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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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표절 문제야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특별히 그 문제가 주목을 받았던 건 명망 있는 교수가 그렇게 했다는 점과 그 교수의 직속 제자가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알고 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둥, 요즘이 어떤 세댄데 도제냐며 사제 카르텔을 비판했을 것이다. 그리고 좀 심하면 그 스승에 그 제자라며 한꺼번에 싸잡아 양비론으로 몰아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 그 이야기가 소설로 나왔다. 하지만 솔직히 그 이야기를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서 반갑다기 보단 그냥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더 드는 건 왜 일까? 새삼스럽다는 건 새롭지 않다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도 얘기했지만 표절이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는 게 첫째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표절 공화국'이란 오명을 쓰고 있다. 너무 빈번하니 면역이 생겨 이젠 그러려니 할 정도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뭐 그리 새롭겠는가?

 

그리고 검색을 해 보니 이 책은 이번에 처음 나온 것도 아니었다. 2001년도에 작가는 다른데 똑같은 제목의 책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 목차가 조금 다르긴 한데 이번에 작가를 달리하면서 내용은 그대로 전승하는 (이런 경우가 이전에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방식으로 나온 모양이다.

 

그렇게 되고 보니 난 책 내용의 전말 보다 오히려 이 책의 출판 과정이 더 궁금해졌다. 책에 대한 설명이 더 붙어줘야 할 것 같은데 왜 내용에 대한 설명만 있지 출판 과정에 대한 설명은 없었던 걸까? 그렇다면 2001년 판의 작가와 이 책의 작가가 필명을 쓴 동일 인물인가? 아니면 다른 인물일까? 만일 서로 다른 인물이라면 판권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확실히 한 건가? 아니면 동일 인물인 경우 독자를 혼란케한 건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를두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할 텐가? 아쉬운 건 아니지만 좀 불친절하다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읽어 볼 생각을 한 건, 나야 작가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 사고와 사건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는지라 책이 나온 김에 한 번 읽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솔직히 세간들의 세치 혀야 다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는가? 그나마 그때 이 필화사건을 전달해 준 나의 후배 역시 사제 카르텔과 도제에 대해 비판을 했고, 난 누군지 모르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말로 접수된 사안을 마무리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 난 무슨 생각으로 이 사건을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했던 걸까?진정 판도라의 상자였다면 이 사건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가져 왔거나,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언론을 통해 보도만 됐을 뿐 이후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 됐고, 대중과 역사 속에 잊혀져 갔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도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거나 판도라의 상자라고 이름 붙여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그 잊혀진 사건을 지금에서야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내용은 그런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맥이 중요하듯 학계 역시 학맥이 중요할 터. 그런데 자신의 학문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스승이 논문을 표절 했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폭로 된다. 그랬을 때 주위의 반응들, 폭로 당사자인 이명서의 행보와 언론이 이 사건을 어떻게 몰아 가는가를 나름 밀도있게 보여준다.

 

솔직히 이런 사건에서 짐작될 수 있는 건 굳이 책을 보지 않더라도 가능하다. 같은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 특별한 관련이 없는 사람은 점잖은 체면에 기대어 폭로한 당사자 앞에서는 용기를 칭찬하지만 그 마음엔 이미 그를 적색분자로 찍어 놓을 것이다. 그래서 경계를 하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든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고 가늠하기도 할 것이다. 또 누구는 시쳇말로 '그런 찐따 같은 짓'은 왜 하냐며 비판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운털이 박혀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고 그러다 불똥이 자신에게로 튄다던지 아니면 애매한 사람이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 정의는 좋은 것이긴 하지만 들쑤시고 파서 좋을 일이 없는 것이다. 또한 책에서처럼 제자가 스승을 친 것이니 이것은 명백한 하극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하극상을 용납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누구는 쌍수를 들어 환영해 마지않을 수 있는데 그게 도덕적 기준이 아닌 이해관계 때문이라면? 이 모든 것들이 책에도 일부 표현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폭로자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된다. 또한 이럴 경우 내부고발자의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없진 않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적극적인지는 미지수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표절 문제를 좌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꼭 이 책에서 다루는 학계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표절은 그 분야의 발전을 저해할뿐 아니라 무엇보다 도덕과 양심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여기엔 무엇을 표절로 볼 것이냐는 기준이 복잡하고, 많은 어려움이 따르긴 한다. 하지만 책에서처럼 스승은 자신이 표절했음을 아주 간략하면서도 순순히 인정한다. 

 

이렇게 본인도 인정하는 명백한 표절을 왜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어느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사안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나에게도 그런 마음은 언제고 도사릴 수 있다. 책에서 '현해탄 콤플렉스'를 지적하기도 했지만, 좋아하면 닮는다고 그것이 병적으로 지나치면 어느 새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분이 모호해져 남의 것도 나의 것으로 오인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은 아닐까?      

