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의 <내가 싸우듯이>를 읽으면서, 새삼 내가 우리나라 작가 특히 젊은 작가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다는 것과 그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생경함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생경함을 다소나마 완충하기 위해서라도 읽어줘야 하는 것일까를 또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이런 결심을 섣불리 할 수 없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나 자신하고라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의 방침이다. 결심한 바를 지키지 못해 나 자신을 자책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책이란 모름지기 좋아서 읽고, 호기심으로 읽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충격을 줄이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정지돈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다. 당연한 거다. 내가 싫다고 남도 싫어하리란 법은 없다. 내가 좋다고 남도 좋으란 법도 없고. 다 취향의 문제이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을 읽고 내가 느끼는 건 세대 차이에서 오는 문화 충격 뭐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그런데 그렇게만 얘기할 수 없는 건, 누구의 분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지돈의 작품을 소설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에세이나 그가 작가의 말에서 그리도 강조해마지 않았던 것처럼 비소설로 분류했더라면 이 책은 독자들로부터 비판을 피해갔거나 덜 비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왜 굳이 소설에 분류시켜 문제를 야기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작가의 말에서, 소설을 썼다 비소설로 전향한 외국 작가의 예를 굳이 들었던 것일까? 그냥 그렇게 쓰고 싶다면 쓸 일이지 자신을 이해시켜야만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게다가 작가의 말이 왜 그리도 어려운 건지 한 편의 논문을 연상시킬 정도다. 이는 추측컨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자신의 소설이 들 끊을 것을 예견했거나, 이러한 장르도 있다며 무지한 독자를 일깨워야겠다고 생각했던가.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시대가 외면한 불운한 소설들. 당대엔 이게 무슨 소설이냐고 질타를 받았지만 결국 시대를 뛰어넘은 작품들. 이를테면,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되길 또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어쨌든 소설의 지경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은 어땠을까? 어쨌든 정지돈의 이번 작품은 평론가들에게도 새로웠을 것이다. 젊은 소설가들이 새로워봤자 얼마나 새로울 수 있을까? 그 밥에 그 나물이건 평론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젊은 소설가들에게 기대하는 건 실험적이라는 건데 내가 얼마 전 그의 작품을 읽고 제목에도 썼지만 정지돈의 작품은 명백히 소설이 아니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굳이 소설이 아닌 작품에 실험적이라는 이유로 소설임을 자처했던 것은 아닐까? 비소설도 소설이라 우기면서. 그러면서 우리 평론가들도 소설을 보는 눈이 이만큼 넒어지고 달라졌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아닐까? 만의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평론가들이 있다면 그는 지진아거나 벌거벗은 임금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평론가가 자기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을 말한다면 그게 어디 평론가란 말인가.

 

그래서 말인데 이제 우리나라 문단계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소설의 안경을 쓰고 비소설을 논하고자 한다면 그것처럼 소모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소설은 소설이고, 비소설은 비소설이다. 그것은 소설이 문학의 왕좌의 자리라도 꿰찬 양 여간해서 비소설을 허락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비소설을 소설 보다 못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이고, 비소설은 무엇이며, 에세이는 또 뭐란 말인가? 소설이 아니면 에세이로 보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리뷰에도 썼지만)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현재 에세이로 분류되어 있다. 그것도 엄밀히 말하면 에세이가 아닌 비소설 같은데, 왜 정지돈은 소설로 분류하면서 비소설이라고 하고, 왜 이석원의 작품은 그렇지 않은가? 이석원의 작품도 어느 정도 일정 수준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기는 한데 에세이라고 보기엔 덜 정제된 느낌이다. 내가 알기론 에세이는 꽤 고급한 문학 형태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불러주기엔 그건 또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면 비소설이어야 맞는 거 아닌가. 그러기엔 또 이 나라 문학계가 비소설을 서자 취급해 온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 문학은 정리가 안 된다. 문학에 서자가 어디고, 적자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차별은 존재하는 것 같긴 하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서로 형태는 달라도 비소설을 쓰기는 이석원이나 정지돈이나 같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시선이 다르다. 이석원을 알다시피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그러니까 예능인이고, 정지돈은 문학 그것도 창작을 전공하고 영화까지 전공한 재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석원은 딴따라고, 정지돈은 귀공자라는 것이지. 그리고 평론가들은 당연 이석원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라이선스를 가진 정지돈만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작가에 대한 편 가르기도 그들의 세계에선 있을 거라는 걸 나는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내가 비소설을 허하라는 건, 평론가들이 비소설을 논하지 말고 비소설가과 독자들이 비소설을 논하도록 하라는 것이고, 비소설 작가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며, 비소설에게도 문학의 자리를 내주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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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7-18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소!

