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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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 시위가 장기화 되면서 언론은 특히 신문은 완전히 두 편으로 나뉘어 버렸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우파 신문과 한겨레, 경향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좌파 신문으로 나누어졌다. 둘로 갈라진 신문사들은 촛불 시위라는 하나의 사건을 보고 우리사회의 양극단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김정일의 사주를 받아 이명박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빨갱이들의 불측한 음모라는 조중동의 기사와 직접민주주의의 발현이라는 한겨에와 경향의 논조는 우리 사회가 양 극단으로 갈라져 있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임과 동시에 국민들로 하여금 우로든지 좌로든지 치우칠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압력이었다. 양쪽으로 갈려 피터지게 싸우면서 국민들은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시작했다. 조중동이 동일 사안에 관한 입장이 전 정부에서와 현 정부에서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불안하게 바라보면서 많은 국민들에게 불안을 조장하던 조중동이 정권이 바뀌자마자 세계에서 제일 안전한 쇠고기는 미국산임을 주장하면서,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안전을 문제 삼는 이들은 김정일의 하수인인 빨갱이로 매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부 선동자들에 의하여 촛불 시위가 격렬해 지고 있다는 조중동의 논조는 이 사회를 보수와 진보, 노와 소로 나누기에 충분한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정권의 모습에 따라 자기 입장을 바꾸는 조중동의 모습이 새로운 것이 아니겠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조중동 불매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을 무시하는 국가에 대한 분노가 조중동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며, 이로 인하여 조중동에 광고를 내는 기업들의 물건에 대한 불매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하면서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에 대한 사람들의 심판이었다. 그러나 불매운동이 잠시 수그러들기 시작하자 언론과 국가의 검은 카르텔이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온갖 법을 적용하여 불매운동을 벌인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하였으며, 언론은 이러한 국가의 만행을 정당한 공권력의 행사라는 아주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가와 언론의 카르텔에 기업이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불매운동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약자라는 탈을 쓰고(기업이 약자인가? 중소기업을 팔아서 실리를 챙기는 대기업들이 약자인가?) 이 구도를 더욱 정당화하는데 일조하였다. 국가와 자본과 언론의 검은 카르텔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이들을 아주 성공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촘스키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경험때문이다. 오래 전엔 땡전뉴스라는 말이 있었다지만 실제로 국가와 자본과 언론이 손잡고 국민을 우롱하고 조작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적어도 2008년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모습들을 목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내가 너무 순진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촘스키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우리 주위에 있는 이야기들은 날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주 세련되게 요리되어 올라오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아주 세련되게 요리가 되어 올라오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치 날것 그대로의 것인줄 착각하게 만들 정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2008년에 목격했다. 세상의 진실을 알아가는 것이 너무 힘겨워 외면해 버리고 싶지만 촘스키의 말대로 왜곡된 선전에 세뇌당하지 않는 최상의 방책은 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진실을 직시할 것을 주문한다.

PS. 책이 쉽기는 하다. 아마도 인터뷰를 출간한 책이기 때문이리라. 책의 곳곳에서 보여주는 뛰어난 통찰력에 무플을 치기도 하지만 인터뷰를 출간한 책의 한계를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든 책이다. 그러나 촘스키라는 이름값 하나로도 책을 읽어볼만하다. 책 값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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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가 전하는 거짓말 - 우리는 날마다 '숫자'에 속으며 산다
정남구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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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무엇인가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수학을 꼽을 것이다. 다음으로 싫은 과목을 꼽으라면 사회학을 꼽을 것이다. 도무지 내 생리에 수학과 사회학은 맞질 않는다. 수학과 사회학이 내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둘다 숫자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이다. 그만큼 나는 숫자를 들여다 보는 것이 너무나 싫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고 숫자 이야기만 나오면 얼른 넘겨버리는 버릇이 있다.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혹시라도 책을 읽다가 통계라도 나오게 되거든 그냥 넘겨버린다. 흘깃보고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넘어간다. 신문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보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체감하는 사실과 통계가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통계자료를 가지고 조중동에서 해석하는 것과 한겨레에서 해석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 또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누가 틀린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의문이 풀렸다. 어느 누구도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해석하는 시각이 약간 다를 뿐이다. 이 약간의 다름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허상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는 무엇인가? 계속 묻고 묻고 물어서 결국 자기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지금 이순간은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끊임없는 의심하여 결국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전제에 이르렀을 때 그의 의심은 끝이 났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을 만들어 갔다.

