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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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주제로한 작품들은 참으로 흥미롭다. 물론 몇 작품 보지는 못했지만 <바베트의 만찬>이나 <초콜릿>같은 작품은 인간의 식욕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음식을 통해 음식이 가진 은혜를 베풀며, 나아가 종교적인 이유에서 금욕하는 인간들을 점잖게 또는 경쾌하게 조롱한다. 물론 이 두 작품들은 금욕 자체를 꼬집는 것이 아니다. 금욕 그 뒤에 감춰진 인간의 위선과 권위 의식을 까발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음식 하나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보여줬던 드라마 <대장금>같은 경우는 이영애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주인공을 맡았다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드라마 자체만으로도 숨 죽이고 볼만한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음식을 소재로한 영화나 문학작품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또 음식을 소재로 한 독특한 작품이 나왔다. 바로 조경란의 <혀>이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은 요리를 통해 인간의 위선이나 권력을 까발렸다면, 조경란은 독특하게 식욕과 성욕 나아가서는 애욕에 관해 지적이고도 음울하지만 훌륭한 성찬을 차려주었다. 

조경란의 작품을 처음 대해 본 나로선 이 작품이 적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작품은 결코 빨리 읽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 이미지도 상당히 강렬하다. 독특하게도 이 책의 부록으로 그녀가 이 작품을 쓰면서 참고했을 참고 문헌이 나오는데, 작품속에서 그것들을 정말로 적절히 잘 녹여내, 읽으면서 지적인 만족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인간이 갖는 식욕과 성욕이 서로 얼마만한 연관이 있을까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어느 한 모임에서 우연찮게 식욕과 성욕에 관한 열띤 토론(?)을 하게 되었다. 즉 인간의 욕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이라 할 수 있는 식욕과 성욕 중 어느 것이 더 우위이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래 생각할 것 없이 당연히 식욕일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은 하루 이틀 섹스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배가 고프면 못 사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게다가 성욕은 일부러 금욕하고도 나름 만족하게 잘 사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신부나 수녀들 또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어도 다른 등등의 이유에서. 하지만 금방 그 자리에 있었던 이를 뒤엎는 반론이 나왔다.

영장류의 동물 실험이 있었단다. 뇌에 전류를 흐르게 하고 한쪽에선 버튼을 누르면 여러 가지 성적 상상이 가능하게 했고, 한쪽엔 실제로 풍성한 먹을거리를 쌓아 놨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실험에서 그 동물(침팬치나 오랑우탄쯤 됐겠지?)은 코 앞의 먹을 것을 놔두고 성적 상상을 할 수 있는 그 버튼만을 굶어 죽을 때까지 하고 있더란다(물론 그러다 진짜 죽었는지 아사 직전에 그 실험을 멈췄는지 그후의 일은 알길이 없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일말의 의심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명체가 갖는 성욕이란 것도 무시 못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흥미로운 건, 수컷들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암컷들이 그들의 성욕을 잘 달래주면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기야 인간의 모든 역사 배후에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말은 결코 근거없는 말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갖는 욕구는 그 하나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식욕. 즉 인간의 절대 미각를 좌우하게 되는 '혀'는 정말 잘 다스려야 하는 인체기관임에 틀림없다. 보라.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그들은 혀로 신께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서 맛을 보았으며 수 많은 애증 낳게 했다. 사실 인간의 역사는 애증의 역사라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는가?  

이 작품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시종 낮고 음울하다는 것일게다. 적어도 요리에 관한 작품이라면 좀 밝고 경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 봤더니 내가 본 요리를 소재로한 일련의 작품들 역시 그리 밝지마는 않았던 것 같다. 그중 이 작품이 조금 더 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왜 이렇게 쓸 수 밖에 없었는지는 마지막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마지막 반전이 참 놀랍고 그로테스크 하다. 갑자기 예전에 보았던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가 생각이 났다.