기억의집 2016-07-18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가 이십대초반에 밀란 쿤데라 소설 읽는데 너무 신선한 거에요. 아마 쿤데라가 에세이형식의 소설인가 그런 스탈로 소설을 썼던 것 같아요. 프라하의 봄이나 불멸. 저는 불멸 읽고 신선한 충격울 받아.... 제가 천주교를 다니며 아네수란 세례명을 수여했울 정도로요, 한동안 쿤데라 소설 좋아했어요. 소설의 형식은 가보지 못한 길, 이라 해도 좋을 듯 싶어요. 여러 형식을 만나고 다양한 형식이 인정 되어야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혹 메탈리카라는 구룹 아세요. 제가 한때 좋아했던 메탈 구룹인데 거기 리더인 보컬 제임스 핫필드가 이번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땃다고 하더라구요. 전문이 양자역학인지 어느 분야인지 모르겠지만 메탈 구룹이라고 딴다라라고 배척하지 않고 박사 학위 딸 정도로 밀어준 물리학계 사람들이 대단하더라구요. 참고로 메탈리카 한 해 수입이 왠만한 중소기업 저리 가라입니다. 수백억 할 겁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분야에 도전해서 학위 딸 정도면, 우리도 이석원이든 딴다라든 그 누구라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고 장르의 벽을 넘어 고급/ 저급의 가치를 없애야 많은 이야기들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stella.K 2016-07-19 12:57   좋아요 0 | URL
와우, 기억님은 참 젊게 사시네요.
메탈리카는 들어보긴 했는데 팝송을 안 들은지가 하도 오래돼나서
가물가물하네요. 그런데 리더가 물리학 박사를 땃다니 대단하네요.
사실 이석원이 대중적이기도 하고, 글 역시 대중적이기도 해요.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겠지만 공감의 글은 정지돈 보다 훨씬 잘
쓸 수 있다고 보고봐요.
정지돈은 문학판 꼰대들이나 좋아하겠죠.
우리나라는 아직도 시야가 넓지가 못해요.ㅠ

yureka01 2016-07-1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옳소..!~~
소설이면 어떻고 비소설이면 어떻습니까.

젊은 친구들이 시쳇말로 그러더군요.
취존하십니다.이렇게 ^^.

stella.K 2016-07-19 12:58   좋아요 1 | URL
헉, 취존이 뭐죠?ㅠ

yureka01 2016-07-19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취향 존중이라고 하더군요..~ㅋ

stella.K 2016-07-19 14:39   좋아요 1 | URL
아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알 것을...ㅎㅎㅎ

전 이번에 정지돈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나라 문학계의 쓸데없는 권위의식에 배가 꼴리더군요.
대중과 소통하고 더 존중받는 문학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ㅋ

수이 2016-07-20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 3000퍼_입니다.

stella.K 2016-07-20 13:58   좋아요 1 | URL
와우, 300도 아니고 3000퍼요?
고맙습니다.^^

syo 2016-07-26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 읽고 쓴 제 글이 부끄러웁네요;;
전 이 책속의 글들이 당연히 소설임을 전제로 깔고 생각하고서는 스스로 나는 참 소설장르를 수용하는 폭이 넓구만, 그러고 오만하는 중이었는데, 오히려 제가 좁게 보고 있었네요ㅎㅎ

stella.K 2016-07-26 16:16   좋아요 0 | URL
아유, 그 무슨 말씀을...
생각하는 바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자책하지 마시길...^^
 

방금, 누가 나에게 그런다. 나는 양비론자 같다고.

진보도 틀렸고, 보수도 틀렸다고 한단다..

내가?

나는 얼른 얼버무리듯 내가 뭘 몰라서일 거라고 대답했다.

뭘 알면 한 가지로만 갈 텐데 하면서.

 

그런데 그것도 솔직한 말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세상에 진보가 어딨고 보수가 어딨냐?

그렇게 말하는 게 웃기는 거지.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다.

그래서 양비론자라면 그건 맞는 말 같다.

 

얼마 전 TV를 보니 우리나라 여자 아이들 중에

생리대 살 돈이 없어 학교를 못 가거나,

생리 기간동안 단 하나의 생리대 가지고 버티거나,

심지어 운동화 깔창 가지고 버티는 아이들이 있단다.

생리대 같은 건 생활필수품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생리대 하나 가격이 미국이나 일본 보다 비싸단다.

331원. 다른 나라들은 2백원이 채 안 되는데.

우리가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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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07-15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비론자일 수 밖에 없는, 복잡하고 다변적 가변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양쪽 모두 틀렸다는 말은 곧 양쪽 모두 일리있는 면도 있다와 상통하기도 하겠고요.
아직 굶는 아이들도 있는 이 나라에, 생리대는 언감생심일지도 모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stella.K 2016-07-15 17:26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예요. h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양비론은 양시론과 일맥 상통하는데
전 제가 황희 정승 같아 너도 옳고, 너도 옳다는주의인 것 같은데
남들은 절 양비론이라네요.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지 않잖아요.
뭔가 이거 아니면 저거여야 하잖아요.
안 그러면 회색분자라고 몰아부치기나 하고.ㅠ

cyrus 2016-07-15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방의 입장의 약점을 공격할 때 제일 많이 쓰는 방식이 진보, 보수 언급하는 거예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내 입장이 진보에 속할까, 보수에 속할까 혼란스러워져요. 여기서부터 꼬이는 거죠. 이념의 단어에 한 번 씌워지는 순간, 서로 대립하는 양쪽 입장의 차이를 서로 좁히지 못해요.