  통계를 대할 때 우리도 이런 모습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이 통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고, 누가 만들었고, 이 통계를 통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이것을 묻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통계라는 그럴 듯한 거짓말에 번번히 당할 수밖에 없다. "통계는 심심풀이 장난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지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통계를 조사하고 발표하는 기관이 어디인가에 따라서 통계는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통계를 다루는 사람들의 역할이 그것이다.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원하는 결론을 통계로 뒷받침 해주는 것, 조사 기관의 역할이다. 자기 기업에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 통계 조사를 할 기업이 어디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냐? 그 통계를 의심하는 것이다. 계속 의심하고, 각 항목별로 세부적으로 살펴봐서 어디에서 왜곡이 되어 있고, 원래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통계라는 그럴 듯한 거짓말에 속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50가지의 사례들은 우리가 신문에서 너무나 쉽게 접하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데 왜곡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내가 얼마나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들, 혹은 이익집단들에게 휘둘려 왔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세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되었다.

  책의 구성이 50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고 힘들지 않다. 차근차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통계표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그렇기 때문에 중고등학생들이나 사회학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부담없이 읽기에 좋은 책인 것 같다. 매일 신문을 접하면서 나와 같은 의문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읽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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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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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당 대선 후보 당시 디씨에서 패러디 했던 포스터를 보았다. 옹박의 포스터를 패러디한 그 포스터의 문구는 이랬다. "박정희는 죽었다. 박근혜는 약하다. 건설의 후예 명박" 이 한마디로 이명박 대통령의 모든 마인드가 설명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BBK관련된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을 해도 용납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경제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품고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더이상 한국 경제는 한 사람만의 힘으로 회생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은 것이 아니기에 경제는 더 어려워졌다. 실업율은 점점 올라가고 IMF때보다 더 어렵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한국 경제를 구하기 위하여 이명박 정권은 무엇인가 구체적인 경제 회생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아파트 건설을 위한 경기 부양과 일자리 창출이다.

  텔레비전을 통하여 이 뉴스를 듣고 나는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건설을 통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기를 부양한단 말인가? 아직도 현대건설 사장인줄 아시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어이가 없어하던 차에 이 책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열심히 탐독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불패라는 말이 절대불변의 법칙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집이란 사람들에게 있어서 거주의 개념인가 아니면 투자의 개념인가? 거주의 개념이면 나누어 써야 하는 공공재일 것이요, 투자의 개념이면 한탕하기 위하여 사재기해야 할 물건인데, 한국에서는 공공재가 아닌 투자의 개념이 더 강한 것 같다. 아니다. 투자라는 말보다 투기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투기의 개념이기 때문에 사재기를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이겠지? 집이 없어서 계속 옮겨다니다 결국 쪽방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수십만을 헤아리는 시대에 한 사람이 1083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단돈 몇 만원이 없어서 쪽방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시대에 수십억대의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동산의 편중보다 더 심한 부동산의 편중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돈을 많이 벌어 더 편한 집을 구하고 더 넓고 쾌적하게 살아가는 것을 뭐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누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들에게 왜 나누어 주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쓰냐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지 의무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편중현상이 도무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데 있다. 한번 고착화된 계급이 다시는 변동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이 나는 몇 계급인가 바라보면서 하향계급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아둥바둥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예전에는 실력이 그 사람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척도였다면 이젠 부동산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부동산=계급"인 시대에 집하나 없이 살고 있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집과 땅은 공공재이다.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투기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역사가 짧아 천박한 자본주의 밖에 배우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집을,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투기의 대상으로 삼고 다른 이들을 쥐어짜고 있다. 과거 조선에서는 탐관 오리가 백성을 쥐어짰고, 지금 한국에서는 집부자, 땅부자들이 서민을 쥐어짜고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암행어사가 그들을 처벌했는데 지금은 누가 처벌할 것인가? 서민을 쥐어짜는 이들을 처벌해야 하는 사람들이 땅부자요, 집부자인데 누가 누구를 처벌한단 말인가? 강부자, 고소영 내각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인 이 시대에에 누가 부동산을 공공재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다가 하늘에 커다랗게 선을 그리고 여기는 내 땅이라고 외치는 사람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구름을 분양한다는 광고가 나지 말란 법이 있단 말인가? "그냥 놔두면 시골땅 누가 사냐? 이렇게라도 땅을 사주는 것을 고마워해야지, 그래야 시골에 돈이 돌지 않냐?"고 당당하게 외치는 똥관이 형님의 말을 과연 누가 지적할 수 있을 것인가?

