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 코드
브라이언 트레이시 지음, 임정재 옮김 / 삼진기획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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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과 겉표지에서 세계적 갑부들의 사진이 즐비하게 나오는 것을 보고 돈 버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는 책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장정으로 보나 저자로 보나 그냥 가볍게 쓴 책은 아닌 듯하여 읽기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돈과 부자들에 대한 이중잣대가 있는지라 이런 책 읽으면 괜히 돈 밝히는 사람으로 오인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내가 생각했던 건 '코드'라는 이미지에서 느껴지는대로, 역대 세계적 갑부들의 생리구조(?)내지는 사고나 습관들에 대해 밝혀 놓은 책인 줄로만 알았다. 물론 내용에서 그런 언급이 전혀 안 되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단 저자는 사고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므로 우리도 성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독려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미국에서는 손꼽히는 컨설던트이사 그 자신 CEO이기도 하다.(현재  이 책 말고도 그의 책은 몇권이 더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구체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의 장점은 총 12장에 걸쳐 다루고 있고, 각장이 끝날 때마다 그 장의 정리와 함께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적용점들을 몇가지로 써 놓고 적용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사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가 돈이나 부자에 대해 이중적인 잣대가 있는 것처럼 이 '성공'이란 단어도 어찌보면 가장 많이 듣고 원하면서도 왠지 울리는 꽹과리 같기도 하고 생경스러운 단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 그럴까? 너나 할 것 없이 힘든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성공이란 개념을 잘 몰라서일까? 그리고 성공의 의미도 지극히 좁아 보인다. 돈을 많이 벌면 성공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돈의 가치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돈 없이는 못 사는 사회이기 때문에 돈=성공이란 등식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일까? 이 책 역시 그러기 위해서 갖추어야할 인간의 마음가짐. 행동지침에 대해서만 쓰고 있으니 (이 책의 잣대로) 아직(?) 성공하지 못한 나 같은 심술맞은 사람은 배리가 꼴리는 수 밖에. 왜 성공이 곧 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일까? 하지만 가만히 읽어보면 꼭 돈 많이 버는 방법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경영인이고 경영을 위한 책인만큼 어떻게 하면 일에 대한 만족감을 극대화하며 그것의 가치와 수익을 창출할 것인가가 이 책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즉 어찌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성공이란 부의 추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가치를 높이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지식경영이란 말도 나오는 것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사실 이 책은 높은 점수를 줘도 좋을 듯하다.

경영, 처세술에 관한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끔 읽어주면 생각도 정리되고 내가 지금 재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실용적인 의미에서) 갈무리도 하게 된다.  그래서 요컨대 굳이 나의 불만은 이 책이 경영이나 처세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회사원이나 경영인들에게만 촛점이 맞혀지고 있는데, 회사원이나 경영인이 아니어도 자기분야에서 성공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도 읽을 수 있을만한 책으로 좋다는 얘기다.(이걸 왜 나는 이렇게 꼬아서 얘기하는 걸까?)

책은 대체로 깔끔하고 명확해서 마음에 든다. 마치 깐깐한 (시)아버지의 '성공적인 삶을 살기위한 지침'을 듣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이만큼 쓸 수 있기까지 얼마나 자기 분야에 얼마나 정통해 있는지도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가끔 이런 류의 책을 읽으면 이런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삶은 여러 각도에서 실험해 보는 실험자 내지는 연구원들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실험한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이런 책을 쓰는 건 아닐까? 그리고 읽다보면 모호한 점도 정리가 되고 아, 이렇게도 해 볼 수가 있겠구나! 고개를 끄덕이게도 된다.  정말 저자가 써 놓은 내용 중 몇 개만 실천해 보아도 나의 삶의 개선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것을 알고 해 보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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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7-05-03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자가 써 놓은 내용 중 몇 개만 실천해 보아도 나의 삶의 개선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하하하. 이런 책 읽으면 항상 그래요. 작심삼일이 문제지..ㅋㅋ
그래도 가끔 이렇게 "자극"을 주는 책도 좋죠. 저도 가끔 읽는답니다.^^

stella.K 2007-05-0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작심삼일이지만 가끔 읽으면 자극이 되죠.^^
 
