 한다. 의자에 앉지 못한 이에게 칼락이 아니라 1분간 퇴장시킨다고 생각해 보자. 1분이 지나고 나면 퇴장자가 다시 게임으로 복귀한다. 소위 말하는 패자부활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회자도 게임의 일원임을 이해시키면서, 리스크를 분담하도록 해야 한다. 주어지는 상도 한 사람에게 줄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준다든지, 혹은 그러한 상 자체를 없애버리든지 하면 오히려 더 긴 시간동안 게임이 진행될 수가 있다.

 

  "다같이 죽자는 말이 아니라 다같이 살자는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다. 다같이 죽는 것도, 일부의 희생을 대가로 일부가 살아남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함께 생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다수가 조금씩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이 가능하도록, 그리고 지속되도록 다수가 조금씩 양보할 수 있도록 룰을 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와락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연대한다. 다같이 살기 위해서 룰을 바꾸려고 애를 쓴다. 여기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면 좋겠다. 대한문을 가는 것도 좋고, 쌍차를 위해서 식사 한끼를 찾아가서 먹는 것도 좋겠고, 십시일반으로 모급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같이 살기 위해 룰을 바꾸려는 연대, 그 연대가 24번째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젠 의자를 그만 치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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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02-20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쌍용자동차 같은 문제는 말씀처럼 패러다임 자체를 고치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노사분규도 결국은 같은 시스템, 같은 원리안의 이슈니까요. 다만 현대기업구조에서 과연 그런 방법이 도입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공지영 작가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죠. 개인적으로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인 문제에 참여하는 의식만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saint236 2013-02-20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겠지요. 이익 추구가 최우선인 기업의 속성상 반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더 크겠지요. 그렇지만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감이 형성된다면 새로운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까요? 아니요.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녀 세대들은 어떤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박근혜 후보가 당선이 되고 난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높은 곳으로 계속 올라가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봅니다.

세실 2013-03-0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씨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의식있는 작가도 필요하죠. ㅎㅎ
작년에 태풍이 한참 심할때, 공지영 의자놀이 북 콘서트인가 갔다가 얼굴만 보고 내려온 적 있습니다. 집에 오지 못할까봐 많이 무서웠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아쉽네요.

saint236 2013-03-03 16:4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전 북콘서트에 한번도 가보지 못해서 어떤 스타일로 진행이 되던가요? 꽤 궁금하네요.
 
사람 냄새 :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 평화 발자국 9
김수박 지음 / 보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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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가족!

 

  한때 삼성이 밀었던 모토다. 고객을 가족처럼, 사원을 가족처럼 여기겠다는 말로 받아들여져서 "오..저런 금쪽같은 슬로건을..."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부터 삼성이 말하는 가족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막말 김용민 선생께서는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을 "또 하나의 가좆"이라는 말로 패러디 하실 것이 분명하다. 김용민이라면 하고도 남았을 농담이니 분명히 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들어보지 못했겠지.

 

  잠시 19금 이야기로 흐를지도 모르겠지만 "또 하나의 가좆"이라는 말을 통해서 삼성이 사원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좆"이라는 말은 남성의 성기를 속된 표현으로 부르는 말이다. 정력에 좋다면 뭐든지 먹어치우려는 습성이 있는 남성들에게, 특히 한국의 남성들에게 "ZOT"라는 것은 참 중요한 신체의 일부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면 어떨까? 만약 남자가 태어나면서 여분으로 "ZOT"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할까? 물론 보호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여분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니,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가차없이 포기해버릴 것이다.

 

  왜 내가 19금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ZOT"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 삼성에게 노동자가, 고객이 꼭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많은 대기업들이, 특히 삼성이 왜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과 동시에 욕을 먹는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는 포기할 수 있다"는 태도에 있다. 기업에게 고객은 자기의 물건을 사주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객의 need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다. 행여라도 고객이 클레임을 건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고객들의 불만에 대처할 것이다. 기업이 작을수록 더욱 이런 불만에 민감한 태도를 취한다. 그렇지만 선두 기업이 되면, 대기업이 되면 그러 불만에 대해서도 둔감해지게 된다. 왜 그런가? 굳이 그 고객이 아니더라도 대체할 수 있는 고객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국제 무역이 활발한 시대라면 국민기업이라는 말이 무상하게 자국의 고객들에게는 더 소홀할 수밖에 없다. 왜냐구? 단순하게 좋은 물건과 서비스를 산다는 차원이 아니라 애국심이라든, 국민을 먹여살린다든지 하면서 다른 돌파구를 찾을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대기업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이것이 기우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돈을 주고 자기 물건을 사는 고객에게도 그런데 자기가 돈을 주고 고용한 노동자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것을 막는 투쟁의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조직이 노조다. 그러니 이 노조라는 것이 기업가에게 얼마나 불편한 존재이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불편하다고 해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 그들 또한 기업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식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가족이 아니던가? 물론 자기들이 돈을 주고 고용한 노동자들이 자기업의 물건을 사주는 고객이 된다는 이해타산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애증의 관계 속에서 공생하는 것이 기업과 노조의 관계이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자회사의 노동자를 가족이 아니라 기계 부품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굳이 그 사람들이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고객을 충분히 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면, 아니 그런 똥배짱이 있다면 둘 사이의 관계를 매우 달라진다.