우리나라도 생리대 역사가 오래된 편인데, 여전히 생리대라는 단어를 금기시하는 인식이 남아서 그런지 이런 생리대 문제와 관련된 토론이 펼쳐지지 못하는 것 같아요.

stella.K 2016-07-15 17:3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이게 다 정치하는 것들이 자신을 위롭게 하기위한
술수잖아. 우리라도 이런 진영 논리 타파해야 하는데.
그래서 저들의 술수에 놀아나지 말아야 하는데...ㅠ

그게 e지식채널에서 보여준 건데 그래서 생리대 지원 사업을 검토중이라나
뭐라나 그러는 것 같은데 아직 이렇다할 보도가 없네.
정말 쪽팔리다고 생각해서일까?
그거야 말로 극빈자 아이들을 개 돼지로 만드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니?
걔네들도 좋은 생리대 쓸 권리가 있는데 말야.
책임을 통감하지 않고 오히려 민중을 폄훼하는 거 정말 없어져야 하는데...ㅠ
 
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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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0여 년 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이 나왔을 때, 앞으로 우리나라 소설가들은 이렇게 소설을 쓰게될 것이라고 했다. 즉 소설을 쓰기 위해 발로 뛰어 다니지 않고 그렇게 책상에 앉아 텍스트를 보고 상상력을 더해 글을 쓸 거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지돈의 소설집을 보니 그 예견에서 한 발 더 진화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작가는 소설은 40대 이전에나 읽을 수 있는 장르라고 했다. 그에 비해 정지돈의 이 책 어디쯤 고다르는 그 보다 앞당겨 30대라고 했다. 그러니까 소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잘 안 읽는 장르라는 것이다. 난 그 말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소설을 아주 안 읽는 건 아니지만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한때는 소설가를 꿈꿨던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가장 큰 이유는 눈이 나빠져서다. 눈은 앞으로 계속 나빠질 것이고, 다른 안 읽는 책도 많은데 소설에까지 내 시력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TV만 틀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화려한 비주얼과 스토리 좋은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데 굳이 소설 하나 가지고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 공감능력은 좋아지는 것 같은데, 순간 판단력이나 집중력은 떨어진다. 그래서 안 그래도 책을 읽으면 잡생각이 비집고 들어 올 때가 많은데 소설을 읽다가 앞뒤 문맥을 내가 지금 잘 이해하고 있는 걸까 자꾸 의심하면서 읽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점점 소설을 안 읽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이유는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면 요즘 소설에 대해 꼭 한 번씩은 말하게 되는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그다지 긍정적이지마는 않다. 이걸 요즘 소설가들은 알고 있을까?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 어떤 소설이든 호불호가 있기 마련이지만, 방금 책 읽기를 마친 비소설계의 신예 작가며 후장사실주의의 창시자인 정지돈 역시 그것을 피해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든다.

 

내가 비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읽고 나서다. 이 책은 현재 에세이로 분류되고 있는데, 난 이 책이 에세이라고 보기엔 너무 소설 같고 소설이라고 보기엔 서사가 약해 보이며 개인적이다. 원래 책이라는 게 읽었을 때와 읽고 나서의 느낌이 다르긴 한데, 이석원은 그의 책이 진실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선 여전히 좋긴 하지만 아직 그의 문학성을 논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이석원은 문학성 같은 거 따지고 글을 쓸 사람 같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독자는 자신이 읽은 책은 어떤 식으로든 분류하길 좋아하는 족속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작가가 문학 판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지 지켜보고 싶어진다(하긴, 그런 분류가 뭐 그리 중요한가? 무엇이 됐건 재밌고 감정이입만 잘 되면 되는 거지). 그런데 같은 비소설로 정지돈은 이석원 보다 한 수 위로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데, 그것은 그가 영화를 전공하고(이론 쪽인 것 같기도 하다), 문예창작을 공부했다는 것이 작용해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이 소설집은 누가 봐도 소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지는 이걸 굳이 소설에 끼워 넣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소설의 생명은 서사에 있다고 보는데 이렇게 서사가 없는 작품을 소설에 끼워 넣고 문학상을 줄 수가 있을까? 어쩌면 정지돈이 10년만 일찍 작가가 되었어도 입상 자체가 불가했을지 모른다. 이걸 두고 문학이 권위주의를 벗었다고 말해도 좋은 것일까?

