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물을 구경하며 natural born gatherers]



얼마 전, 귀농하신 어르신.찾아뵌 김에 그분들의 안내를 받으며 시골길을 걸었다. 한 때는 참새 쉼터였을 전깃줄을 지중화한 도시에 사는 내게 살짝 기울어진 전봇대는 온기를 주는 시골다움이었다. 그 산책 길에서 놀라다 못해 경탄했던 것은 어르신들의 탁월한 식물감별안이었다.


나도 쑥은 안다. 쑥향 진하게 나는 쑥개떡도 좋아한다.부추와 달래도 구별한다. 하지만 다른 초록이들은 그저 땅을 뚫고 올라온 봄생명일뿐 이름도, 쓰임도, 그리고 그 아름다움도 잘 모른다.어르신들은 산책하시는 내내 존재조차 몰랐던 초록이들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당귀. 머위. 돌나물...등등. 


100여 년 전엔 집에서 술을 담궈 마셨던 조상들

50여.년.전만.해도 집간장, 집된장이 대세였다. 이젠 유튜브 동영상 따라하거나 요리 과외를 받아도 어렵다. 불과 1ㅡ3 세대만에 그 귀한 지혜가 전수되지 못한 채 끊겨간다. 풍경을 보는 눈 또한 바뀌어간다. 30분 산책으로 한끼 채식.밥상을 준비하실 수 있었던.귀농 어르신들의.나물감별안을 보고.많은 생각이.스쳤다.



봄쑥 150g에 4000원이 넘는 가격이 매겨져 있다.

마침 어제 "natural born gatherers"라는 제목으로 메모를 남겼기에, 그 연장에서 쑥 이야기를 이어가 본다.

동화 [몽실언니]에서 어린 몽실이는, 처절한 심정으로 산에 오른다. 봄 나물이라도 뜯어야 젖동냥으로 자라 온 동생 입에 뭐라도 흘려 넣을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바디나물, 고수나물, 뚜깔나물, 개미나리, 칫동아리나물, 미역 나물, 잔대나물, 싸리나물, 고사리....." 몽실이는 죽으로 끓일 수 있는 들풀들을 참 많이도 안다. 누구의 소유도 아니기에, 바코드 찍히지 않은 봄 나물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몽실이와 난남이(몽실이의 동생)를 살려왔을까?

하지만, 한 줌에 4000원이 넘는 가격표를 붙이고 진열대에서 형광등과 냉기를 받는 봄쑥을 보니, 인간의 '먹을 권리'에 대한 전망 역시 냉기를 뿜겠구나 싶다. 고급 품종으로서 샤인 머스캣을 밀어내고 새로운 프리미엄 포도가 등장하여 누구나 따먹을 수 있던 산딸기와 머루를 비웃듯. 몽실언니에게는 생명의 끈을 연장해주었던 봄나물도, 인간의 먹고 살 권리도 의미를 잃어간다...

고작 쑥 한 봉지 사들고 비관이 너무 앞서 나간걸까...


누구나

깨끗한 물 마시고, 깨끗한 공기 들이 마시고,

최소한의 먹거리를 권리로 챙길 수 있는 세상.

그 당연한 권리주장이 왜 떼쓰는 걸로 느껴질까....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23-04-11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어머님이 조금 더 기운이 있으실때 같이 산에 가면 진짜 냄새만으로도 뭐가 있는지 아시고 얘기하곤 하시더라구요. 이제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면서 우리 식탁에서 저런 봄나물들이 사라지는 것도 빨라지지 않을까 싶네요. 얄라알라님의 비관이 남일같지 않기도 합니다.

얄라알라 2023-04-11 11:19   좋아요 1 | URL
와! 바람돌이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사소한 데서 사람의 대단한 능력에 감탄하곤 하는데, 어머님께서 냄새만으로 풀들을 구별하셨다는 게 진심 놀랍고 존경스럽습니다.

