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조안 해리스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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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콜릿'이란 단어를 입력하고 클릭을 해 봤더니 이 이름을 달고 있는 책이 수십 권이 뜬다. 좀 놀랐다. 원래 초콜릿이 사람의 입맛을 달콤 쌉싸름하게 유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로라는 작가들이 이것을 소재로 그렇게도 많이 책을 내놓은 줄은 미처 몰랐다. 책도 유행을 타긴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초콜릿'이 한때의 트렌드였다면, 얼마 전엔 '개'를 소재로한 이야기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올해는 '고양이'가 트렌드다.

 

이 책은 저자의 음식 3부작 중 하나라고 한다. 블루베리, 오렌지, 초콜릿을 소재로 했다. 몇년 전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동명 영화를 인상 깊게 본적이 있어, 한번쯤 소설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봤을 때나 책으로 읽었을 때나 내가 갖는 의문은 정말 '초콜릿'이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가이다. 초콜릿을 싫어하진 않지만 일부러 즐겨하진 않는다.  요즘엔 초콜릿의 고급화와 대중화를 선언했는지 젊은 두 남녀의 욕망의 줄다리기를 컨셉으로한 한 CF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저 초콜릿이 사람을 강하게 끌 수 있는지 의문이 간다. 하지만 막상 편의점엘 가서 이 초콜릿의 가격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까지의 먹고자 하는 욕망은 사라지고 과연 이 가격에 이 초콜릿을 사? 말아? 갈등하고 있는 나를 보면 나는 '상대적인 금욕주의자'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찌보면 먹는 것에 대한 유혹이 성에 대한 유혹을 앞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담과 이브의 최초의 유혹을 보라. 그깟 사과 알만한 선악과를 따 먹겠는가? 말겠는가를 고민하다 어처구니 없이 한입 베어 먹은 걸 가지고 벌거벗은 수치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 하지 않는가? 그 역사 이후 우리 인간을 얼마나 많이 먹는 것을 가지고 아귀다툼을 하며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해야 했더란 말인가? 게다가 정력에 좋다면 뭐든지 먹고 보자는 우리나라 사람들 보면 기가 차고, 걸상만 빼고 뭐든지 다 만들어 먹는다는 중국 사람들 보면 신기해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그런데 그깟 '초콜릿'이 뭐 그리 대수라고 이처럼 은밀하고도 서정적이게 이야기를 써 놨더란 말인가?  

 

