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는 안락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 걸인의 삶을 이해하는지 궁금해하며 이런 희망을 전했다. "모두가 적당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당장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간다면 얼 - P37

마나 멋질까요." 그리고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도 제안했다.
"당신이 줘야 하는 걸 주세요. 우리는 언제나 뭔가를 줄 수 있어요.
아주 작은 친절한 행동 하나라도 말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세상에는 방과 재물, 돈과 아름다움이 넘칩니다. 신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충분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으니까요.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당장 그것을 좀 더 공평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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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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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작가의 산문집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은 지 12년 만에 이 소설을 읽었다. 내가 힘든 시절에 읽었던 책이고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가족사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이야기라 뭉클하고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당시에 메모한 노트를 들춰 보았다. 작가의 글에서는 어둡고, 쓸쓸하고, 배고프고, 그립고, 외롭고, 억울하고등등 이런 느낌이 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또 농촌에 살면서 느끼는 소박함이나 자연 속에서 얻는 충만한 행복감도 들어있다는 나름의 감상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나를 감동케 했던 말은 작가는 깨끗하고 환한 방에서는 탄생하지 않는다, 습하고 어둡고 쓸쓸한 그런 방이 작가의 영혼으로 태어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했던 말이다. 이 말은 나에게 엄청난 용기를 주었다. 나도 언젠가는 작가가 될 것이라고 희망을 품었고... 작가가 되었다. 정말 신기하다. 사설이 길었다. 공선옥 작가의 소설을 이제야 접한 것을 반성한다.

 



이 작품은 80년 광주, 청춘들의 아픈 이야기이며 우리 시대의 슬픈 역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수선화 멤버 진만이, 승규, 만영이, 태용이, 승희, 정신이, 화자 해금이, 경애, 수경이, 이렇게 아홉 명이 펼치는 아픈 스무 살 시절 이야기다. 한창 젊음을 발산하고 꿈과 열정으로 모든 걸 태워버릴 수 있는 나이에 그들 앞에 닥친 상황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곧 두려움으로 바뀐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 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P76)

 



수경이가 하는 말이다. 이 글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해금이는 매사에 좀 무디고 집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했다. 경애를 따라 성당에 갔다가 의도하지 않게 수선화 멤버가 되고, 지금이 계엄령 상황에 있다는 것도 늦게야 알아차린다. 유일한 친구 경애를 잃은 뒤 수경이는 크게 상심하고 몸져누웠다.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너만 난리냐고. 아픈 수경이 문병을 온 친구들에게 수경이 엄마는 냉대하고 쫓아내다시피 한다. 결국, 경애의 뒤를 이어 수경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승희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죽음, 아빠 없는 아이를 낳고, 가슴 떨리는 사랑의 감정을 경험하는 등 여러 사건이 그들을 에워싼다. 해금이와 친구들은 절망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우정을 나누고 민중을 압박하는 시국에 대항한다. 해금이도 이 분위기에 동요되고 자각하고 행동을 취한다.

 



빛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는 거, 아름다움은 슬픔에서 나온다는 거, 모든 행복은 고통 뒤에 온다는 거. 진짜 빛이 있고 진짜 아름다움이 있고 진짜 행복이 있다면 말야.”(p199)

 



모든 오만한 자들이, 모든 무뢰배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까지, 견디고 견뎌서, 그 견디는 힘으로 우리가 아름다워지자고, 왜냐하면 모든 추함은 모든 아름다움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에서 출발한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에, 동물적 본능의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 때문이라고, 동물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의 과정이야말로 진보의 역사라고, (중략) 오늘, 저 무뢰배의 오만이 횡행할 수 있는 이 야만의 구조, 이 동물적 상황을 나는 견뎌야 한다. 저항하기 위해 견딜 것, 아름다워지기 위해 지금은 견딜 것.(P241)

 



그러나, 모든 좋은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행복이, 우리의 청춘이, 우리의 인생이, 우리 인생의 모든 환한 것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이 세상에 슬픔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으므로, 슬픔은 생겨나는 것이다. (p248~249)

 



중학생 시절 어느 날, 둥근 철모를 쓴 군인들 무리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간 적 있다. 그 후 몇 년이 흘러 직장인이 되고 나서 그 현장에서 명령을 수행한 적 있다는 남자 직원의 말을 듣고 섬뜩한 적 있다. 그 날 군인들은... 그래서 그랬구나. 권력을 앞세워 방송과 언론을 차단하고 무고한 시민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권력 앞에서는 희생이 따라야만 하는 걸까. 무거운 마음 지울 길 없었다. 작가는 진솔한 체험을 바탕으로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표현하며 작품 활동을 해 왔다. 이 책의 제목은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제목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중에서

 



그 시의 일부다. 이 책 주인공들이 살아내야 했던 가장 예뻤을 때잔혹했던 스무 살의 삶과 절묘하게 닮았다. 이 아픈 역사를 젊은 시절에는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30년 만에 썼다고 한다. 거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이고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빌어다 쓴 것인데 이 역사를 모르는 어린 작가는 작가님 상상력이 대단하시네요.” 라고 해서 놀랐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공선옥 작가는 2000년대 용산이 80년 광주라고 했단다. 시대는 흘렀고 세상은 좋아졌지만, 아직도 어딘가에 폭력은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또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작가이고 싶다라고. 불편한 책을 멀리하려는 독자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 같아 뜨끔했다. 다양한 층의 독자가 읽고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행복한 작가와 행복한 독자만 있는 세상은 오히려 비극에 가깝다. 독자를 행복하게만 만드는 글은 설탕처럼 해롭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불화가 있어야 한다. 내 글을 읽고 불편한 사람이 있는 편이 작가로서 행복하다.”