사실 예전엔 땅이 좋아서(?) 풀들의 향도 더 강했던 것 같아요. 시골의 부추 냄새는 비닐하우스 재배 부추와는 향이 비교도 안 되더라고요....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람돌이님, 바람, 돌풍이 심한데, 아무쪼록 안전한 화요일 보내시어요

기억의집 2023-04-11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친정엄마가 나물 반찬을 좋아하시고 꾸준히 먹어서 취나물, 비듬나물 등등 봄에 채취해서 삶아 냉동실에 소분해서 먹는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나물을 아예 안 먹더라고요. 아마 저 쑥으로 한 쑥개떡도 젊은 세대들은 안 먹어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세월이 참 많이 변했어요. 진짜 예전에 고추장 된장 담궈 먹었는데.. 저희집은 된장은 메주 사서 담궈 먹는데 고추장은 안 담궈 먹은지 수십년 된 것 같어요. 달달한 고추장 좋아해서.. 진미 고추장의 등장이 생각나고 봄의 두릅이 생각나는 페이퍼입니다.

얄라알라 2023-04-16 00:15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
달달 고추장, 초고추장, 두릅, 쑥 개떡....
이렇게 나열만 해도 올라오는 정서가 저에겐 분명히 있고 기억의집님께도 있으시고^^

세상과 먹거리가 많이 변해가지만 요즘 꼬마 친구들도 봄 나물의 매력을 좀 알고 컸으면 좋겠는데...

요런 심리가 ˝라떼˝ 심리인 거 겠죠?^^;;

행복한 일요일 시작하시어요. 기억의집님.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은빛 2023-04-11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렸을 때 어머니와 천변에서 쑥 뜯었던 기억이 나네요.
우리 어머니가 담근 된장 정말 맛있는데, 그 비법을 저도 동생도 물려받지 못했으니,
그냥 사라지게 되는구나 하고 얄라알라님 글 읽으며 새삼 깨닫습니다.

오래 전에 전국여성농민회에서 매달 꾸러미 라고 뭘 보낼지 모르지만,
정해진 금액에 맞춰 텃밭에서 길렀거나 야산에서 채취한 다양한 나물과 먹거리를 보내주는 서비스가 있었어요.
그거 받아보는 동안 정말 평생 먹어본 나물보다 훨씬 더 많은 나물들 먹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보내주는 나물을 바로바로 요리해서 먹어 치우지를 못하고,
처치 곤란한 이름 모를 나물들이 자꾸 쌓여서 결국 그만두고 말았네요.
달마다 이번에는 뭘 보내주실까 궁금해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아쉽네요.

얄라알라 2023-04-16 00:18   좋아요 0 | URL
전국여성농민회!
감은빛님 댓글을 보고 찾아보니 ˝언니네 텃밭˝ 꾸러미 보내주시는 활동을 하시는 군요
예전에도 다른 루트로 들어보았는데, 제게 말씀 전해주셨던 분 역시
꾸러미가 너무나 소중하지만, 보내주시는 것들을 잘 활용하지 못해 결국 아깝게 된다는 이야기 하셨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감은빛님께서는 다양한 시도를 해보셨음을 댓글을 통해 상상하게 되네요^^ 좋은 초록 나물 많이 드시고, 더욱 건강하시어요^^

레삭매냐 2023-04-11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말 동네 체육공원에 갔었는데
옆동산에서 어르신들이 쭈구리고 앉
아 무언가를 열심히 캐고 계시더라구요.

저희 어머니도 얼마 전에 쑥 캐오셨다
고 해서 농약 조심하시라고...

유기농 봄쑥이 4천원이나 하는군요. 깜놀 -

얄라알라 2023-04-16 00:20   좋아요 1 | URL
아! ˝쭈구리고 앉다.˝

이 말조차 정감 있게 들리는 걸 보면, 제가 뭘 많이 결핍하고 있는 것인지^^;;;

결핍이라고 말 할 필요 없이, 쭈구려 앉아서 뭐 좀 캐보면 될까요?^^

결국 그 봄쑥은 인기가 없어서....

서운해했습니다^^;;;

Falstaff 2023-04-11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이 참 좋습니다.

얄라알라 2023-04-16 00:21   좋아요 0 | URL
골드문트님 ^^
기억이 납니다. [몽실언니]를 좋아하시는 골드문트님의 소중한 분~~~

전 [몽실 언니]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의외로 많이 나와서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나물 이름에서 부끄럽기까지 했어요. 아는 이름이 거의 없더라고요.

