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조조전 1 - 농단의 시대, 흔들리는 낙양성
왕샤오레이 지음, 하진이.홍민경 옮김 / 다연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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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 박종화의 삼국지 8권짜리 시리즈를 세 번 읽은 적이 있다.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하고는 말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왠지 대단한 느낌으로 다가와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그 후로도 차례대로는 아니지만, 자주 들춰 보았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이야기, 전쟁에 이기기 위한 계책, 살아남으려고 속고 속이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책의 저자 왕샤오레이는 조조의 ‘21세기 대변인’이라 불리며, 현존하는 조조의 모든 자료를 통독하며 조조의 흔적을 쫓아 10여 년간 연구했다 하니 대단한 조조 사랑의 저자라고 생각된다. 한 인물의 집중탐구 덕분인지, 살아있는 인물 군상을 느낄 수 있었다. 삼국지만큼이나 재미있다. 이전에 배경 인물로서 조조에 대한 사적인 면은 잘 알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환관 조등의 양자였다. 이것부터가 벌써 파격적이다.



이 책 1권은 후한(後漢) 영강((永康) 원년(167년)을 배경으로 ‘당고지화(黨錮之禍)’(후한 말기 환제와 영제 시절,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기강을 어지럽히는 환관세력에 불만을 품은 사대부와 귀족세력이 서로 공격한 사건. 환관세력이 승리함. p13)인 정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조조가 도성에서 쫓겨나는 부분까지이다.



조조의 아명은 아만(阿瞞)이고 맹덕은 그의 자다. 조숭 첩의 소생으로 덕아(德兒)라는 동생이 있었다. 덕아는 인정받는 모범생이었다. 하루 종일 글공부, 책읽기를 즐겼다. 게다가 겸손하고 예의바르기까지 하다. 반면, 조조는 글공부는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이었고, 동네에서 이름난 말썽꾸러기 대장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짓을 해도 아버지 조숭은 무조건 감쌌다.



이렇게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조조가 서울 낙양을 떠나 고향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한밤중에 몰래 싸움닭을 들고 놀러 나갔다가, 정변을 피해 달아나던, 피투성이가 된 태학생 하옹과 마주치게 된다. 사정을 들어보니 나쁜 사람은 아닌듯하여 피신을 돕게 된다. 하옹은 선물로 아만에게 청동보검을 주고, 조숭의 아들 조조임을 알게 된다. 그는 하늘의 뜻이로다. 라는 말을 반복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편 곤궁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운 것뿐인데, 도대체 왜 그렇게 노기등등한지 아버지와 숙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어린 열 두 살이니 세상에 대한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고 할까.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심하게 혼나고, 고향 패국(沛國) 초현(譙縣)에 살고 있는 칠숙 조윤에게 맡겨진다. 아직도 분노와 원망을 가슴에 품은채로. 그 마을엔 또 한 명의 말썽꾸러기 대장 이숙 조치의 아들 조인(曺仁)이 있다. 자신들의 근거지를 두고 하후염(夏候淵)과 하후염(夏候廉)의 하후가(家) 아이들과 조가(曺家)의 아이들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를 지켜보기만 했던 아만은 조가(家)의 아이들에게 심한 핀잔을 듣게 되고. 이 싸움을 통해서 아만은 병법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의욕을 갖고 집중한 결과 아만은 <손자병법> 13편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두 읽어낸다. <논어>도 자다가 일어나서 줄줄 외울 만큼 완벽하게 익혀 자신감을 얻는다. 드디어 하후가(家) 아이들과 대결하여, 그들의 근거지를 되찾는데, 성공을 거둔다. 그리하여 아만은 조가(家) 아이들의 자랑스럽고 믿음직한 형님이 된다.



그 후 4년이 지나고, 이제 조조는 이전의 꾀병과 술수를 일삼던 망나니가 아니었다. 준수하고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이제 제법 조윤과 대화 상대가 된다. 그리고 가문을 영광을 위해 멀쩡한 사람이 환관이 되어야 했던 잔혹한 가족사의 비애(悲哀)를 듣게 된다. 전에는 대승상 조참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마음 한쪽 구석은 항상 열등감이 자리한다.