요셉과 그 형제들 4 - 이집트에서의 요셉 (하)
토마스 만 지음, 장지연 옮김 / 살림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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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언제 나왔는가를 돌아보니 2001년 11월에 나온 걸로 되있다. 그 무렵 신문의 북섹션에 어느 기자의 리뷰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나는 이 책을 꼭 완독하리라 다짐 했었다. 

이 책은 알겠지만, 창세기 40장부터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에 관한 이야기다. 내용은 간단하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그로인한 이복형들의 시셈으로 인해 함정에 빠지고, 그후 이집트의 노예상인에게 팔려가 갖은 고생 끝에 이집트 총리대신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상 성경 본문은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9장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고, 그나마 어린아이에게 구연동화를 읽어주듯 너무나 교훈적이고 정형화 된 듯하여 어른들에겐 그닥 와닿지 않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았을까? 이것을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로부터 들었다. 그때 그 선생님이 얼마나 재밌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던지 말 그대로 빨려들어가듯 했고, 침을 흘려도 침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한마디로 감전 됐다고나 할까? 나는 그만 이 이야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내가 사춘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고, 성경을 펼쳤을 때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마주하고 얼마나 그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던지, 지금은 그 나이의 몇 곱절을 살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이야기에서 조금도 자유하지 못한 채 세월을 살면 살수록 이 이야기에 빚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가 성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생각해 보라. 자신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있는지? 나이가 들어서도 잊지 않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 있는지. 그러기에 나는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을 꼭 완독하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이야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나의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읽혀지는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원래 귀한 것, 신비스러운 것은 쉽게 문을 여는 법이 없으니까. 그러니 토마스 만도 이 이야기에 20년을 바친 것이 아니겠는가? 그만큼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한 것 같아도 그 신비로움은 가히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솔직히 난 1권부터 3권까지 어떻게 읽었는지  기억에 없다. 앞서 밝혔지만, 너무 지루해 이 책을 발견했던 처음의 다짐과는 달리 그 다음 권은 언제 읽을지 기약에도 없었다. 독후감도 써놓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드디어 4권을 읽었을 때 내가 비로소 깨달은 건, 3권까지는 4권과 그 이후의 것(6권까지)을 말하기 위한 전초전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성경대로라면 3권까지는 야곱이 요셉을 어떻게 생각했고, 요셉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이복형들은 요셉을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끊이지 않고 펼쳐진다. 그리고 4권의 내용은 이렇다. 이집트 노예상인에 의해 팔려간 요셉이 포티파르(성경은 보디발이라고 했다)라고 하는 이집트의 최고 권력가의 시종이 된다. 그러나 요셉은 포티파르의 아내의 끊임없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결국 포티파르의 아내는 그를 유혹하는데 실패하자 오히려 요셉이 자신을 덮칠려고 했다고 누명을 씌워 주인으로 하여금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것 또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 만은 이 이야기를 상당히 매혹적인 이야기로 풀어간다. 이후에도 요셉의 이야기는 더 전개가 되겠지만 아마도 요셉과 무트의 이야기는 전체를 통털어 가장 매혹적이고 백미라고 꼽을만 하지 않을까? 그것은 확실히 토마스 만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물론 4권에서도 예의 그 끊임없이 펼쳐지는 만연체의 문장은 여전하여 읽는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금치 못하게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만연체의 문장속에서 발견하는 보석 같은 문장 또한 매우 훌륭할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하나 하나가 무척 매력적이다. 특히 가슴에 사무치도록 요셉을 향한 그리움과 정욕에 사로잡힌 여인의 마음은 절절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성경에 잠시 언급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같이 잠자기를 종용했다는 이 짧은 문장이 그녀를 대변해 주기엔 한참 역부족이다. 또한 그 뜻을 결국 이루지 못하자 증오의 마음으로 변해 요셉을 스스로 배신하는 여인의 마음이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조금도 비껴가지 않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4권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요셉이 여인의 유혹에 조금도 동요함이 없었다는 것에서 단순히 교훈만을 찾으려 하면 안될 것이다. 요즘 같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에 어쩌면 요셉은 비웃음을 살 인물일지도 모른다. 요셉이 살았던 그 시대에도 성은 언제나 자유로왔다. 성을 숭배하는 신이 있었고, 그 시대의 창녀는 신을 받드는 신녀로서 추앙을 받았까. 그러니 고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 유혹을 피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왜 그런 속에서 요셉이 그토록 육체적 순결을 지키고자 했는지 토마스 만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요셉을 대변해 준다. 또한 토마스 만은 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의 육체와 정신이 어떠했을런지 그 파장과 떨림을 놓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요셉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 무트가 요셉을 어느 정도나 생각했는지 생생하게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는내내 서사시가 뭔지를 새삼 깨달았으며, 마치 대작 오페라를 보는 듯한 상상에 사로잡혔ㅅ다. 더불어 왜 이런 훌륭한 이야기가 오페라나 뮤지컬 또는 연극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토마스 만이 기독교인이었는지 아닌지는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위해 읽기도 하겠지만,  그 이야기 자체는 신화로서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 작가라면 이야기의 전범이 될만한 신화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토마스 만은 작가로서 충분히 충실했다고 본다.  내가 이 이야기에 두근거리는 떨림이 있고, 빚을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다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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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4-09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가 기네요. 표지가 인상적이에요. 그치만 너무 길어서 읽을 엄두가..;;;

