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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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불화는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사라지기를! 그리고 현명한 사람도 거칠어지게 만드는 분노도 사라지기를! 분노는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더 달콤하고 인간들의 가슴속에서 연기처럼 커지는 법이지요. 꼭 그처럼 저도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에게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 가슴속 분노를 억제해야지요. 이제 저는 나가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헥토르를 만나기 위해서.”(옮긴이의 말 중에서)


일리아스에서 파트로클로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테티스 앞에서 이렇게 절규하였고, 저자 매들린은 이 부분에 대한 호기심이 연구로 이어져 십 년의 과정을 거쳐 이 작품이 탄생했다 한다. 고전학을 전공한 그녀의 내공이 그리스신화와 함께 상상력으로 빚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신과 인간의 이야기가 들어있어 환상적인 느낌도 든다. 더구나 사랑 이야기는 흔한 남녀의 사랑이 아닌 미소년들의 사랑 이야기라서 더욱 재미있었다. 그들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이 얼마나 섬세한지,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도 나고 두근두근해진다. 그렇다고 결코 저속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순수하고 고결하게까지 느껴진다. 서로 너무 좋아서 서로의 몸과 마음을 느끼는 장면과 분위기, 그들이 느끼는 희열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야기는 파트로클로스가 화자가 되어 이끌어간다. 죽어서까지. 왕의 자손이니까 왕자다. 작고 가냘프고 빠르지 않고 노래도 못 불러서 일찌감치 아버지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주관하는 경기에서 꿀처럼 빛나는 금발머리에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아킬레우스를 본다. 아들은 저래야 하는 거다.” 아버지의 이 말은 계속 열등감으로 따라다닌다. 그러다가 열 살 때는 왕궁에 온 귀족의 아들을 실수로 밀었다가 죽게 한 죄로 프티아로 추방당한다. 펠레우스왕의 아들 아킬레우스와 같이 자라게 되는데, 여기서 그들의 우정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파트로클로스가 본 아킬레우스는 피부는 갓 짜낸 올리브같으며 이목구비가 수려한 조각남이다. 어머니는 여신 테티스이며 반신반인인 아킬레우스의 움직임과 속도감은 경이로움이다. 어떻게 해서 친구가 되었을까. 펠레우스왕은 아들에게 동무를 권해도 항상 시큰둥했는데, 어느 날 파트로클로스를 동무라고 한다. 왜 이 아이를 선택했느냐고 하자. ‘놀랍기 때문이라고.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소년들은 같은 방에서 지내며 어딜 가나 항상 같이한다. 열등감이 있던 파트로클로스는 그와의 경쟁의식도 없어지고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고 옛날이야기도 하며 우정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아킬레우스를 신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 테티스는 아들이 파트로클로스와 지내는 것을 눈에 가시같이 여긴다. 인간인 네가 감히 내 아들의 앞길을 막으려고 하느냐며 혐오한다.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느 날 자다 일어나보니 아킬레우스가 없다. 그의 어머니의 바람으로 인해 예견했던 일이지만 낙담하지 않을 수 없다. 왕궁을 벗어나 숲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아킬레우스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자괴감과 누군가 잡으려고 병사를 보낸 건 아닐까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릴락 말락 한 아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따라와 주길 바랐는데아킬레우스의 말을 듣고 긴장감과 안도감으로 속이 울렁거린다. 파트로클로스는 너무 짜릿한 환희에 감히 숨을 쉴 수가 없다. 둘은 이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스승 케이론은 테티스의 말을 어기면서까지 파트로클로스도 함께 데리고 길을 떠난다. 동굴에 기거하며 케이론에게 전투기술은 물론 사냥, 수술, 의술에 대한 것까지 배운다. 어느 날 케이론은 아킬레우스에게 헤라클레스의 모든 기술과 그 이상을 알고 있어서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으며 이전 세대 당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라고 칭찬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긴급사태가 벌어졌다는 왕의 전령을 받고 다시 프티아로 돌아가는데... 미모의 헬레나가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 왕자에게 납치되고 급기야는 전쟁이 시작된다. 테티스는 참전시키지 않으려고 아킬레우스를 여자로 변장시켜 스키로스 섬의 왕의 수양딸로 보냈지만 묘수를 쓴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를 찾아내고야 만다. 별자리에 이름이 새겨질 정도로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셈이냐고 자꾸 꼬드긴다. 트로이아에 가지 않으면 그 안의 신성이 쓰이지 않은 채 시들어 버릴 거라는 예언, 테티스는 트로이아에 가면 절대 돌아오지 못하고 요절할 거라고 말하지만 명예를 목숨만큼 여기는 아킬레우스는 참전을 결심한다. 겨우 열여섯 살에.


