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세 먼지 걷힌 4월 주말에는 놀아야 하건만, 오후 내내 [수학자 Scythe]를 읽었다.
뜻을 알더라도 실제 회화에서 발음했던 적도, 앞으로도 쓸 일 없어 보이는 단어이다. 그런데 닐 셔스터먼은 'scythe'를 무려 3부작 소설의 1권 제목으로 삼았다. "Scythe"는 사람의 생명을 인공적으로 앗아갈 수 있는 특권층(수확자들)을 은유함과 동시에 그들이 실제 물리적으로 동원하는 무기를 대유한다.
[수확자]는 작년에 읽었던 [Dry]에 비한다면, 덜 입체적이었다. [Dry]에서처럼 조숙하고 예민하면서도 제 앞가람 잘 하는 10대 소녀를 주인공 삼았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덜 사회비판적이고 더욱 미국적이라고 느꼈다. '(소설이) 미국적인 게 뭐냐?'라고 공격해 온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1) 장면 전환 빠르고 2) 폭력 수위 높아 자극적이며 3)'선택받은 자'의 아우라에 집중할 뿐, 평범한 사람들은 무개성 조연 집단 취급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겹친다.(닐 셔스터먼은 영화화될 염두를 두고 원작을 집필했을까?)
그래도 1) 설정 자체의 참신성 2)캐릭터들의 어조까지 변별적으로 살려낸 이수현 번역가의 출중한 언어감각 3) 닐 셔스터먼 특유의 재미 전략 덕분에 즐거웠기에, 중간에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https://youtu.be/sA6xEszg5EM
저자의 인터뷰 영상을 살펴 보니, 닐 셔스터먼은 기존 디스토피아가 '세계가 어떻게 잘못 돌아가고 있는가?'에 집중했다면 다른 방향에서 상상의 실타래를 풀었다. 인간이 통제하지 못했던 문제들에서 해방된 미래. 전쟁, 질병, 가난, 심지어는 노화와 죽음까지 해결된 세상에서 인간은 '사망(+살인) 이전 시대'의 예술작품과 일상에 스며 있던 정서를 더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전 세대 필멸자들이 강렬한 생존욕구와 절실함과 짜릿한 충동을 느꼈다면, '자연적 죽음'이 '수확자들'이 의례적으로 수행하는 인위적 수거로 대체된 이후 사람들은 수확자에게 운명을 내맡긴다. 수확자들은 인구를 인위조절하기 위해, 다양한 살인 테크닉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죽이는데 결코 이 행위를 '살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고결하고 신성한 의무라고 여기며 심지어 10계명까지 준수한다.
영화 [스타워즈]도, 소설 [Dune]도, [수확자]도 왜 그리 '선택받은 자'의 비범성에 집중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는 하겠지만, 특히나 [수확자]에서는 선택받은 집단으로서 '수확자들'과 그들에게 언제라도 '수확당할(=죽을)' 수 있는 사람들의 대비가 '사자 앞의 토끼들' 꼴로 묘사되고 있어서 배알을 뒤틀리게 하는 지점이 있다. 또한 특권층 '수확자들'의 정기모임인 콘클라베는 위엄과 정통성 있는 행사로 그려지는 반면, '음파교도'라는 소수자들의 종교는 희화화되었다고 느꼈다. 현대 미국소설을 몇 권 읽어본 적도 없는 게으른 독자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수확자]에서 닐 셔스터먼이 제기하는 화두 중 가장 흥미롭고, 저자의 통찰력에 공감했던 부분은 인간의 정치였다. 수확자 10계명, 수련과 시험, 자기성찰과 외부의 감시 등 다양한 규제 메커니즘을 설정해두었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가락에 낀 수확자들은 권력과 과시욕, 엘리티시즘에 취약하다. 취하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며, 연민, 생명존중, 공감 등 소위 인간적 정서를 다 활성화시키지만 그 안에서도 변종이 생긴다. 기술 발달 이전 시대의 자연적인 죽음을 인위적으로 조율한다면서, 어떻게 오감칠정 五感七情 느끼는 인간 수확자에게 절대반지를 맡길 수 있는가? 타락이 예견되어 있는데.... [수확자] 시리즈의 2권과 3권에서는 닐 셔스터먼의 통찰이 좀 더 정교해질지 기대 반 우려 반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