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월송도 1
김이령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8년 2월
평점 :
품절


 도입부부터 강한 몰입이 느껴진다. 출생의 비밀을 논하는 부분은 더더욱 그렇다. 신분사회는 출생부터 전반적인 인생이 정해졌으니 스스로 거스르지 않으면 태어난 대로 살 수밖에 없다. 갓난아이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혁명을 꿈꾸는 부모에 의해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말방 할멈은 어찌하여 숲 속 동굴에서 살게 되었을까.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름난 산파로 일을 했는데, 홍씨 집안의 여종의 아이를 받은 날, 그 집 주인 마님도 아이를 출산한다. 지독한 난산으로 고생하다가 가까스로 아이를 낳고는 죽는다. 이 때 할멈은 주인집이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패물을 훔쳐서 달아나다가 여종과 마주치고. 옆구리에 아이를 끼고 나가는 여종과 마주쳤으나, 서로 무언의 묵인... 이것은 나중에 어떤 사건으로 변할지, 몹시 궁금해진다. 역사와 허구  사이에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한 빼어난 조화에 감탄하게 된다. 전작 <왕은 사랑한다>에서 느꼈던 몰입력을 그대로 선사한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 후 말방 할멈은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잘 살다가 옛날 홍씨 집안 종복들을 만나게 되고 아이가 뒤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실수로 인해 잿더미가 된 집에서 겨우 빠져나와 동굴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홍씨 집안의 둘째 부인 김씨는 아들 휘를 낳았고 이미 십여 년이 흘렀다. 급제 동기로 홍규직과 절친 이었던 임진출은 왕의 상소 건으로 바쁘고, 아내마저 병으로 피접 중이라 어린 딸 운영을 그 집에 맡기게 된다. 엄마가 아픈 것 말고는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운영의 눈에 비친 홍씨 집안의 풍경은 기이하고 낯설기만 하다. 부친의 친분으로 맡겨졌는데 자신을 짐짝취급하는 김씨 부인의 살갑지 않은 태도, 할 말은 서슴없이 하는 소년답지 않은 제온의 태도에 놀란다.


 무차대회(無遮大會)-승려와 속인, 남녀노소와 귀천의 구별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법회(주석)-에 갔다가 제온은 노비 영로와 함께 사냥을 하겠다고 빠져 나간다.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는 형을 원망하며 울다가 동생 휘가 갑자기 뛰쳐나가는 바람에 운영도 쫓아나갔다가 휘를 놓친다. 제온과 운영은 숲속에서 헤매다가 길을 잃고 찾아든 곳이 하필 그 말방 할멈의 동굴이었고. 말방 할멈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 불한당 같은 한 사내를 포섭했는데, 홍씨 집안 큰 도령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된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제온은 동굴 천장 틈새로 기어 올라가 그 사내에게 활을 쏘고, 운영과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열세 살 소년소녀의 재기어린 행동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모험 아닌 위기상황을 같이 하게 되면서 처음에 느꼈던 거친 말투의 개망나니 소년의 모습이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쪽으로 운영의 마음은 바뀌어간다. 다행히 없어졌던 휘를 찾게 되고 차츰 분위기는 안정된다. 그러다가 다음날 갑자기 들이닥친 아버지와 함께 운영은 홍씨 집안을 떠나게 된다.