난티나무 2023-04-11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숲이나 들판에서 아쉬운 게 그거예요. 저기에 내가 몰라서 못 먹는 풀이 얼마나 많을까??? 늘 아쉬워요. 꼭 먹어야 하기보단 더 많이 알고 싶어요. 반드시 배워야 할 지식/지혜라고 여기고요, 반드시 나중에 배울 거예요.^^

얄라알라 2023-04-16 00:23   좋아요 0 | URL
난티나무님 멋지세요.

네네, 그냥 아쉬워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배워야하는 지혜/지식!

저는 실제 난티나무님과 똑같은 이유로, 일부러 찾아서 2번이나 강습을 받았는데....^^;;;;
돌아서면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더 반성하며 저 글을 썼나봅니다.

난티나무님께 나중에 다시 배워야겠어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세 먼지 걷힌 4월 주말에는 놀아야 하건만, 오후 내내 [수학자 Scythe]를 읽었다.




◆ Scythe ◆


뜻을 알더라도 실제 회화에서 발음했던 적도, 앞으로도 쓸 일 없어 보이는 단어이다. 그런데 닐 셔스터먼은 'scythe'를 무려 3부작 소설의 1권 제목으로 삼았다. "Scythe"는 사람의 생명을 인공적으로 앗아갈 수 있는 특권층(수확자들)을 은유함과 동시에 그들이 실제 물리적으로 동원하는 무기를 대유한다.

[수확자]는 작년에 읽었던 [Dry]에 비한다면, 덜 입체적이었다. [Dry]에서처럼 조숙하고 예민하면서도 제 앞가람 잘 하는 10대 소녀를 주인공 삼았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덜 사회비판적이고 더욱 미국적이라고 느꼈다. '(소설이) 미국적인 게 뭐냐?'라고 공격해 온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1) 장면 전환 빠르고 2) 폭력 수위 높아 자극적이며 3)'선택받은 자'의 아우라에 집중할 뿐, 평범한 사람들은 무개성 조연 집단 취급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겹친다.(닐 셔스터먼은 영화화될 염두를 두고 원작을 집필했을까?)

그래도 1) 설정 자체의 참신성 2)캐릭터들의 어조까지 변별적으로 살려낸 이수현 번역가의 출중한 언어감각 3) 닐 셔스터먼 특유의 재미 전략 덕분에 즐거웠기에, 중간에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https://youtu.be/sA6xEszg5EM


저자의 인터뷰 영상을 살펴 보니, 닐 셔스터먼은 기존 디스토피아가 '세계가 어떻게 잘못 돌아가고 있는가?'에 집중했다면 다른 방향에서 상상의 실타래를 풀었다. 인간이 통제하지 못했던 문제들에서 해방된 미래. 전쟁, 질병, 가난, 심지어는 노화와 죽음까지 해결된 세상에서 인간은 '사망(+살인) 이전 시대'의 예술작품과 일상에 스며 있던 정서를 더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전 세대 필멸자들이 강렬한 생존욕구와 절실함과 짜릿한 충동을 느꼈다면, '자연적 죽음'이 '수확자들'이 의례적으로 수행하는 인위적 수거로 대체된 이후 사람들은 수확자에게 운명을 내맡긴다. 수확자들은 인구를 인위조절하기 위해, 다양한 살인 테크닉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죽이는데 결코 이 행위를 '살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고결하고 신성한 의무라고 여기며 심지어 10계명까지 준수한다.

영화 [스타워즈]도, 소설 [Dune]도, [수확자]도 왜 그리 '선택받은 자'의 비범성에 집중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는 하겠지만, 특히나 [수확자]에서는 선택받은 집단으로서 '수확자들'과 그들에게 언제라도 '수확당할(=죽을)' 수 있는 사람들의 대비가 '사자 앞의 토끼들' 꼴로 묘사되고 있어서 배알을 뒤틀리게 하는 지점이 있다. 또한 특권층 '수확자들'의 정기모임인 콘클라베는 위엄과 정통성 있는 행사로 그려지는 반면, '음파교도'라는 소수자들의 종교는 희화화되었다고 느꼈다. 현대 미국소설을 몇 권 읽어본 적도 없는 게으른 독자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수확자]에서 닐 셔스터먼이 제기하는 화두 중 가장 흥미롭고, 저자의 통찰력에 공감했던 부분은 인간의 정치였다. 수확자 10계명, 수련과 시험, 자기성찰과 외부의 감시 등 다양한 규제 메커니즘을 설정해두었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가락에 낀 수확자들은 권력과 과시욕, 엘리티시즘에 취약하다. 취하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며, 연민, 생명존중, 공감 등 소위 인간적 정서를 다 활성화시키지만 그 안에서도 변종이 생긴다. 기술 발달 이전 시대의 자연적인 죽음을 인위적으로 조율한다면서, 어떻게 오감칠정 五感七情 느끼는 인간 수확자에게 절대반지를 맡길 수 있는가? 타락이 예견되어 있는데.... [수확자] 시리즈의 2권과 3권에서는 닐 셔스터먼의 통찰이 좀 더 정교해질지 기대 반 우려 반 심정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삭매냐 2023-04-11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는 수확자를 수학자로
잘못 봤네요 이론...

