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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툇마루에서 모든 게 달라졌다 1~3 - 전3권
쓰루타니 가오리 지음, 현승희 옮김 / 북폴리오 / 2019년 2월
평점 :
품절
만화를 한창 많이 보던 어렸을 적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무서운 만화를 보던 기억, 순정만화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던 추억이 떠오른다. 책 서핑을 하다 발견한 이 책, 툇마루가 나오는 책 제목도 눈에 띄었고 수채화처럼 느껴지는 표지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읽게 되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우수만화도서> 선정작!’ 이라는 평가도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여학생과 할머니의 나이차이가 58살이나 차이 나는 BL 친구라고. BL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Boy Love’의 약자라고 했다. 그러니까 소년들이 우정을 넘어서 사랑하는 이야기? 가 나오는 만화라는 것이다. 그런 BL만화를 좋아하는 75세 할머니와 17세 여고생의 우정 이야기라니. 하지만 우려와 달리 이야기는 소소하면서도 설렘과 웃음을 주었던 흡족한 만화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어느 무더운 여름 유키 할머니는 단골 카페 마운틴에 간다. 그런데 카페 문에는 오랫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폐점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숨을 헐떡이며 쉴 곳을 찾다가 우연히 들른 서점.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고생 우라라를 만나게 되고 그녀들의 우정이 시작된다. 우연한 만남이 우정으로 바뀔 줄은 그녀들 자신도 몰랐으리라.
요리 책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예쁜 그림의 표지에 시선이 머문다. <너만 바라보고 싶어>라는 제목의 만화. 우라라는 북커버를 씌워드릴까요? 하고 묻지만 유키는 괜찮다며 사가지고 집에 돌아간다. 사람의 빈자리는 크게 느껴지는 걸까. 함께 부대끼며 살아갈 때는 모르지만 떠난 뒤에 그 허전함은 더욱 크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운틴 카페가 문을 닫아서 슬펐고, 거의 1년 만에 서점에 갔다 왔다면서, 3년 전에 사별한 남편과 주저리주저리 대화를 시작한다. 그제야 아까 서점에서 사온 만화가 생각나서 읽기 시작한다. 아, 젊은이들이 읽는 걸 모르고 사왔네, 하면서 결혼했을 무렵 만화를 읽었던 젊은 날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긴다. 음... 그런데 유키 할머니 의외로 거부감은 없는 모양이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다시 서점을 찾았는데, 재고가 다 떨어져서 주문을 하고 기다려야 된단다. 우라라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유키 할머니에 대한 미묘한 교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나이 차이를 넘어선 우정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지만 17세 여고생과 75세 할머니와의 우정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
우라라는 집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고 학교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못한다. 한참 외모에 신경 쓰는 예민한 나이 인데도 남들이 뭐라 하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내성적이고 사교적이지도 않은 우라라가 서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궁금했다. 고등학생이라면 한창 공부해야 할 때인데 책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런 우라라에게 딱 한 가지 부러운 게 있었으니, 그것은 좋아하는 관심사로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떠는 것이다. 하지만, 우라라는 친구들이 수다를 떨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워 할 뿐이다. 뒹구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웃음 터뜨린다는 사춘기 여고생이 이야기 할 상대가 없어서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하다니 딱한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하면 사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서점 동료에게 물어도 지금도 충분히 사교적이잖아, 하는 말만 돌아올 뿐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유키 할머니가 주문한 책이 입고되었다는 전화를 하는데... 뭔가 조금씩 바뀌어가고 싶은 우라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유키 할머니는 슈퍼에서 야채를 사면서도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이 나이에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웃겼다. 그래 순수한 마음이 있어서 그럴 거야. 우라라가 있는 나카 서점에 찾아온 할머니는 내친김에 이것저것 물어본다. 이런 책이 유행인거냐, 이런 책을 처음 읽었지만 응원하고 싶어진다면서 3권의 표지는 다른 사람인 것 같은데 이상하다고. 그건 어른이 된 마코토와 사쿠라 인데요, 가슴은 두근거리면서도 우라라는 설명해주느라 애쓴다.
할머니도 서서히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집에서 서예교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만나는 사람들은 노인과 어린이 뿐이고, 누군가와 만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할머니의 말에 우라라는 귀가 쫑긋해지면서 공감하는 눈치다. 자신이 생각하던 친구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할머니를 친구로 인정하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것으로 실컷 수다 떠는 것을 얼마나 바랐던가. 소심한 우라라는 좋으면서도 내색도 못하고, 또 유키 할머니는 이런 내가 나이어린 여고생과 어울려도 되는 건지 미안해하는데, 우라라는 오히려 기쁘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그러면 이 책 다 읽고 문자를 보내도 되느냐는 유키 할머니의 말에 우라라는 바로 네, 라고 대답한다. 표현하는 것이 아직도 서툴고 조심스러운 우라라 이지만, 서로 공감대가 생겼다는 것이 엄청 기쁘고 행복해 보였다.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것은 58살이라는 나이차이도 괜찮은 것일까. 어찌 생각하면 현실성 떨어지는 면도 없지 않지만 조금씩 스며들 듯 친근감 있고 진지한 대화가 이어져서 웃기기도 하고 순수함이 느껴졌다.