영화에서는 비주얼이 상당히 좋다. 정말 줄리엣 비노쉬가 만드는 초콜릿을 보면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것도 그거지만 찬 바람을 뚫고 두 모녀가 어딘가를 가고 있는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다. 그때 둘이 입었던 빨간색 망또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초콜릿은 잃어버렸던 부부의 사랑을 이어주고, 인간관계의 화해를 가져오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자기 선언을 하게 만드는데 묘한 마력(?)을 뿜어낸다. 특히 종교적인 위선과 권위에 도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저자가 종교를 초콜릿이란 도구를 통해 허위와 권위를 수면위로 끌어올리려 했다는 것이 일견 아쉽게도 느껴졌다. 물론 종교에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난 왠지 작가가 의도적으로 까발리려고 했던 것 같다 나름 그것을 변호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 못할 것도 아닌지라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게다가 어찌보면 작가는 신앙을 흠잡으려 했다기 보다 인간의 자유가 종교적인 위선과 권위에 짓밟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아마도 그것을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저자의 문체가 서정적여서 좋다. 하지만 흠이 있다면 요즘같이 흡인력있고 재밌게 읽혀지게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한권의 책을 읽는데 며칠이 걸렸던가? 감히 입에 떠올리지도 못하겠다. 초콜릿 본연의 유혹보다 이 책을 이쯤해서 덮을까 하는 유혹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래도 무사히 완독했다. 다행히다. 읽는 내내 진한 코코아의 유혹도 만만치 않았다. 물론 다 읽고 나서는 그런 유혹은 다시 없어지긴 했지만. 그 보단 매일 인스탄트 커피 두 스푼에 설탕 한 스푼, 우유 섞은  커피 한잔의 유혹이 더 크니까 그것으로 코코아의 유혹을 대신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열린 책에서 찍어내는 이 페이퍼백 소설에 적지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고래적부터 책의 모양새가 그래왔겠지만, 개개인의 인체공학에 맞춘 책이 앞으로 등장 하겠는가? 기대도 안한다. 하지만 너무 가볍게 만든 탓에 편하게 책상에 놓고 가볍게 한장씩 넘길 수  없었고, 꼭 손으로 들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불편함을 감내해야 했다. 만일 어떤 사정이 있어 한 손으로만 생활해야 하는(그것이 한시적이든, 영구적이든 간에) 사람에겐 엄청 불편한 것이다. 어쩌다 책을 읽다 머리나 콧등이라도 긁을라치면 읽은 페이지를 잃어버리지 않게 책을 엎어 놓고 긁어야 한다. 그 불편함을 아는가? 게다가 글씨와 행간은 왜 이리도 작고 촘촘한 것인지? 이것을 문학은 좋아하나 눈 나쁜 선배나 어르신한테는 결코 선물해서는 안될 책 1순위가 되어 버렸다. 나 역시도 시력이 예전만 같지 않이 이렇게 만들어진 책은 기차게 좋은 내용이 아니면 손도 대지 않을 확률이 아주 높다. 아무리 뚝배기 보다 장맛이라고는 하지만, 기왕이면 책 내용도 좋고, 튼실하게도 만들면 좋지 않은가? 싸게도 팔면 금상첨화겠지만 싸게 파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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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3-19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만 봤었는데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책으로 다시보면 기억이 나려나요? 님의 리뷰를 보니까 그래도 책이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ㅎㅎ

stella.K 2007-03-2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느낌이 다르더구요. 좀 더 섬세하다고할까? 책으로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겁니다.^^

rancet 2007-06-09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책의 '페이퍼백' 시리즈에 대해서 저는 찬성입니다. 어서 다른 출판사에서도 좀 따라해줬음할 정도이니까요. 어제께 교보문고에 가서 문학 섹션에 갔었는데, 이제는 책의 표지가 만화책의 표지와 같아 졌더라구요.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책은 사용성을 파는게 아니라 영혼을 파는 상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담는 그릇이 넘치는 것이 좀 마뜩지않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말이에요. '초콜릿'은 그래도 아주 두꺼운 편은 아니지만, 같은 시리즈의 '새의 노래'는 600쪽이나 됩니다. 만약 이 페이퍼백 시리즈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드커버나 정본을 사시면 되겠지요. 출판사는 오히려 독자에게 선택의 기회를 넓혀주고 이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거의 모든 책들은 하드커버와 페이퍼백이 같이 나옵니다. 물론 시간상의 선후는 있지만, 책의 내용을 보는 입장에서라면, 또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도, 열린책들 출판사의 '페이퍼백'은 좋은 기회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꾸벅~