 

  여기에 삼성 나아가 대기업이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의 비밀이 숨어 있다. 과거에는 자기 회사의 노동자들이 물건을 사주는 주 고객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우대하고, 보호해야했지만, 이젠 그들이 고객으로서 차지하는 비중과 구매력이 과거에 비하여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은 가족이라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가좆이라는 개념으로 사원들을 대하기 시작한다. 보호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포기할 수 있다. 이것이 대기업들이 사원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다만 삼성은 그 정도가 유달리 더 심할 뿐이다.

 

  과거의 기업의 태도로 본다면, 현대라는 기업에 밀렸던 그 시절의 삼성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삼성의 무노조 경영이라는 허울 속에서 행하여 지는 미행과 노조파괴와 해고가 이렇게 대놓고 행하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후의 보루요,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다른 대안이 있다. 그러니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 거리면서 버릴까 말까 고민할 이유가 없다. 설령 고민을 한다고 해도 그렇게 만지작거릴 이유가 없다. 그냥  한번 쓰고 버리면 된다.

 

  이것을 장기에 빗대어 생각해 보자. 장기를 둘 줄 아는 사람들은 졸과 차의 중요성이 다른다는 것을 안다. 차는 2개다. 위력도 막강하다. 졸은 5개다. 졸 개개의 능력은 정말 약하다. 그러니 둘 줄에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차대신 졸을 포기한다. 이것이 장기의 기본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기를 오래두다보면 졸을 포기하는 것이 처음과 많이 달라진다. 처음 장기를 배울 때는 졸 하나를 포기할 때에도 심사 숙고를 한다. 그러나 몇 번 장기를 두면 습관적으로 졸을 포기하게 된다. 대용품이 많다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막판에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졸이다. 졸이 몇개 남아 있는가에 따라서 판세가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그때 가서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왜 일찍 그렇게 버렸을까? 지금 삼성에게 사원은 쉽게 포기해도 되는 졸이다. 대용품이 아직 많이 있다. 그러나 막판에 이 졸의 무게는 전혀 달라지듯이 위기를 겪을 때 사원의 무게는 달라진다.

 

  삼성이 지금 잘나간다. 정말 잘나간다. 그래서 사원을 가족이 아니라 대용품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영 마뜩치 않다. 세련되기는 했는데 사람냄새가 안난다. 수더분하다고 하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온통 수치만 가득한 것 같다. 수출 얼마 달성, 한 주에 얼마 등등. 그래서 더 사람 냄새를 지우기 위하여 경영혁신이라는 향수를 뿌린다. 사람냄새를 지우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한다. 그러다보니 삼성에 입사한 사람들은 오직 한가지만 생각한다. 젊을 때 바짝 벌어서 내 사업을 차려야겠다. 여기에 미래가 있을까? 삼성이 사원을 가좆으로 생각하지 사원도 삼성을 가좆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내겐 이 포장이 또 하나의 가족으로 대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족을 구하겠으니 너를 포기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백혈병 문제는 지엽적인 문제다. 대상자들에게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지만, 관망자에게는 백혈병 문제는 병의 본질이 아니라 나타나는 증상이다. 우리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연대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여기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된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문제의 본질을 바로 잡아야 한다. 안그러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냄새 나지 않는 기업에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부품으로 취급받게 될 것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대체될 것이다. 난 삼성에서 사람 냄새가 나길 원한다. 삼성은 물론이고 다른 기업에서도 사람 냄새가 났으면 좋겠다. 사람 사는 세상, 경제 민주화? 어려운 말로 빙빙 둘러서 표현하지 말자. 사람냄새라는 말, 이외에 무슨 말이 필요한가?