아직 읽어 보지 않았다면 한번쯤 읽어 보라고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다. 그럼 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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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서평단 알림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 나의 야고보 길 여행
하페 케르켈링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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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좀 특이한(?) 직업의 소유자다. 코미디언이란다. 코미디언이 뭐가 특이하단 말인가? 단지 특이하다면 코미디언이 기행문을 썼다는 것이겠지. 웬만해서 없는 이례적인 일이 아닐까? 더구나 저자는 독일 사람이다. 내가 시야가 좁긴 좁은가 보다. 기껏 외국의 코미디물이래 봤자 미국 아니면 영국이 고작일텐데, 왜 독일에도 코미디언이 있다는 걸 생각 못했을까?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인하면 웬지 근엄하고 써렁할 것만 같은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있어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분명 그 나라도 사람이 사는 나라고 희노애락의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독일인들은 어떻게 웃길까? 궁금해 진다.

사람 저마다 웃음의 코드가 다른 것 같긴하다. 어떤 사람은 웃음에 인색하며, 어떤 사람은 별로 웃기지도 않는데 배꼽잡고 웃는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직업병인지는 몰라도 책 갈피 갈피마다 웃길려고 나름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가끔은 나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난 웬만해서 잘 웃지 않으며 한번 웃기 시작하면 어깨가 들썩일 정도도 웃는 극단이 있어, 저자가 자기 직업의 성향을 들어냈다고 해서 배꼽이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웃겨야 먹고 사는 사람으로선 사람들이 많이 웃어주면 고마운 일이겠지.

그런데 이 책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김이 빠지는 느낌이다. 왠지 자꾸 논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면 내가 이 책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걸까? 그래도 모름지기 야고보가 걸었다는 산티아고가 아닌가? 산티아고는 파울로 코엘료에 의해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난 그닥 코엘료의 작품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 과연 그가  자신의 책에서 산티아고를 어떻게 그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오히려 작년 여름, 어떤 지인으로부터 직접 쓴 산티아고 기행을 접했을 때야 비로소 그곳을 알았다. 그리고 그 책은 참 재밌게 읽었다. 단지 그 지인의 책엔 산티아고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 걸었던 길이라는 것을 몰랐고, 이 책을 들었을 때야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지인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으니 그것까지는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알았어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거나.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또한 순수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 그는 본인을 말하기를 불교적 기독교  신자라고 했던가? 암튼 그런 신앙인이 없으라는 법은 없겠지만, 좋게 말하면 너무 자유주의적이다. 그래서 일까? 야고보가 걸었다는 산티아고를 별로 순례의 마음으로 걸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고전적인 의미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고 했을 땐 뭔가의 영적 목마름이 있을 것이다. 저자도 그런 의지가 없지는 않아 보이지만 오히려 그 길을 걸어 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더 많지 않았을까? 신은 누구이고, 나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인생을 살면서 한번쯤 품어 볼만한 질문이긴 하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을 법한 여행은 이 책에선 그다지 찾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하루 여행하면서 보고 느끼고 만나고 했던 것을 스케치한 것으로 일관한다.

그것도 나름 중요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록은 중요한 거니까. 하지만 산티아고가 갖는 아우라를 이 책은 그다지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엿다. 오히려 그런 영적인 순례 어쩌고 하는 것을 빼고 읽는다면 그냥 편하게 읽는 여행서쯤이 되지 않을까? 물론 그 길을 걸어야 했던 저자로선 괴로웠겠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을 5분의 1쯤 남겨 놓고 덮어버린 채 이 글을 쓰고 있다. 나의 기대를 좀 많이 비껴 나갔던 책이라 완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지루하기도 했고...또 하나 유감인 건 이 책을 분류할 때 '기독교 에세이'이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산티아고를 막연히 야고보가 걸었다는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이 책을 기독교 에세이에 분류해 놓는 건 좀 무책임한 분류 같아 보인다. 이 책엔 신앙적 동기가 거의 드러나 보이지도 않고,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여행한 것을 스케치한 정도인데, 어느 믿음 좋은 기독교 신자가 다른 이유라면 모를까 나와 비슷한 기대를 가지고 펼쳐 읽기 시작했다면 실망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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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7-12-0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리뷰 제목만 보고 갑니다.
지금 읽고 있는데 너무 진도가 안 나가요. ㅠ.ㅠ
스텔라님 리뷰 제목과 제 진도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

stella.K 2007-12-06 15:08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로 평점이 좋던데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ㅜ.ㅜ
 