 

정지돈을 소설에 배치해서 하는 말인데, 그 보다 한 세대 앞선 작가들 중엔 독자들로부터 이것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라는 말을 듣기 위해 쓰는 작가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정이입. 공감 뭐 이런 것을 중요시 여긴 작가들이라면 말이다. 물론 정 작가와 같은 세대 작가들 중 그런 작가는 지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작가를 좋아한다. 독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작가. 내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은 대신 말해주는 작가. 나는 그런 작가는 자신의 작가됨을 확실히 아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지돈에게는 이런 잣대를 댈 수 없다.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라. 어느 한 작품이라도 이건 내 얘기를 하고 있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 있는지. 뭔가 여태까지 접해 보지 않은 것이라 신선하긴 한데 대체적으로 좀 부산스럽다. 그리고 이런 작품을 소설로 분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문학이 개인의 사적인 경험과 생각들을 중요시 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빨리 개인주의화가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 동굴 안에서만 놀고 태만해진 것은 아닌지 의구심도 든다. 확실히 세대가 달라지긴 했다는 걸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전 세대 작가들은 뭔가의 치열함이 있는데 요즘 작가들은 확실히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것 같다. 문학이란 게 과연 뭔지 아득해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렇다 할 서사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었던 건 내가 모르는 예술가들의 삶과 뒷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서다. 난 이게 항상 흥미롭다. 읽으면서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할 정도로 작가의 정보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작가가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인데 그 점에 있어서는 그는 가히 합격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글쓰기의 법칙 중 하나가 빙산의 일각이란 법칙이 있다. 알면 안다고 해서 그걸 다 써 먹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굳이 이것을 숨기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알면 아는 대로 자신이 메모한 것들을 압축 정리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설이야 싶은 것이다. 그래서 후장사실주읜지는 모르겠다만.

 

그 후장사실주의라는 것도 사전에는 없는 말로 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한 일종의 정 작가가 말의 유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존의 문학계가 서사에만 매달리고 그것만을 문학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반발과 저항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 정신이라면 독자인 나도 일단 환영이다. 그래서 보다 다양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문학 형태가 나온다면 그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후장사실주의에 찬동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단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다. 한국 문학이 서사에만 매달렸다고 언제부터 오해를 받아 온 걸까? 요즘 나온 소설 중에 제대로 된 서사를 갖추고 있는 소설이 과연 있었던가? 겨우 스토리라인만을 갖추고 온갖 폭력과 섹스 묘사 등에 탐닉하며 그것이 일종의 자아의 깨달음인 양 해 오지 않았던가? 어쨌든 이렇게 서사는 약하면서 묘사에만 치중한 오늘날의 문학을 반성하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다는 걸 볼 때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다소 어패가 있어 보인다. 단지 묘사에 충실한 작품을 서사로 착각하고 그런 작품에 문학상을 주고 문학이라고 봐 온 우리나라 주류 문단계가 잘 못이겠지.

 

하지만 묻고 싶다. 기존의 문학도 그렇고 이 후장사실주의라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독자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고. 이례적으로 정지돈 같은 작가에게 상을 수여했다는 건 괄목할 만 하긴 한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독자인 나로선 도무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후장사실주의가 (유희로 나왔든 저항의 의미로 나왔든)나왔을 때 그 생경함도 생경함이지만 우려스러움도 없지 않았다. 이건 작가와 독자를 나누는 또 하나의 벽이 되는 건 아닐지. 이건 그저 작가가 듣고 아는 얘기를 전달해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왜 이게 나에겐 생경한 걸까? 적어도 이걸 소설의 범주에 넣지만 않았어도 그 생경스러움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문학계가 바보가 된 건지 독자인 내가 바보가 된 건지 헷갈린다. 그래놓고 문학계는 한국문학이 다양함을 시도했다고 자위하겠지? 이런 생경함이 독자를 또 한 번 외로움 내지는 냉소주의에 빠뜨린다는 것도 모르고.

 

작가는 뭐하는 사람일까? 자기들만의 성을 짓고 그 안에서 희희낙락, 독야청청 하는 게 과연 작가인가? 그리고 어느 땐가 외로워지면 독자들이 너무 자기네들을 이해 못한다고 역시 작가는 고독해 하며 한숨이나 짓는 게 고작인 건가?

 

