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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 Veronika Decides to Di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에밀리 영 |
주연 : 사라 미셸 겔러, 조나단 터커(2009) |
베로니카 살아서 사형선고를 받다
자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삶에 대한 굉장한 압박과 스트레스를 탈피해 보고자 하는 자살과 또 하나는 실존적 자살. 살아야할 아무런 이유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삶에 대한 무료함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자살. 말하자면 베로니카의 자살은 후자쪽이다. 그녀가 아주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웬만큼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 같긴하다. 하지만 이 정해진 대로의 삶이 그녀를 점점 무력화 시킨다. 그녀의 자살 방법은 약물 과다 복용. 하지만 그것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녀가 눈을 뜬 건 어느 정신병원 병실이다. 담당 주치의 겸 병원 원장인 블레이크 박사는 목숨은 구했지만 자살하는 과정에서 건강에 너무 많은 손상을 입어 곧 죽을 것이라며 사형선고를 내린다.
죽고자 했는데 살아나서 사형선고를 받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더 비참하지 않을까? 우선 자살을 처음 시도해 본 그녀로선 살아났다는 것에서 약간의 안도감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살에 실패해 본 사람은 다시 자살을 시도하고 실패하면 또 시도를 한다고 한다. 그렇게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이 싫고, 삶이 괴로워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기 목숨에 대한 실험 또는 자기 오만함 때문은 아닐까?
어차피의 삶은, 어차피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의사의 말대로라면 어차피 수 주일 또는 수 달내에 죽을 것이다. 그러니 애써 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도감을 가질 법도 한데 자살 미수인 베로니카에겐 죽음 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서 절망감과 함께 자기 연민이 느껴졌을 것이다. 어차피 때가 되면 죽을 것인데 애써 죽을 것은 무엇인가? 동시에 어차피 죽을 것인데 애써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는 아닐까? 결국 그때까지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거지만 삶은 내가 원하는대로만 살아지지 않는다. 때가 되면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돈을 벌어야 하고, 때가 되면 결혼을 해야하고, 아기를 낳아야 하며, 나이 들어가는 것을 시마다 때마다 느껴야 한다. 그뿐인가, 늙으면 노후와 건강을 염려하며 살아야 한다. 거기에 중간중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배우자의 외도 또는 경제적인 문제, 자녀의 문제 등등이 삶에 대한 회의를 가져 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기에 베로니카는 일찍 삶을 마감하려 했을 것이다. 꼭 베로니카가 아니더라도 이 모든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세월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춘기 정도에만 이르러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바로 그 시기에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해 봤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 시기에 사람은 어차피 죽을 것인데 왜 애써 공부해야 하는 것인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사람이 짐승과 다르니까 공부를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 까지는 알겠는데 그것이 내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확실한 동기를 이끌어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일단 경쟁이 싫었으니까. 그래서 허무주의적인 생각을 많이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건 또 어찌보면 살기 위해 모험을 해야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에게 누구든 용기를 북돋아 주고, 나의 이런 잘못된 생각 이면을 열어보여 주며, 세상은 의외로 살기 따라선 재미있는 구석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면 나는 좀 더 세상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베로니카도 그러지 않았을까?