stella.K 2007-06-1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ncet님,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페이퍼백과 하드카바, 같이 나와야 하는 것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잘 몰라서일까요? 열린책들의 어떤 책들은 하드카바가 안 나오는 것 같던데...그래서 불만인 거죠. 맞아요. 책은 영혼을 파는 거에 동감합니다. 하지만 그런 책들이 갈수록 찾아 보기가 어려운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은 것 같아요. 흐흑~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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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소설가들이 독자를 웃기기 시작했다. 웃기는 소설가가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 웃기는 수준이 전과는 좀 달라 보인다. 이를테면 예전엔 웃기는 쪽에선, 나는 전혀 웃기지 않은 척 눙치고 있는데 상대가 웃어주면 좋은 일이지 하며 엄숙을 가장한 그런 것이었다면, 요즘의 작가들은 아예 작정하고 나도 웃고, 너도 웃고 우리 다 같이 웃자는 식인 것 같다. 그것이 나쁠 것은 없다. 모 작가가 그런 말을 했다지. 내가 먼저 재미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어찌보면 작가는 자기 글의 제1의 독자인지도 모른다. 내가 재밌게 느끼지 않는데 남 보고 재밌게 읽어달라고 하면 그건 어불성설일게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재밌다. 웃긴다. 나름 톡톡 튀는 재치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그런데 읽으면서 살짝 걱정되는 건, 작가가 독자를 웃겨서 나쁠 건 없지만, 모든 작가가 이것을 들고 나온다면 '웃음 강박증'에 사로잡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웃는 것이 좋다고 하니 웃긴 웃는다만,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웃길거냐에 경도된 나머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걸 놓치거나 부각시키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앞지른 걱정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아니, 좀 더 솔직히 얘기 하자면 나는 이 작품에서 개그적 요소를 발견했고(이를테면 소설 어디엔가 보면 스파이들이 보는 책목록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거 보고 정말 웃겼고 인물이나 배경 설정이 웃겼다) 그래서 웃긴 했지만, 앞으로 한동안 우리 소설에 이런 개극적 요소를 심심찮게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정말 '콜럼버스의 달걀' 같과 같은 소설이다. 누구든 한번쯤 다루어 봄직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을 생각 못하고, 안 다루었는지 모르겠다. 아는대로, 007 영화는 많은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제임스 본드는 승리를 의미하는 만족스러운 웃음과 매번 바뀌는 본드걸과의 달콤하고도 야스러운 포즈로 마무리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걸고 넘어지는 것은, 정말 보여지는 짜릿한 엔딩이 과연 실생활에서도 이어지고 있느냐라는 의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거 얘기라면 찾아보면 더 나오지 않을까? 나의 경우 신데렐라 이야기가 그렇던데. '그래 좋아.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왕자님과 다시 만나 결혼을 하게 됐어. 그런데  삶은 현실이거든. 그 이후의 삶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신데렐라 이야기의 속편을 쓰는 사람이 없다. 이 기회에 내가 한번 써 봐?'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많은 가능성과 참신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기대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하지 않았다. 어느 쪽일까? 일부러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걸까? 못한 걸까? 정말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단 말인가? 이 책에서 007은 해피엔딩과 달리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다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간단하게 미미양을 배신하고 새로운 여자와 사랑을 한다. 이에 미미는 복수를 위해 스파이 교육을 받는다. 그랬으면 당연 끝까지 복수를 해야하지 않는가? 그런데 작가는 그것을 슬쩍 비껴간다. 작전 한번 실패해 봤더니 사람이 보이더라는 식이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떠한 깨달음이었는지 사람이 저 모습이 되기까지는 나름의 많은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려고 했겠구나. 그러니 어쩌겠니? 서로 이해해 주고 감싸주고 인류애를 좀 발휘해 줘도 괜찮지 않겠니? 그래야 세상이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뭐 그런 식의 호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쯤은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정도의 지점에서 마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소설이 너무 짧지 안았을까? 작가가 성직자 같을 필요야 없겠지만 암시 정도에서 끝내버리면 독자가 성에 안 차한다. 특히 나 같이 까탈스럽고 이기적인 독자는. 아니면 설득될 때까지 더 많은 에피소드와 이야기를 전개해 보던가? 뭔가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지점에서 대충 뭉개고 마니 김이 빠진다. 그러니 여기에 굳이 '미미양의 모험'이란 타이틀까지 달고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그냥 '미미양의 깨달음' 정도이지 않았을까? 모험이 모험다워지려면, 뭔가 박진감이 넘치고 어려워도 목표치까지 가 보고 갔다가 그 이후에 오는 것들을 조용히 음미해 보는, 뭐 대충 그런데까지 나갔어야 '모험'이란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았을까?

