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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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불화는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사라지기를! 그리고 현명한 사람도 거칠어지게 만드는 분노도 사라지기를! 분노는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더 달콤하고 인간들의 가슴속에서 연기처럼 커지는 법이지요. 꼭 그처럼 저도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에게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고 가슴속 분노를 억제해야지요. 이제 저는 나가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헥토르를 만나기 위해서.”(옮긴이의 말 중에서)


일리아스에서 파트로클로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테티스 앞에서 이렇게 절규하였고, 저자 매들린은 이 부분에 대한 호기심이 연구로 이어져 십 년의 과정을 거쳐 이 작품이 탄생했다 한다. 고전학을 전공한 그녀의 내공이 그리스신화와 함께 상상력으로 빚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신과 인간의 이야기가 들어있어 환상적인 느낌도 든다. 더구나 사랑 이야기는 흔한 남녀의 사랑이 아닌 미소년들의 사랑 이야기라서 더욱 재미있었다. 그들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문장이 얼마나 섬세한지,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도 나고 두근두근해진다. 그렇다고 결코 저속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순수하고 고결하게까지 느껴진다. 서로 너무 좋아서 서로의 몸과 마음을 느끼는 장면과 분위기, 그들이 느끼는 희열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다.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야기는 파트로클로스가 화자가 되어 이끌어간다. 죽어서까지. 왕의 자손이니까 왕자다. 작고 가냘프고 빠르지 않고 노래도 못 불러서 일찌감치 아버지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주관하는 경기에서 꿀처럼 빛나는 금발머리에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아킬레우스를 본다. 아들은 저래야 하는 거다.” 아버지의 이 말은 계속 열등감으로 따라다닌다. 그러다가 열 살 때는 왕궁에 온 귀족의 아들을 실수로 밀었다가 죽게 한 죄로 프티아로 추방당한다. 펠레우스왕의 아들 아킬레우스와 같이 자라게 되는데, 여기서 그들의 우정과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파트로클로스가 본 아킬레우스는 피부는 갓 짜낸 올리브같으며 이목구비가 수려한 조각남이다. 어머니는 여신 테티스이며 반신반인인 아킬레우스의 움직임과 속도감은 경이로움이다. 어떻게 해서 친구가 되었을까. 펠레우스왕은 아들에게 동무를 권해도 항상 시큰둥했는데, 어느 날 파트로클로스를 동무라고 한다. 왜 이 아이를 선택했느냐고 하자. ‘놀랍기 때문이라고.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소년들은 같은 방에서 지내며 어딜 가나 항상 같이한다. 열등감이 있던 파트로클로스는 그와의 경쟁의식도 없어지고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고 옛날이야기도 하며 우정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아킬레우스를 신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 테티스는 아들이 파트로클로스와 지내는 것을 눈에 가시같이 여긴다. 인간인 네가 감히 내 아들의 앞길을 막으려고 하느냐며 혐오한다.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느 날 자다 일어나보니 아킬레우스가 없다. 그의 어머니의 바람으로 인해 예견했던 일이지만 낙담하지 않을 수 없다. 왕궁을 벗어나 숲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아킬레우스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자괴감과 누군가 잡으려고 병사를 보낸 건 아닐까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릴락 말락 한 아는 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따라와 주길 바랐는데아킬레우스의 말을 듣고 긴장감과 안도감으로 속이 울렁거린다. 파트로클로스는 너무 짜릿한 환희에 감히 숨을 쉴 수가 없다. 둘은 이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스승 케이론은 테티스의 말을 어기면서까지 파트로클로스도 함께 데리고 길을 떠난다. 동굴에 기거하며 케이론에게 전투기술은 물론 사냥, 수술, 의술에 대한 것까지 배운다. 어느 날 케이론은 아킬레우스에게 헤라클레스의 모든 기술과 그 이상을 알고 있어서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으며 이전 세대 당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전사라고 칭찬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긴급사태가 벌어졌다는 왕의 전령을 받고 다시 프티아로 돌아가는데... 미모의 헬레나가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 왕자에게 납치되고 급기야는 전쟁이 시작된다. 테티스는 참전시키지 않으려고 아킬레우스를 여자로 변장시켜 스키로스 섬의 왕의 수양딸로 보냈지만 묘수를 쓴 오디세우스가 아킬레우스를 찾아내고야 만다. 별자리에 이름이 새겨질 정도로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셈이냐고 자꾸 꼬드긴다. 트로이아에 가지 않으면 그 안의 신성이 쓰이지 않은 채 시들어 버릴 거라는 예언, 테티스는 트로이아에 가면 절대 돌아오지 못하고 요절할 거라고 말하지만 명예를 목숨만큼 여기는 아킬레우스는 참전을 결심한다. 겨우 열여섯 살에.


 전쟁이란 인정사정 봐줄 것 없이 어떻게든 승리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는 순수한 소년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헥토르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잘못 한 게 없는데 어떻게 죽이느냐고 말하던 아킬레우스, 세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전사는 어떻게 승리로 이끌고 갈 것인가. 그리스군과 트로이아군만이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신들도 편을 갈라 싸우는 통에 제물을 바쳐서 도움을 받는다. 며칠이면 끝날 것 같던 전쟁이 희한하게 돌아간다. 빼앗은 영토도 포로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다가 전리품으로 얻은 미모의 여인 브리세이아를 아가멤논이 빼앗는 사태가 벌어진다. 포로가 된 여자들을 보호하며 안심하며 살도록 도와주었던 아킬레우스에게 치명적인 모독이다.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면서 아가멤논이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개입을 않겠다며 싸움을 중단한다.


 ‘아리스토스 아카이오이(그리스의 으뜸)’인 이 위대한 전사가 참전하지 않자 전세는 밀리고 병사들은 죽어나간다. 신의 노여움으로 역병까지 번지고 전쟁은 어느새 9년이 넘어가고 있다. 보다 못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참전하여 사르페돈을 죽이고 헥토르의 창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아킬레우스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슬픔과 분노가 싸움터로 다시 불러냈다. 눈앞에 비극을 맞이하고 얼마나 많이 후회했을까. 그까짓 명예가 뭐라고, 그 많은 인명을 희생시켰다고 할 수도 있다어떤 이에게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 남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니.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이다.


 싸움도 못하는 파트로클로스가 자신이 대신 나가겠다고 한 것은 아킬레우스를 더 이상 욕먹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고 죄 없는 병사들의 죽음을 막기 위한 순수한 사랑이었다. 죽어서도 그를 따라다니고 그의 숨결을 느낀다. 핏빛 전쟁터에서도 그들의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영웅의 시대, 거친 전쟁 이야기 속에 두 연인의 사랑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의 용기, 순수, 우정, 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울렁울렁했다. 일리아스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기에 얼마만큼의 각색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재미있는 로맨스가 곁들여진 소설로 읽어서 다행인지도 모른다. 갖고 있는 일리아스를 읽어보고 싶은 용기를 갖게 되었으니까.

 

'나는 살짝 스치는 감촉만으로도, 체취만으로도 그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눈이 멀어도 그가 숨을 쉬는 소리와 땅을 밟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죽더라도 땅 끝에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P175)


내가 죽으면 우리 유골을 한데 모아서 같이 묻어주기 바란다.”(P445)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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