……
우라라와 함께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만화 이야기를 하고 돌아온 할머니는 앞으로 85세까지 산다고 가정하고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지 계산해 보고는 안타까운 마음이 된다. 1년 반에 한 권씩 나오는 책을 기다리기 힘드니까 읽을 수 있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할 일이 생긴 우라라는 열심히 궁리하며 검색하기 바쁘다.
노인과 어린이만 찾아오는 집에 새 손님 우라라가 오는 것이 정말 기쁜 모양이다. 여고생이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딸에게 조언을 구하더니 카레를 만드는 등 정성을 쏟는다. 우라라 역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여전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다. 좋아하는 것으로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이 꿈에 그리던 것이었지만 막상 닥쳐서는 쩔쩔매는데... 겨우 말을 마치고는 그런 자신을 대견해 한다. 그렇게 조금씩 변화되는 우라라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책 속의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카레를 먹으면서 점점 친해져간다.
어느 날 우라라는 <너만 바라보고 싶어>의 작가 코메다의 동인지 이벤트가 이케부쿠로에서 열린다는 메시지를 받는다. 이런 기회는 흔치않은 기회라서 할머니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메시지를 보내고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답장이 오지 않자 우라라는 괜히 얘기했나, 걱정하고 있는데 할머니의 전화가 온다. 함께 가자고 얘기 해줘서 고맙다고. 아이돌을 좋아하는 소녀들의 들뜬 모습이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떠난 남편을 생각한다. 두 시간이나 기다리는 것이 힘들어서 전망대를 올라가지 않았던 옛날 일을. 그 다음이 있을 줄 알았다는 할머니의 말에 뭉클해졌다. 지금 할 수 없는 것은 나중에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를 살면서 소중한 것을 먼저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작가 코메다 선생을 만나서 악수를 하는 우라라, 1년 반은 너무 길다고 책을 좀 빨리 써달라고 얘기하는 할머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할머니를 보고 놀라면서도 동요된 표정이다. 함께 책을 사가지고 오며 기뻐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소녀들 같다.
한편 우라라의 소꿉친구였던 츠무구는 여자친구 에리와 잘 되어가지 않으니 괜히 우라라에게 푸념을 하고 에리는 우라라를 보면서 오히려 미묘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다. 무엇 하나 분명하게 표현하고 요구하는 것이 힘든 자신이 답답해서 우라라는 할머니에게 상담하러 가야지, 생각하는데... 정말 놀라운 발전이다. 할머니는 우라라가 들어오자, 읽고 있던 만화 이야기를 시작하며 반가워한다. 우라라는 만화 속에 나오는 사랑 말고는 몰라서 그런지, 에리가 내비치는 말과 표정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말을 꺼낸다. 실제로 친구와 어울리고 싸우면서 지내보아야 마음속을 알 수 있을 텐데 만화책에만 빠져서 혼자 즐기는 우라라에게 인간관계는 참 어려운 숙제 같은 거였다.
“할머니가 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가 우라라 학생이라면 말이죠. 그냥 그려 봤을지도 몰라요.”
“우라라 학생은 이렇게 만화를 많이 보면서 직접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아뇨, 그렇진... 저 같은 게...”(2권 P93)
매사에 자신 없는 말만 하고 말을 끝맺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답답했다.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 걸까.
“아... 그게 아니라 전 보는 게 좋아서...”
“그래요? 그래도 모르는 거라우.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2권 P94)
할머니도 우라라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의 의욕을 느끼는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좋아하는 만화 이야기로 즐겁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가 생겼는데.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한 할머니는 서점에 들렀다가 <너만 바라보고 싶어>를 한 달에 한번 연재한다는 정보를 알고 나서 우라라에게 그 반가운 소식을 알리는 장면은 정말 웃겼다. 친척 아이라도 만난 듯한 느낌이 들어서 사버렸다는 할머니의 말에, 그 기분 안다고 맞장구치는 우라라. 할머니와 우라라는 만화 주인공 이야기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할머니가 이제 매월 한번 씩 회동을 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자 대찬성이라고 대답하는 우라라. 우라라는 두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에 놀란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서서히 바뀌어가는 우라라가 보였다. 만화를 그리면서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꽁꽁 숨겨 놓았던 꿈을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마음이 바빠진다.
이제 우라라의 미묘한 변화는 주변에서도 알아차리게 된다. 외출도 잘하고 활발해진 것 같다는 엄마의 말씀이 들린다. 우리 친구들의 우정은 한 걸음 쉬게 되는데, 바로 우라라가 대학입학을 앞두고 수험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
우연한 만남과 만화를 매개체로 겨우 친구가 되었는데 그동안 만나지 못하고 어떻게 잘 참아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할머니의 말씀을 되새기고 꿈을 다지는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다. 시간이 좀 흐른 어느 날, 우라라는 5월에 열리는 동인지 이벤트에 함께 가자고 할머니를 찾아오는데... 세상에, 주인공 작가는 우라라 자신이었다! 할머니의 말에 등 떠밀려 막연하게 동경했던 만화에 한 발짝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좋아하는 만화 이야기로 수다 떨 수 있는 소중한 친구가 생겼고, 우라라가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꿈을 펼칠 수 있어서 할머니는 행복했을 것이다. 적잖은 나이 차이지만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용기 있게 나아가는 우정이 참 예쁘게 느껴졌다. 친구들 사이에서 희미한 존재였던 우라라, 이제는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한 뼘 정도 자란 우라라의 성장 일기를 본 느낌이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는데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 열린 마음과 용기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