물론 사람의 생각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 거 가지고 독자를 설득시킬 수는 없다. 독자는 인물이 변하는 것을 추적해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니 미미양이 나중에 무엇을 깨달았던지 간에 007을 복수하기로 했다면 해 봤어야 했다. 그리고나서 남는 건 뭐였는가를 얘기해야 완결된 맛이 느껴지지 않을까? 복수를 위한 모험이었을텐데 재대로 해 보지도 않고 끝내 버리다니 좀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 책은 개인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나를 자극시켰다. 우선 앞서말한 모 작가의 재밌게 쓰기에 또 한번 좋은 사례(?)를 보여줬고, 작가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너무 성급하게 일찍 뭔가를 드러내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거야 설교가나 상담가들이 하는 거 아닌가? 그것이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독자의 가려운 부분을 충분이 긁어주고 등장인물과 충분히 놀다가 끝내줘도 늦지 않은 거 아니겠는가. 그런 여유가 아쉬운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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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7-03-0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라는 것 같기도 하고, 보지 말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stella.K 2007-03-08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선택은 자유죠. 저 같은 경우 선물 받아서 읽은 거거든요.^^
 
르네상스의 비밀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01
리처드 스템프 지음, 정지인.신소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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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책이라는 게 읽기에도 편해야겠지만 휴대 하기에도 편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래야 편하게 누워서도 볼 수 있으며, 가방에도 쏙들어가고 어디서든 편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 그 상식을 뛰어 넘는 책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체형이나 구조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네가 볼테면 봐라. 하며 도도하고 럭셔리하게 그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다소곳이 있는 것이다. 마치 황진이 본색마냥.

가격도 만만치 않다. 그런 책들은 아무리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보통 그 분야게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관심이 가지 않아서라기 보단 책을 사는 것까지는 좋으나 돈을 지불할 때의 손떨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 하지만 보지 않으면 먹지도 않게될 금단의 열매 같은 것이다. 바로 이 책이 그런 책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이 인터넷에 그 모습을 들어냈을 때 아, 한번쯤 가져봤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금단의 열매 같은 이 책을 덥썩 잡아 볼 기회를 얻었다. 웬 호사란 말인가? 그런데 쪽수가 200 페이지를 조금 넘는다. '페이지는 얼마 안 되면서 비싸기는......' 딴은 그래서도 선듯 사기를 주저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상 받아 본 결과 헉~! 더 두꺼웠으면 클날 뻔했다. 받아 본 그날로부터 매일 정해진 페이지를 읽고 아무대나 던져놓을 수 없어 책꽂이에 세워놓아야 한다. 그거 세워놓은 것도 손목에 힘이 꽤 들어간다.  이 책은 쪽수는 얼마 안 되지만 결코 빨리 읽을 수도, 읽어서도 안될 책이다. 감상이 필수다. 도판에 꽤 신경을 썼다는 소리다.

르네상스라...! 서양의 역사 중 가장 화려하고 무궁무진했던 때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학교 졸업과 동시에 르네상스를 잊고 있었다는 걸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하기사 나의 학교 때는 역사에 그닥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무식의 소치가 들어난다. 나는 르네상스가 인본주의의 부흥기로써 그전까지 신본주의가 팽배했고 그것에 대한 반기로 일어난 줄로 막연하게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이때만큼 기독교가 역사적으로나 문화 또는 예술 방면에서 빛을 바랬던 때도 없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 시기에 나타나고 활동했던 예술가들 대부분 예수나 성모를 찬양하기 위해 예술활동에 뛰어 들었다. 물론 각 예술가들마나 독특한 기법이 있겠지만, 그들의 하나 같은 테마는 '예수'와 '성모'였다. 하지만 나는 책에 나온 그림을 보면서 르네상스가 과연 서양의 기독교 융성을 위한 것이었겠는가에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하나, 그림에 나타난 성모와 아기 예수는 하나 같이 혈색이 좋고, 고고하다. 권위마저 느껴진다. 이것은어찌보면 기독교의 실제적 역사와는 조금은 다르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그 시대에 나타난 그림들을 보라. 시쳇말로 럭셔리 하다. 색감도 그렇고, 하나 같이 풍성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다못해 예수님 고난을 그린 그림조차 슬프다 못해 처절함이 느껴지기 보다, 어떻게 이렇게 럭셔리 할 수가 있지! 또 다른 면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예수 고난상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처절함이 느껴지려면 리얼리티어야겠지만, 그 시대는 풍부하고도 고급스런 이미지만을 강조했다는 느낌이 든다. 결국 그것은 그 시대의 예술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기 보다 있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지고 그들의 감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호사가를 위한 예술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강력한 신심에 의해서 예술 또한 그러했을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 부러움은 있다. 르네상스 예술에 관심있는 여간내기가 아니고서는 요즘 같은 시대에 과연 이 예술이 일반대중에게 먹힐까 싶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는 영원하다. 서양사에 있어서 어느 방면의 역사를 들추더라도(문화사든, 예술사든) 르네상스는 꼭 거쳐가야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가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그 시대의 당대를 풍미했던 호사가들에 의해 전승 발전해 오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다(맞거나 틀리거나.). 어쨌거나 그렇게 보존이 되고 어느 한 나라만을 위한 역사적 유물이 아닌 전 세계적 유물이 되었는데,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말은 하면서 과연 우린 우리의 것을 전 세계에 알릴만한 재원이 있는 것일까?

