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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성 1 ㅣ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94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희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7년 2월
평점 :
나는 어느정도 긴 머리를 유지하다가 한 번씩 커트로 자르곤 한다. 커트는 장점이 많아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친구와 함께 극장에 갔었는데 그곳 화장실에서 어떤 아주머님이 내 뒤에서 다시 앞을 번갈아 보시고는 "뒤에서 보고 남자인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 분의 머리길이도 나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단지 그 분은 곱슬곱슬하게 펌이 추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퍼머한 짧은 머리는 여자,퍼머하지 않은 짧은 머리는 남자라는 편견을 갖게 됐을까? 그분이 내게 굳이 건네는 그 말 속에는 '여자는 당연히 머릴 기르거나 펌을 해야지'가 포함되었을 수 있다. 인공지능의 공포를 논하는 지금 시대에도 흔한 이런 편견들은 발자크가 살았던 때에는 어땠을까?
여자에게는 교육과 교양과 그녀의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금지해야 한다. 움직이기 불편한 옷을 입히고 ,빈혈을 일으킬 정도의 소식을 장려해야 한다. <결혼의 생리학>발자크
p.156
이 책은 시종일관 내게 놀라움을 일으켰다. 나는 보부아르의 글을 읽는 동안에 수도 없이 "어머나! 이럴수가!"를 연발했다.
내가 여성으로 태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험했던 많은 일들 속에서 주체로서 방황하고 고민했던 것들의 해답이 이 안에 대부분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권을 읽는 데에만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놀랍고 경이로운 사실들로 가득했지만 해답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과거의 내 기억들과 번번이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른 책으로 한 눈도 팔았다.;)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세를 떨친 보부아르는 그 상대만큼이나 철학적 사유의 깊이도 남다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여성이 마주하는 이 세계에 뿌리박힌 오랜 편견과 오해를 전복시키려 한다. 여성의 삶은 그 수동적이고 타자화된 특징들 때문에 일생에 걸쳐 온갖 혼란을 개개인이 스스로 감당해야하는 불리한 조건에 있다. 남자들의 경우에도 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도 가정에서도 이들은 공식적,또는 암묵적 지지를 받는다. 반면 여성들은 세계 곳곳에서 민족적,문화적 경계를 초월하여 유사한 문제, 유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가지만 사회는 물론 학교나 가정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드러내지는 않으며 모호하지만 강력한 방식으로 그 시스템을 유지시킨다.
청년이 인생을 향한 출발을 비교적 쉽게 하는 것은,인간으로서의 사명과 남성으로서의 사명이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벌써 그는 유년시절에 이 행복한 운명을 예고 받는다. 그는 자기를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존재로 완성해 가면서 사회적 가치와 병행하여 남성의 권위를 획득한다. ...중략...이에 반해서 처녀의 경우 인간으로서의 조건과 여성으로서의 사명 사이에는 모순이 있기 때문에, 사춘기는 여성에게 있어서 무척 어렵고 극히 결정적인 시기이다. 이제까지 그녀는 자주적 개체였으나, 이제는 그 주권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녀는 자기 형제들 사이에서 더욱 심각하게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분열된다. 뿐만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능동적이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그녀의 타고난 욕구와,그녀에게 수동적 객체이기를 요구하는 성적 경향 및 사회적 요구 사이에 알력이 생긴다.
p.423
그렇게 보부아르의 말처럼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생물학적 조건으로 부터 시작해 역사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가치들의 차별과 대물림을 분석한다.
"사슬에 매여 있으면 존중받기 때문에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사슬에 매여 있는 편이 한결 편하다"고 버나드 쇼는 말했다.
P.157
또 그녀는 시대를 반영하는 여러 여성들의 사례와 문학속 텍스트에 담긴 의미에 대해 심리적,철학적인 주장을 이어간다.결국 보부아르의 목소리를 따라 독자는 여성의 어린시절부터 첫경험과 섹스,결혼에 이르기 까지 삶 전체를 포괄하여 수많은 모순과 맞딱뜨리게 되고 자신의 인생을 하나하나 되돌아 보게 된다. 때로 너무나 단정적이고 거침의 없는 그녀의 언어에 나는 주춤했다. 하지만 보부아르가 경험한 시대에 비해 여성의 권리가 나아진 지금에도 여전한 문제들에 고개가 끄떡여지는 것은 씁쓸하다.
남자는 결코 어떤 성에 속하는 개인으로서 자신을 규정하며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가 남자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P.17
내용이 너무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분량이 많은 것부터 시작해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내용도 있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고민들과 황당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풍부하다.게다가 '밑줄긋기'에도 어느정도 넣었는데 주옥같은 보부아르의 격언들은 덤이다. 여성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남자들에게도 유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권이 기대된다.
메를로 퐁티의 아주 지당한 말처럼,인간은 자연의 종이 아니라 역사적인 관념이다.
P.64
<사진 출처: 네이버 '두 남자의 철학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