  한반도 대운하, 아파트 건설, 분양가 상한 폐지, 주상복합 아파트, 제 2의 롯데월드 등 도무지 이 땅에서는 건설을 빼고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건설이 선이고, 건설이 만병통치약이다. 미분양 아파트가 수도 없이 많은 이 시대에 끊임없이 건축을 한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해도 이윤이 남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40%만 분양되도 돈번다는 소문또한 어느 정도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부동산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천박한 자본주의 시대를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책에서는 거칠지만 나름대로 부동산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을 제시했다. 땅을 국유화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정책으로 삼고 장기 임대를 보장하는 것을 골격으로 삼았다.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말그대로 제시된 대책이 너무 거칠다. 과연 국유화가 가능하기는 할 것일까? 부동산을 투기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시킬 것인가? 이들이 이미 충분히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물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대책은 이상으로 끝나 버릴 것이다. 이 정책을 갈고 닦아 현실화 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인데 천박한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인들이 과연 이것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면 답답할 뿐이다.

PS. 이 책의 가장  큰 의의는 대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부동산을 깊이 파고든 첫번재 책이라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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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 새사연 신서 3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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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는 말 그대로 깡촌이다. 그러나 다른 곳보다 한 세대는 뒤떨어져 있는 것 같은 환경은 나와 내 동무들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컴퓨터 게임기와 오락실이 동네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영화관이나 비디오 대여점도 버스를 타고 30분은 나가야 만날 수 있었지만 그것들 때문에 하루를 즐기는데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자치기, 연날리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머루와 다래, 칡뿌리 등은 어린 우리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는 놀이들이었다. 이런 동네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었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100명이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학교였다. 원래부터 이 학교가 작은 곳은 아니었지만 농촌 인구의 감소, 그로 인한 취학 아동의 감소는 학교를 점점 작게 만들었다. 더 이상 이사 올 아이들도 없고, 이사 갈 아이들도 없이 6년을 같이 보고 지내는 친구들은 나를 포함하여 13명뿐이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학교를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결국 내가 졸업하고 몇 년 되지 않아 학교는 분교가 되었고, 또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학교는 폐교가 되었다. 한동안 교육청의 물건을 쌓아놓는 창고와 동네 주차장 노릇을 하던 학교가 얼마 전에 가보았더니 바뀌어 있었다. 깨끗하게 수리를 하고 온갖 컴퓨터와 기자재를 가져다 놓고 “농촌 원어민 학교”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다. 오직 서울에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2박 3일짜리 영어 캠프를 여는 프로그램이었다. 교육청에서 하는 것도 아닌 교육청의 인가를 받은 관광단체에서 하는 행사였다. 학생들을 잔득 싫은 관광버스가 학교로 들어갈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도대체 농촌하고 원어민 학교가 무슨 상관이지? 쟤들은 무엇 때문에 이 시골까지 영어를 배우러 오는 것일까?”