 

  머리가 복잡해서 두서 없이 적다보니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의자 놀이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보면서 울컥 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꼭 한번씩은 읽혔으면 좋겠다. 황상기씨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냄새 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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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3-01-12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인트님, 어쩜 이리 깔끔, 완벽, 임팩트 강한 글을 쓰시는지...
음미하면서 읽게 되는... 사람냄새 나라 하시는데,전 님의 인간적 글 냄새에 취해 그만^^*
내공 장난 아닌 게 보이니 또 한 수 배우고 갑니다.

saint236 2013-01-13 17:3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두서없이 썼는데 못다한 말들이 많네요. 시사인 삼성 백혈병은 산재가 맞다는 기사를 링크하려다가 그것도 못하고 말았네요.

transient-guest 2013-01-1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력한 법제와 실행이 필요한데, 지금 한국의 법은 기득권의 것이죠. 이런 이슈는 결국 시민의식이 더 성숙해지면서 함께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삼성제품이 좋아도 쓰기 싫어지는 이유가, 사원과 구매자를 그렇게 취급하기 때문인 듯 합니다.

saint236 2013-01-16 10:42   좋아요 0 | URL
법은 만명에게만 평등하다는 노회찬 의원의 말이 가슴 속에 확 박힙니다.

드림모노로그 2013-01-17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족중에 삼성 다니시다가 퇴직하신 분이 있는데
삼성 드만두시고 거의 폐인이 되셨어요 ㅠ.ㅠ
그냥 갑자기 글을 읽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군요 ..멋진 서평 잘 보고 갑니다 ^^