stella.K 2007-04-0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 어제 리뷰 고치고 있는데 알라딘 에러가 나서 고치지도 못하고 왕짜증이었슴다. 그세 와서 보셨군요.
이 책 좀 길긴하죠. 저도 왠만해선 긴 책 안 보는데 꼭 완독해야 할 이유가 생겼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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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프리카하면 가뭄과 기아를 떠올리게 된다. 언제부터였을까? 아프리카 보도를 처음 접하게된 것은 말이다. 적어도 내가 10대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로부터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아프리카의 기아는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뉴스들은 그것을 보도할 때마다 가뭄 탓을 한다. 그렇다면 아프리카는 정말 신이 버린 땅인지도 모른다. 어쩌자고 그 지역만 비가 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나라 한반도에도 가뭄이 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실제로 작년에 북한은 극심한 가뭄으로 가득이나 어려운 식량난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비만 오면 기아는 해결이 될까?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므로 이것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비단 기후나 환경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선진국 또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에 내전으로 인한 군벌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켜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있는 나라가 없는 나라를 도와주며 사는 것 그것이 사람된 또는 나라된 도리가 아닌가? 실제로 선진국들이 기아로 허덕이는 나라를 도와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그저 아무 조건없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도와줄리 만무하다. 거기엔 많은 이해관계들이 복잡하게 얽켜있었던 것이다. 역시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를 피해갈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가난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대로 한 움큼 밖에 안되는 권력 가지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거기에 희생당하는 것은 저 굶주림에 허덕이는 어린아이들과 무고한 양민들이다. 어째서 자기 나라의 존망이 달린 문젠데 군벌에 의한 내전만을 거듭하고 있단 말인가? 하다못해 자기나라 기아문제를 무기로 들고 나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야만도 그런 야만은 없을 듯 하다. 그러니 기아는 그냥 기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는,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의 박빙의 "빼쩨라"식 한판 승부의 장이라고나 해야할까? 결국 문제는 인간의 '탐욕'이다.