철들지 않는다는 것 - 하종강의 중년일기
하종강 지음 / 철수와영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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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어디서 많이 들어왔던 이름이었더랬다. 그런데 그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인간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관심있어 하는 분야나 사람이 아니면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고 보면 나도 어지간한 외눈박이란 생각이 든다. 그는 노동상담가란다. 아하! 그랬구나. 그리고 자신이 50대라고 밝히고 있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짤막짤막한 글이 별반 어떠한 느낌도 받질 못했다. 노동상담가라면 노동현장에 있으면서 느꼈던 체험들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피 끊는 듯한 글은 없고 그냥 저자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단백한 필치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오히려 밋밋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읽어 갈수록 글이 위트가 있고, 사람됨의 면면이 느껴져서 이내 편안한 마음으로 읽었다.

읽다보면 어딘가 모르게 그에 대해 천진난만함이 느껴진다. 나이 먹을수록 음악 듣는 것도 멀어지던데 하물며 팝송은 더하지 않는가? 그래도 하종강 그는 딥퍼플을 좋아해 아들과 함께 고생해가며 공연에 갖다 온 것을 자랑처럼 얘기한다. 그가 얼마나 천진난만하면 어디 가면 정신연령이 낮다고 코코아나 대접 받는다. 하지만 그가 꼭 다 천진난만함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섬세함도 있다. 어느 날 교통사고로 꼼짝없이 방에 누워있어야 할 때 그때야 비로소 박안의 벽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았다고 했다. 또한 한동안 정신병원에 입원에 있는 사람과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고통 당하는 사람을 위로하기는 차라리 쉽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토로하고,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김지연씨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그 슬픔을 글로 적은 부분에서 그의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하종강, 이 분 철이 없긴 없는 사람인가 보다. 1년 간 한겨례 신문 논설위원으로 일하다가 계약이 만료가 되어 다시 계약갱신할 때 저쪽에서 그만두라는 말을 완곡어법으로 말한 것을 그는 계속 더 일해달라는 뜻으로 알고 마음을 쓸어내리며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부분에선 정말 웃음이 나왔다. 우리나라 말은 왜 그리 어려운 것인지? 그건 나라도 직설로 받아 들이겠다. ㅎ 그는 386세대가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386세대가 아직 50에 진입하지 않았으니 그의 아쉬움이 더욱 절절해 보인다. 하지만 나라마다 한 시대를 아파해야 하는 굴곡은 있게 마련인 것 같고, 거기에 직격탄을 맞은 사람이 386이라고 하지만 그 역사에 온몸을 던져 불 살랐던 세대가 있었으니 그것으로 제 할 본분은 다 하지 않았겠는가? 단지 언젠간 잊혀짐이 아쉬울 뿐이지.

나이 들수록 입에 붙는 말이 있다. 나이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 보면 "도대체 나이가 몇이야?"란 말이 절로 나오는 때가 너무 많아졌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을 '철딱서니'라고도 한다. 이 책을 읽으니 우리 시대는 너무 철들기를 강요하는 세대는 아닌가를 생각해 본다. 본래 철이 든다면 성숙해져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함께 나누고, 양보하고, 다 같이 잘 사는 삶의 태도를 지향하고 등등. 하지만 우린 철들면 어떻게 하면 손해 안 보고, 영악해지고, 남을 짓 밟고라도 내가 잘 살까를 궁리하게 된다. 이젠 좀 꿈 꾸는 사람이 대접 받고, 작은 것에도 강동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인정 받는 그런 때가 와야하지 않을까?

하종강. 그는 그 바쁜 중에도 아마추어 무선사이기도 하다. 나는 무선에 대해선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선사들은 가끔 자신이 보낸 전파를 다른 안테나에 보내지 못하면 자신이 고스란히 되돌려 받아 그 전파를 감당하지 못해 나중에는 무전기가 고장이나고 만단다. 그것을 SWR 또는 '정제파비'라고도 한단다. 그것에 대해 그는,

   
 

...사람도 그렇다. 자신의 넘치는 감정을 다른 사람이 받아 주지 않아서, 자신이 고스란히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가슴 가득 넘치는 그리움을 아무도 받아 주는 이가 없어서 혼자 되새김질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지금 다른 이에게 끊임없이 전파를 보내고 있는 많은 안테나들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나, 또는 모르거나.