왜 제목을 <르네상스의 비밀>로 했는지 저자에게 묻고 싶긴 한다. 물론 이 책을 통해 분명 내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게 됐지만 그것이 비밀스럽기 까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역시 예술사나 미학에 관한 책들은 좀 어렵다.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 이 방면의 대중을 위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르네상스에 대한 나름 예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 책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글쎄, 비싼 책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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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3-07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목이 좀 그랬습니다^^;;;

프레이야 2007-03-07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싼 책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 그맘 이해합니다.^^
표지만 봐도 럭셔리 하네요.

은비뫼 2007-03-0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제목이 문제입니다. 아무튼 책장에 밀어넣기 힘든 터라 책상에 고이 모셔두고 있습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

stella.K 2007-03-08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고맙습니다, 님들. 이렇게 댓글 많이 받아 보기는 정말 오랫만이군요.^^

행인 2012-01-29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쓰셨네요~!이 책 사려고하는데 고민이 많이되서 리뷰를 찾아봤는데 별로 쓴사람이 없더라구요 ㅋㅋ 그래서 알라딘에 들렸는데 리뷰가 하나같이 다 길어서 도움이 많이됐어요~ 특히 첫단락 비유랑 마지막에 글쎄, 비싼 책이라 그런가?! 가 참 인상깊었네요~
 