  내가 어릴 적 자란 동네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아산시와 천안시가 많이 발전을 하고, 삼성전자와 현대 자동차가 내려와 있어서 일자리를 구하기 그리 어려운 지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발전되는 두 섹터의 중간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곳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세 가지가 있다. 동네 어귀에 있는 모텔과 앞서 이야기한 농촌 원어민 학교, 동네 꼭대기에 위치한 골프장이다. 고령인구만 남아 있는 농촌에 골프장이 왠 말이며,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는 형편에 모텔은 또 무엇이며, 영어라곤 자녀들이 학교에서 사용하는 것 외엔 외국인들조차 거의 볼 수 없는 시골에서 원어민 학교는 무슨 말이더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세 가지가 동네에 함께 자리 잡은 이유가 무엇인가? 이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시골 동네에 골프장 들어서고, 우너어민 학교 들어서고, 모텔이 들어섰다고 무슨 거창하게 신자유주의까지 입에 올리는가 반문하겠지만 이게 신자유주의이다. 생태학적인 모습, 농산물을 만들어 내고, 전통을 지키는 농촌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천박한 자본은 자기의 이익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도시이든 시골이든 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시골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농촌 땅 가운데 과연 얼마나 그 지역 주민들의 소유일 것인가? 그렇게라도 시골 땅 사주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하던 똥관이 형의 오만한 말이 빈말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잠들기까지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온갖 신자유주의 물결을 접하고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켈로그의 콘프라이트로 밥을 먹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다. 출근하는 길에 파견 근무하는 청소 아주머니를 만난다. 출근해서 만나는 직장 동료 중에 파견근무 나온 이도 있고, 계약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수학과를 나왔지만 커피를 타고 있는 여직원이 있고, 경영학과를 나와서 복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고 들어가는 길에 이마트에 들러서 먹을 거리를 사간다. 그 늦은 시간에도 기계적으로 웃는 주차 요원을 보면서 마트에 들어가서 물건을 들고 계산대로 간다. 기계적으로 가격을 찍는 캐셔들도 피곤해 보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전히 입에는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말을 달고 있다. 집에 들어오니 동생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다니는 학원에서 막 돌아온다. 조금 있으면 학원을 마치고 아들 녀석이 돌아올 것이다. 이마트로 출근한 아내가 돌아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위의 이야기들은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의 평균적인 모습이다. 이 가운데에는 비정규직의 문제, 농촌의 문제, 사교육의 문제, 자영업의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신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이 무엇이냐? 존재를 실용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실용정부를 표방하는데 이는 자기들이 신자유주의자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실용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실용은 철저하게 이익이다. 실용이라는 말은 존재를 존재가 아닌 이익을 창출하는 재화로 보는 것이다. 이익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사람도, 문화도 모두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폐기처분당하는 사람들이 이 당에 얼마나 넘쳐나고 있는가? 1%의 사람들을 위하여 99%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쥐어 짜내고 있는가? 만약 쥐어 짜낼 것이 떨어졌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폐기처분 밖에 없다. 과거 정권에도 이런 흐름들이 있어 왔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더 첨단화되고 세련되게 바뀌어 버렸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대안은 무엇인가? 과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삶과 동떨어진 진보만이 공허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386임을 자처하면서, 진보세력임을 자처하면서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의 노선을 걸어온 참여정부를 경험한 우리에게 허울 좋은 진보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다. 진보가 없어서 이 땅에 신자유주의가 활개치게 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이것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지금가지 정책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진보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면서 오늘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이렇게까지 깊이 파고들 수 있었던 이유를 대안적인 실현 주체가 없다는데 두고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들이 삶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에 멈추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지금가지 진보라는 이들이 구태의연하게 87년식 운동체제와 조직체계를 가지고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 전방위적인 대안주체들의 각성이라고 말한다. 노동자가, 대학생이, 자영업자가, 중소기업인이, 모든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존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며, 여기에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희망의 조건들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의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반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그 불이 꺼질 뿐이다.

