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3개월이 됐나? 일본의 지진 해일에 원전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들은지도. 그런데 처음 한 달 정도는 불안하더니 그맘도  잊혀지는 것인지, 아니면 체념을 한 건지, 지금은 다소 잠잠해진 느낌이다. 우린 그 보다 먼저 체르노빌 원전 사태를 접한 상태라, 분명 일본도 체르노빌 사태 만큼이나 심각할 텐데도 자제를 해서 그런지 아직 이렇다할 보도가 없다.  

솔직히 체르노빌도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에만 조금 요란했지, 그 이후 어느 정도 복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정말 나의 무지의 소치다. 이번 일본 원전 사태가 아니었으면 영원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곳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즉 우리나라 모 방송국 기자가 그곳을 취재한 것이 얼마전 보도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문득문득 궁금했다. 하지만 인간의 무지함과 게으름을 탓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끔찍한 재난 앞에 사람이 집단으로 죽어 나감에도 그것을 단발성으로 끝내버리고마는 보도행태를 탓해야 하는 것일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걸 보고 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막연하게 체르노빌이 복구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게 아니었다. 거긴 이미 사람이 살지않는 유령도시가 되어버렸다. 그곳을 취재하는 기자의 사명감은 알아줄만은 한데, 왠지 그 기자가 조마조마 하면서도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오래 머물렀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짧은 순간 취재를 했는데도 방사능에 오염됐을 것만 같기도 하고, 사지로 가는 걸 막지 못한 그의 아내나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먹고 산다는 게 뭐길래, 등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나는 역시 제 3자 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체르노빌. 지금 그곳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기 보다, 그곳을 취재하는 기자의 안위를 더 걱정하다니? 

놀라운 것은, 그렇게 방사능이 오염된 곳은 몇 십년 내에 복구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200년 이상이 걸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년을 걸려서라도 회복이 되긴 된다는 건가? 아니면 회복불능이라는 말인가? 또한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 그곳에 살았던 사람은 졸지에 피난을 갔지만 지금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역시나 책에서처럼 어린 아이의 피해는 치명적이어서 기형은 물론이고, 건강이 심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까지 일본은 쉬쉬하지만 조만간 제2의 체르노빌 사태를 보는 건 시간 문제가 되었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책은  이번 일본의 원전 사태 때문에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게된 것으로 아는데,  역시 저자가 전문 소설가가 아니고, 르포작가여서 그럴까?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체르노빌이 왜 그 같은 사태를 맞이하였는지 대한 입체적이고도 사실적인 묘사는 거의없고, 단지 그때의 피해 상황과 이반이란 소년과 그의 여동생의 처절하고도 안타까운 상황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어,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맥이 좀 빠지는 느낌든다. 그럴 경우 이야기는 다소 진부해지면서 감상적이 되기 쉬운데, 그래서일까? 읽다보면 당시의 급박했을 체르노빌의 상황을 읽는다기 보단, 나치를 배경으로 핍박 받고, 헤어질수밖에 없는 어느 유대인의 자전적 소설을 읽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국가가 재난을 당했을 때 국민은 얼마나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전 사태가 이슈가 되고 있을 때, 나는 마침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났기에, 원전이 왜 있어야 하는 거냐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질문도 사실은 일본이 아니었으면 전혀 묻지 않았을 질문이다. 그랬을 때 한 지인이 아주 교과서적인 대답으로 나의 무지를 일깨워 줬다. 즉 석유만으로는 에너지의 필요를 다 해결할 수 없기에 필요하다고. 그것이 확실한가에 대해선 그도 말할 수 없었으리라. 그냥 그런 줄 알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뿐. 나 역시 그런 교과서적인 답을 얻자고 물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책 후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금 일본의 원자로를 모두 없애도 전력 사정에 전혀 장애가 없다. 러시아로부터 홋카이도를 경유해 파이프라인을 설치하여 천연가스를 이용하면 된다. 석유는 유한한 에너지지만, 천연가스는 지질의 심층부에서 무한히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172p)라고 말하고 있다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확실히 새겨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말하자면, 원전만이 전부는 아닐진대 너무나 위태롭게 그것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또 일본에만 국한된 이야기일까? 이렇게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각 나라마다 원자력을 보유하려고 하는 것은 뭐 때문일까? 눈앞에 뻔히 재난을 보고도 말이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체르노빌이나, 일본이나 심지어 우리나라까지도 원자력은 절대 안전하다고 말했다. 지진도 몇 도에도 끄덕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일본같은 경우 지진이 워낙 강하게도 났지만, 어쨌든 그 자랑이 무색하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나라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어딨겠는가?  설혹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안전하다고 해도, 우리 머리 위로 언제 북한이 쏘아올린 핵의 세례를 받을런지 알 수가 없다. 그랬을 때 우린 정부를 어느 만큼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얼마 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그런 국가적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얼마나 침착하게 대응했는지. 그러나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쪽으로 선회했다.  

원전을 보유하고 싶은지 국가가 국민에게 물어 보기나 했나? 그것이 국익을 위해 좋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그 나라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사고가 났을 때 가장 먼저 차출이 되는 것은 관련자들이요, 남자들이요, 가장들이다. 책에서처럼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가장 패해를 많이 보는 사람은 제목 그대로 아이들이고, 노인들이며, 여자들이다. 꿈을 채 피워보기도 전에 죽어갔던 그들. 피폭에 살아 남아도 불구자로 살아갈수밖에 없는 아이들.  우린 좀 더 안전하고도, 행복한 국가를 그들에게 물려줘야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내 당대에서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우린 마치 시한 폭탄 지구를 떠받들고 아틀라스의 후예들 같다.   

조금 아쉬운 작품이긴 하지만, 저자는 핵발전이 우리들 개개인의 인생을 어떤 비극으로 빠뜨려 가는가를 절실히 알리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나는 이 책 말고도 체르노빌을 심층적으로 다룬 책들이 좀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원자력 피해를 입은 일본도 가감없이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연 이 원자력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겠는지, 세계적으로 고민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의 미래가 달린 문젠데 어떻게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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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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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1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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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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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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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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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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