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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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이 책에 실린 사진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본 적이 있다. 플리처상 보도사진 부분에서 수상했다는 짧은 제목과 함께. 사진엔 문외한이라 어떤 필름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은 강렬했고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처음 보면, 겉표지의 사진은 제법 서정적이고 낭만적여 보이기도 하다. 물론 지붕위에 앉았으니 불안은 하겠지. 하지만 소년의 돌아앉은 모습에 묘한 황량한 여유로움이 베어있는 듯하다. 과연 이럴 수 있을까? 그래도 소년의 마음은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몰래 무임승차 했으니 불안할 것이고, 어서 이 기차가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데려다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 분명 무임승차가 나쁜 것이긴 하지만 여행 하면서 무임승차와 서리의 묘미는 여행의 짜릿한 기쁨을 배가시켜 주기도 하지않던가.  더구나 제목 끝말을 '여정'으로 설정했으니 대뜸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하게도 만든다. 또한 '엔리케'란 리틴스러운 이미지가 주는 느낌도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나머지 사진이나 책의 내용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비참하다.  살아 보겠다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아이들과 그 위를 나르는 검은 독수리의 이미지란 스산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하다. 또한 기차의 지붕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붙들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생에 대한 사투는 참으로 모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운이 없어 거기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사지가 절단 나거나 죽기도 한단다.  그런데 이들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어린 나이에 그런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부럽지 않게 자식을 키워 보고자 불법이민자로 미국땅에 발을 디딘 부모를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그러한 도전을 서슴치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죽느니 차라리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길에 죽겠다'는 필사의 각오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정을 그리워 하는 마음이란 죽음 조차도 갈라놓지 못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나는 고백 하건데, 그런류의 보도 사진이나 뉴스 보도물 보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보면 괴롭다.내가 살고 있는 지구 어느 한쪽에서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뭘 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나는 저런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란 말로 본 느낌을 대변한다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아무튼 그런 보도물을 접한다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나를 들여다 보면, '이 생각이 과연 전부 다인가?'가에 진실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해 버리고 만다. 눈이 보배라고 사람은 좀 더 나은 것, 화려한 것,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스러운 것에 눈을 두기를 좋아한다. 나 역시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매스컴은 연일 그것을 쫒기에 바쁘다. 사람의 오감을 만족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사람들의 눈과 귀는 점점 더 길들여져 우리 바깥은 세계에 대해선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분야나 그렇듯 속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도 조그만 불씨하니 지펴내는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낼 힘을 얻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모든 것이 썩있다면 저널리즘이라고 예외겠는가? 그래도 소냐 나자리오 같은 저널리스트가 있으니, 저널리즘은 살아있다!고 외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참혹한 현실을 펜대에 풀어내기 위해 그녀는 무려 5년이란 세월을 준비했고, 엔리케와의 동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녀 역시도 가정이 있었고, 동행취재하는 동안 어떤 위험한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일을 감행하도록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단순한 기자 정신이라고 하면 설명이 가능할까? 아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고로 휴머니즘은 살아있다!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어떤 개기로 작년부터 우리나라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전에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는 것에서 조금은 한발 다가선 느낌이고, 알고 있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들은 탈북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알고보면 이 책에 펼쳐진 현실이나 탈북자들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탈북자들 역시 북한에 가족 내지는 자녀들을 두고 탈북을 한다. 그리고 중국이나 몽골, 필리핀 등지로 흩어 진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들은 매춘 내지는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어쨌든 가까스로 그렇게도 원하던 한국에 발을 들여놓지만 그땐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돼 수족 놀리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북한에 두고 온 자녀를 데려오기 위해 적지않은 돈을 벌어 알선책에게 주지만, 잘못 아이들을 데리고 와 졸지에 그 아이는 고아  신세가 되기도 한단다. 북한에 남겨진 아이들도 엔리케를 비롯한 이 책에 소개된 아이들과 같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간다. OECD에도 가입한지 오래고,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이 나라 대한민국 안에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탈북자 1만명을 돌파 했다고 한다.

가끔 나는...탈북자,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행복하냐고? 가족을 두고 이렇게 힘들게 남한 사회에 정착하게 됐는데, 남한은 과연 살만하던가요? 사람들이 잘해 주던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역시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체제도 다를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네들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같은 민족끼린데도 박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또한 경제적으로도 너무 안 좋으니 나 살기도 버거운 판에 남 생각을 어떻게 하겠는가?

읽으면서...행복도에서 1순위라고 하던 방글라데시를 생각했다. 없이 살기로야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있는 온두라스나 그 나라나 오십보 백보 아닌가? 그런데도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나라는 아직 상업주의의 물결을 덜 타고 있고, 삶의 가치가 돈에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나라는 국제 경쟁력은 여타의 국가 보다 떨어질지 모르나 가난을 부끄럽지 않게 여길테니 그래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우린 어떠한가? 물질적인 부의 가치가 개인으로 하여금 꼭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확신도 없으면서 우린 너무 쉽게 그것을 믿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돈은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보장해 줄 수 있고, 내 자녀를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치루어야 하는 희생은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너무 가혹하다. 그리고 빈부의 격차가 심사면 심할수록 이것은 더욱 자명해진다.

가족은...어떠한 경우에도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적어도 그 사람이 독립된 인격과 경제적 자립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이것은 가난한 가정이나 부유한 가정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자식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시켜 보겠다고 교육 엑소더스 대열에 밀어 넣은 가족들을 보라. 그중 성공한 케이스도 없진 않지만, 가족해체의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은가? 또한 엔리케를 보라. 엄마와 떨어지고 보니, 버림 받았다는 생각. 모정에 대한 그리움. 탈선. 분노 등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 간다. 그러니 없이 살아도, 지금 당장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지 못한다 해도 가족만큼은 정말로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칠 필요가 있다. 엔리케의 고통은 엔리케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다. 엔리케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고 당장 북한에도 존재한다. 또한 아직도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이 엔리케와 똑같은 사연과 경로로 기차 지붕 위에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고 있으며, 제2, 제3의 엔리케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럴 때 국가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읽으면서 화가 났다.