(출처: 채널예스-80년 광주, 아픈 청춘들의 이야기를 사반세기 만에 그리다 - 소설가 공선옥

반세기를 가슴에만 품어둔 이야기가 소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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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23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읽었는데 독후감을 올리지 않았네요. ㅎㅎㅎ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공선옥 짱!

모나리자 2024-07-23 16:47   좋아요 1 | URL
아, 읽으셨군요! Falstaff 님, 워낙 다독하시는 분 같은데 댓글과 공감 감사합니다!!
맞아요. 글 잘 쓰시는 작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우기 사회 문제를 소재로 끌어내어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어서요...
장마로 습하고 더운 날이 계속되네요.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한 여름 나시길 바랄게요.^^

2024-07-25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29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가 그늘에서만 살던 번역가가 작가가 되어 세상에 나오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백댄서를 하던 김종민이 앞으로 나와서 코요태가 되고 예능인이 된 것처럼. 그러나 김종민이 다시백댄서를 하는 일은 없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번역가란직업을 사랑하며 원서와 사전과 고군분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145

「번역에 살고 죽고』가 출간됐을 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많은 메일이 왔다. 인터뷰는 당연한 것이고, 졸업한 이후소식이 끊긴 중, 고등학교 동창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하더니 통번역 대학원이나 대학의 강연 요청도 들어왔다.
요청받는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주제넘게 나섰다가 가문의 수치가 될지도 모른다. - P149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더불어 사는 세상이니 하는 말에서 자유로워지자, 지구의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 나이를 먹어서 뻔뻔해진 것인지해탈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소한 사람의 도리를하고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세상을 왕따시키며 살고 있다. 물론 외롭다. 외롭지만, 편하다. 편하지만, 찜찜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잠자리에 들며 혼자 반문하지만, 다음 날 해가 뜨면 또 찜찜하지만 편한 외로움을 선택하고 있다. 아, 이렇게 고운 독거노인이 돼가는 건가.
- P169

책을 읽고, 책을 번역하는 게 직업이다. 동종 업계의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연중무휴였다.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도 바로 노트북을 펴고 앉았다. 마감에 쫓겨서도 아니고, 생활비를 벌어야지하는 압박감에서도 아니었다. 긴 세월 하다 보니 그냥 그게 직업인 동시에 취미 생활로 굳어졌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만큼이나 재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번역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 P176

화사한 봄날에 긴자 역에서 브릭스퀘어광장의 에쉬레까지 걸어가서 스위츠를 사 먹은 기억이얼마나, 얼마나 좋았던지. 정하랑 "우리 살다가 언제 제일행복했더라?" 하는 얘기를 나눌 때면 둘 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뽑는 것이 그날이다. 어느 날, 야후 재팬에서우연히 본 살인범의 기사가 모녀의 최고로 행복한 날로이어지는 드라마가 되다니. 삶은 그래서 모든 순간이 복선일지도 모른다. - P185

구체적인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분은 "너는 나다니는 직업이 좋다. 기자를 하면 딱 안성맞춤이야"라고 했다.
좋은 미래도 나쁜 미래도 딱히 얘기하는 것도 없고 귀에걸면 귀걸이식의 점사 몇 마디 하고 끝이었다. 이미 ‘나다니는 직업, 기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날 점은 꽝이었다.

그러나 나다니는 걸 싫어하고, 부끄럼도 많이 타고, 전화 기피증이 있는 내게 기자는 시켜줘도 못 할 직업이긴했다. 그곳에 다녀온 몇 달 뒤 나는 번역을 시작하게 됐고,
평생 나다니지 않는 직업을 갖게 됐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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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 되기 전에 친척집에 맡겨졌던 첫딸은 유치원 때부팀 이지메를 당하는 등, 어릴 때부터 순탄치 못한 생활이이어졌다. 급기야 10대에는 거듭된 자살 미수로 고등학교1학년 때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그러다 극단에 들어가서스무 살에 극작가로 데뷔하고, 만 스물여덟 살에 『가족시네마』로 재일 교포로서 두 번째 아쿠타가와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 책은 밀리언셀러가 된다. 바로 유미리다. - P113