천하의 정의롭고 의로운 선비들은 환관, 외척 세력을 증오하고 있는데, 아버지 조숭과 조치, 조정 세 형제는 환관 세력과 결탁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현실. 아버지가 환관 왕보에게 돈을 바치면서 아들의 앞날을 부탁하는 것을 엿들으며 비굴함을 느낀다. 강한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음. 두 번의 살인,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을 얻은 일. 잘못을 하고도 아무 벌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 한다. 조조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시시비비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명성이 자자해진다. 잘못이 있는 자를 탄핵하는 상주문을 올리지만, 아버지 조숭의 손에 다시 들어오고, 이로 인해 도성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나름 잘 해보려고 했지만, 조조 부자가 정반대편의 관점으로 일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요지경이다.



조조에 대한 야누스의 얼굴을 보여준다.

비굴함과 수치로 얻은 관직에서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이야말로 야누스적인 일이 아닐까. 조조만이 아니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것은 아닐까 싶다. 어떤 일이 정의로운지는 알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면 대단한 용기와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섣불리 나설 수 없다. 그렇게 현상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통용되는가 보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골고루 인맥을 쌓으며 양다리를 걸쳐놓으면 별 문제가 없을 걸세'(P258)


어쩜 그렇게 오래된 삼국지 시절의 이야기 속이나 현실이나 똑같은지 모르겠다. 이 말처럼 적나라하게 삶의 처세를 말 한 것이 또 있을까. 시대는 달라졌어도 삶의 모습은 똑같다. 한 사람의 고결한 성품도 비리가 판을 치는 세계에서 눈엣가시가 된다. 수많은 군상의 삶의 모습에서 현재의 삶을 돌아다 볼 수 있다. 지금도 칼만 들지 않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시기를 불문하고 인간은 살아가고 대대손손 이어진다. 살아남기 위해 어떤 처세로 임해야 할까를 고민한다면 이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아직 서막에 불과하다. 여기까지는 조조 나름의 정의편에 서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도성에서 쫓겨나는 계기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백 퍼센트 야누스의 얼굴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임기응변에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조조는 다음엔 어떤 말과 어떤 얼굴로 독자를 사로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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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월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9
조광국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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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누가 지었을까. 남자보다 더 뛰어난, 문무와 덕성까지도 겸비한 여성호걸의 이야기다. 옮긴이만 나오는 걸 보면 작가는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따로 작자는 밝히지 않는다. 처음엔 조선시대의 땅에서 일어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시대와 배경이 명나라 헌종 임금 시절 형주 구계촌으로 나온다.


 보통의 영웅소설의 구조가 충실히 들어있는 이야기다. 다만 주인공인 영웅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점이 다르다. 출생부터 부모의 늦은 나이에 선녀의 꿈을 꾸고 잉태되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부모와 이별을 겪는다. 아버지는 도적 장사랑의 난을 만나 붙잡히고, 어머니와 계월은 피난을 가다가 붙잡혀서 다섯 살 계월은 이불에 싸여 강물에 던져진다. 이를 보국의 아버지 여공이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서 자신의 아들과 같이 친자식처럼 키운다. 잘 키워서 훗날 영화를 볼 생각에.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곽도사에게 두 아이를 맡겨서 공부도 시키고 무술도 익히게 한다.


 계월은 얼마나 영특했는지, 한 자를 가르치면 열 자를 알았다. 용병술과 온갖 술법을 배우면, 검술과 지략이 당대에 이길 자가 없었다. 계월은 스스로 이름을 평국으로 바꾼다. 여기에 곽도사는 바람과 비를 부리는 술법까지 가르쳤다. 평국은 이것을 삼 개월 만에 마스터했는데, 보국은 일 년을 배워도 통달하지 못한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여자의 실력이 출중하게 그려냄으로써 벌써 남자의 우위에 있는 영웅임을 표현했다.


 곽도사는 평국의 재주는 이 세상에서 으뜸이라며, 황성에서 과거시험이 있으니 부디 역사에 이름을 빛내라고 한다. 두 아이의 나이 이제 열다섯 살.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는데, 평국은 장원이고 보국은 부장원이다. 보국은 절대 평국을 이길 수 없다. 천자의 부름을 받고 평국은 한림학사, 보국은 부제후가 되고 천리준총마 한 필씩 선물로 받는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기쁜 영광을 부모와 나눌 수 없음에 계월은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첫 번째 임무, 도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천자를 구하라는 도사의 명으로 서달의 난을 평정한다. 평국은 대원수가 되었고 보국은 대사마 중군장이 되었다. 용맹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여자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벽파도에 도적을 해치우러 갔다가 부모를 만나고, 잦은 전쟁으로 피곤해져서 병이 들어 여자임이 밝혀진다. 천자의 명으로 둘을 결혼을 시킨다는데... 이를 어길 수 없는 평국은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음을 분하게 여겨 눈물을 흘린다.