 
   

 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철이 든다면 감성이나 감정적인 부분은 줄어들고 이상이나 현실감각이 극대화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얼마나 삭막해질까? 그래서 하정강 그는 철들기를 거부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도 자신이 쏘아올린 천진난만하고도 가슴 따뜻한 전파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 누구에게 어떠한 전파를 보내며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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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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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가끔 퀴즈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다. 막상 나 같은 사람이 이 소설에 나오는 이민수만큼이나 퀴즈쇼에 나가면 버벅거리고 아는 문제도 틀리고 그럴텐데도 한 두 문제 맞춘 것 가지고 나도 한번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보면 어떨까를 상상해 보곤한다. 나가면 우승은 못할지라도 못해도 본선진출에 재수 좋으면 등위 안엔 들지 않을까? 요즘엔 상금도 짭짤하다 못해, 저걸 정말 다 준단 말야? 하고 의심할 정도로 많이 주던데. 물론 그것을 다  맞춰야 한다는 전제있긴 하지만. 못 마쳐도 반타작을 할 수 있으니 그또한 나쁘지 않다. 그래도 난 낭패를 볼 확률이 좀 많아 보인다. 왜냐하면 퀴즈하면 순발력인데, 난 아는 문제도 부저를 누르는 속도가 느려서 떨어질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김영하의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소설로는 이 책이 처음이지 않은가 싶다. 그만큼 김영하와 나는 인연이 없었던 것일까? 그래도 읽으면서, 아, 김영하가 소설을 이렇게 쓰는구나. 꽤 감탄하며 읽었다. 그 느낌은 뭐랄까? 상당히 도회적이면서도, 지적이고, 회색톤이며, 한땀 한땀 뜨게질 하듯 촘촘하게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가 이야기 중간중간에 소개해 놓은 소설들만 해도 몇십 권은 돼 보이는데, 그것을 나름 정교하게 배치해 놓고 있다. 게다가 이민수가 갔다던 일명 '퀴즈 회사'라는 곳도 꽤나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어서 정말 그런 곳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그런 지엽적인 것은 아닐터. 그가 얼마나 20대의 방황하는 청춘을 오늘 날에 맞게 그려놓고 있느냐일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작가는 상당히 충실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하는 바, 독자인 나는 대체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책에 나오는 20대 후반의 자조섞인 목소리를 들어 보자.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 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헐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편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 세대는 그중에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작가 김영하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이십대에 대해서 생각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20대를 건너왔고, 나의 20대랑 요즘의 20대는 전혀 다르며, 20대를 건너왔기 때문에 요즘의 20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세대의 변화라는 갭은 역시 뛰어넘지를 못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지금의 내 나이도 더 버겁다고 비중을 실어서일까? 그닥 와 닿지 않는 면도 없지 않다. 그냥, 그래, 너희들도 힘들지? 앞으로 더 살아 봐라. 삶의 무게가 더 무거우면 무겁지 새털같이 가벼울 줄 아니? 하며 측은지심이 들어가기도 한다.

사실 이 소설이 세태를 표방하는 만큼 각 개인은 시대의 불운아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상처받고, 소외되고, 뭔가 병든 것 같은 사람들. 그것을 자위하고 자조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영웅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그 지긋지긋한 희망 때문에라도 말이다. 그래도 우린 이민수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봐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변인으로 봐야하는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누군가는 이 세태를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무엇을 빗대어서라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김영하는 오늘의 세태를 자신의 글에 충실히 반영했던 충실한 기록자는 아닐까?

우리는 언제부턴가 희망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될 싯점에서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없고, 어두운 전망과 서로의 엇갈린 진술속에 진창을 딩군다. 희망을 말하지 않게 된 것이 정말 희망이 없어서 그런 건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 건지 그것은 알 길이없다. 이 전망없는 세대가 이 소설속에서도 그대로 묻어나와 조금은 마음이 씁쓸해 진다.