아무튼 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작가가 뭔가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취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후장사실주의 그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 이상의 것을 말할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아는 척 하지 않고 딱 자기가 아는 것만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 새로움은 좋을지 몰라도 내가 앞에서 말했던 이 소설은 나를 말해주고 있군요.”란 말은 듣지 못할 것이다. 이는 곧 일부 독자에게 새로운 유희는 안겨줬을지 몰라도 소통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게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어떤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글로 독자를 일깨우고 그들을 이끌 수 있다고. 그게 얼마나 무모하고 자신을 고립시키는 말인지 깨달을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 작가는 시답잖은 작가정신은 좀 그만 들이댔으면 좋겠다. 고독한 영웅의식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는 독자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통이 무엇이고, 표현되지 못한 언어와 감정을 대신 표현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를 외롭게 하고 무슨 고독한 영웅인 척 하는 것인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좀 더 민중적이고 친근해졌으면 좋겠다. 어설픈 작가정신 같은 건 개에게나 줘버리고 차라리 배우정신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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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1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나 실험적인 구성인가 보죠 ? 가끔 꽁트를 소설이라고 우기기도 하죠.. 김중혁처럼..
처음에는 눈여겨본 작가인데 계속 그짓하니 실망스럽더군요..
피카소의 데생 실력이 꽤 훌륭하다고 하죠 ? 그 바탕 위에 지금의 화풍이 만들어진 것인데
소설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사와 묘사가 탄탄하고 나서 실험적인 구성을 선보이는 것은 좋은데
몇몇은 대놓고 실험적 구성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stella.K 2016-07-12 17:53   좋아요 0 | URL
차라리 실험적이면 낫게요? 이건 뭐 어느 잡지에 실릴만한
딱 그만큼의 글을 가지고 소설이라고 하니 우리나라 소설이
마음이 너그러워진 건지, 정신이 나간건지 그걸 모르겠어요.
읽기는 그럭저럭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래가지고 한국문학의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까?
한숨이 나오드라구요. 아휴~

아이리시스 2016-07-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비슷한 이유로 한국소설을 끊은 것 같아요. 도서관에서 가끔 빌려와도 앞만 뒤적이다 다시 반납합니다. 그래도 최근에 <종의 기원>을 샀고 <붉은 소파> 선물받았는데.. 안 가진 한강 소설을 사모으려다 시기를 놓쳤습니다. 나만의 신예작가 발굴보다 신경숙,공지영,김인숙,정유정,한강 등 신작나오면 기대없이 들추는 정도로만 한국소설에 관심있어요.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까먹고 있었네요. 그런데 저는 대학때도 그랬던 것 같고.. 그러면 안되지만 너무 재미 없어요. 어쩌면 외국소설만 찾는 게 타언어를 신격화한데서 오는 감정인가 싶어서 반성도 해보는데, 비소설도 일단 해외저자인 경우 관심이 먼저 갑니다. 그렇지만 글을 재밌게 잘 쓰면서 인기도 많으면 좋죠. 수준만 따지기보다는.. 좀 깐깐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게 좋은거지 싶고 돈 많이 버는 작가 부럽고.. 실험도 필요하지만 제가 한국문학계에 갖는 생각이야말로 완전 상업화되어버린 듯해요. 스텔라님 잘 계시죠? 아, 그리고 더 좋은 책, 재밌는 책, 유익한 책만 골라 읽어요. 시간은 부족하고 책은 많은데..

stella.K 2016-07-12 18:30   좋아요 0 | URL
와우, 오랜만이어요. 잘 지내죠?
한국소설 어쩔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에서만 그러는 걸까요?
언젠가 한류 어쩌고 떠들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
해외에서 주목 받는다고 소설계도 한류 바람 분다고 어쩌고 떠들면
어쩌나 걱정되더군요.
솔직히 채식주의자 번역자도 너무 좋아서 번역한 건 아니라잖아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떨거덕 맨부커상을 받고.
영국 사람들은 뭔가 이국적이고 별스러운 것에 너그러운 민족 같아요.ㅋ

기억의집 2016-07-1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인화가 저런 언급할 때만해도 한국소설 많이 읽었어요. 어느순간 한국소설은 안 읽게 되더라구요. 딱 저 이유때문에요. 앉아서 텍스트 찾아서 머리로 짜집기 하는 순간부터요. 한국 소설 안 읽게 되니 일본소설이 눈에 들어오면서 일본소설 읽는데, 일본작가들이 더 현실에 대한 순발력 있다고 해야하나. 분명 그들도 책상에 앉아 머리로 소설 나부랭이 쓸텐데,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읽었을떼,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을 읽었을 때, 남쪽으로 튀어를 읽었는때부터 뭔가 한국소설하고 다르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쪽으로 발걸음이 서서히 움직여 지더니 이젠 한국문학은 들여다보지도 않게 되었어요. 아 진짜..갖다부치기는 후장사실주의... 아하, 스텔라님 말에 동감하며 후장사실주의 운운에 웃고 갑니다. ㅠㅠ

stella.K 2016-07-12 18:12   좋아요 0 | URL
더 웃긴 건, 언젠가 후장사실주의 잡지가 나왔었다네요.
뭐 신형철, 금정연을 비롯해서 정지돈은 물론이고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됐다는데 2호는 언제 나올지 자기네들도 모른데요.
아주 지네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피리 불고 난리도 아닌가 봐요.
그놈의 후장이 뭐길래.
한국문학 정신 좀 차려야 하는데.
저도 많이 읽지는 않지만 외국소설이 더 끌려요.
그게 꼭 외국에 대한 동경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국소설 뭐 읽을 게 없잖아요.ㅠ

전 같은 비소설이라면 차라리 이석원이 훨씬 낫다고 봐요.
그건 감정이입이라도 할게 있지
정지돈은 난 이만큼 알고 있어.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냥 웃음만 나와요.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2 18:06   좋아요 0 | URL
공감. 언제부터 소설이 학술적으로 변했습니다. 대중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라는 말을 들을까봐.. 저도 한국 소설 잘 안 읽습니다.