 전쟁이란 인정사정 봐줄 것 없이 어떻게든 승리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 순수한 소년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헥토르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잘못 한 게 없는데 어떻게 죽이느냐고 말하던 아킬레우스, 세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전사는 어떻게 승리로 이끌고 갈 것인가. 그리스군과 트로이아군만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신들도 편을 갈라 싸우는 통에 제물을 바쳐서 도움을 받는다. 며칠이면 끝날 것 같던 전쟁이 희한하게 돌아간다. 빼앗은 영토도 포로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다가 전리품으로 얻은 미모의 여인 브리세이아를 아가멤논이 빼앗는 사태가 벌어진다. 포로가 된 여자들을 보호하며 안심하며 살도록 도와주었던 아킬레우스에게 치명적인 모독이다.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면서 아가멤논이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개입을 않겠다며 싸움을 중단한다.


 ‘아리스토스 아카이오이(그리스의 으뜸)’인 이 위대한 전사가 참전하지 않자 전세는 밀리고 병사들은 죽어나간다. 신의 노여움으로 역병까지 번지고 전쟁은 어느새 9년이 넘어가고 있다. 보다 못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참전하여 사르페돈을 죽이고 헥토르의 창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아킬레우스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슬픔과 분노가 싸움터로 다시 불러냈다. 눈앞에 비극을 맞이하고 얼마나 많이 후회했을까. 그까짓 명예가 뭐라고, 그 많은 인명을 희생시켰다고 할 수도 있다어떤 이에게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남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니.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이다.


 싸움도 못하는 파트로클로스가 자신이 대신 나가겠다고 한 것은 아킬레우스를 더 이상 욕먹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죄 없는 병사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순수한 사랑이었다. 죽어서도 그를 따라다니고 그의 숨결을 느낀다. 핏빛 전쟁터에서도 그들의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영웅의 시대, 거친 전쟁 이야기 속에 두 연인의 사랑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의 용기, 순수, 우정, 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울렁울렁했다. 일리아스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기에 얼마만큼의 각색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재미있는 로맨스가 곁들여진 소설로 읽어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갖고 있는 일리아스를 읽어보고 싶은 용기를 갖게 되었으니까.

 

'나는 살짝 스치는 감촉만으로도, 체취만으로도 그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눈이 멀어도 그가 숨을 쉬는 소리와 땅을 밟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죽더라도 땅 끝에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P175)


내가 죽으면 우리 유골을 한데 모아서 같이 묻어주기 바란다.”(P445)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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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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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를 연상시키는 문학성 넘치는 스릴러라는 호평에 이 책을 만나기전부터 설렜다. 하지만 보통의 추리소설처럼 긴장감 같은 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심리소설인가 할 만큼 주인공의 내면의 불안이나 공포가 세밀히 묘사되어 어린 범죄자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고 참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윌리스라는 이름의 개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열두 살의 소년 앙투안은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 쿠르탱 부인과 살고 있다. 자신의 평판을 생명만큼이나 집착하는 쿠르탱 부인은 자신이 정한 규칙을 앙투안에게 따르도록 한다. 비디오 게임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어머니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게 되자 옆집 개 윌리스 만이 유일한 위안의 대상이다. 그 윌리스가 어느 날 자동차에 치어 옆구리와 다리가 부러졌는데, 수의사를 부르기는커녕 개 주인 데스매트 씨는 엽총으로 쏘아 죽인다. 앙투안을 그 장면을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충격으로 마음은 찢어진다. 우울한 성격에 분노의 성향을 갖고 있는 이 소년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다. 자신의 아지트였던 생퇴스타슈 숲 너도밤나무 위에 지어놓은 오두막을 모조리 때려 부순다.