saint236 2013-01-17 18:14   좋아요 0 | URL
제 주변에도 삼성을 다니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 모두 공통적으로 삼성을 평생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기업이 대우하는대로 직원들이 기업을 생각하는거죠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김종배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1998년에 개봉했던 영화 중에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다. 위에 있는 포스터를 한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것이다. 영화의 기본 포맷은 단순하다. 한 쇼프로그램 기획자가 기상 천외한 교를 기획한다. 한 아이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까지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하는 것이다. 거대한 세트를 만들고 트루먼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주인공으로 쇼를 진행한다. 트루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연기하는 배우들이다. 그의 아내도,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배우다. 트루먼은 소소한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설정이다. 다만 트루먼만 모를 뿐이다. 평범한 일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던 그가 어느날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현실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끝을 향해 나가보기로 결정한다. 태풍이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서도 투루먼은 굴하지 않고 결국 세계의 끝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세계의 끝은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목숨 걸고 뚫고 나왔던 풍랑도 사실은 사람이 만들어낸 장치일 뿐이었다. 만약 그가 눈 앞에 보이는 풍랑에 굴복하여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이 모든 것이 쇼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트루먼이 품었던 일상에 대한 의심은 그를 진정한 현실의 세계로 인도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팟캐스트가 유행했다. 주로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 젊은 층들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뉴스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땡전 뉴스와 대한 늬우스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로만 알았던 사람들에게 MB헌정 방송은 의심을 품기에 충분할 정도로 저질이었다. 그들의 의심은 보다 진실에 가까운, 팩트에 근거한 뉴스를 찾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나꼼수가 있었다. 과거 컬투쇼를 들으며 낄낄대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나꼼수를 들으며 낄낄대기 시작했다. 나꼼수가 다루는 재료들이 컬투쇼와 비교할 수 없는 딱딱한 것들이다. 정치 경제, 종교, 외교 등등! 그런데 사람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두서없이 떠들어대는 술자리 뒷담화 같은 나꼼수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과거 PD수첩을 꼼꼼하게 챙겨듣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장 비정치적인, 그래서 정치인들로부터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던 20대 들이 나꼼수의 업데이트를 목빠지게 기다리기 시작했다.(너무 과한 말이라 생각하는가? 절대과한 말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언제 20대를 위한 정책을 편 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20대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표로 인식을 했더라도 그렇게 20대를 무시하는 정책을 펴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금 지나면서 나친박, 나꼽사리 같은 유사 팟캐스트들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나도 들어봤는데 꽤 재미있더라. 그런데 참 묘한 것이 나꼼수 나꼽살, 나친박 같은 방송을 챙겨듣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털남도 즐겨 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처럼 라디오 방송을 타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이털남이 재미있나? 아니다. 솔직하게 재미없다. 요즘들어 진중권이 등장하면서 약간 재미있어지기는 했지만 이털남은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다른 팟캐스트들이 사용하는 비속어도, 욕도 사용하지 않는다. 다른 팟캐스트와 비교하면 이털남은 성인군자처럼 군다. 때론 그게 아니꼽기도 하다. 그런데 말이다. 그게 참 묘하다. 아니꼽고, 때론 지루하게 느껴지면서도 지속적으로 챙겨듣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재미? 아니다. 속 시원함? 아니다. 듣고 있으면 더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런데도 왜 듣는가?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이슈들을 한번 꼬아서 그 속내들을 탈탈 털기 때문이다. 매일 접하는 일상에 대해서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일이 비록 힘들고, 피로하기는 하지만 트루먼 쇼에서 탈출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이털남을 책으로 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나꼼수처럼, 나꼽살처럼 방송 내용을 정리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털남의 기본 포맷과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실제 있는 뉴스들을 한번 비틀어서 그 안에 담긴 팩트와 허구를 구분해 내는 방법들을 가르쳐 준다. 보수쪽에만 혹은 진보쪽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김종배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그 안에 담긴 팩트와 허구를 구분해 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방법이 투루먼 쇼와 같은 이 세상을 탈출하기 위해서 꼭 필요함을 역설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의심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주의를 가지고 네이버를 검색해 본다. 왜 하필 네이버인가? 다른 포털에 비해서 조작의 냄새가 유달리 강하게 나기 때문이다.(얼마전 네이버에서 행했던 검색어 조작에 대해서 여러가지 물증이 나오지 않았던가? 아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박근혜 콘돔"이라고) 중요한 이슈들도 많은데 초기 화면 기사의 대부분은 예능 방송을 보고 한두줄짜리로 작성된 기사다. 어느 여자 연예인이 옷을 벗었네, 아찔하네, 뒷담화는 이런 것이네 등등. 아무리 나영석 PD가 인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KBS에 사표를 내고 종편으로 간 것이 대선후보들의 정책보다 더 중요하기야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능으로 도배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다시 만들어 내기 위한 우민화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오늘자 보수 신문의 기사들은 이정희에 대해서 깎아 내리기에 열심이다. 그가 했던 말이 무엇인지, 팩트가 무엇인지는 관심이 없다. 박근혜가 불쌍하다, 이정희가 무례하다, 옛날에는 똑똑했는데 지금은 바보같다 등등. 게다가 묘하게도 문재인과 안철수의 지지율은 오르지가 않고 떨어지기만 한다. 박근혜가 민혁당 드립을 쳐도, 아버지의 과오를 시인하는 순간에도 박근혜의 진정성을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박근혜가 그날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안고 울었다는 시덥지 않은 기사만 전면을 도배한다. 언론 조사 기관도 묘하게 조금씩 다르다. 문재인은 과거에는 노무현 꼬붕이요, 지금은 안철수하기 나름이라는 식으로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프렘임을 짜기에 급급하다. 그 어디에도 팩트는 없다. 제대로 된 기자라면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오늘 유시민이 안철수에 대해서 쓴소리를 했다. 안철수가 정권 교체를 위해서 백의종군하겠다면서 후보를 탈퇴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문재인을 후원하지 않고 삐친 것처럼 한발 뒤로 물러나 있다. 이것을 보고 안철수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 정권 교체를 위해서 백의 종군하겠다면 문재인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 옳다는 쓴소리를 했다. 내가 보건데 옳은 이야기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안철수 지지자들에게 유시민의 말은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 기사를 쓰자면 전자나 후자의 입장에서 팩트에 근거해서 기사를 써야 한다. 유시민의 말에 찬성한다면 왜 찬성하는지 반대한다면 왜 반대하는지를 서야 한다. 그렇지만 보수 언론들은 대부분 유시민은 원래 싸가지 없는 놈이었고, 지금도 싸가지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기사를 썼다. 물론 직접적으로 싸가지 없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다만 묘하게 그런 뉘앙스를 풍길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의심을 해야 한다. 왜 그럴까? 박근혜를 편드는구나라는 타당한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의 근거를 찾기 위해 그 신문사의 박근혜와 문재인 안철수에 대한 기사를 검색한다. 한시간내로 타당한 근거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가끔 이 과정이 귀찮은 사람들은 "어허 저런 유시민은 정말 싸가지가 없네. 문재인은 문제네, 박근혜 불쌍해라. 이정희는 종북이군."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안에 안주한다. 모 신문사들이 제공하는 트루먼 쇼 세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의심하는 것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그 힘든 일은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 보다 나은 미래로 우리를 인도한다. 더군다나 이렇게 언론이 엉망인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을 의심하라.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팩트를 구별하라. 다음으로 거기에 근거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라. 그 일이 비록 폭풍을 뚫고 가는 것처럼 힘들지라도 당신을 트루먼 쇼 세트장 밖으로 인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마지막 1/3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부분은 괜히 어설프게 들어갔다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에 대한 책이라면 이보다 얼마든지 좋은 책들이 널려 있으니 말이다. 물론 김종배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늘도 나는 이털남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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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8 0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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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8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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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02: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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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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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1 14: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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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2-18 10:25   좋아요 0 | URL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 것만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줄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근본주의라는 것이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개지기 마련입니다.

숲노래 2012-12-09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신문도 방송도 안 보면서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가면 되리라 느껴요..

saint236 2012-12-10 18:09   좋아요 0 | URL
앗...그런 극단적인 방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