나는 결코 두껍지 않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문득 중간중간, 나라의 균형, 즉 한 국가가 국가로써 존립하기까지 어떠한 균형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 아프리카나 기아로 시달리는 여타의 국가에서는 오늘의 한끼를 해결하기 위해 허우적대지만, 만일 그들이 이 밥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을 때는 장차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런지 아무도 장담 못할 것이다. 지리상으로만 불려지고 있고, 국경에 의한 나라가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국가 경영'이라고 하는 큰 틀에서 자신의 나라가 의식이 깨이지 않으면 결국 부자나라와 다국적 기업의 짓밟힘은 계속될 것이고, 군벌에 의한 우민화 정책 또한 계속 될 것이다. 그리고 부자나라나 다국적 기업 또는 부자에게만 유리한 철학(신자유주의) 역시도 언제까지 그들의 발목을 탄탄히 받혀 줄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들이 쉽게 망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억압 받고 고통 당하는 가난한 자의 피맺힌 한을 언제까지고 외면하며 눌러만 놓을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가난한 자는 그들의 문제일뿐이라고 언제까지 배만 두드리겠는가?

이 책은,  저자가 그의 아들에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지 그 이유를 아주 쉬운 문체로 설명한 책이다. 너무 쉬운 문체로 써서 감탄이 다 나올지경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건, 학교에서는 '기아'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가르치지 않고 있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부끄러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로 했을 때 그리 편안한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펼쳐 나가지 못했던 것 같다. '분명 비참할 거야.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어?'하는 마음이었지, 기아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은 아니다(물론 어느 정도 "왜 그럴까?"하는 의문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마음도 아프고, 편치마는 않은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그런데 돌이켜 보면,  교육이란 게 너무 많은 맹점을 가지고 있다. 성취지향적이고, 양육강식 또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아 남을 수 있을까를 가르칠 뿐이지, 정말 '기아'에 대해서 '인권'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그토록이나 '기아'에 대해서 가르치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인간의 탐욕에 대해서 가르치는 건 어떨까? 조금은 우회하는 방법이지만 무엇이 탐욕인가를 알면 나중에 기아에 대해서도 눈을 뜨지 않을까?

이 책은 아빠와 아들이 함께 대화하는 식으로 씌여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을 교육(기아교육)에 목적을 두고 썼던 것 같다. 이것이 부자 나라의 학생들을 위해 썼다고 한다면,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의 아이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한끼의 식사도 재대로 할 수 없는 나라에서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교육만이 희망이다. 그래야 자주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나라 아이들이 언제까지 부자나라에 기대어 한끼의 식사를 구걸만 할 것인가?

그런데 생각해 보라. 부자 나라의 아이들이 기아에 대해서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 문맹을 깨우쳤을 때 부자나라가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인간의 역사가 어떻게 쓰일지는 명약관화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책은 분명 인도주의적 사명만을 가지고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인도주의면 어떠냐? 그것도 교육의 한 일환인 것을. 배웠다면 그 배운 것을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인물로 키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저자와 같은 인물을 존경하고 부러워한다.

저자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석학들(제프리 삭스 같은)도 가난 또는 기아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를 살리면 이 세계는 좀 더 풍요롭고 안전할 것이다. 그런 거시적 안목을 갖지 못하고, 근시안적으로 당장 나만 잘먹고 잘 살려고 한다면 그런 인간의 '탐욕'에 화살을 꽂고 불을 질러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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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2:07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2007-04-10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7-04-11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에 관한 부분은 역설이기도 하고, 힘들지만 누군가는 해야되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꼼꼼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루키와 노르웨이 숲을 걷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드보일드 라이프 스토리
임경선 지음 / 뜨인돌 / 2007년 2월
절판


집에 돌아온 하루키는 새로 산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소설 쓰기를 위한 자신만의 몇 가지 원칙을 먼저 세웠다.
첫째, 익숙하지 않은 것을 처음 시도하는 것이므로 그리 어렵게 고민하지 않는다. 둘째, 글은 1인칭으로 쓰고 주인공은 '나'로 정한다. 셋째, 되도록이면 허구를 쓴다. 넷째, 문장은 최소한 세 번 이상 고쳐 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변명은 절대하지 않는다. -70~71쪽