 하필 이 때 나타난 가여운 레미, 앙투안을 숭배하여 졸졸 따라다니던 여섯 살의 레미다. 레미를 보자 앙투안의 맹렬한 분노가 되살아나고 작대기로 마구 후려치고... 영문도 모른 채 당한 레미는 싸늘하게 죽어간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앙투안, 그 맹렬했던 분노는 이제 거대한 공포로 바뀐다. 열두 살 소년의 머릿속은 이 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계산하기 바쁘다. 교도소 감방에 있는 자신의 모습, 엄마의 얼굴을 떠올린다. 엉엉 울고, 레미에게 왜 죽었느냐고 뺨을 후려치는 동작을 하며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경악을 금치 못 한다. 경찰에 자수해야지 하다가도 죽은 개가 담긴 쓰레기 자루의 영상이 떠올라 치우기로 한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공포 속에서 죽은 레미를 업고 얼마나 걸었을까, 앙투안은 생퇴스타슈 숲 너도밤나무가 쓰러진 구덩이 밑으로 죽은 레미를 밀어 넣는다.


 이제부터 앙투안의 다른 인생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까. 우발적인 일이었지만, 살인 전의 삶과 살인자가 된 시점의 사람의 내면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게 보이려고 애쓴다. 방송은 보발 지역의 여섯 살 어린 아이의 실종 소식을 전면 보도하고 군경의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쳐진다. 마을 사람들의 봉사도 지원을 받는다. 앙투안은 군경의 탐문에도 응하게 되고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도 없다. 한번 거짓말은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한다. 불안한 나날이 엄습한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일하고 있는 코발스키 씨가 용의자로 지목되어 불려나갔다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다. 안도와 불안이 교차하며 도망칠 생각도 하지만, 여러 가지가 발목을 잡는다.


 아직까지 레미의 죽음은 앙투안 밖에 알지 못한다. 피해자인 데스매트 씨 가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유괴되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진 베르나데트 부인을 도와주고 부축해 주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앙투안은 너무 괴롭다. 레미를 살려내서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다. 어머니와 같이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세상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라니.....!

, 내가 솔직히 하나 물어보자......

그런 어린아이를 그런 식으로 유괴한다는 게.....

, 너 상상이 되니? 여섯 살 먹은 꼬마 아이를 납치한다는 게? 아니, 그리고, 대체 무얼 하려고......?

에그, 불쌍한 녀석아. 그래, 저도 이 일 때문에 힘든 모양이구나...... 정말 그 아이는 너무 착했었는데......(P124~126)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속사포처럼 이야기하는 어머니를 보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앙투안의 두려움의 심연은 레미와 자주 만난다.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영원히 숨기고 싶은 양심의 갈등으로 들끓는다.


빨리 붙잡히고 싶었다. 빨리 체포되고 싶었다.

빨리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빨리 다 털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자고 싶었다. 그냥 계속 잠만 자고 싶었다.’(P131~132)


 어머니의 성화로 시에서 벌이는 자원봉사 수색대에 갔다가 생퇴스타슈 숲을 수색한다는 말을 듣고 감전되듯 몸이 굳는다. 어머니의 알약을 몽땅 털어 넣고 자살 시도했다가 겨우 살아난다. 이것은 행운이 될까. 또 다른 비운의 상태에 놓이게 될까. 묘하게 어머니의 태도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앙투안은 예리하게 눈치를 챈다. 그리고 두 개의 태풍에 이은 폭우로 보발 지역은 쑥대밭이 된다. 비극의 진실이 묻힌 생퇴스타슈 숲도 나무가 모조리 뽑히고 폐허가 되어 여러 가지 단서들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이것이 앙투안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일까.


 그 후로 12년이 흘렀고 앙투안은 의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부름으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고향에 다시 가게 되고, 어린시절 고약한 짝사랑으로 얼룩졌던 애밀리와 만났다가 하룻밤의 불장난. 이것은 앙투안에게 또 한 번 위기에 몰린다. 애밀리의 아버지가 아이의 유전자 검사를 종용하자, 이로 인해 어떤 일을 초래할지 빤한 상황이라 어쩔 수없이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디욀라푸아 박사의 자리를 이어받은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만난다. 항상 무섭게 느꼈던 코발스키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범죄자의 두려운 내면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개의 수상스럽게 여긴 복선을 마지막에 반전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한다. 세상에, 그래서 그랬구나. 어쩐지 알고 있는 눈치였어. 12년이나 잡히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 생퇴스타슈 숲은 재정비되어 어린이 놀이공원으로 탈바꿈한다. 앙투안은 그 날 잃어버린 손목시계를 소포로 받으며 완벽하게 원죄를 구원 받는다. 그토록 증오하던 고향에서 작은 선행을 하며 속죄를 하며 살아가겠지. 죄에 대한 응당한 대가를 받지 않고, 이렇게 도와주어도 되는 건가. 그 도움의 손길에는 자신의 감추고 싶은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은 인간의 이기심도 엿볼 수 있었다. 앙투안에게는 눈물의 감동이었겠지만, 레미를 잃은 데스매트 가족에게는 영원한 수수께끼이며 살인범도 못 찾고 진실은 묻힌 것이다. 그 점은 좀 씁쓸하다. 여타의 추리문학이 범인을 잡는 과정의 진행이라면, 이 작품은 우발적으로 살인자가 된 한 사람의 인생, 그 내면을 추적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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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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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출신 작가의 작품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이야기는 대체적으로 간결하고 짧은 호흡의 이야기로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다. 마리암 마지디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하는데 에세이 같은 느낌도 들었다. 시나 우화 같은 이야기도 들어 있어 환상적인 분위기도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엮어나가는데, 화자는 태아의 시선에서부터 한 살짜리 유아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되어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특히 아버지의 손, 어머니의 배와 눈, 할머니의 목소리를 테마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면은 좀 독특하게 느껴지며 천상 이야기꾼이구나, 감탄하게 된다.