그런데 Scythe(사이쓰~)는
서양판 저승사자들이 들고 다
니는 흉기가 아닌가요...
살발하네요 고저.

개인적으로 미쿡 소설가들은
모두 영화 판권을 겨냥해서
집필하지 않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되면 좋고 안되고 그만~

얄라알라 2023-04-11 09:22   좋아요 1 | URL
저도 알면서도 발음은 자꾸 ˝수학자˝로 되더라고요.

소설에서는 ˝살인˝이나 ˝자살˝이라는 용어는 마치 구시대의 부끄러운 무엇인양 쓰지 않고
대신 ˝수확˝ ˝자기를 거둔다˝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레삭매냐님 합리적 의심 굉장히 합리적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았던 인상이 마치 영화 속성 과외 받는 느낌이기도 했겠군요 ㅎ

감은빛 2023-04-11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수학자라고 읽고, 수학이랑은 안 친한 관계로 이 글을 건너뛰려고 했는데, 수확자였군요. ㅎㅎ
 


벚꽃 흐드러지게 피고 꽃 이파리 날렸던 4월 첫 주말, 남도로 통하는 고속도로마다 승합차며 대형버스가 즐비하다. 추돌사고로 인한 교통정체도 3건이나 경험했다. 광활한 대륙도 아니건만, 왕복 10시간 30분을 꼬박 안전벨트를 메고 있었다. 남도 여행길에 읽을거리 2권 챙기길 자~알 했다. 특히 [어슐러 K. 르 귄의 말]은 탁월한 선택. 

 



책 선배님들이 별 다섯 ★★★★★ 꽉 채워 칭송한 인터뷰집이다. 사실, 인터뷰집은 읽을 땐 재미있어도 묵직하게 가라앉는 문장이 많지 않아서 피하는 장르였다. 어슐러 K. 르 귄 역시 서문 제목을 "인터뷰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로 달았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인터뷰어는 출판사 홍보팀에서 책에 관해 쓴 보도자료를 읽고 오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발췌 문장까지 갖춰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발췌 문장을 크게 읽고 나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 여기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시죠."

그런 인터뷰어들은 책을 한 권 쓴 유명인들과는 잘 맞는다. 그 유명인이 실제로 그 책을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터뷰어도 실제로 읽지 않았으니까.


9쪽


하긴,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인터뷰이 이름조차 제대로 몰라 실시간 방송에서 실수를 하는 D급 인터뷰어를 본 적 있는데, 숱한 인터뷰 요청을 받아왔을 문학계 거장은 어떠할까? 다행히 어슐러 K. 르 귄은'데이비드 네이먼David Naimon'이라는 A급 인터뷰어를 만나 "배드민턴 경기와 같은 좋은 인터뷰"를 생의 말미에 진행했음은 그 자신에게도, 팬들에게도 큰 축복이다. 게다가, 그 인터뷰집을, 무려 13권 째 르 귄의 저작을 번역하고 서신까지 주고 받았던 이수현이 우리 말로 옮겼다는 점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행운이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 물 흐르듯 이뤄지는 언어의 즉흥연주, 교감이 경청으로 화답 받는 찐케미 인터뷰의 정석을 보여주는 [어슐러 K. 르 귄의 말]. 평생 이심전심 해온 지피지기일지라도 친구의 깊은 생각을 이처럼 유연하게 끌어내긴 어려울 텐데... 인터뷰어 데이비드 네이먼이 어려서부터 어슐러 K. 르 귄을 읽으며 만남을 상상해 왔기에 가능한 케미가 아닐까 한다.