조금 다른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공교롭게도 이번에 나의 조카가 대입수학능력고사를 봤다. 나의 조카는 저주받은 트라이앵글 세대라는 89년 생이다. 트라이앵글은 내신, 논술, 수능을 지칭한다고 한다. 얘네들이 취직을 해야하는 6,7년 후에는 누가 또 어떤 20대를 주인공으로 한 세태소설을 쓸까?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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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1-25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영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인데 이 사람은 이렇게 소설을 쓰는구나...하며 감탄했어요. 대단히 재밌게 보았는데도 이상하게도 별점은 저도 넷을 주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stella.K 2007-11-26 10:1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다섯 주면 독자로써 너무 싸 보인다는, 뭐 그런 심리도 있었을 것 같아요. 네개 주면서 다시한번 이 별점 자체에 대한 묘한 불만이 생기더라구요. 없으면 허전하고, 주자니 껄끄럽고. 이젠 필요악쯤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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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완서 선생의 글을 접한 때가 10대 말에서 2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놓은 책마다 족족이 다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작가의 작품을 꽤 꾸준히 읽어냈던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박완서 선생이다.

그때 그는 40대에서 50대의 나이었을 것이고, 그의 소설에 나온 주인공들도 꼭 선생만한 나이의 여성들이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나는 그의 소설을, 산문집을 잊고 살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한 작가에 대해서 어느만치 알겠다 싶으면 다른 작가 또는 다른 책으로 관심을 돌리는 나의 콩 뛰고 팥 뛰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 때문이었을 게다. 그리고 이렇게 한 20년쯤의 세월이 흘러 그의 소설을 다시 접하고 보니, 그는 여전히 당신만한 나이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사람들에 대해, 삶에 얘기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중년의 여성이었겠지만, 지금은 노년이다. 그렇게 꼭 자기만한 나이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젊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노년이 될 때까지 글을 쓰는 작가들은 꽤 있다. 그런 작가들은 더 노련해지고, 더 풍성한 글을 쓴다. 하지만 주인공을 딱 자기만하게 하고, 그 나이의 주인공의 싯점에서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내가 보기엔 그리 많이 않아 보인다. 이 책의 해설을 맡은 김병익 씨도 우리나라엔 아동문학도 있고, 청소년문학도 있지만, 유독 노년문학의 부재를 지적했다. 그것의 이유로는, 전쟁과 가난으로 작가들이 장수하지 못했거나 조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285p) 그렇다면 노년문학은 어떤 것일까? 수록작 <대범한 밥상>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너 딴 반찬도 먹지 그 군둥내 나는 짠지 국물은 다 마셔버리냐? 나중에 물키려고."

"글쎄 나도 모르게 그 군둥내가 비위가 땡기네. 이거 어떻게 만든거니?"

"만들고 말고가 어딨어? 무를 통째로 왕소금에 푹 절인거지."

"그건 아는데 짠맛 말고 군둥내가 꼭 요만큼만 나게 하는 레시피 말야."

"레시피 좋아하네. 그거 작년 것도 아니고 아마 재작년 걸 거야. 김장때가 쉬 돌아올 것 같아서 뒷마당에 묻어둔 항아리를 살피다가 밑바닥에 골마지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무가 서너 개 남았기에 버리기도 뭐해서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손님 맞을 준비한답시고 나박나박 예쁘게 썰다가 맛을 보니까 어찌나 소탠지 몇 번 물에 울궈내고 나서 다시 물 부어놨던 거야. 가미한 건 초 몇 방울하고 실파 썬 것하고 고춧가루 솔솔 뿌린 것밖에 없어." (220-221p)