  그러나 묻고 싶다. 과연 이들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줄 동력을 누가 제공해 줄 것인가?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에 분명히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잠깐의 여유랄까, 숨통을 틔어주는 일이랄까 이런 역할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 달기만 하면 모든 이들이 일어날 것인데 말이다. 나는 아직 여기에 대한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386이 이런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런가?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전도자가 된 세력들이 386이 아니던가? 과연 누가 이 역할을 감당할 것인가? 아직 여기에 대한 답변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 눈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책에서 내가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PS. 말이 좀 어렵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 원한다면 좀더 쉬운 표현들을 찾아서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 또한 읽히지 못하고 소수의 사람들만 돌려 읽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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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 라면 교양 2
하승우 지음 / 뜨인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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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대하여 입막음하듯이 하는 이야기들을 싫어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계속 소리를 질러 댔다. "제발 좀 그냥 놔두세요." 마치 군대에 간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듯한 이야기에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하여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말은 분명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가 그들은 군대에 가는 것을 양심으로 거부한 사람들이라 말하면서 군대에 입대한 사람들은 양심을 가지고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그만 할 일을 잃었다. 누가 군대를 양심을 가지고 가는가? 누가 군대를 나라를 지킨다는 의식을 가지고 가는가? 누가 군대를 의식해서 가는가? 그들은 끌려 가는 사람들이다. 병역 거부로 인하여 형무소에 갇히는 이들은 사회적인 약자라고 그들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을 외치기 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병역문제로 인한 사회적인 약자는 군에 입대한 절대 다수라는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가 공감이 안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군대가 좌우한다는 말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특성일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혈연과 지연과 학연으로 똘똘 뭉쳐 있는 나라이다. 심한 경우는 같은 유치원 출신이라는 거사저 연줄로 사용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런 나라에서 정말 밑바닥을 보여주고 같이 생활했던 군대에 관하여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는 것은 어지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어느 정도 너그러움을 가지고 봐줄만한 이야기이다. 주제를 바꿔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하여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들이 친구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동창회 이야기를 하겠는가? 등산 이야기, 등산을 준비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다. 군대라는 공통된 경험을 가진 남자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군대 이야기다. 그런데 왜 군대 이야기가 가끔 인신 공격이나 차별로 이어지는지 아는가? 왜 그리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하는지 아는가? 알아 달라는 것이다. 알아 주지 않아도 좋으니 깡그리 무시하지 말아달라는 이야기다. 군대 갔다온 것만으로 죄인을 만들어 버리는 이 사회에 대하여 병역 문젱 대해서는 우리가 가장 큰 피해자라는 사실을 알아달라는 말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 참 좋은 말이다. 개인의 양심을 가지고서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 기술을 익히지 않겠다고, 국가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말,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이 또 다른 차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양심적 병역 거부가 군대에 입대한 이들을 비양심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던 당시 나는 군대에 있었다. 그것도 저자가 제일 싫어하는-물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 늬앙스로 알 수 있다.- 군목으로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상담하고, 종교행사를 집례하는 것이다. 그 당시 병사들은 물론 내 마음까지도 무너지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이다. 군대에 좋아서 온 사람들이 누가 있겠는가? 신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개인의 책임이기 때문에 군대에 입대한 것이 아닌가? 세상이 좁다고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엄격한 규율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참아내고 있었다. 왜 그런지 아는가?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티고 있던 이들에게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은 자기들은 마치 비양심적이라서 군대에 입대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사회에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토해내고 있는 그 때에 그들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버텨내고 있었다. 자살하는 이들도 있었고, 사고로 죽는 이들도 있었지만 절대 다수는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 병역거부와 병역기피는 다르다고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무임승차와 똑같다. 정말 혈세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병역을 감당하지 않는 무임승차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가? 모든 사람이 병역 거부를 할 수 없다. 그 중간에 분명히 총을 들고 찬 바람 맞아가면서 언 다리 두들겨 가면서 산을 오르고 철책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장소에 가보면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남북화해 모드라는 것은 꿈같이 느껴진다. 가끔 총소리가 들려오고, 지뢰가 터지기도 하고, 불이 나기도 한다. 철책을 바라보면 평화라는 말은 저멀리 사라져 버린다. 그래도 최전선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명예를 주지 못할망정 돌을 던지지는 말자. 위로해 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내버려두자. 군가산점 안받아도 좋다. 대체복무 허용해도 좋다. 그러나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병역의 의무를 감당한 이들에게 돌은 던지지 말자. 그들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슬픈 사람들이다.

추신

1. 상비군 제도가 19세기의 제도라고 말하는 저자에게 묻노니 로마 군단은 상비군이 아니던가? 각 나라에 존재하던 상비군들은 무엇이던가? 아무리 전시에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상비군은 분명히 있어 왔다.

2. 군대가 없이도 국가가 망하지 않는 나라로 코스타리카와 스위스와 일본을 꼽았다. 코스타리카야 그렇다고 해도 스위스는 이미 유럽의 용병으로 이름을 날리던 나라다. 산업이 발전되기 전 국가를 먹여 살린 것은 스위스 용병들이 아니던가? 일본에 군대가 없다고? 명칭상 군대는 없지만 우리나라보다 훨씬 윗줄에 있는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다. 물론 헌법을 수정하여 군국주의 부활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다.

3. 먼저 총을 내려놓으면 평화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이야기? 글쎄다. 이상론이다. 극동 아시아에서 총을 내려놓는다? 잡아 먹히기 딱 좋다.

4. 대만에 대체 복무를 함으로 인하여 사회 서비스는 좋아지고 병역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얼마전 신문에 병력이 없어서 부대 위병소에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기사를 본 것 같은데?

5. UN을 믿으면 된다. UN의 약자가 무엇인지 아는가? Unnecessary이다.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그만큼 영향력이 없다는 말이다.

6.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가? 망한다. 물론 해외 파병을 국익과 결부시키는 현재 모습은 위험하지만 군대는 필요하다. 지구가 하나의 나라가 되지 않는 이상. 다른 나라를 침략할 정도로 세지는 않지만 자기 나라를 지킬 정도의 힘은 가진 군대, 이것이 대한민국에 필요한 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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