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이중섭 - 전2권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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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중학교 몇 학년이더라? 미술 교과서에 실린 그의 그림 몇 점. 특히 그의 그림 황소는 너무 어리고, 미술에 식견이 없어서일까? 그 그림을 보고도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분명 강렬한 느낌이긴 한데 그것 외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왜 그는 그리도 소를 좋아했던 것일까? 

 

솔직히 나는 화가 이중섭을 알게된 후에도 그가 무엇을 즐겨 그렸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도 같다. 물론 그가 그린 황소는 하도 이미지가 강렬해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겠지만, 그 보다 나는 그의 죽음이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시절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그가 짧은 생애를 살다 갔으며, 죽을 때 담배를 피우며 그림을 그리다 앉은 자리에서 담뱃재를 떨구며 죽었다고 들었으니까.진정 화가다운 죽음 아닌가? 자기 일을 좋아해 그 일에 충실해서 그 일을 하다 죽으면 얼마나 복된 죽음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의 죽음에 대한 환상은 이 책을 읽으므로 깨지긴 했지만, 만일 그 환상이 사실이었다면 나는 여전히 그를 신비로운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읽은 소감부터 얘기하자면, 책은 정말로 잘 썼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노작가의 노련한 문학적 향취가 여지없이 드러난 수작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역시 소설은 작가의 문체에만 언제까지나 취해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작가가 인물을 너무나 생생하게 살리고 있어서일까? 언제나 그렇듯이, 예술가들은 왜 그리 불행할까에 결국 귀착되고 만다. 누군가는 이상을 가리켜 박제가 된 천채라고 하지만 그런 불행한 천재는 의외로 많다. 또한 이 책을 읽으므로 그런 또 하나의 천재를 마주한 것 같아 결국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천성적으로 의지가 박약한 것일까?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를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 천재는 불행할거란 덧씌워진 이미지에서 그 역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가 불행했으니 당연 주변인물도 행복할 수마는 없을 것이다. 특히 그의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의 삶은 그로인해 더욱 실존주의자가 되어갈 수 밖엔 없었으리라. 일본 출신. 사랑은 국경도 넘는다지만, 그와 그녀의 시대는 한국인 남자와 일본인 여자의 사랑을 결코 좋게 봐 줄 수 없는 시대였다. 그나마 한국인 여자가 일본인 남자와 결혼하는 건 봐 줄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인 여자가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는 건 양국의 사람들에겐 죄악시되는 시대다. 그래도 그들은 사랑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사랑은 국경을 넘는다고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의 무게는 같을 수 없는 것일까? 똑같이 사랑을 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조금 더 많이 사랑하게 되어있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많은 희생을 하게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중섭이 아닌 그의 일본인 아내 남덕의 몫이었다.

 

그래서 남편만큼의 실력은 아니어도 프랑스 유학을 떠날만큼 그녀도 미술에선 실력있는 재원이었지만 그것을 미련없이 포기했고, 그에게서 두 아이를 낳아 키우는 평범한 아낙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요즘에도 없을리 없겠지만 우린 또 그런 사람을 얼마나 불편한 시선으로 보는 걸까? 확실히 격세지감이다. 

 

그런데 천재가 그렇듯 그도 한 가지 밖에는 잘하는 것이 없다. 바로 그림 그리는 일. 그리고 인간과의 사리분별을 논하지 않는 순수한 사귐. 그리고 가정을 재대로 돌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과 자유에 대한 열망. 이 모든 것이 또 그녀를 얼마나 힘들 게 만들었는지 그는 얼마나 알까? 하지만 그도 자신의 삶의 날개가 무거워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게다가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허수는 또 그 유명한 모짜르트와 살리에르를 연상케도 한다. 그래도 천재는 둔감하다고 했던가? 중섭은 그다지 허수를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난 여기서 의문을 가져 본다. 과연 허수는 실재인물이었을까? 아니면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인물이었을까? 

 

말미에 허수는 중섭에 대한 자신의 시기와 질투를 고백하고 있던데, 이 소설은 이중섭을 조명하고 있는 것 같아도 다분히 여성 그러니까 남덕의 시각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은 또 작가의 관점일 터. 만일 이 이야기가 남덕이 아닌 허수나 이중섭과 친했다던 구상 시인의 관점에서 그려졌다면 어땠을까? 허수의 관점에서 썼다면 좀 더 정치적이었을지 모르고, 구상의 관점에서 씌였다면 우정이 강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남덕의 관점에서 씌였던 게 맞는 것 같긴 하다. 사랑은 반드시 명분과 충돌하고, 외로움은 실존의 문제와 맞닿아 있으며, 모든 이야기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완벽해질 것이다.

 

여담 같지만, 왜 여자는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지 않는 사람에게 부나비처럼 뛰어드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는 사랑 하나뿐이 없는데, 왜 남자는 사랑이 전부가 될 수 없는가? 왜 여자는 한 가지 밖에 잘 할 수 없는 외눈박이 남자에게 끌려하는가? 역시 미스터리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이중섭이 소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소야말로 우리 민족과 가장 가까운 상징과도 같은 동물 아니던가? 일본을 상징하는 동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소는 아니다. 그런 한국 남자를 소 같이 사랑했던 일본 여자. 그녀에게도 한국인의 정서가 흐르긴 했었을까? 늘 그림과 민족주의 사이에서 고민했던 이중섭의 영혼과 남덕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잘 표현되어 있다.

 

리뷰를 쓰려고 이중섭이란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보았더니 그에 대한 책이 의외로 많이 나와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풍성한 느낌을 주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를 몰라 의문이 증폭되기도 한다. 훗날 그의 평전을 한 번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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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1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을 깨닫도록 일깨울는지 몰라요.
머스마들이 너무 바보스러우니까요.
사랑이 있으면 그림도 더욱 빛이 나고
삶은 한결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stella.K 2013-12-14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스마..ㅋㅋㅋ 그렇죠?
근데 여자는 바람이나면 가정이고 뭐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지만,
남자들은 바람을 펴도 가정은 안 버린다잖아요.
그게 맞는 말인지는 전 잘 모르겠으나(흑, 뭔 말을 하는 건지...ㅠ).
아무튼 이 소설은 천재에게 덧씌워진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좀 아쉬웠어요. 이중섭에게나 소설이나.
천재는 왜 그렇게 비운스러운 건지...
피카소처럼 장수하면서 행복한 천재는 왜 그렇게 없는 걸까요?

노이에자이트 2013-12-2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문희 씨는 늦은 나이에 데뷔해서 지금도 노익장을 과시하니 대단합니다.요 몇 년 동안은 예술가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쓰더군요.

stella.K 2013-12-23 11:07   좋아요 0 | URL
아, 최문희 씨가 늦게 등단했군요.
저도 이 분 나이 알고 깜짝 놀랐어요.
나이들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확실히 복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