 마음에 없는 결혼은 했지만, 평국의 지위와 권력은 여전히 유지된다. 오히려 보국이 눌려 지내며 불만이 불쑥 고개를 들지만 어쩌지도 못한다. 남편의 애첩이 예를 보이지 않자 군법으로 다스려 처형하고, 적진에서 포위된 남편 보국을 필마 단신으로 쳐들어가 구해서 오는 장면 등은 스릴 있고 박진감 넘친다. 복숭아 빛 예쁜 얼굴에 남자 못지않은 용맹까지 가졌으니, 어이 남편을 두려워 할 것인가. 위기에 빠졌다가 목숨을 구한 천자도 심정은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남자가 여자가 되었으니, 또 보통 남자가 못하는 일을 여자가 당당하게 해치우고 있으니 불편한 심정이야 이루 말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천자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지고 이들 부부도 3남 1녀의 아이를 모두 영민하게 키워내고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이다.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러한 좋은 이야기를 기록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맺는다.


 이 이야기 속에 페미니즘 관점이 보인다. 원래 계월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 부모 슬하에 있다가 죽은 후에 다시 남자가 되어 공자와 맹자가 가르친 행실을 배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천자의 명을 어길 수 없어서 지시대로 보국을 남편으로 맞이했다. 여성적인 삶을 거부하고 남성적인 삶을 살았다.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한 점은 남편 보국과 대립이 될 수밖에 없다.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여자는 조신하게 가정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하는데, 그 몫을 온전히 ‘즐겨서’ 하는 이는 계월이었다. 제3자의 입장인 천자, 조정신하, 여공, 홍무, 곽도사 등은 그것을 인정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남자의 삶이냐, 여자의 삶이냐를 이분법으로 생각하지 않고, 계월이 남성적인 삶을 사는데 도움을 준 셈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부분을 보면 둘째 아들의 성을 ‘홍씨’로 하여 초나라 태자로 보낸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분은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더더욱 파격적인 생각이다. 고전소설 속 허구의 세계를 통해서 현재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양성에 대한 관점을 볼 수 있었다. 당시의 신분사회, 입신양명의 길이 차단된 여성의 삶에서 한 번쯤 탈피하여, 남성 우위에 서서 통쾌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분분했던 마음이 작품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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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라이터즈
김호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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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에 보았던 일드 <고스트 라이터>에 꽂혀서 동명의 제목만으로도 내 마음을 흔들었던 책을 만나게 되었다. 2013년 장편소설『망원동 브라더스』세계문학상 우수상을 받으며 데뷔한 김호연의 작품이다. 걸쭉한 입담에서 벌써 보통이 아님이 느껴진다. 작품의 화자 김시영은 몇 해 째 유령작가로 살면서 ‘창작지원금’이라는 명목의 돈도 제때 받지 못하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다. 드라마 작가, 만화가, 소설가들이 창작을 위해 고심하는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모두 유명 작가가 되기 전 단계의 유령작가, 고스트라이터즈에 대한 애환이다. 정작 등단을 하고 데뷔를 한 작가라도 쓴 책이 계속 잘 팔리는 것은 아니다. 생활을 꾸려갈 수 없기에 주변의 유혹을 받는다. 어느 분야의 사람이든 돈 문제를 떠나서는 삶을 논할 수가 없다. 굵직한 스캔들로 침체에 빠진 여배우가 큰 사례를 하겠다면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미래의 자서전을 써 달라는 것으로 시작된다.

 


 의아했지만, 자신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할 수밖에 없었고, 신기하게도 여배우의 앞날이 잘 풀리면서 자신에게 고스트라이팅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타인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능력 말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큰손에게 납치를 당한다.