 독재자 호메이니에 대항하여 반정부 정치 모임에 참여하며 좀 더 나은 나라를 꿈꾸었으나 나아지지는 않고 형제, 친척, 동료들이 체포되거나 죽어간다. 폭력과 살인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이곳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혁명을 겪은 여섯 살의 마리암은 부모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한다. 지옥 같은 땅을 빠져나왔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할까. 나고 자란 땅에서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는 부모형제, 친척들과 동네 이웃들에 대한 미안함, 그들의 고통이 선하다. 낯선 이방인으로 살면서 정체성의 방황을 겪기도 하고 등지고 떠난 고국의 현실이 여전한 것을 보며 괴로워한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와 의대생이었던 어머니, 나름 풍족한 살림이었지만,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안정적인 울타리를 모두 빼앗기고 가난의 냄새가 풀풀 나는 파리의 허름한 아파트에 새 둥지를 틀게 된다.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도 그렇지만, 낯선 사람들과 함께 공동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문화적 충격에 휩싸인다. 어머니는 점점 말이 줄어들고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생전 안 해본 막일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목수로 이름을 날릴 정도가 되지만, 고국의 피비린내는 현실이 자꾸만 떠올라 정신은 피폐해져 간다. 마리암은 학교에서 먹지도 않고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 낯선 아이들 속에 끼지 못해 도망쳤다가 할머니의 환영과 목소리를 듣고 힘을 얻는다.


 아직 어린 소녀가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측은하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아이, 아빠들, 우는 엄마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토해낸다. 악몽을 꾸며 울부짖는 날이 계속된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이 자꾸 먹고 싶고, 고향집 아이들에게 모두 주어버린 장난감이 생각난다. 말이 통하지 않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로움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며 상상하고 그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학교에 간 지 4개월이 되도록 말 한마디를 않는다며 어른들을 걱정을 시키고 벙어리, 외계인이라는 아이들의 놀림을 받던 마리암이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과정은 새가 알을 까고 나오는 그것이었다. 어른들의 걱정과 우려를 오히려 즐기듯이 안에서 웅크리며 도약하기 위해 준비한다. 작품이 될 때까지 공을 들였다가 어느 날 폭죽을 터뜨리려고 내밀한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이런 야심찬 생각을 하다니. 그렇게 언어를 배우고 다듬어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첫 이야기가 공쿠르 상 수상작이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난 어딜 가도 내 나라에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 프랑스에서는 다들 내가 이란 사람이라고 하고 이란에 가면 나를 프랑스 사람 취급해. 나처럼 두 문화를 가지고 싶어? 내 거 다 줄 테니까 나처럼 살아봐. 그러고 나서 그게 정말 멋지고 풍요로운지 말해주라고.”(P190)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서 살아야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이 말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 두 문화를 가져서 선택의 폭이 넓지 않느냐고 부러워하는 대학 친구들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살고 싶어 하는 파리도 이방인에게는 완벽한 안식처는 아닌 모양이다. 두고 온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가족과 사촌들과 보내던 추억, 유치원 운동장에 있던 떡갈나무까지, 고향에서 보고 듣던 소리가 희미해져가는 것이 아쉽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간청하던 모국어 페르시아어. 너의 뿌리를 잊지 말라던 아버지의 음성이 떠올라 회한에 잠긴다.