저는 제가 쓰는 글의 소리를 들어요...몸 안에서 글이 울리면, 스스로가 쓰는 글을 들으면 올바른 리듬을 들을 수 있고, 그러면 문장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18)



이야기는 갈등을 다룬다고,

플롯을 갈등에 바탕을 둬야만 한다고 말하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인 선언이기도 하죠. 삶은 갈등이고, 그러니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 갈등뿐이라고 말이에요.

(41)


[왜 미국인은 드래건을 두려워하는가?]였고, 딱 집어서 모든 판타지를 상상력이 많이 들어간 모든 소설을 단지 오늘의 주식시장을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들용이라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폄하하는 미국인의 경향에 대해 슨 글이었어요. 삶에 대해 즉각적인 이득만 따지는 태도죠.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을 어디까지 대변할 수 있는가? 제 아버지는 인류학자였고 이 질문과 정면으로 부딪혔어요.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동의 없는 가져다 쓰기가 되어 버리는가? (116)

우리는 다른 존재의 마음을 상상할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상대를 멋대로 이용하지 않도록, 매 걸음을 아주아주아주 조심해야죠. (118)


무엇보다 나는 [어슐러 K. 르 귄의 말]을 통해 이수현 번역가를 다시 만나 즐거웠다. 젊은 시절 미모가 대단했던 르 귄 만큼이나 유난히 또렷하고 까만 눈동자가 아름다웠던 이수현님. 진중하고 사려깊은 성품을 반영하는 저음의 음성과 밝은 표정, 오랜 세월이 지나 활자로 다시 만난 이수현은 여전히 사차원 재치와 지적인 매력을 글로 품고 있었다. 어슐러 K. 르 귄(1929년 출생)과 이메일 서신을 주고 받가가, 작가가 루즈벨트 대통령 재임 기간의 사람임을 인식하고는 "내 마음속의 유교인이 깨어나서, 평생 그를 어슐러라고 부르기는 불가능해져버렸고!"(140)라고 적다니! 사차원 매력이 여전한 그!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ransient-guest 2023-04-05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우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처음에 어스시 이야기로 시작해서 구할 수 있는 작품은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었어요. 여타 다른 판타지나 SF와 다른 잔잔함과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톨킨과 함께 판타지와 SF를 고전적인 의미에서 ‘문학‘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인터뷰집이라서 아직 안 구했는데 저도 조만간 책 주문할 때 구해야겠습니다. 자동차여행은 비행기와는 다른 과정의 묘미가 있어 저도 좋아합니다. 바깥 경치도 살피면서 음악도 듣고 노래도 하고 뭔가 이것도 행공처럼 명상하는 느낌일 때가 있어요. 즐거우셨겠습니다

얄라알라 2023-04-06 12:07   좋아요 1 | URL
transient님께서는 이미 친숙하시고 좋아하시는 작가이시군요
전 그 유명한 인류학자의 따님이라는 데 먼저 호기심을 느껴서 읽게 되었는데, 사실 본격적 작품은 아직 접해보지 못해서 천천히 시작하려 합니다. transient님 서재에 가면 좋은 정보가 많겠는걸요?^^ 미리 감사드립니다

레삭매냐 2023-04-05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거리여행에는 고저 책과
함께 하시는 모습, 아주
부럽습니다.

저도 언젠가 남도에 가보고
싶네요. 기차 타보고 싶은데
말이죠 ^^

한 번역가가 한 작가를 줄창
번역하는 것, 찬성합니다.

얄라알라 2023-04-06 12:06   좋아요 1 | URL
˝고저˝ 부럽습니다...라고 말씀해주시는 레삭매냐님의 언어감각 덕분에 왠지 제가 이틀 여행에 책 읽기 자알 한 듯 으쓱해집니다.

이수현 작가님, 최근에 닐 셔스터먼 신작도 (꽤 두꺼운데) 다 번역해주셔서 읽으려 대기중입니다.

레삭매냐님께서는 기차도 좋아하시네요^^ 기차타고 동해 여행도 해보고 싶어집니다

감은빛 2023-04-1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복 10시간 반이라!
저도 동해 바다로 여행 다녀온 지 일주일 밖에 안 지났는데,
또 어딘가로 놀러가고 싶네요.
바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화요일이네요.
 