 

또한 아무리 현해탄 콤플렉스라고 해도 왜 표절을 할 생각을 했을까이다. 나름 우리나라에 대학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생에 왜 그런 오점을 남겼던 것일까? 그냥 보통의 사람이 표절한 것과 그런 명망 있는 학자가 표절은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온정적이고도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성향들이 그것을 덮게 마련이다. 그럴 경우 아무리 명망있는 사람이라도 그도 한 인간임을 보여 준다는 쪽으로 기울고, 그동안 쌓아 온 공적이 그 표절 하나로 무로 돌릴 수 없으며, 시간이 지나면 묻혀진다는 것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보라.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김윤식 교수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학자로써 자신의 소임을 다해 오늘 날까지 이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졌다는 말인가?

 

그럴 경우 종국엔 이명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귀결이 될 수 있겠다. 과연 그가 정말 하극상을 보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대로 이명서의 실제 모델은 <타는 혀>란 평론집을 낸 이명원이다. 그는 그 평론집을 통해 김윤식뿐 아니라 당대 유명한 학자들의 논문의 오류를 바로잡고 비판을 가해 유명해진 사람이다. 솔직히 나는 (아직)<타는 혀>를 읽지 못해 무슨 오류를 어떤 식으로 바로 잡았는지 또한 그것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 보수적인 우리나라 학풍에 적지 않은 진보를 가져왔을 것이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우리나라 학풍이라는 것이 너무 편향적인데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에 발전이 늦거나 어려운 실정 아닌가?

 

그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뭐 나름 집필 활동도 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 같긴한데, 그때 자신이 한 일을 지금은 어떻게 생각할까? 김윤식 교수와는 어떻게 지낼까? 조금은 궁금해진다. 솔직히 난 이 책을 읽었을 때 김윤식 교수의 자서전 내지는 회고록을 읽어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아쉽게도 아직은 그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때를 어떻게 회고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처녀가 애를 베도 할 말은 있다는데 그도 왜 표절을 했는지 이유는 있을 것 아닌가? 과연 '현해탄 콤플렉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까?

 

사실 이 책은 나름 탄탄한 구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쉽게도 독자를 만족시키기엔 다소 부족해 보인다. 물론 한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주위를 환기시키는 정도라면 그도 읽어 볼만하긴 하다. 하지만 이 책의 초판이 나오고도 십 수년이 흘렀다. 그동안 표절은 너무나 익숙한 단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앞서도 얘기했지만)새롭지가 않다. 차라리 그 사건의 후일담을 보는 거였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이렇게 작가를 달리해서 나온 책이라면 말이다.) 굳이 프란츠 카프카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책이 새롭지 않다면 우리가 뭐 때문에 그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소설은 분명 허구라고 배웠는데 '논픽션 소설'이란 장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꼭 그렇게 읽히는 것만 같다. 그래도 소설은 소설이다. 글쎄, 너무 드라마에 익숙한 탓일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소설에서 드라마적 요소를 최대한 억제하고 온전히 이명서와 김윤식의 이야기로 채워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것이 비록 허구고, 상상일지라도 말이다. 국민의 알 권리. 대중의 알 권리. 시청자의 알 권리는 그토록 외치면서 왜 정작 문학에 있어서 독자의 알 권리는 이리도 빈약한 것인가? 소설은 허구라고 합리화 시키면서 말이다. (어설픈)열린 결말이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전부라며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면 그건 겸손일까?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 되는 것일까?        

 

아무리 소설의 위기를 논해도 소설은 살아 남았다. 이젠 그것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도 얘기한다. 그처럼 소설은 앞으로 영원히 종언을 고하지 않고 살아 남을 거라고 말한다. 나 역시도 그것에 동감하고 앞으로 꼭 그렇게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이 소설을 읽는 사람 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그나마 드라마는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 소설을 읽지 않을 확률을 더욱 높이고 있다. 

 

나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면, 이를테면 왜 소설을 읽느냐는 질문과 왜 소설을 읽지 않냐고 묻는다면(이런 상반된 질문을 동시에 받을 리 없지만) 나는 한 가지로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진실이다. 왜 그 소설을 읽느냐고 하면 소설이 허구이긴 하지만 인간의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고, 왜 소설을 읽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진실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읽는 행위가 전자에 속한다면 고전을 읽고 있을 확률이 높고, 후자라면 요즘의 영혼없는 소설들에 실망했기 때문이다. 

 

소설엔 반드시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해석 내지는 혜안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문제를 다루는 사안만 있지 작가 고유의 해석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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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3-25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구인 소설이라도 다 아니까 두 분 이름을 고스란히 써도 되었을 텐데요.
지난날 그 사건을 실시간으로 읽고 들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로서
참말 '새삼스럽지 않구나' 하고 저도 똑같이 느낍니다.

표절공화국이라기보다
'도둑나라'가 아닐까 싶어요.
여기저기 다들 '도둑'이니까요...

오랜만이셔요.
봄날 즐겁게 봄내음 누리셔요~

stella.K 2014-03-25 18:0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님도 잘 계시죠?
거기 고성은 봄이 한껏이겠습니다.
이쪽은 봄이라고 해도 아직은 좀 덜 영근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님한테서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더 리얼했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