국가가...개인의 가난을 구제해 줄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떨어져서 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보인책은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은가? 언제까지 밀입국자가 가장 많은 나라 내지는 교육 엑소더스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오명을 쓰고 있을 것인가? 국민의 바람은 지극히 소박하고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들어 줄 수 없다면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국가는 가정과 개인의 고통을 언제까지 침묵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거의 속수무책이 아닌가? 더구나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엔리케는 어머니와 상봉을 하지만 많은 정서적인 혼란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들을 치유하고 상담해 줄만한 마땅한 사회 시설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 그쪽으로 부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기사 밀입국자니 어디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병이 나도 의료보험 해택도 받지 못할텐데...미국이 무슨 봉도 아니고.  

이 책은...책이 가지는 문제점은 다소 있어 보인다. 어느 독자의 지적대로 오자나 탈자도 많지만, 동어반복적인 내용이 많아 전달에 있어서 다소는 그 긴장감이 떨어져 보였고, 무슨 문학도 아닌데 여러 사람의 얘기를 다루다 보니 다소는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기자의 싯점을 견지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 책이 전 세계에 출판되고, 사진이 전파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언급해 주었으면 좋을텐데 그런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나는 제발 우리의 아이들이 인권 교육을 재대로 받으며 살았으면 좋겠고, 거기에 이 책이 나름 공헌할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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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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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토머. 토포러. 메모리모자이커. 타임스키퍼 등등. 화자가 캐비닛에서 꺼낸 파일들 보면 하나 같이 너무 그럴 듯해서, 정말 내가 모르는 단어가 있는 줄만 알았다. 근데 뭐란 말인가? 주의사항을 보니, 이 캐비닛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오염된 것' 이라지 않는가. 띠옹~!  속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

귀가 얉은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야기가 좋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언제부턴가 보이는 것, 드러난 것에 더 많은 거짓과 위선이 있어 믿지 못하는 버릇이 생겨서일까? 암튼 난 이런 이야기가 꽤 흥미롭고 마음이 갔다. 하지만 저 주의사항을 읽었을 때 꼭 허무했던 것마는 아니었다. 작가는 어찌보면 있지도 않는 것들을 통해서, 보이는 것, 드러난 것들을 통렬하게 조롱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감싸 안고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고 속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왜 소설을 읽는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사실 읽으면서도 내가 속을 것을 어느만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가 속였다고, 독자인 내가 속았다고 어떻게 100% 장담할 수 있을까? 솔직히 이 책에 나오는 정도가 심한 '심토머'는 아닐지라도 그래도 그 비스무레한 이야기는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프로에 심심치 않게 공개되서 정말 놀라기도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아니, 저러고 어떻게 살아?"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도 산다. 우리와 같은 방식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나는 작가가 각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고딕체로 어찌보면 푸념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연극 대사 같기도 한 그 툭툭던지는 말들이 참 매력적으로 와 닿았다.  개다가 소설가가 뻥을 치지는 능력이 없다면 그게 어디 소설간가?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은  어쩌면 속을 줄 알면서 그 속는 맛 때문에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 작가는 독자를 속이기만 해서는 안된다. 평범하든 비범하든 그 이야기속에서 인간의 인간됨의 진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재주가 작가에게 없다면 우리는 소설을 읽지 않을거라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독자를 자극할만한 뭔가의 울림을 갖고 있지 않으면 읽지 않을 거란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나름의 구조적인 결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읽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이 소설은 참 독특하고 기존의 소설적 화법을 과감하게 깨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것이 문체는 어찌보면 하루키의 그것을 닮아 있는 것도 같고, 나중에 공대리가 잡혀가 손가락, 발가락 잘리는 것을 보면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데 나 역시도 내내 킥킥대고 웃으며 읽다가 말미에 갈수록 약간은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뭔가 늘어지는 것 같다는 그 지점에서 나름대로 잘 마무리하고 나왔다는는 점이겠지.