기억의집 2016-07-12 18:17   좋아요 0 | URL
뭣이 중한디!!! 를 모른다니깐요. 울 작가들. 왜 우리는 부동산 투기 몰락을 이야기할 때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를, 신용카드의 무분별한 소비에 대해선 화차를 예로 들어야할까 싶습니다. 몇달전에 장정일이 시사인에 다 박유하편을 들면서 우리 나라 소설가들이 위안부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였다고 하더라구요. 이 무슨... 전 우리 엄마한테도 울 외할머니가 일제시대때 잡혀가지 않으려고 숨어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인데.. 단지 작가들이 위안부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고 위안부는 강제가 아니였다는 논리를 갖다대는데.... 놀랐습니다. 솔직히 이상이나 김동리나 기생치마폭에서 살다 그 세상를 묘사한 게 우리 나라 근대소설 아닙니까! 쪽팔리죠. 장정일식이면, 태평양 전쟁때 징집되어 끌려간 우리 나라 청년들, 수십만명은 다 허구인가요. 소설가들이 소재를 안 삼아서. 맨 머릿속에서만 실험정신 운운하며 후장사실주의 운운하니. 현실의 소재는 유치한가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7-12 18:24   좋아요 0 | URL
장정일도 어느 순간 꼰대가 되어 있더라고요.
초기의 총명함은 사라지고......


구월의 이틀인가.. 그 소설 읽다가 쓰레기통에 쳐박았습니다.
여전히 혁띠 풀어서 막 때리면서 보수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보고 참.. 후지구나 했습니다. 이러니 한국 소설 안 읽는 것입니ㅏㄷ.


그리고 기억집 님 말씀에 공감하는 게 일본작가들은 당대의 문제를 바로바로 흡수해서 내놓습니다. 아웃도 그렇고 이유도 그렇고....

근데 한국 소설가는 만날 아버지의 학대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이야기합니다.
프로이트가 굉장히 좋아할 만한 소설만 양산한다고나 할까요..

stella.K 2016-07-12 18:25   좋아요 0 | URL
헉, 진짜 우리나라 작가들 정신 나간 거 맞군요.
아니 그 똑똑한 장정일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네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 민주화 항쟁 때 작가들도 동참해서 글을 썼어요.
그 정신 다 어디로 간 걸까요?
그게 작가정신이지. 뭐가 작가정신이겠어요.
시대를 비추지 못하는 작가도 작가입니까? 진짜 통탄하고 싶군요.ㅠㅠㅠㅠㅠ

루쉰P 2016-07-13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스텔라님 ㅎ 전 아무래도 한국문학은 싫어요 조정래 빼구요 ㅋ 채식주의자도 읽었는데 이게 왜 상 받았는지 원체 이해가 안 가요 ㅎ 전 1850년대 러시아에서 태어나야 했나봐요 그 때 소설만 너무 좋아요 ㅋ

stella.K 2016-07-14 16:50   좋아요 0 | URL
앗, 루쉰님! 제가 먼저 인사해야 하는 건데,
이렇게 먼저 인사도 건네주시고 황송하네요.ㅋ
조정래 작가를 좋아하시는군요.
요즘 신간이 나왔던데 관심이 많으시겠어요.
엊그제 조정래 작가가 나향욱한테 날린 말이있어
저도 갑자기 신간에 급 관심이 가요.ㅎ

마지막 말씀에서 빵 터졌습니다.
1850년대 러시아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이전인가요?
제가 연대에 약해서 말이죠. 대표로 한 권만 소개해주시면 안 될까요?ㅋ

루쉰P 2016-07-15 00:21   좋아요 0 | URL
에이 뭐 스텔라님도 다 아시는 책들이에요 ㅋ 토...톨..톨스토이요...전 좀 덕후 기질이 농후한 가봐요. 한 작가를 여러 번 읽는 경향이 있어요. 폭이 너무 좁아요 ㅋ 고칠려고 하지만 다른 책은 잘 손이 안가요 ㅋㅋㅋ

아무래도 러시아 체질로 바뀐 듯 ㅋ 글구 전 외국 문학이 더 읽혀요. 뭔가 한국 문학은 처절하고 한스럽고 진득진득한 그런 느낌...외국 문학도 그런 류의 소설은 많지만 한국처럼 진득스럽지는 않거든요. 내가 한국 살아서 그런가? 암튼 그러네요 ㅎ

stella.K 2016-07-15 17:23   좋아요 0 | URL
아하! 맞았군요!
그런데 새삼 우리가 러시아 문학에 대해 아는 것도 참 한정적이란
생각이 드네요. 그 두 영감을 비롯해서
푸시킨, 솔제니친 뭐 이 정도가 아닐까요?

