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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의 여정
소냐 나자리오 지음, 하정임 옮김, 돈 바트레티 사진 / 다른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언젠가...이 책에 실린 사진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본 적이 있다. 플리처상 보도사진 부분에서 수상했다는 짧은 제목과 함께. 사진엔 문외한이라 어떤 필름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은 강렬했고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처음 보면, 겉표지의 사진은 제법 서정적이고 낭만적여 보이기도 하다. 물론 지붕위에 앉았으니 불안은 하겠지. 하지만 소년의 돌아앉은 모습에 묘한 황량한 여유로움이 베어있는 듯하다. 과연 이럴 수 있을까? 그래도 소년의 마음은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몰래 무임승차 했으니 불안할 것이고, 어서 이 기차가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데려다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겠지. 분명 무임승차가 나쁜 것이긴 하지만 여행 하면서 무임승차와 서리의 묘미는 여행의 짜릿한 기쁨을 배가시켜 주기도 하지않던가. 더구나 제목 끝말을 '여정'으로 설정했으니 대뜸 '엄마 찾아 삼만리'를 연상하게도 만든다. 또한 '엔리케'란 리틴스러운 이미지가 주는 느낌도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지만...나머지 사진이나 책의 내용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비참하다. 살아 보겠다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아이들과 그 위를 나르는 검은 독수리의 이미지란 스산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하다. 또한 기차의 지붕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붙들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생에 대한 사투는 참으로 모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운이 없어 거기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사지가 절단 나거나 죽기도 한단다. 그런데 이들은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어린 나이에 그런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부럽지 않게 자식을 키워 보고자 불법이민자로 미국땅에 발을 디딘 부모를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그러한 도전을 서슴치 않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리워서 죽느니 차라리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길에 죽겠다'는 필사의 각오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정을 그리워 하는 마음이란 죽음 조차도 갈라놓지 못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나는 고백 하건데, 그런류의 보도 사진이나 뉴스 보도물 보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보면 괴롭다.내가 살고 있는 지구 어느 한쪽에서 그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타깝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뭘 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나는 저런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란 말로 본 느낌을 대변한다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아무튼 그런 보도물을 접한다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나를 들여다 보면, '이 생각이 과연 전부 다인가?'가에 진실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해 버리고 만다. 눈이 보배라고 사람은 좀 더 나은 것, 화려한 것,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스러운 것에 눈을 두기를 좋아한다. 나 역시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매스컴은 연일 그것을 쫒기에 바쁘다. 사람의 오감을 만족시켜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사람들의 눈과 귀는 점점 더 길들여져 우리 바깥은 세계에 대해선 관심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분야나 그렇듯 속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도 조그만 불씨하니 지펴내는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낼 힘을 얻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모든 것이 썩있다면 저널리즘이라고 예외겠는가? 그래도 소냐 나자리오 같은 저널리스트가 있으니, 저널리즘은 살아있다!고 외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참혹한 현실을 펜대에 풀어내기 위해 그녀는 무려 5년이란 세월을 준비했고, 엔리케와의 동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녀 역시도 가정이 있었고, 동행취재하는 동안 어떤 위험한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일을 감행하도록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단순한 기자 정신이라고 하면 설명이 가능할까? 아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고로 휴머니즘은 살아있다!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어떤 개기로 작년부터 우리나라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전에 막연하게 짐작만 하고 있는 것에서 조금은 한발 다가선 느낌이고, 알고 있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들은 탈북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알고보면 이 책에 펼쳐진 현실이나 탈북자들의 현실이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탈북자들 역시 북한에 가족 내지는 자녀들을 두고 탈북을 한다. 그리고 중국이나 몽골, 필리핀 등지로 흩어 진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들은 매춘 내지는 강간을 당하기도 하고, 어쨌든 가까스로 그렇게도 원하던 한국에 발을 들여놓지만 그땐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돼 수족 놀리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더구나 북한에 두고 온 자녀를 데려오기 위해 적지않은 돈을 벌어 알선책에게 주지만, 잘못 아이들을 데리고 와 졸지에 그 아이는 고아 신세가 되기도 한단다. 북한에 남겨진 아이들도 엔리케를 비롯한 이 책에 소개된 아이들과 같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간다. OECD에도 가입한지 오래고,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이 나라 대한민국 안에서도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탈북자 1만명을 돌파 했다고 한다.