 배우기를 거부했던 페르시아어를 17년 만에 다시 배우면서 마리암은 스스로와 화해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아직도 어린이를 위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싶고 죽을 각오가 되었다는 압바스의 눈빛, 플라스틱 샌들 한 짝을 남기고 죽은 동네 젊은이, 감옥에서 만난 삼촌의 웃음, 만화 누샤베를 보며 아내의 목소리를 듣는다던 기자의 이야기 등 기억속의 이미지는 끝없이 맴돈다. 망명자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 그 그늘의 안타까움을 보았다. 바꾸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세상이 여전히 공존 한다는 것도.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생각해본다. 글을 쓰는 행위로 고통의 트라우마도 조금은 치유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매혹적인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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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월송도 2 - 완결
김이령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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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설로 인해 객점에서 제온과 경대승의 우연한 만남이 무척 흥미롭다. 날씨 상황 때문에 몰려온 손님으로 인해 방이 없는데, 경대승의 선심으로 제온이 묵게 되는데, 또 하나 험악한 인상의 천박한 무인 감무 강채주를 끼워 주는 바람에 좁디좁은 방 하나에서 세 명의 사내들이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이렇게 좁은 방에 사내끼리 살을 맞대고 자는 것보다는 밤새 내기를 해서 지는 사람이 술을 사자는 강채주의 제안에 의기투합한다. 아무리 낯선 사람들이라도 그렇게 모여 앉아 내기를 하게 되면 이런저런 얘기가 술술 나오게 마련이다.


 강채주는 자신의 뛰어난 노름 기술로 여인과 혼약까지 얻어냈다고 자랑을 한다. 얘기를 주고 받다보니 경대승이 자신의 아버지를 못마땅해 하고 싫어한다는 것에 묘한 공감이 생겨 제온과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다혈질이지만 의리에 밝은 경대승은 그 혼담은 무효라며 자신이 물어주겠다고 한다. 나름 규칙을 정하는데 경대승이 이기면 은 열 근에 처녀를 넘기고, 지면 은 스무 근을 내는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경대승이 내리 진다. 이에 제온은 은 백 냥을 걸고 자신이 이기면 계권을 찢어버리고 처녀를 놓아주는 조건으로 하자고 한다. 노름에 완전 초자 실력인 제온이 이기게 되자 경대승은 놀라며 강채주는 분을 못 이긴다. 하룻밤을 보낸 경대승은 제온에게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는데... 이렇게 전 권과 마찬가지로 흥미롭게 몰입하게 된다.


 이의방 이후의 정중부의 세상도 여전히 무법천지다. 정중부와 그 무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남적, 서적을 통합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승려들까지 나서게 된다. 이미 개경에는 괴이한 귀신 가면을 쓴 귀면이 나타나 무신들이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피해자는 행실이 포악하고 잔인한 자를 해치워서 민인들이 은근히 기뻐한다. 귀면은 무예가 출중해서 감히 당해낼 자가 없다. 오합지졸인 도적떼들을 한 뜻을 위해 규합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붙기도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내려놓지 않는다. 권력의 안락함에 젖은 자는 뺏기지 않으려 하고 밑바닥에 있던 자들은 권력을 갖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제온이 충주의 사심관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만나게 된 운영. 제온의 마음과 달리 부모와 스승을 잃고 자신을 향한 자책으로 돌덩이처럼 굳은 운영의 마음속으로 좀처럼 들어갈 수 가 없다. 남편의 학대 속에 점점 미쳐버릴 것 같은 서아, 죽은 줄 알고 있었던 휘, 제온의 곁을 떠난 영로 등 제온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숨 가쁘게 진행된다. 한 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가엾기도 하고 서로 잘 맺어졌으면 해서. 휘는 또 얼마나 얼굴이 빼어나면 기녀들보다 예쁘다고 하는지. 온 상상력을 동원해서 몰입하는 재미가 있다. 문장 하나하나가 눈앞에 살아있는 인물들의 영상을 보는 듯 실감난다. 자신의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한당 같은 찬술에게 온갖 협조를 제공하고는 결국 그 시커먼 손에 죽는 계랑.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약한 일개 민인의 몸부림이 처절하다. 신분이 높고 재산이 많아도 마음 편히 쉴 곳, 마음 하나 나눌 사람이 없는 서아도 가엾기는 마찬가지다.