왜요, 전 루쉰님 그런 독서법 좋다고 생각해요.
책 욕심이 많으면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기가 쉽지 않잖아요.
전 정말 두 번 이상 읽은 책이 손에 꼽을 정도예요.ㅠ

한국문학에서 한의 정서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죠.
하지만 하도 그지 같은 작품들이 많아서 그럴 바엔
예전의 우리나라 작품이 오히려 괜찮게 돋보이는 것 같아요.
나이들면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요.
그래도 우리 문학을 사랑해야겠죠?ㅠㅋ
 
스모크
웨인 왕 감독, 스톡카드 채닝 외 출연 / 무비홀릭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이 영화의 제작년도가 1995년. 그러니까 나도 20여년 전 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본 것 같다.

그땐 정말 멋모르고 봤던 것 같다. 지루한 한편의 미국 영화.

뭐 이 정도로 밖엔 설명이 더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미없다고 욕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를 보는 안목이 얕다고 나 자신을 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이 영화는 지루한 영화였을 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그렇게도 유명한 폴 오스터님께서 각본인지 각색에 참여하신 작품

이라지 않는가? 자신의 소설 <뉴욕 3부작>을 옮겼다지.

그 무렵 폴 오스터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일본 작가 하루키와 함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하루키는 좀 읽겠는데 폴 오스터는 읽는데 실패했다.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한번 편견을 갖게되면 좀처럼 바뀌기 어렵다는 걸.

그래서 난 늘 폴 오스터의 어떠한 책이 나와도 관심이 없었다.

올봄이었나, 우연히 그의 <내면보고서> 읽었다.

물론 그전에 그의 인터뷰집도 읽고, <작가란 무엇인가?>에 나온 역시 그의 인터뷰 내용을

읽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책을 역시 지루하게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어쩌면 폴 오스터와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꿈꾸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감독의 연출 솜씨를 봐야지 왜 작가를 보려고 하는 것일까?

 

정말 첫 번째 봤을 땐 멋모르고 봤는데, 두번째 보니까 이 영화도 나름 꽤 괜찮은

영화라는 걸 알겠다. 미국의 독특한 서정과 낭만이 베어있다.

글쎄 미국의 서정과 낭만을 한마디로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까?

오래 전, 이어령 교수는 미국의 문화를 가리켜 길의 문화라고 정의한 바 있다.

난 그가 정확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길의 문화는 곧 나그네의 문화이기도 한데, 영화도 보라. 소년이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고,

오기의 동거녀가 오기의 담배 가게에 왔다가 사라지지 않는가.

 

거기다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허풍 또는 허세가 아니겠는가?

워낙에 역사가 그리 길지가 못하니 자꾸 영웅 신화만 양산해 내는 게 미국 아니던가.

이 영화도 그 허세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조그맣고 귀여운 허세이긴 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면, 난 그 장면이 좋았는데, 오기 렌이 13년 동안 매일 같은 거리의 풍경을 찍어

4천 장의 사진이 있다. 매일 같은 장소의 사진을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겠지만,

그 4천일, 4천장의 사진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의미를 만들었다.

그 사진 안엔 소설가 친구인 폴의 죽은 아내도 찍혔다. 그것을 보고 눈물짓는 폴.

인간은 그렇게 무상하게 하루하루를 살다 죽어갈 것 같지만 그 세월 중 하나가 누군가에겐

이렇게 눈물을 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건 그 사신을 찍게된 동기다. 

자세한 건 여기 다 밝히진 않겠지만 중요한 건 오기의 사진기는 훔친 거라는 거다.

훔친 건 옳지 않으며 내 노력이 들어간 것이 아니니 가짜다. 그런데 그 훔치는 과정은 진짜다.

우연찮게 어느 눈먼 흑인 할머니의 하루 손자가 되어 가출해 몇 년만에 다시 돌아와

할머니의 그리움을 달래 드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 역시 가짜 손자라는 걸 알지만 성실하게 손자 역할을 해 준 오기에게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속아 준다. 겉은 가짜지만 진심이 통하는 것이다. 

어쨌든 훔친 건 옳지 않고 가짜지만 거기에 또 진실을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담으려 했다.

난 이게 미국식 이야기의 서정이고, 힘이라고 생각한다. 

보고 있으면 지루하긴 한데 맨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엄지 손가락을 쳐들게 만든다.

이 별 것 아닐 것 같은 이야기에 이만한 진실을 담고 있다니!

 

난 이 영화를 다시 보는데 20년이 걸렸다.

훗날 다시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땐 20년씩이나 안 걸릴테다.

