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의 <내가 싸우듯이>를 읽으면서, 새삼 내가 우리나라 작가 특히 젊은 작가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다는 것과 그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생경함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생경함을 다소나마 완충하기 위해서라도 읽어줘야 하는 것일까를 또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이런 결심을 섣불리 할 수 없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나 자신하고라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의 방침이다. 결심한 바를 지키지 못해 나 자신을 자책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책이란 모름지기 좋아서 읽고, 호기심으로 읽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충격을 줄이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정지돈을 좋아하는 독자도 있다. 당연한 거다. 내가 싫다고 남도 싫어하리란 법은 없다. 내가 좋다고 남도 좋으란 법도 없고. 다 취향의 문제이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을 읽고 내가 느끼는 건 세대 차이에서 오는 문화 충격 뭐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그런데 그렇게만 얘기할 수 없는 건, 누구의 분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지돈의 작품을 소설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에세이나 그가 작가의 말에서 그리도 강조해마지 않았던 것처럼 비소설로 분류했더라면 이 책은 독자들로부터 비판을 피해갔거나 덜 비판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왜 굳이 소설에 분류시켜 문제를 야기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작가의 말에서, 소설을 썼다 비소설로 전향한 외국 작가의 예를 굳이 들었던 것일까? 그냥 그렇게 쓰고 싶다면 쓸 일이지 자신을 이해시켜야만 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게다가 작가의 말이 왜 그리도 어려운 건지 한 편의 논문을 연상시킬 정도다. 이는 추측컨대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자신의 소설이 들 끊을 것을 예견했거나, 이러한 장르도 있다며 무지한 독자를 일깨워야겠다고 생각했던가.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시대가 외면한 불운한 소설들. 당대엔 이게 무슨 소설이냐고 질타를 받았지만 결국 시대를 뛰어넘은 작품들. 이를테면,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되길 또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어쨌든 소설의 지경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은 어땠을까? 어쨌든 정지돈의 이번 작품은 평론가들에게도 새로웠을 것이다. 젊은 소설가들이 새로워봤자 얼마나 새로울 수 있을까? 그 밥에 그 나물이건 평론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젊은 소설가들에게 기대하는 건 실험적이라는 건데 내가 얼마 전 그의 작품을 읽고 제목에도 썼지만 정지돈의 작품은 명백히 소설이 아니다. 그런데 평론가들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굳이 소설이 아닌 작품에 실험적이라는 이유로 소설임을 자처했던 것은 아닐까? 비소설도 소설이라 우기면서. 그러면서 우리 평론가들도 소설을 보는 눈이 이만큼 넒어지고 달라졌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아닐까? 만의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평론가들이 있다면 그는 지진아거나 벌거벗은 임금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평론가가 자기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을 말한다면 그게 어디 평론가란 말인가.
그래서 말인데 이제 우리나라 문단계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소설의 안경을 쓰고 비소설을 논하고자 한다면 그것처럼 소모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소설은 소설이고, 비소설은 비소설이다. 그것은 소설이 문학의 왕좌의 자리라도 꿰찬 양 여간해서 비소설을 허락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비소설을 소설 보다 못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이고, 비소설은 무엇이며, 에세이는 또 뭐란 말인가? 소설이 아니면 에세이로 보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리뷰에도 썼지만)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현재 에세이로 분류되어 있다. 그것도 엄밀히 말하면 에세이가 아닌 비소설 같은데, 왜 정지돈은 소설로 분류하면서 비소설이라고 하고, 왜 이석원의 작품은 그렇지 않은가? 이석원의 작품도 어느 정도 일정 수준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기는 한데 에세이라고 보기엔 덜 정제된 느낌이다. 내가 알기론 에세이는 꽤 고급한 문학 형태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불러주기엔 그건 또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면 비소설이어야 맞는 거 아닌가. 그러기엔 또 이 나라 문학계가 비소설을 서자 취급해 온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 문학은 정리가 안 된다. 문학에 서자가 어디고, 적자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차별은 존재하는 것 같긴 하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서로 형태는 달라도 비소설을 쓰기는 이석원이나 정지돈이나 같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시선이 다르다. 이석원을 알다시피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그러니까 예능인이고, 정지돈은 문학 그것도 창작을 전공하고 영화까지 전공한 재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석원은 딴따라고, 정지돈은 귀공자라는 것이지. 그리고 평론가들은 당연 이석원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라이선스를 가진 정지돈만을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작가에 대한 편 가르기도 그들의 세계에선 있을 거라는 걸 나는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내가 비소설을 허하라는 건, 평론가들이 비소설을 논하지 말고 비소설가과 독자들이 비소설을 논하도록 하라는 것이고, 비소설 작가들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며, 비소설에게도 문학의 자리를 내주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