우연히 보게 된 바다 건너 사는 작가의 블로그를10년째 듬성듬성 읽고 있다. 지금 상황은 마치 삼진 아웃만 당하다가 9회말 투아웃에 장외 홈런을 날린 한물간 야구 스타의 경기를 본 것 같다.
인생은 정말 어디로 굴러갈지 알 수 없다. 끝날 때까지끝난 게 아닌 것이었다. 유미리 작가의 부활을 진심으로축하한다. 앞으로는 부디 꽃길만 걸으시기를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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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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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소설가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한국 소설을 한동안 읽지 않아서. 늦게나마 김애란 작가의 책을 만난 건 번역 수업 덕분이다. 번역 공부는 거의 국어 공부라 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좋은 책, 좋은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올려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워낙 유명한 작가라서 책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꽤 젊은 작가였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은 상복도 많은 작가였다. 이 산문집은 작가를 있게 한 이름들, 작가와 함께한 이름들을 주제로 썼다. 1부 나를 부른 이름 2부 너와 부른 이름 3부 우릴 부른 이름들 세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인정받아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인문고등연구소(LASH)에 초대받아 머물렀던 화려한(?) 경험까지 담고 있다. , 정말 부럽군, 했다. 한 사람의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추억이 깃든 장소와 에피소드를 엿보는 일은 늘 뭉클한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작가의 어머니가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팔았던 가게 맛나당은 작가에게도 큰 의미를 부여한 곳이었다. 작가로서의 기질을 키우고 꿈을 꾸게 한 곳이 아니었을까. 김애란 작가는 자신의 정서가 거기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수많은 손님을 만나고 거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그 분위기가 작가의 가슴에 차곡차곡 스며들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그 돈으로 세 딸을 가르치고 생활을 꾸리고 집도 장만했단다. 그곳은 어머니가 경제 주체이자 삶의 주인으로 자의식을 갖고 꾸린 적극적인 공간이었다. ‘맛나당은 작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팔 할의 힘이 되었고 나머지 이 할은 사범대학에 가라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예술학교에 들어간 것이란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어머니를 본받아서 자신이 선택했고, 그것이 인생을 바꾸었다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 두 분의 첫 만남과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고 진한 가족애와 행복한 정경이 전해져 왔다. 또 지인과의 우정, 읽은 책을 소개하며 들려주는 소소한 감상 이야기도 좋았다. 나도 전에 읽다 만 적 있던산해경을 접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이 책은 원래 중국의 신화집 또는 역사서, 지리서 고대 동아시아 풍습과 종교를 다룬 책이지만 문학 텍스트로 읽는다면 창작자에게 먹을 만한 플랑크톤이 풍부한 심해라고 알려 주었다. 귀한 보석을 주운 기분이었다. 선후배 작가와의 여행 이야기도 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는 동료로서 함께 보고 공감했던 시간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하고 충만한 시간일 것이다.

 



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P124)

 



우리의 삶은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한 가지를 풀고 나면 또 한 가지가 우리에게 닥친다. 글 쓰는 삶이나 보통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감사를 말하게 된다. 당연한 것들에 놀라는 삶, 그러려고 하는 마음의 다짐이 있을 때 우리 삶은 한층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두라고.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 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대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P133)

 



역시 작가다운 통찰이 들어있는 대목 같다. 이 글은 작가가 창비 50돌 축사를 맡게 되어 쓴 축사의 일부인데 너무나 공감이 가는 문장이라 소개해 본다. 작가가 태어나 처음 가보았던 창비 출판사, 마포 사무실을 떠올리며 감개무량에 젖는다. 다시 올 일 없을 줄 알았기에 대충 보고 말아서 기억도 나지 않는 그곳. 그 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며 하는 얘기였다. 몇 달 전부터, 자꾸만 가보고 싶은 곳이 떠올라 가봐야지 벼르고 있던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내가 20대 시절에 다닌 직장이 있던 동네이다. 언제 한번 가보자고 작은 아이에게 말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났는데 그곳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김치찌개가 끝내주던(?) 식당이 있던 골목, 그 뒤편에 수녀원이 있던 동네였다. 지금이라면 휴대폰으로 모든 걸 담을 수 있지만, 그 시절은 온통 아날로그 세상이었다.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 가게 아줌마들, 그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새삼 그립다. 일찍이 아파트촌으로 뒤바뀐 지 오래여서 그 풍경은 온데간데없겠지. 자세히 보고 기록해 둘걸. 그때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 산문집을 읽은 계기로 김애란 작가와 조금 친숙해진 느낌이다. 에피소드 중에는 작품을 쓰면서 기록해 두었던 창작 노트도 들어있다.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나면 인물들이 작가에게서 떠난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신애라고 했다. ‘쪼그려 앉은여자 신애. 한동안 잊고 살았다고 했다. 이렇게 다른 작가의 작품 속 인물을 만나면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 속에 그려 넣은 인물들은 분신이나 마찬가지로 애착이 많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은 누구였더라.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어서였을까. 생각해 본다. 어렸을 때부터 나와 만나고 스쳐 지나간 이름들은 얼마나 될까. 무수한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앞으로 내 발길 눈길 닿는 곳은 좀 더 세심하게 보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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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5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29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