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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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완서 선생의 글을 접한 때가 10대 말에서 2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놓은 책마다 족족이 다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작가의 작품을 꽤 꾸준히 읽어냈던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박완서 선생이다.

그때 그는 40대에서 50대의 나이었을 것이고, 그의 소설에 나온 주인공들도 꼭 선생만한 나이의 여성들이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나는 그의 소설을, 산문집을 잊고 살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한 작가에 대해서 어느만치 알겠다 싶으면 다른 작가 또는 다른 책으로 관심을 돌리는 나의 콩 뛰고 팥 뛰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 때문이었을 게다. 그리고 이렇게 한 20년쯤의 세월이 흘러 그의 소설을 다시 접하고 보니, 그는 여전히 당신만한 나이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사람들에 대해, 삶에 얘기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중년의 여성이었겠지만, 지금은 노년이다. 그렇게 꼭 자기만한 나이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젊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노년이 될 때까지 글을 쓰는 작가들은 꽤 있다. 그런 작가들은 더 노련해지고, 더 풍성한 글을 쓴다. 하지만 주인공을 딱 자기만하게 하고, 그 나이의 주인공의 싯점에서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내가 보기엔 그리 많이 않아 보인다. 이 책의 해설을 맡은 김병익 씨도 우리나라엔 아동문학도 있고, 청소년문학도 있지만, 유독 노년문학의 부재를 지적했다. 그것의 이유로는, 전쟁과 가난으로 작가들이 장수하지 못했거나 조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285p) 그렇다면 노년문학은 어떤 것일까? 수록작 <대범한 밥상>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너 딴 반찬도 먹지 그 군둥내 나는 짠지 국물은 다 마셔버리냐? 나중에 물키려고."

"글쎄 나도 모르게 그 군둥내가 비위가 땡기네. 이거 어떻게 만든거니?"

"만들고 말고가 어딨어? 무를 통째로 왕소금에 푹 절인거지."

"그건 아는데 짠맛 말고 군둥내가 꼭 요만큼만 나게 하는 레시피 말야."

"레시피 좋아하네. 그거 작년 것도 아니고 아마 재작년 걸 거야. 김장때가 쉬 돌아올 것 같아서 뒷마당에 묻어둔 항아리를 살피다가 밑바닥에 골마지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무가 서너 개 남았기에 버리기도 뭐해서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손님 맞을 준비한답시고 나박나박 예쁘게 썰다가 맛을 보니까 어찌나 소탠지 몇 번 물에 울궈내고 나서 다시 물 부어놨던 거야. 가미한 건 초 몇 방울하고 실파 썬 것하고 고춧가루 솔솔 뿌린 것밖에 없어." (220-221p)

참 평범하지만 노년문학 아니 박완서 문학을 이토록 잘 표현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짠지엔 양념과 재료의 맛을 좌우하는 황금 비율의 레시피가 없다. 오로지 왕소금과 원래 무가 가지고 있는 맛의 성질이 오랜 시간을 두고 하얀 골마지를 뒤집어 써야 나온다. 하지만 쉽게 먹을 수도 없다. 쓰도록 짜서 몇 번을 물에 울궈내야 겨우 먹을 수가 있다. 나도 몇번 먹어 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맛 있는 음식이 아니다. 그런데 이 노년의 여인은 그 군둥내 나는 국물을 맛있다고 들이킨다. 과연 그것은 그 나이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이 주는 맛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표제작 <친절한 복희씨>를 비롯한 9편 모두는 겉으로 드러난 생의 이면을 저자 특유의 문체로 재치있고 웅숭깊게 드러내고 있다. 특별한 멋도, 기교도 없다. 그냥 예전에 나의 외할머니가 어디선가 듣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옮겨 들려주는데 그것이 마냥 재미있어 또 듣고 싶어했던 것처럼, 선생의 문학은 나에겐 꼭 그런 느낌이다. 그야말로 한 작품, 한 작품 읽을 때마다 가슴속 깊이 뭔가가 켜켜히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이 책은 내가 한동안 어떠한 일로 기분이 꿀꿀해 했을 때, 위로 받으라고 어느 착한 알라디너 분이 선물해 주신 것이다. 그 분의 마음이 하도 따뜻하게 느껴져 나는 잠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다시 펼쳐 든 박완서 선생의 이 책은 참으로 나의 마음을 보듬어 안아 주기에 충분했다.

어떠한 꾸밈도  에누리도 없는 선생 특유의 문체는, 마치 어떠한 기교도 없이 애조띤 정서만을 목소리에 담아 노래 부르기로 유명한 가수 이미자 씨의 음성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살잔 소리, 낭탁, 우세스럽다 같은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선생만의 독특한 어휘는 김병익의 말대로, 눈치로 받아 들이게끔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 준다. 게다가 문장부호 또는 줄바꿔 쓰기 등도 여간해서 잘 쓰지 않는 선생의 문장에선, 오히려 이것을 너무 심하다 싶으리만큼 쓰고 있는 겉멋든 젊은 세대의 글쓰기 방식에 잔잔한 하고도 도도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이제 나는 선생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던 젊은 날을 관통하여, 선생이 처음 글을 쓰고 문필을 날렸던 그 나이 언저리에 도달해 있다. 나이 먹어서 좋은 건 그다지 없어 보이는데, 한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젊을 때 보다 덜 방황하고 덜 실수한다는 거다. 젊을 땐 그게 그렇게 하고 싶고, 좋아 보이는 것들이 때를 지나놓고 보면 그것도 그다지 좋은 것마는 아니라는 것을 아는 시기가 바로 지금의 내 나이인 것 같다. 그래서 웬만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는게 인생이고, 꿀꿀한 게 인생이다.

박완서 선생은 서문에서,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쓰셨다. 나는 언제쯤이면 이 꿀꿀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게 될까? 선생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나이쯤이 되면 진짜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게 될까? 그렇다면 시시때때로 섣불리 이게 다일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고, 조금 더 살아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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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7-11-13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렇군요. ^^
지난번 산문집에서 좀 노인스런 고집이 느껴져서 당장은 조금 망설이고 있는데,
결국엔 읽을 것 같아요. ^^;;
좋은 리뷰, 잘 읽었어요. ^^

stella.K 2007-11-13 18:09   좋아요 0 | URL
그럼 추천도 좀 해 주시지 안쿠...>.<;;

프레이야 2007-11-1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 이리 후하게도 다섯개를 주신 거 보면 분명 읽어야되는 책
맞죠? ㅎㅎ

stella.K 2007-11-14 10:38   좋아요 0 | URL
그럼요. 박완서 선생 글을 읽으면 정말 쓰고 싶어져요. 근데 나름 심혈을 기울여 리뷰 썼는데, 댓글도 추천도 그리 많지 않군요. 저는 왜 이럴까요? 흐흑!

프레이야 2007-11-15 08:5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ㅎㅎ 토닥토닥~ 심혈을 기울여 쓰는데 말이에요^^
클릭 한 번 더 하면 되는뎅..
님의 명언 "추천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세요^^

stella.K 2007-11-15 10:58   좋아요 0 | URL
ㅎㅎ 님도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