번역은 무라카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왜 그가 이토록 번역을 많이하는지 신기해하지만, 번역은 하루키가 실질적으로 글을 쓰는데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 소설은 여태까지 살아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게 되는데 소설가가 자기에 대한 것 혹은 자신이 아는 것만 쓰다 보면 아무래도 하나의 스타일로 고착되기 쉽다. 따라서 소설가에게는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자극이 필요하다. 그런데 번역을 하고 있으면 또 다른 작의 눈으로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번역자에게 유형무형의 재산이 되어 준다. 소설가는 소설을 읽지 않으면 끝장이다. 그런 면에서도 이왕이면 번역할 작품을 선정할 때, 적어도 자신이 배울 수 있는 작품을 고른다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번역은 무라카미에게 한 여자를 사귀는 것과 비슷하다. '어, 좀 괜찮네.'하면서 건드려 보는 게 아니고 과연 자신이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124~125쪽

레이먼드 카버는 위에서 아래로 사물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지도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먼저 땅을 자신의 두 발로 밟아 확인하고 거기서부터 조금씩 시선을 움직여 위를 올려다 본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레이먼드 카버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는 척하거나 잘난 척하는 소설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달변을 싫어할뿐만 아니라 요령을 배격하고, 샛길이나 새치기를 싫어하는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우직함에 대해 무리카미 하루키는 안심할 수 있었다.

"카버에게는 자신의 신체를 깎는 고통으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작가로서 살아가면서 최소한으로 지켜야 하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실행하지 않는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죠."

레이먼드 카버는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작가로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과는 결코 친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람이 아무리 인간성이 좋다고 해도 그 '좋은 인간성'마저 부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먼드 카버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긍정적인 '긴장감'을 안겨 주었다. -128~129쪽

하루키: 매일 4~5시간씩 쓴다고 치면 하루에 10장 정도? '한번 10장'이라고 정하면 매일 어김없이 10장을 씁니다. 기계적으로 적금을 붓듯이 말이예요. 원고의 양은 일정하게 늘어 가죠. 흐루에 10장, 한 달에300장, 반년에 1,800장, 이런 식으로.-150쪽

하루키: ......그 즐거운 상상을 '과제'로 생각한다면 이미 그건 자유롭지 못한 거죠. 편하게 여유로운 태도로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글의 소재는 '자신이 가야할 곳'을 알아서 찾게 된답니다. 단편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자발성'입니다. 그래서 특히나 단편소설 초고는 3일을 넘기지 말고 단숨에 써야 합니다.-155쪽

......좋은 문장을 쓰려면 몇 번이라도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수정해야 합니다. 좋은 글의 원칙은 '수정, 수정 또 수정!'입니다. 필요한 만큼,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수정해야 합니다.-157쪽

......달리 말하면 어렵게 맛있는 소재를 찾아내서 평범하게 쓰는 것보다 평범한 소재를 찾아서 맛깔스럽게 쓰는 편이 더 좋아요. 내용 면에서도 비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이나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일이 일어나는 스토리가 아닌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스토리가 더 좋구요. -161쪽

필자: ......그 주인공들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루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죠. 소설속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는 것, 그것이 소설을 읽는 옳은 방법이에요.
필자: 그렇다면 주인공들은 우리에게 이 지루하고도 함난한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 혹은 그 의미를 기꺼이 가르쳐 줄까요?
하루키: 인생이란 건 '질 걸 빤히 아는 게임'을 하는 것과 같아요. 빠르던 늦던 우린 쓰러져 죽으니까. 존 어빙도 '인생은 불치병일 뿐이다'라고 말했잖아요. 어찌되었거나 빤히 질 것을 안다면 규칙을 지켜 제대로 지는 것도 후회가 되진 않을 듯합니다. -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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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7-03-28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재밌겠어요. 실제 인터뷰한 거겠죠? 아님 가상으로...