김시영이 납치된 장소, 럭셔리한 주상복합아파트를 집필실로 쓰라는 대목에서는 불쑥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생각났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환상의 공간이지만 여긴 아니다. 강압에 못 이겨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쓰라는 것은 굴욕이며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데스노트가 나온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한 참 유행이었던. 어쨌든 그 목록에 오른 사람은 모두 죽어나갔다는 이야기. 여기의 무리들도 원한을 그렇게 푼다. 자료를 주고 그렇게 책으로 써서 죽어나가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신도 아닌 다음에. ‘건강하게 죽음을 기원하는 글을 쓰라니’(p176)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곧 그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사건의 피해자들을 동원하여 증언을 하는 등 분노를 느끼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결국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쓰는 대로 되는 걸까. 드디어 차유나와 오진수의 도움으로 그 호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주 흔한 것이 되어버린 버킷리스트. 목록을 써놓고 간절히 원하면 하나하나 이루어진다고 했다. 어떤 개그우먼의 미래일기도 겹친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렇게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바라는 일을 이루고 싶었음 일거다.



 고스트라이터의 손을 거치면 천박한 사람도 고상하게 변한다. 처음 만나 배우 차유나는 거침없이 반말을 내뱉는 안하무인이었다. 천재만이 자신의 고스트라이터를 알아본다는 말. 이건 고스트라이터를 이용하는 사람이 더 천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후 그렇게 변했다. 언행과 자태에서 여신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내가 알던 그 여자가 맞나 할 정도로. 마치 원하는 대로 갈고 닦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거라면 긍정적이지 않을까.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되고 싶은 대로 쓰면 된다. 고스트로 살던 김시영, 성미은 등이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을 깨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쓰게 되었으니, 이 또한 고스트라이팅의 영향을 제대로 받은 셈인가. 아마도 세상에는 이러한 고스트들이 넘치는 지도 모른다. 자신이 이룬 성과를 주변의 누군가에게 빼앗기고도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그러고도 박차고 나오지도 못하며, 전전긍긍 울분을 삭이면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 내가 본 <고스트 라이터>라는 제목의 일드와는 좀 다른 내용이다. 이 책은 고스트라이터가 타인의 운명에 영향력을 미친다는 내용이어서 좀 황당한 면도 없지 않다. 단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필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니. 그런 일은 신의 영역이 아닌가. 원한을 갚고 복수의 대가로 쓰는 부정적인 면은 좀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의 타인의 꿈을 이루어주고 과거의 상처를 정화해주는 차원의 고스트라이팅은 괜찮은 발상 같다. 누가 누구의 고스트라이터를 하는 것보다, 내가 내 자신의 그 역할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에 대해서 자신만큼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성격이나 원하는 것, 미래의 삶까지도. ‘작가’나 ‘작가의 세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읽어보면 그 세계에 대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작가는 그냥 운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마냥 써야 된다는 사실. 나도 위대한 작가들의 빛나는 조언을 인용해 본다.

 

 


              쓴다는 것은 기도의 한 형식-프란츠 카프카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아이작 디네슨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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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의 여왕 1
이재익 지음 / 예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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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달콤하거나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유난히 키스신이 많은 드라마가 아시아 전체에 신드롬을 일으켰고 키스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아시아 최고의 여배우 손유리와 개인자산만 1조원에 달하는 IT업계의 슈퍼 리치 이선호가, 빌게이츠가 소유한 기종과 같은 초호화 요트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이들이 신혼의 첫날밤 나누는 대화가 이렇다. “밤새도록 계속 사랑을 나누고 싶어요. 그럼 당신은 내일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겠죠?” 유리의 말이다. 기상천외하다. 달콤한 신혼의 밤에 나눌 수 있는 대화인가. 무언가 일어날 조짐을 알려주는 복선인 것 같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이튿날 아침 이선호가 증발했다. 요트 여행을 떠났던 망망대해(茫茫大海)서 남편을 잃고 표류 하다가 11일 만에 고깃배에 의해 구조된다. 그리고 ‘키스의 여왕’에서 남편을 죽인 살인마 손유리, ‘암살의 여왕’으로 바뀐다. 방송과 언론은 이들의 뉴스로 도배하다시피 하고 취재 경쟁으로 난리가 났다.



