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DNA를 가지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 너무나 도발적인,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천재 과학자 7인의 이야기
데이비드 E. 던컨 지음, 김소정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작년 말부터부터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생명윤리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윤리' 라는 과목이 그리 신나고 재미있는 공부는 아니기에, 이 세미나가 과연 얼마나 나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줄 것인지 의문인채로 그곳에 발을 내딛게 됐다.

그러나 즐거움이나 재미만을 생각했다면 내가 그것을 왜 듣고 있었던 것일까? 마침 그 무렵이 '황우석 파동'이 있었던 때였고 그전부터 황우석 박사가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을 때, 나는 뭔가 모를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과학 분야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면서 왜 의문을 가졌던 걸까? 결국 이런 의문이 재미와 상관없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때 즈음 번역자의 말에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굿스타인 박사의 인용구를 발견했다. 그는,  왜 과학자들이 거짓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가에 대해 크게 세 가지로 설명했다고 한다.  

첫째는, 성과에 대한 압박이 심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스스로 올바른 결과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개별 실험들이 다른 곳에서 정밀하게 재현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도전이 생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학이란 분야에 대해서 잘 알던 모르던 무작정 그들의 연구를 지지하던가, 내 전공 분야가 아니니까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하며 방관해도 된단 말인가?

우린 과학이 인류를 위해 공헌만 하고 있다고 착각 속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당장의 눈 앞의 이익만을 보다가 나중에 더 큰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데도? 실제로 우린 그런 재앙들을 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를 하면 일단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 볼 수 밖엔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유명한 과학자들의 삶과 연구 분야를 소개하면서 특별히 그것이 사회, 윤리적 관점에서 어떠한 의의를 갖게 될런지를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솔직히 과학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읽기엔 다소 버겁고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자체도 그다지 쉽게 씌여지지 못한 데다가, 워낙에 생명윤리라고 하는 분야가 광범위 하고 아직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논의와 성과는 좀 더 시간이 흘러봐야 알 일이라고 감히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제 (기독교적 관점에서) 생명윤리를 8개월 여 접해 본 나의 좁은 소신이기에 이렇게 얘기 하는 것 뿐이다.

이 책이 좀 어렵긴 하지만 흥미로운 것도 없진 않았다. 예를들면 이 책의 두번째 장에 나오는 <이브: 신시아 케년> 같은 경우 '예쁜꼬마선충'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노화의 비밀을 풀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늙지 않고 400살까지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도 없진 않지만, 오늘 날의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볼 때 불가능 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건데, 난 늙지만 안는다면 그리고 죽을 때 고통없이 자연사 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인간 수명에 만족한다. 그러므로 신시아 케년이 400살 까지 살 수 있다는 것에 그냥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인간의 삶은 어떻게 하면 오래 살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살고 복된 죽음을 맞이할 것이냐에 초점이 맞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니 내가 그녀를 보면서 미소를 지은 건 그냥 치기 어린 과학자다운 면모를 보는 것 같아서 였다. 물론 그녀가 알면 화낼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다음으로는 3장에 나오는 <바울: 프랜시스 콜린스>와 4장에 나오는 <파우스트: 크레이그 벤터>다. 이 둘은 명확히 대비된다. 콜린스는 기독교인이고, 벤터는 무신론자이다.  기독교가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늘 반대적 입장에 서 왔느냐 아니냐는 이 책에서 처음 다루어진 것도 아니고, 어제 오늘의 일은 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과학의 발전에 발목을 붙잡는다고 보는 견해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불행한 것은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과학자는 아니기에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인과 무신론자가 충돌하고 불화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자들 중엔 기독교인이 있고, 그들은 오늘 날의 과학 분야의 발전에 발목을 잡는 사람마는 아님을 알아줬으면 한다. 무신론 과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이 고리타분인 교리에 매여 사람이 그냥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다고 반박 할지 모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만큼 혹시 이것이 하나님의 계율에 위배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과학의 발전에 민감하다고도 볼 수 있고 그 발전 이면에 올지도 모르는 인간 사회의 윤리적 문제와 인류의 재앙에 대해 대처 하려는 자세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한다. 

물론 기독교 진영에서건 무신론적 관점이건 딜레마는 어느 관점에서 건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콜린스에 대한 벤터의 반박은 깊이 들어가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뭔가가 있겠지만, 결국 신념의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어쨌거나 이 책은 과학자들이 연구실에만 붙박혀 연구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때로는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과학이 윤리나 정치에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도 그들의 입술을 통해 들을 수 있어 나름대로 유익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쓰여진 성과적인 측면에선 앞에서 말했던대로 윤리적 측면을 다뤘다고 보기엔 초보적 단계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이 분야에 대한 저작물은 앞으로 좀 더 많이 나와야 하고, 좀 더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굿스타인 박사의 말을 상기시켜 본다면 말이다.

저자는 특별히 미국의 과학자들 7명을 다뤘는데도 이 정도의 성과라면, 전세계에 흩어진 석학들을 다뤘다고 볼 때 그 작업은 또 얼마나 방대하고 산만해질 것인가를 생각해서 미국 과학자들만을 다뤘다는 것에 관대해져 보기로 했다.  윤리에 대한 범세계적인 보편적 가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윤리에 대한 잣대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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