 정균 일당과 맞닥뜨린 제온, 경대승의 대적 장면은 심장이 두근두근 한다. 정균의 호위 무사가 된 영로의 칼날이 과연 누구를 향할 것인지. 같은 동지가 되었어도 커다란 일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또 하나의 적을 해치우려 한다. 어쩌면 인간의 욕망은 이렇게 끝도 없는지도 모른다. 원래 적당한 선이라는 건 없는지도. 처음부터 제온과 이상이 달랐던 것처럼 정중부 부자 일당을 제거하고도 경대승은 제온을 여전히 불편해한다.


걱정스럽다는 겁니다. 장군은 군인답게 엄격한 규율로 세상을 짜 맞추려 하지만 그 규율도 낡으면 고쳐야죠. 사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그래서 시대가 변하는데도 낡은 규율에 구겨 넣으려고 하면 저항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세상과 사람이 변했는데 완전한 복고가 가능하겠습니까.”(P430) 실권을 잡은 경대승에게 이렇게 제온이 주장하지만, 기득권층은 언제나 익숙하고 자신에게 이익 되는 방향으로 제자리를 찾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비극과 비리가 계속되는 거겠지.


암울했던 삶 속에서 분투했던 주인공들은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길을 찾아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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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월송도 1
김이령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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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입부부터 강한 몰입이 느껴진다. 출생의 비밀을 논하는 부분은 더더욱 그렇다. 신분사회는 출생부터 전반적인 인생이 정해졌으니 스스로 거스르지 않으면 태어난 대로 살 수밖에 없다. 갓난아이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혁명을 꿈꾸는 부모에 의해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말방 할멈은 어찌하여 숲 속 동굴에서 살게 되었을까.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름난 산파로 일을 했는데, 홍씨 집안의 여종의 아이를 받은 날, 그 집 주인 마님도 아이를 출산한다. 지독한 난산으로 고생하다가 가까스로 아이를 낳고는 죽는다. 이 때 할멈은 주인집이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패물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여종과 마주치고. 옆구리에 아이를 끼고 나가는 여종과 마주쳤으나, 서로 무언의 묵인... 이것은 나중에 어떤 사건으로 변할지, 몹시 궁금해진다. 역사와 허구  사이에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한 빼어난 조화에 감탄하게 된다. 전작 <왕은 사랑한다>에서 느꼈던 몰입력을 그대로 선사한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 후 말방 할멈은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잘 살다가 옛날 홍씨 집안 종복들을 만나게 되고 아이가 뒤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실수로 인해 잿더미가 된 집에서 겨우 빠져나와 동굴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홍씨 집안의 둘째 부인 김씨는 아들 휘를 낳았고 이미 십여 년이 흘렀다. 급제 동기로 홍규직과 절친 이었던 임진출은 왕의 상소 건으로 바쁘고, 아내마저 병으로 피접 중이라 어린 딸 운영을 그 집에 맡기게 된다. 엄마가 아픈 것 말고는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운영의 눈에 비친 홍씨 집안의 풍경은 기이하고 낯설기만 하다. 부친의 친분으로 맡겨졌는데 자신을 짐짝취급하는 김씨 부인의 살갑지 않은 태도, 할 말은 서슴없이 하는 소년답지 않은 제온의 태도에 놀란다.


 무차대회(無遮大會)-승려와 속인, 남녀노소와 귀천의 구별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법회(주석)-에 갔다가 제온은 노비 영로와 함께 사냥을 하겠다고 빠져 나간다.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는 형을 원망하며 울다가 동생 휘가 갑자기 뛰쳐나가는 바람에 운영도 쫓아나갔다가 휘를 놓친다. 제온과 운영은 숲속에서 헤매다가 길을 잃고 찾아든 곳이 하필 그 말방 할멈의 동굴이었고. 말방 할멈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 불한당 같은 한 사내를 포섭했는데, 홍씨 집안 큰 도령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제온은 동굴 천장 틈새로 기어 올라가 그 사내에게 활을 쏘고, 운영과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열세 살 소년소녀의 재기어린 행동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모험 아닌 위기상황을 같이 하게 되면서 처음에 느꼈던 거친 말투의 개망나니 소년의 모습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쪽으로 운영의 마음은 바뀌어간다. 다행히 없어졌던 휘를 찾게 되고 차츰 분위기는 안정된다. 그러다가 다음날 갑자기 들이닥친 아버지와 함께 운영은 홍씨 집안을 떠나게 된다.