영화상에서 그렇게 많이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베로니카의 부모는 딱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딸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력을 줬던 부모는 아닌 것 같다. 다 그렇지 뭐. 세상에 자식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부모가 몇이나 되겠는가? 자신이 누구에게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 왔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운명을 지배한다는 것은 확실히 맞는 얘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한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가깝하고 지루한가? 세상은 의외성이 있기 때문에 살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사고의 틀을 깨면서 세상은 꼭 이제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만 있다면 이 지루한 삶을 다시 살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체험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사랑을 하는 것일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선 베로니카가 정신병원에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이 영화는 너무 영화적이다
그렇게 하고 많은 설정 중 베로니카가 사랑을 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 영화적이고, 동시에 도식적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랑을 구하지 않는 영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분명 감독은 이 영화를 자살에 대한 영화 보단 그것을 매개로 한 사랑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뭔가 역부족이었던듯도 하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허점이 많은 영화라는 것이다. 베로니카가 입원해 있는 병원엔 실어증에 걸린 에드워드가 있었다. 그는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애인을 잃고 그후 그렇게 병원에 입원해 있다. 그리고 거기엔 피아너 한 대가 있었는데, 피아노를 곧 잘 치는 베로니카는 한동안 피아노 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을 열고 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게 되고, 서서히 마음도 정화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거기에 에드워드도 동화가 되어 어느 날 말을 하게 되고 베로니카와 사랑을 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영화적이다 못해 동화적이고, 도식적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베로니카와 에드워드가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구애가 이루어질 찰나에 에드워드가 두려워 움츠러든다. 그때 베로니카도 움츠러 들 수도 있는데 오히려 그 앞에서 자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민망한 장면이긴 한데 그것은 또 어찌보면 살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참고로 이 영화 15 등급인데, 꼭 그 장면이 아니더라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15세가 보기엔 다소 부담스럽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이렇게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이자 미션은 베로니카 죽는 것이 아니라 살기로 결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좀 더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에드워드를 사랑해서 살기로 결심하지만, 그 사랑이 얼마나 갈 것 같은가? 그리고 그 대상은 있다가 없어질 수도 있고, 살다가 배신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다 다시 죽기로 결심하게 된다면...?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지만,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이루었다는 건 동화라는 거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야기의 이후를 얘기하는 게 소설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설정은 가장 얄팍한 설정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주인공은 매력적이다. 매력적인 사람이 사랑을 이룰 확률은 그렇지 못한 사람 보다 많다는 건 상식이다(실연의 확률도 그에 못지 않게 많다). 그런데 중요한 건 자살은 꼭 매력적인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예쁜 사람은 몇되지 않는다. 평범 하거나 그 이하의 사람이 이 세상엔 더 많다. 만일 그런 사람이 죽기로 결심한다면 이 도식을 적용해 보면 구제 받을 길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 보다는 희망을 선택하는 것으로 적용점을 바꿔줬어야 했던 것은 아닌가 한다.
열쇠는 블레이크 박사가 쥐고 있다
이 영화는 흔한 로맨스가 아니라 휴먼 드라마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베로니카와 에드워드가 주인공이 아니라 블레이크 박사가 주인공이 됐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영화에서는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다. 영화 내내 뭔가 피곤에 찌든 듯한 표정이고, 베로니카가 그 얼굴에 침만 안 뱉았다뿐이지 자신을 살려놨다는 그것 때문에 온갖 수모를 당하는 인물로 나온다. 사실 이 설정이 어떤 의미에선 맞기는 하다. 왜 그런 말이 있다잖나, 상처 받은 사람이 나을 때 오히려 자신의 상처를 낳게해 준 카운슬러의 존재를 잊고 있거나 오히려 해 준게 없다며 욕을하면 확실히 나은 거라고 한다. 그만큼 카운슬러나 정신 의학자들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직업이다. 영화에서도 보라.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찬 베로니카가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사랑하는 에드워드와 함께 무엇도 하고, 무엇도 하고 계획을 밝히며 잠을 자지 않게 해 줄 것과 얼마간 병원을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을 때 블레이크는 거절을 한다. 결국 둘은 병원을 몰래 빠져 나가는데,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블레이크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베로니카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거짓이며 스스로 벽을 넘을 수 있도록 블레이크의 지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블레이크는 끝까지 능청스럽다. 이것이 자신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며 자신은 여전히 삶에 찌든 한 사람의 정신 의학자일 뿐이다. 이건 확실히 인상적인 반전이고, 그나마 영화의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래서도 이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블래이크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어도 좋지 않았냐는 것이다.
내가 이런 영화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름 좋게 보는 건, 영화가 자살을 소재로 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자살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서 어떻게 삶을 선택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가를 아쉽지만 그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보여줘서 좋았다. 사실 자살, 자살 떠들기만하지 자살의 방지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는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 가운데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게 새삼 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살은 이제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자살할 의도가 없어도 내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 또는 그 아는 사람의 누군가는 자살을 한다. 이렇게 자살의 문제는 가까이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이 세계적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런 영화도 나와줘야 할 것 같은데 아직 그러기엔 우리나라 영화계가 역부족인가 보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본다면 의외로 생각할게 많은 작품인 것 같다. 조심스레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