참 평범하지만 노년문학 아니 박완서 문학을 이토록 잘 표현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짠지엔 양념과 재료의 맛을 좌우하는 황금 비율의 레시피가 없다. 오로지 왕소금과 원래 무가 가지고 있는 맛의 성질이 오랜 시간을 두고 하얀 골마지를 뒤집어 써야 나온다. 하지만 쉽게 먹을 수도 없다. 쓰도록 짜서 몇 번을 물에 울궈내야 겨우 먹을 수가 있다. 나도 몇번 먹어 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맛 있는 음식이 아니다. 그런데 이 노년의 여인은 그 군둥내 나는 국물을 맛있다고 들이킨다. 과연 그것은 그 나이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이 주는 맛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표제작 <친절한 복희씨>를 비롯한 9편 모두는 겉으로 드러난 생의 이면을 저자 특유의 문체로 재치있고 웅숭깊게 드러내고 있다. 특별한 멋도, 기교도 없다. 그냥 예전에 나의 외할머니가 어디선가 듣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옮겨 들려주는데 그것이 마냥 재미있어 또 듣고 싶어했던 것처럼, 선생의 문학은 나에겐 꼭 그런 느낌이다. 그야말로 한 작품, 한 작품 읽을 때마다 가슴속 깊이 뭔가가 켜켜히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이 책은 내가 한동안 어떠한 일로 기분이 꿀꿀해 했을 때, 위로 받으라고 어느 착한 알라디너 분이 선물해 주신 것이다. 그 분의 마음이 하도 따뜻하게 느껴져 나는 잠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다시 펼쳐 든 박완서 선생의 이 책은 참으로 나의 마음을 보듬어 안아 주기에 충분했다.

어떠한 꾸밈도  에누리도 없는 선생 특유의 문체는, 마치 어떠한 기교도 없이 애조띤 정서만을 목소리에 담아 노래 부르기로 유명한 가수 이미자 씨의 음성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살잔 소리, 낭탁, 우세스럽다 같은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선생만의 독특한 어휘는 김병익의 말대로, 눈치로 받아 들이게끔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 준다. 게다가 문장부호 또는 줄바꿔 쓰기 등도 여간해서 잘 쓰지 않는 선생의 문장에선, 오히려 이것을 너무 심하다 싶으리만큼 쓰고 있는 겉멋든 젊은 세대의 글쓰기 방식에 잔잔한 하고도 도도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이제 나는 선생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던 젊은 날을 관통하여, 선생이 처음 글을 쓰고 문필을 날렸던 그 나이 언저리에 도달해 있다. 나이 먹어서 좋은 건 그다지 없어 보이는데, 한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젊을 때 보다 덜 방황하고 덜 실수한다는 거다. 젊을 땐 그게 그렇게 하고 싶고, 좋아 보이는 것들이 때를 지나놓고 보면 그것도 그다지 좋은 것마는 아니라는 것을 아는 시기가 바로 지금의 내 나이인 것 같다. 그래서 웬만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는게 인생이고, 꿀꿀한 게 인생이다.

박완서 선생은 서문에서,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쓰셨다. 나는 언제쯤이면 이 꿀꿀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게 될까? 선생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나이쯤이 되면 진짜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게 될까? 그렇다면 시시때때로 섣불리 이게 다일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고, 조금 더 살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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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7-11-13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렇군요. ^^
지난번 산문집에서 좀 노인스런 고집이 느껴져서 당장은 조금 망설이고 있는데,
결국엔 읽을 것 같아요. ^^;;
좋은 리뷰, 잘 읽었어요. ^^

stella.K 2007-11-13 18:09   좋아요 0 | URL
그럼 추천도 좀 해 주시지 안쿠...>.<;;

프레이야 2007-11-1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 이리 후하게도 다섯개를 주신 거 보면 분명 읽어야되는 책
맞죠? ㅎㅎ

stella.K 2007-11-14 10:38   좋아요 0 | URL
그럼요. 박완서 선생 글을 읽으면 정말 쓰고 싶어져요. 근데 나름 심혈을 기울여 리뷰 썼는데, 댓글도 추천도 그리 많지 않군요. 저는 왜 이럴까요? 흐흑!

프레이야 2007-11-15 08:5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ㅎㅎ 토닥토닥~ 심혈을 기울여 쓰는데 말이에요^^
클릭 한 번 더 하면 되는뎅..
님의 명언 "추천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세요^^

stella.K 2007-11-15 10:58   좋아요 0 | URL
ㅎㅎ 님도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