읽다보니, 앞으로 작가들은 점점 발품 팔아 글을 쓰지 않고, 있는 재료와 상상력만 가지고 글을 쓰게 될거라고 하시던 나의 옛 스승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분의 말은 맞는 말이된지 오래고, 이 소설에서도 새삼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앞으로 작가에게 있어서 취재력이 없거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무슨 의미가 될까?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지금도 완성하게 발품 팔아가며 소설을 쓰고 계시는 조정래 씨나 최인호 씨 보면 그분들이 어떻게 취재력을 발휘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또한 작가의 나이가 아직 젊은데 취재력 좀 발휘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수상소감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독자는 이 세계에 단 한 명도 없다.고. 처음에 이 글줄을 읽었을 때 설마...했다. 하지만 봐라. 내가 언제 독자로서 작가에게 관용을 베푸는 거 봤나? 위에서 바로 쓰지 않았나? 취재력 좀 발휘해 보라고. 그의 말이 맞다. 그렇다면 이 말은  독자를 잘 알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작가 나름의 방어술이었을까?

뒤에 작가 전경린과의 인터뷰 내용이 참 절절하다. 역시 작가란 배곪는 직업이란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배 곪는 줄 뻔히 알면서 작가가 뭐 그리 좋다고 못되서 안달하는 것일까? 그래도 그에겐 춘섭이라고 하는 고마운 친구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친구가 그랬다지, '언수야, 내가 세계문학을 위해서 한번 쏜다'고. 그래서 2년간 매달 50만씩 그를 도와줬다고 한다.  멋있는 친구다. 지금 그는 수천억원 매출 올리는 사장이 되었다고 하니, 분명 위에 계신 분께서 그의 갸륵한 마음을 알고 복을 주신게다. 일개 작가지망생 나부랭이 밖에 안되는 나도 가끔 아는 사람 만나면 아는 척 씨부리고 다닌다. 작가는 명예직이라고. 작가가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줄 아냐고? 왜 작가는 기본적인 의식주 걱정없이 오직 이 나라의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 글만 쓰면 안되는 걸까?

최재천 교수가 지난 주일 TV에 나와서 그런 말을 했다. 우린 위기란 말은 너무 잘 쓴다고. 인문학의 위기, 자연과학의 위기, 경재위기 등. 그런데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다. 이것이 믿겨지느냐고. 전쟁의 폐허에서 반세기만에 이런 발전을 이룩한 나라는 전세계적 몇 안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린 아무런 가진 자원이 없다. 우리나라가 내세울 것은 오로지 학문 연구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에서 5백명의 가능성 있는 학자를 1년에 4천만원씩 10년 간(?) 무상으로 지원해 주면, 그들이 훗날 각 분야에서 브레인으로 그동안 연구한 것을 쏟아낸다면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좋은 일이겠냐고. 그렇게되면 총 200억 정도가 드는데 그것이 우리나라 경재 규모상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좋은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5백 명에 글쟁이는 과연 낄 수 있을까? 아니 끼어야만 한다. 아니면 춘섭 씨 같은 친구나 배우자를 만나던지...

아무튼 문학동네가 또한번 '김언수'라는 가능성 있는 젊은 작가를 배출해 냈다. 어느 심사평에서처럼, 나 역시도 김언수란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 궁금해졌다. 이전에 무슨 글을 썼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가 된다. 그런데 이 작가 겸손하기도 하고 자신만만 해 보이기도 한다. 정말 그의 말대로 작가가 단순히 돈 없고, 빽 없는 독자 하나를 후려쳐서 책 한권 더 팔아먹을 요량이라면 귀싸대기를 맞아도 싸다. 그런데 난 이 작가에게 따귀를 올려 붙일 생각이 없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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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2-0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믿고 싶었지만 때리고는 싶더군요. 마지막에서요^^:;;

stella.K 2007-02-1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물만두님이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