  • 패기 넘치는 젊은 인류학자가 2010년대 카자흐스탄에서 수행했던  자신의 연구를 들려주던 중, 몸짓과 목소리에 두려움을 담길래 의아했던 적이 있다. 공안에게 밀착 감시받고 근방에서 폭탄테러를 경험하는 등 생사가 갈리는 절박한 순간들을 회상하는 그의 앞에서, 모험소설 소비하는 독자인 양 생글거렸던 무식함을 후회한다.

  •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를 권해 준 이 지역 정치철학 연구자에게 서문 읽다가 충동적으로 "무척 흥미롭습니다"라고 메시지 날리지 말았어야 했다. 목숨을 걸고 증언해 준 사람들만큼이나 학자로서 자신도 많은 걸 걸고 쓴 대런 바일러(Darren Byler)의 책에 "흥미롭다"라는 표현이 불경하다는 걸 알았다.

  •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를 읽는 중간중간, [이퀼리브리엄], [1984] [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한 디스토피아가 겹쳐 떠올랐다.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가상 현실계(소설과 영화 속)의 디스토피아가 21세기 현실에서 소위 "중국의 첨단기술 형벌 식민지(China's high-tech Penal Colony)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데 경악, 혐오, 공포감을 느끼리라. 그럼에도 저자 대런 바일러는 [1984]나 [멋진 신세계]를 어디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IF" 가정법이나 비유적 수사, 저자 자신의 사적인 목소리를 최대한 배제하고 담담하게 기술했다.

  • 대런 바일러는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를 문헌 연구는 물론, 2011년부터 2020년, 신장과 카자흐스탄, 그리고 미국 시애틀에서 수행했던 연구(특히 심층 인터뷰와 현장조사)에 근거해 썼다. 신장위구르 자치구에서 자행되고 있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수준의 폭력이 현실의 이야기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신장 재교육 수용소를 거쳐갔던 이들의 사례 연구(case study)를 축으로 챕터를 연결한다. 감시 자본주의 하, "자동화된 인종화의 일상성"이 얼마나 끔찍하게 진행형이며 벗어날 길 없이 내리누르는 탄압과 촘촘한 감시망이 구축되기까지 어떤 이해관계가 얽히고 어떤 맥락이 있었는지 보여준다.

  • [신장위구르 디스토피아] 읽기를 권해준 신장위구르 연구자(+알라디너) 김 ** 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3-03-06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7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3-03-2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오웰의 1984년을 읽을 때 공포를 느꼈었는데- 저는 이런 세상에서 살라고 하면 못 살 듯- 신장 위구르~~는
더할 것 같습니다. 필독서인 것 같아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얄라알라 2023-04-05 08:58   좋아요 0 | URL
페크님, 장바구니엔 또 뭐 다른 보물이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전 이 책 김재원님 추천으로 읽었는데 완전 잘 읽었다 싶었어요. 완독 응원드립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몽실언니]는 40년 전, 1984년 초판되었다. 해방직후와 6*25전쟁을 시간적 배경 삼았지만, 책 읽다 워낙 생경한 단어를 자주 접하다 보니 22세기 배경의 SF소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불과 70여 년 전 고난한 삶과 격동기 풍경을 공감은 커녕 낯설어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다.

*

예를 들어 나는 '암죽'이라는 음식을 [몽실언니]에서 처음 들어보았는데, 발음 때문인지 '밤'같은 열매로 만든 죽인줄 알았다. 몽실이의 갓난 동생은 이 암죽을 먹고 컸다.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엄마를 잃었기 때문에 암죽이 모유 대용이었다.

*

'암죽'도 몰랐던 내가, "설빔"을 "설빙" 으로 오해하는 꼬마들에게 놀라움을 표한다. "아!!!팥빙수 아냐!" 하며 황당해한다. 그러는 나는 정작 마트에서 '파조기' 안내판을 '파기(폐기) 조기'로 오해했다. 폐기예정 음쓰인줄 알았단 말이다.