가끔 나는...탈북자,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행복하냐고? 가족을 두고 이렇게 힘들게 남한 사회에 정착하게 됐는데, 남한은 과연 살만하던가요? 사람들이 잘해 주던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역시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체제도 다를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네들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다고 말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같은 민족끼린데도 박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또한 경제적으로도 너무 안 좋으니 나 살기도 버거운 판에 남 생각을 어떻게 하겠는가?
읽으면서...행복도에서 1순위라고 하던 방글라데시를 생각했다. 없이 살기로야 이 책의 배경이 되고 있는 온두라스나 그 나라나 오십보 백보 아닌가? 그런데도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나라는 아직 상업주의의 물결을 덜 타고 있고, 삶의 가치가 돈에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나라는 국제 경쟁력은 여타의 국가 보다 떨어질지 모르나 가난을 부끄럽지 않게 여길테니 그래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우린 어떠한가? 물질적인 부의 가치가 개인으로 하여금 꼭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확신도 없으면서 우린 너무 쉽게 그것을 믿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돈은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보장해 줄 수 있고, 내 자녀를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치루어야 하는 희생은 자신에게나 가족에게나 너무 가혹하다. 그리고 빈부의 격차가 심사면 심할수록 이것은 더욱 자명해진다.
가족은...어떠한 경우에도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적어도 그 사람이 독립된 인격과 경제적 자립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이것은 가난한 가정이나 부유한 가정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자식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시켜 보겠다고 교육 엑소더스 대열에 밀어 넣은 가족들을 보라. 그중 성공한 케이스도 없진 않지만, 가족해체의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은가? 또한 엔리케를 보라. 엄마와 떨어지고 보니, 버림 받았다는 생각. 모정에 대한 그리움. 탈선. 분노 등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 간다. 그러니 없이 살아도, 지금 당장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지 못한다 해도 가족만큼은 정말로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칠 필요가 있다. 엔리케의 고통은 엔리케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다. 엔리케는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고 당장 북한에도 존재한다. 또한 아직도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이 엔리케와 똑같은 사연과 경로로 기차 지붕 위에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고 있으며, 제2, 제3의 엔리케는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그럴 때 국가는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읽으면서 화가 났다.
국가가...개인의 가난을 구제해 줄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떨어져서 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인 보인책은 마련해 주어야 하지 않은가? 언제까지 밀입국자가 가장 많은 나라 내지는 교육 엑소더스가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오명을 쓰고 있을 것인가? 국민의 바람은 지극히 소박하고 당연한 것인데 그것을 들어 줄 수 없다면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국가는 가정과 개인의 고통을 언제까지 침묵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거의 속수무책이 아닌가? 더구나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엔리케는 어머니와 상봉을 하지만 많은 정서적인 혼란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런데 이들을 치유하고 상담해 줄만한 마땅한 사회 시설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봐 그쪽으로 부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것 같다. 하기사 밀입국자니 어디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는가? 병이 나도 의료보험 해택도 받지 못할텐데...미국이 무슨 봉도 아니고.
이 책은...책이 가지는 문제점은 다소 있어 보인다. 어느 독자의 지적대로 오자나 탈자도 많지만, 동어반복적인 내용이 많아 전달에 있어서 다소는 그 긴장감이 떨어져 보였고, 무슨 문학도 아닌데 여러 사람의 얘기를 다루다 보니 다소는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기자의 싯점을 견지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 책이 전 세계에 출판되고, 사진이 전파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언급해 주었으면 좋을텐데 그런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나는 제발 우리의 아이들이 인권 교육을 재대로 받으며 살았으면 좋겠고, 거기에 이 책이 나름 공헌할거라고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