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의 빈과 그 거리에 들어서던 화려한 건물들, 도도하지만 요염한 여인들과 바위처럼 완고한 황제, 가스등 조명이 켜진 카페와 우아한 왈츠 선율, 소리 없이 퍼져나간 성性에 대한 프로이트의 파격적인 주장, 그리고 새로운 예술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선 젊은 예술가들의 수장 클림트… - P12

여기에 클림트의 모순이 있다. 그 누구보다도 현대적으로 보이지만, 클림트의 ‘선배‘들은 이토록 먼 과거에 존재하고 있었다. 클림트는 19세기 말, 빈 분리파를 만들어 과거 스타일을 답습하는 기존 오스트리아 예술계에서 스스로를 ‘분리‘ 하겠다고 선언하며 혁신가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의 영감은 미래가 아니라 고대와 중세 초기의 예술에서 왔다. 클림트는 누구보다도 혁신적인 화가인 동시에 가장 고답적인 화가이기도 했다
- P15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만약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면 나는 빈으로 갈것이다. 빈에서는 모든 것이 20년 늦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라고말했다.  - P16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처럼 클림트가 살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어제의 세계‘였다. 황제가 거주하던 도시, 19세기 말에 바로크 스타일의 궁전과 고딕 양식의 교회를 지었던 시대 착오적인 도시가 클림트의 삶의 터전이었다. - P18

클림트는 이 집에 자신의 수집품들, 그리고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책들이 꽂힌 서가를 가지고 있었다.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Alma Mahler의 회고에 따르면, 클림트가 늘 입고 다니던 헐렁한 가운 주머니에는 『신곡』과 『파우스트』가 들어 있었다. 모델들을 스케치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클림트는 응접실로 가 책을 읽었다. 그의 서가에는 고야, 세잔, 드가의 화집과 일본 미술에 대한 책도 있었다.  - P28

오다는 클림트의 아틀리에를 자유로이 오가는 반라의 모델들, 그리고 그 여인들이 클림트와의 애정행각에 대해 서로 속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한 모델은 다른 모델에게 어깨를 드러내 보이며 간밤에 클림트가 새긴 ‘러브 마크‘를 자랑하기도 했다. 클림트는 모델들 모두에게 매우 상냥한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 P29

1918년, 클림트는 막 56세를 맞고있었다. ‘60세가 되기 전에 뇌출혈로 쓰러질 것‘이라는 불안은 거짓말처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그의 친구인 작곡가 구스타프말러 Gustav Mahler 역시 베토벤과 슈베르트, 드보르자크가 모두 교향곡 9번을 작곡한 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교향곡9번이 될 곡에 번호 대신 〈대지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였다. 말러는 그 후 교향곡 9번을 무사히 작곡했지만, 결국 교향곡 10번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1911년 세상을 떠났다. 클림트는 친구의 죽음을보면서 예정된 운명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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