그런 내가 "설빔"을 "설빙"이라며 입맛 다시는 꼬마들에게 놀라워할 수 있을까? 원클릭이면 옷을 바로 배송받는 패스트패션 천국에 사는 꼬마들에게 일 년에 한 번 설빔 알기를 기대한 내가 고루했다. 언어의 생물성을 깜빡한 것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Falstaff 2023-02-26 0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큰아이가 제일 좋아하던 동화책입니다. 딱 이 책입니다. 초판이고요. 아직도 가끔 몽실이와 작가 권정생을 이야기하지요.
˝새끼 입에 먹을 거 들어가는 거 보는게 제일 좋다.˝
이게 여태 제가 올린 유일한 짤의 제목입니다. 동화 말고 드라마 <몽실언니>에서 극중 몽실이의 상이군인 아빠 한진희가 했던 대사였습니다. ^^

얄라알라 2023-02-26 12:39   좋아요 0 | URL
˝새끼 입에 먹을 거 들어가는 거 보는게 제일 좋다.˝

그 말의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몽실언니> 아버지는 군에서 도망나와 ‘상이군인‘이라고도 불리지 못했다고 했던 것 같고, 그래서 더 자격지심이랄까, 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지경으로 못나 보였는데
골드문트님이 올려주신 대사를 보니, 몽실이 아버지에 대한 편견이 조금 달라지려 합니다.^^

참 좋은 책이예요~~ 들려주셔서 감사드려요 골드문트님.

새파랑 2023-02-26 1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몽실언니 드라마로 본 기억만 나네요. 그런데


설빙 맛있습니다 ^^

얄라알라 2023-02-26 12:38   좋아요 1 | URL
[몽실언니]를 여기저기, 다양한 루트로 추천받아왔는데
몽실이의 생명력이, (섹슈얼리티를 무기와 자원삼는) 성인 스칼렛 오하라와는 또 다른 맛의 질김을 보여주고 멋지더라고요.
읽으며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게 했던 동화입니다.

새파랑님, 근데 요즘 ˝설빙˝ 매장 거의 없지 않나요?^^ 저도 설빙 인절미 들어간 메뉴들 좋아했엇는데 저희 동네 대형 매장은 철수한지 오래 되었고, 많이 없어진 것 같아요^^ 가고 싶네요. 설빙 ㅋ

persona 2023-02-26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지라서 파조기 아니었나요? 겉에 흠집 난 거요. 오징어나 진미채나 명란젓 같은 거 저는 파지가 오히려 좋더라고요. ㅎㅎㅎ 다시마도 괜찮고요.

얄라알라 2023-02-26 12:36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최근에 그 단어를 처음 들어봤어요..^^:;;;

˝설빔˝을 팥빙수인줄 아는 애들 앞에서, 놀람 감탄사를 뱉었던 제가 부끄럽죠 ^^

아! 제주구좌 ˝못난이˝ 당근이라는 걸 사봤는데 그거 참 괜찮은 선택이더라고요.
아마 파조기 개념인가봐요^^

persona 2023-02-26 12:40   좋아요 1 | URL
못난이 과일 채소들 안 예쁠 뿐이지 괜찮은 것 같아요! 제로웨이스트 샵에서 처음 봤어요. 저는. ㅎㅎㅎ 파지 쪽은 시장에 잘 안나오니깐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 거 같아요. 부끄러워하실 것 까지야…^^
저도 어릴 때 ‘모과’를 뭐가? 로 잘못 알아들은 적이 있어요. ㅋㅋㅋ 경험이 없는 어린이다 보니깐 ㅋㅋㅋ 그런 일이 종종 있는 것 같기도 해요. ㅎㅎㅎ

얄라알라 2023-02-26 12:49   좋아요 1 | URL
‘모과‘ ㅋㅋㅋ
너무 귀여우세요.
‘모과‘나 ‘뭐가?‘나 엄청 비슷하네요

저는 1년째 생활영어좀 잘 해보고 싶어서 노력 많이 했는데
참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표현에 더 신경이 쓰이고 관심가나봐요

모과..ㅋㅋ아, 모과향을 갑자기 맡고 싶어집니다

persona 2023-02-26 13:34   좋아요 2 | URL
모과를 누가 주셔서 그걸로 모과차를 엄마가 만들어 주던날인데요.
-엄마 이게 뭐야? 향 좋다!
-모과?
-이거이거
-모과.
-아니 이게 뭐냐구!
로 시작해서 엄마가 웃겨서 일부러 모과라고만 한동안 답하셨었어요. 전 막 답답해서 이게 뭐냐고 뭔지도 모르고 먹냐고 막 그러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