stella.K 2007-03-2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실제죠. 저자가 하루키를 워나에 좋아했거든요.^^
 
하루키와 노르웨이 숲을 걷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드보일드 라이프 스토리
임경선 지음 / 뜨인돌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하루키를 한 마리 외로운 늑대로 표현했던 사람은, 작가 필립 말로우다. 사실 이 책에 묘사 된 작가 하루키는 친구도 그리 많지 않고, 사람이 많은 것은 질색이며(그랬던 그가 재즈바를 운영 했었다는 사실은 다소 아이러니 하다. 물론 호구지책이었겠지만,) 혼자 있는 것을 좋아 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사를 광적으로 좋아해서 어디든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2, 3년마다 한 번씩 이사를 하는 별난 취미의 사내로 나와있다. 그리고 인스턴트 식품은 극히 안 좋아해서 웰빙으로만 먹는단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이기지 못하는 유혹이 딱 하나 있으니, 미국산 도너츠를 무척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재미있는 아저씨다!

90년 대, 언젠가 모르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주요한 문학의 코드였다. 그 시절 하루키의 소설 한 두 권쯤 안 읽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었고,  그 시절 나 역시도 하루키의 소설을 3권쯤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니 한동안 잊혀졌던 그의 소설 한 두권은 더 읽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무엇이 이토록 하루키에 열광하도록 만들었을까? 하루키는 이 책의 저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아마도 자신의 소설이 한국에서 그토록 인기를 끌었던 것은, 이념 논쟁이 한창이던 80년 대를 지나 90년 대는 '나'라고 하는 것이 화두가 되면서 인기를 모았던 것 같다고 조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소설의 하나 같은 주제는 진정한 '나 다운 것'이 무엇이냐 였다. 이런 개인주의가 하루키 문학과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  

하지만 난 80년 대나 90년 대나 변함없이 개인주의자였고, 앞으로 내 삶이 특별히 변화되지 않는 이상 개인주의자적인 삶은 계속 될 것 같다. 그렇다면 90년 대를 거쳐 오면서 내가 '하루키'를 읽었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당연 시류에 영합한 소행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하루키가 뭔데 난리야? 나도 한번 읽어 봐야 뭔가 이야기 상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안 읽으면 이야기 상대에서  '소외'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보단, 호기심이 그의 소설을 읽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명색이 책 좀 읽을 줄 안다는 인간이 '하루키'를 모른대서야 말이 안되지 않는가? 그래서 그럴까? 앞에서도 밝혔듯이 언제나  나는 '개인주의'자 였기 때문에 하루키의 소설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개인주의자가 늘 그렇듯, 그들은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편견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내 생각이 잘못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상대의 생각도 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 줘야하지 않은가?가 개인주의자들의 사고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말인데, 난 그 시절(하루키가 한창 문명을 떨치던 시절) 일본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그 편견이 얉아지고 있긴 하지만). 그때 내 친구랑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무슨 말 끝에 "일본 소설은 백치미적인 것 같아."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와는 달리 일본 소설에 호의적이었던 것 같은데  나의 '백치미'란 표현을 상당히 인상적으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내가 '백치미'라고 표현했던 것은 수식은 좋은데 사람의 영혼이나 삶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우리 문학은 소위 말하는 '한'이라는 정서가 있고, 수 많은 질곡으로 점철되어 퍼올릴만한 질펀한 삶이 표출되어  있는데, 내가 읽은 일본 소설이란 수동적 삶에서 느껴지는 세미한 파장을 쫓는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와는 좀 맞지 않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이것은 하나의 개인적 취향이고, 스스로 갖는 느낌을 표현했을 뿐이니 그 친구는 반박이나 논쟁을 하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면 피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어쩌면 개인주의는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키의 단편엔 꽤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출판사에서는 '하루키'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은 장사가 좀 되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그의 단편을 편집할 때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엔 이런 단편들이 없고, 저 출판사에서 나온 책엔 저런 단편들이 없었기다. 그래서 나는 그의 단편집만 두권을 읽었던 것이다. 중복되는 것과 중복되지 않는 것등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노르웨이 숲>을 읽었다. 지금은 하도 오래 전에 읽어 기억하는 바는 없지만, 하루키 소설은 일본적인 것에서 상당히 많은 거리감을 두고 있고, 미국풍에 가까운 묘사를 했다는 것이 나의 구미를 당겼다. 미국 소설 역시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하루키의 소설엔 그 어떤 묘한 매력이 있었다. 나는 '작가는 미국에 상당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라고 생각했고,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책에서 미국 소설을 즐겨 읽었으며 특히 트루먼 카포티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레이몬드 카버와 스티븐 킹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내가 이 부분을 읽었을 때, '그러면 그렇지!' 하며 난 혼자 퀴즈라도 맞힌 것처럼 쾌재를 올렸다.   