 경인(庚寅)8월 국왕이 폐신들과 놀러 간 보현원 근처에서 왕의 호위를 맡았던 무신들 중 이의방(李義方)의 주도하에 정변이 발생한다. 왕을 호위하던 문신들과 환관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개경으로 올라와 궁궐에 난입해 문신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으며, 함께 행동하지 않은 문신들도 도륙한다. 한바탕의 피바람이 지나자 패기어린 유생들은 민인들의 힘겨운 삶에는 안중에도 없는 왕에 대한 분노가 들불처럼 일어나 나라를 구해야겠다며 분연히 모여든다. 병든 고려를 향한 시무책을 써서 놀라게 했던 제온을 필두로 문사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허름한 술집에서 의논을 거듭한다. 그리고 제온의 스승 안장효와 그의 친구 어사대부 임진출을 초대하여 거사를 일으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한다. 전왕의 복위를 앞세워 과거를 회귀하려는 임진출의 의견과 낡고 부패한 세상을 개혁으로 고려를 중흥시켜 민생을 구하자는 제온과 맞서게 된다. 거사의 성공을 위해서는 일단의 무신과 남적을 포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임진출은 5년 전 이미 원수가 된 홍규직에 대한 극심한 반감으로 그의 아들의 진실한 강직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사로운 감정이 대의를 그르치는 것이다. 개혁을 꿈꾸는 자들이 첫 번째로 죽이고 싶어 할 만큼 모두가 증오하는 홍규직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아들일 수 있을까 놀라워한다.


 가뭄과 수탈에, 죽은 시체를 먹으며 핍박받은 민인들은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란다. 개혁을 꿈꾸던 쪽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정변이고 반역이 된다. 기득권층은 이미 익숙해진 그들의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게 마련이다. 개혁이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그들의 권력이 약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실정의 책임이 있는 전왕은 청산해야 할 구태의 상징인데, 그 전왕을 다시 섬기자는 것은 나라를 망쳐버린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는 기득권층의 관습이다. 제온의 이상은 누구든지 신분 때문에 능력을 썩히지 않는 세상이다. 얼마나 공평한 세상인가. 그러나 세상은 불공평한 부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자신들의 득세를 위해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가 판을 치기 때문이다. 실천과 이상 사이에 갭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음서의 혁파를 주장했던 제온도 한 가지 실수를 범했으니, 아버지의 음직 권유를 끝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추악한 재욕에 눈이 먼 부친에게 분노를 느끼면서도 결국 내키지 않는 혼인을 거부하는 것을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거사 준비를 위해서라는 명분이었지만, 언행일치의 모순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정변이 나던 날 밤 다시 만나게 된 제온과 운영은 부모의 눈을 피해 만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한없이 자신의 존재를 자책하던 제온은 운영에 의해 자존감을 찾게 된다. 부모들에 결정된 혼사에 아무런 저항 없이 순종해야 했던 여인들의 고통의 수난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노비들의 주인을 향해 환심을 사기 위한 그들의 암투도. 무신 현장군의 딸 현서아는 남편인 줄 알았던 홍제온이 자신의 큰아들이 된 것에 기막히지만 체념하고 만다. 친정마저 홍규직에게 설설 기는 판국이니 무엇을 따질 수 있겠는가. 가문을 보전해야 한다는 이유로 본인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는 여인들의 인생이다.


 결국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든 임진출의 실책으로 거사는 실패하고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잡혀 들어가고 또다시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한편 아버지의 계책으로 영로의 술잔을 받아 마시고 비몽사몽 깨어난 제온은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어디 감사할 수 있는 일인가. 뜻을 같이 했던 동료들이 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아버지에게 오히려 구원을 받다니 묘한 기분이다. 잿더미가 된 임진출의 집에 가서 무언가 찾으며 헤집고 다니는데...


 어린 시절 휘는 제온에게 제온은 영로에게 의지하면서 버팀목이 되었던 그들에게 어떤 인생은 펼쳐질까. 병든 어머니를 이유로 제온을 거절했던 운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의 격랑 속에서 이들의 사랑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어릴 적부터 잔학무도했던 아버지에게 감금과 학대를 받고 두 어머니의 죽음, 외로움과 고통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한 제온. 이제 겨우 좋아하는 여인 운영을 만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는데, 운명은 과연 이들의 편이 되어줄까. 달빛 아름다운 송도에서 위대한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사랑, 꼭 이루어지길 간절히 응원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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