못해도 5년안에 다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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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0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참 좋죠.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영화 내용은 좀 가물가물하네요..

stella.K 2016-07-07 17:53   좋아요 0 | URL
조만간 다시 한 번 보세요.
그래야 얘기가 되죠.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7-07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에. 조만간 다시 한번 볼 계획입니다..

hnine 2016-07-08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그 옛날 극장에서 봤어요 혼자서.
기억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하비 키이텔인가? 그 배우가 생각나고 (다른 사람은 누가 나왔었는지 전혀 생각안나요 ㅠㅠ), Smoke 라는 제목이 연기와 동시에 허무함을 의미하는, 중의적으로 사용된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만 떠오르네요.
폴 오스터랑 친해보려는 시도 차원에서 다시 보셨나요? 저도 친해보려고 하는데 계속 실패하는 작가가 있어요. 우리 나라 작가인데 엄청 인기있는 작가이지요.

stella.K 2016-07-08 13:31   좋아요 0 | URL
헉, 누군데요? 궁금.
그런 것 같긴 하네요. 왜 그 당시엔 뭐 이래 했던 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다시 보니 괜찮은 거 있잖아요.
저는 폴 오스터가 그래주길 바라고 있어요.
조만간 뉴욕 3부작을 조심스럽게 읽어줘야 할 것 같은데...ㅠ

cyrus 2016-07-07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의 소설(절판된 것까지 포함)을 모으는 중인데 아직 한 번도 안 읽어봤습니다. 책장 장식품 되어버렸습니다. ㅎㅎㅎ

stella.K 2016-07-08 13:34   좋아요 0 | URL
헉, 폴 오스터 안 읽어 봤나? 너 같은 독서광이...? 의외네.
영화는 봤나? 안 봤으면 봐봐. 영화는 꽤 볼만해.
폴 오스터는 가장 미국적인 작가는 아닐까 싶어.
그 전 세대는 헤밍웨이 아니겠어?ㅋ
 
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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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러 면에서 좀 놀라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글쓰기에 관한 책은 많이 나왔다. 그리고 모르긴 해도 앞으로 꽤 오랫동안 이 분야의 책은 계속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이 분야의 책은 나름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즉 글쓰기에 대한 노하우를 저자 특유의 감각을 가지고 펼쳐 보인다는 것.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 분야의 책은 여기까지가 한계는 아닐까 싶었다.

 

글쓰기의 방법과 기술에 대해선 너나 할 것 없이 가르치는데 정작 아무도 글쓰기 철학에 관해서 말하는 책이 없다. 물론 글쓰기도 작가나 강사가 달라서 고전을 섞어 가며 깊이 있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예 고전에서 글쓰기의 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동서를 아우르며 문장사라고 하는 역사를 꿰뚫기도 한다. 또한 그 범위도 세분화 하면서도 깊고, 넓다(이 책의 목차를 보라). 한마디로 문장사 개론서라고나 할까?

 

이 책을 읽다보면 문장이란 이토록이나 깊고 넓은데 왜 우리는 문장을 그저 실용적인 것에만 한정지으려 하는 것일까 반성도 하게 된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내가 깨우친 바를 정리하거나 알리려 하지 않고, 소통이란 미명하에 어떻게 하면 튀어 볼까, 어떻게 하면 관심을 받아 볼까로 한정지어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나름 반성도 해 본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문득 지금 우리나라 몇몇 젊은 작가를 중심으로 지난 날 있어왔던 우리나라 문학의 카르텔과 문학상의 성토가 오버랩 된다. 우리나라 선조들의 글쓰기를 보는 시야가 이토록이나 넓고 방대한데 우리는 어느새 이렇게 제도의 틀에 갇혀 이 어항 안에서만 놀라고 하고 있는 걸까 답답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문장은 사람의 사상을 담는 그릇이다. 문장이 모여 글이 되고, 그것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된다. 누구는 그 한 권의 책으로 입신양명의 길을 열기도 하겠지만, 누구는 자신뿐 아니라 나라의 운명도 좌지우지 한다(조선의 문체반정). 오늘 날 문단의 카르텔이 21세기 문체반정은 아닐까를 생각해 보게도 되는 것이다.

 

저자가 어떻게 글쓰기에 관해 이런 책을 쓸 생각을 했을까?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글쓰기는 책 읽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좋고, 나중에 이 책이 제시한 책을 따라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단지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같은 내용이 반복되기도 하는데 그 점만 가뿐하게 뛰어넘을 수만 있다면 이 책은 충분히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글쓰기에 관한 생각과 고민이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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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6-07-28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기 관련책을 찾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stella.K 2016-07-28 14:37   좋아요 1 | URL
아, 이 책은 좋긴한데 좀 묵직해서 읽기가 버거우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고라님 취향은 잘 모르겠으나, 장석주의 <글쓰기는 스타일이다>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어떨까 싶네요.
편하게 읽혀지면서도 깊이가 있기도 하고.^^

고양이라디오 2016-07-28 16:35   좋아요 0 | URL
묵직하긴 하네요ㅎ
목차보니깐 재밌을 것 같아요. stella.k님이 추천하신 책들 왠지 믿음이 가네요. 두 권 다 읽어볼께요ㅎ

stella.K 2016-07-28 18:36   좋아요 0 | URL
넵.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