처음에 내가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 '평전'인가 했다. 사실 웬만해서 살아있는 사람을 주제 삼아 평전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움베르토 에코의 평전이 나온만큼 이것도 그런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역시 평전이라고 보기엔 가볍다. 그냥 어느 묘령의 작가가 하루키를 너무 좋아해서 그에 대한 자료를 모두 모아놓고, 자기 좋은대로 편집한 것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읽는데 부담이 없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읽으면서 하루키의 인간적인 면들을 접할 수가 있어서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나의 경우 여느 작가들의 삶이나 글쓰기에 관한 기사나 저작물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 책 역시 개인적으론 만족감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특이한 점이라면, 하루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저자 자신의 체험이나 어린 시절의 느낌들을 간간히 써 놓고 있다는 것인데, 나 개인적으론 하루키만 알고 싶지 저자에 대해선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아 오히려 방해물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왜 무모(?)하게 이런 시도를 했을까? 아마도 이것을 일컬어 '개인주의 글쓰기'를 시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테면 하루키란 작가가 저자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가를 말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독자를 생각한다면 절제의 미도 보여줘야 했던 것 아닌가? 아니면 그렇게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다면 좀 더 세련된 뭔가의 기술적 장치를 써서 독자에게도 공감을 줬던가. 그만큼 하루키란 작가가 저자에게 상당한 영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난 이 점이 별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나중에 하루키 사후에(아직 인생을 더 살아야할 사람이지만) 누군가는 본격적인 평전을 내지 않을까? 기대 반, 아쉬움 반으로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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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2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오랜만에 반가운 리뷰 추천합니다.^^ 보관함에도 담아가요^^

2007-03-25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7-03-25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다시 리뷰를 고칠까 하는 생각에 들어왔는데, 벌써 읽으셨네요. 근데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막상 고칠려니 번거롭네요. 리뷰는 쓰면 쓸수록 아쉬움이 남아요. 추천 고맙슴다.^^
숨어계신 님/그랬다면 더 솔직하고, 더 개인적이어야하고, 더 세련되야 할 것은데 그러지 못한 것 같더라구요. 리뷰를 쓰면 쓸수록 그냥 안 넘어가는 꼬장스러움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막상 저의 리뷰 다시 보면 부끄러워 못 보겠으면서 말이어요. 흐흐.
암튼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2007-03-25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7-03-2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나의 이웃님/지적 고맙슴다. 솔직히 내 글을 객관적으로 본다는 게 참 어렵더라구요. 이렇게 지적해 주면 나야 고맙죠. 아, 그러고 보니 이 댓글에도 님이 지적한 게 또 나오는군요. 흐흐. 예전에 나의 은사님은 '왜냐하면'을 지적하셨고, 오래 전나의 '나름대로'란 말을 너무 많이 쓴다고 지적을 받았더랬죠. 이젠 님이 지적한 것과 한판 승부를 버릴 차례군요. 하하. 거미줄에도 걸려 넘어지는 게 저랍니다. 지적해 준 것 늘 상고하고 있겠슴다. 진지하고 성깔 있다는 말 내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