 경인(庚寅)8월 국왕이 폐신들과 놀러 간 보현원 근처에서 왕의 호위를 맡았던 무신들 중 이의방(李義方)의 주도하에 정변이 발생한다. 왕을 호위하던 문신들과 환관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개경으로 올라와 궁궐에 난입해 문신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으며, 함께 행동하지 않은 문신들도 도륙한다. 한바탕의 피바람이 지나자 패기어린 유생들은 민인들의 힘겨운 삶에는 안중에도 없는 왕에 대한 분노가 들불처럼 일어나 나라를 구해야겠다며 분연히 모여든다. 병든 고려를 향한 시무책을 써서 놀라게 했던 제온을 필두로 문사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허름한 술집에서 의논을 거듭한다. 그리고 제온의 스승 안장효와 그의 친구 어사대부 임진출을 초대하여 거사를 일으키기 위한 논의를 시작한다. 전왕의 복위를 앞세워 과거를 회귀하려는 임진출의 의견과 낡고 부패한 세상을 개혁으로 고려를 중흥시켜 민생을 구하자는 제온과 맞서게 된다. 거사의 성공을 위해서는 일단의 무신과 남적을 포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임진출은 5년 전 이미 원수가 된 홍규직에 대한 극심한 반감으로 그의 아들의 진실한 강직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사로운 감정이 대의를 그르치는 것이다. 개혁을 꿈꾸는 자들이 첫 번째로 죽이고 싶어 할 만큼 모두가 증오하는 홍규직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아들일 수 있을까 놀라워한다.


 가뭄과 수탈에, 죽은 시체를 먹으며 핍박받은 민인들은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바란다. 개혁을 꿈꾸던 쪽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정변이고 반역이 된다. 기득권층은 이미 익숙해진 그들의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게 마련이다. 개혁이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그들의 권력이 약해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실정의 책임이 있는 전왕은 청산해야 할 구태의 상징인데, 그 전왕을 다시 섬기자는 것은 나라를 망쳐버린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는 기득권층의 관습이다. 제온의 이상은 누구든지 신분 때문에 능력을 썩히지 않는 세상이다. 얼마나 공평한 세상인가. 그러나 세상은 불공평한 부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자신들의 득세를 위해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가 판을 치기 때문이다. 실천과 이상 사이에 갭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음서의 혁파를 주장했던 제온도 한 가지 실수를 범했으니, 아버지의 음직 권유를 끝까지 피하지는 못했다. 추악한 재욕에 눈이 먼 부친에게 분노를 느끼면서도 결국 내키지 않는 혼인을 거부하는 것을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거사 준비를 위해서라는 명분이었지만, 언행일치의 모순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정변이 나던 날 밤 다시 만나게 된 제온과 운영은 부모의 눈을 피해 만나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한없이 자신의 존재를 자책하던 제온은 운영에 의해 자존감을 찾게 된다. 부모들에 결정된 혼사에 아무런 저항 없이 순종해야 했던 여인들의 고통의 수난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노비들의 주인을 향해 환심을 사기 위한 그들의 암투도. 무신 현장군의 딸 현서아는 남편인 줄 알았던 홍제온이 자신의 큰아들이 된 것에 기막히지만 체념하고 만다. 친정마저 홍규직에게 설설 기는 판국이니 무엇을 따질 수 있겠는가. 가문을 보전해야 한다는 이유로 본인의 의사는 철저히 무시되는 여인들의 인생이다.


 결국 사사로운 감정이 끼어든 임진출의 실책으로 거사는 실패하고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잡혀 들어가고 또다시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한편 아버지의 계책으로 영로의 술잔을 받아 마시고 비몽사몽 깨어난 제온은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지만, 이것이 어디 감사할 수 있는 일인가. 뜻을 같이 했던 동료들이 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아버지에게 오히려 구원을 받다니 묘한 기분이다. 잿더미가 된 임진출의 집에 가서 무언가 찾으며 헤집고 다니는데...


 어린 시절 휘는 제온에게 제온은 영로에게 의지하면서 버팀목이 되었던 그들에게 어떤 인생은 펼쳐질까. 병든 어머니를 이유로 제온을 거절했던 운영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의 격랑 속에서 이들의 사랑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어릴 적부터 잔학무도했던 아버지에게 감금과 학대를 받고 두 어머니의 죽음, 외로움과 고통을 견뎌내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성장한 제온. 이제 겨우 좋아하는 여인 운영을 만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는데, 운명은 과연 이들의 편이 되어줄까. 달빛 아름다운 송도에서 위대한 변화를 꿈꾸는 이들의 사랑, 꼭 이루어지길 간절히 응원하는 마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