 빛나는 별에서 불행한 여자로 전락한 손유리 앞에, 첫사랑 이도준이 변호사가 되어 5년 만에 나타났다. 아주 차갑고 반듯한 남자로 변해서. 이별 선고를 받은 이도준은 독하게 공부하여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한다. 여전히 손유리를 잊지 못하고 헤어진 날짜는 도준의 집 현관의 비밀번호가 되고, 손유리와 추억이 깃든 자취시절의 방은 ‘비밀의 방’에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민정은 이도준의 약혼자다. K&J 로펌의 대표인 아버지를 무기삼아 이도준을 굴복시키려 한다. 민정의 남성 편력은 상대 남자를 죽음으로, 감옥으로 밀어 넣기도 했으며, 몇몇 교수는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김대표는 딸의 문제를 모두 돈으로 해결했다. 이런 딸을 이도준과 결혼시키려 하는 김 대표의 도덕성 부재와 이기심. “이변이 민정이를 책임져주면 이변은 내가 책임져주지. 막대한 부와 권력... 변호사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도록 말일세.”(p181) 돈으로 사랑을 사고팔기도 하는 세상.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랑이 오래 가겠는가.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을 물려받을 야망을 위해 모든 수모를 견디고 있다. 그에겐 사랑보다는 야망이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첫사랑이었던 손유리에게 흔들리는 자신을 느낀다.



 그에 못지않은 야망을 가진 자가 또 하나 있다. 검사 문지환. 우리나라 최연소 검찰총장을 꿈꾸는 그다. 강력한 비주얼 외모를 가진 둘의 라이벌전을 기사로 쓰려하는 여기자 백현서. 특종 사냥을 위해 현장을 누비고 다닌다. 상황은 반전하여 검찰청에 출두한 날, 손유리 대신 이도준이 외신 기자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의식을 잃은 지 보름 여 만에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깨어난다. 마음속 자아가 원하는 대로 따르기로 결심하고 민정에게 파혼을 선언한다.



 검찰측에서는 요트 안에서 발견된 루미놀 검사의 혈흔을 증거로 손유리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한편, 이도준과 친구 k&J로펌의 차시원은 어떻게든 손유리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정보를 찾고 수집 한다. 실종된 이선호가 살아 있다는 가정 하에 전국으로 시야를 넓혀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영화에서 힌트를 얻기도 한다. 서울대 출신, 천재적 두뇌의 소유자. 비주얼한 외모, 아이돌같은 패션과 말투 등 두루 갖춘 캐릭터들의 다양한 개성은 독자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부유층의 특권을 누리는 장소나 백억이나 하는 요트 등 위압감을 느끼는 요소가 등장하지만, 사랑, 배신, 야망을 둘러싼 인물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명예와 부를 꿈꾸고 성공을 위해서 달리지만, 진실한 믿음과 사랑이 없는 관계속에서  한계를 느낀다.



 이제 사랑은 없다면서 죽어라고 공부만 하다가 유능한 변호사가 되었고, K&J를 물려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것을 원점으로 돌린 이도준. 멈출줄 모르던 맹목적인 성공과 야망을 포기하고 사랑과 행복을 선택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순리를 깨달은 때문일까. 처음 만나는 이재익 작가의 작품 , 참 재미있게 읽었다. 초호화 요트의 결혼식 장면, 바다에서 요트와 표류하는 장면, 법정의 예리하고 틈을 주지 않는 논쟁, 톡톡 튀는 대화, 긴장감과 몰입감을 주는 이 소설은 영화로 상상해 보아도 근사한 매력이 있다. 웹소설 누적 조회수 1천만이라는데, 그에 걸맞는 재미를 선사한다. 뒷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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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60
와타야 리사 지음, 정유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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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서부터 뭔가 풍기는 게 있었다. 남녀 고교생의 이야기라는데. 그 시기는 친구나 연예인에 대한 매우 호기심이 많을 때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죽고 못 살 정도로 사이좋게 지내던 단짝 친구와 절교를 선언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하츠는 중학생 때부터 절친 이었던 키누요가 다른 아이들의 그룹에 들어가 어울리자 큰 실망과 함께 소외감을 느낀다. 예전처럼 둘이서 계속 잘 지내면 안되느냐는 말에 키누요는 싫다고 한다. 자신은 남녀혼성 그룹을 동경했다면서. 하츠에게 그룹에 끼어 같이 놀자고 하지만, 하츠 또한 거절한다. 그래서 하츠는 키누요한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생물시간에 과학실에서 5명씩 조를 짜서 실험을 한다는데, 친구가 없어서 혼자 남는다. 그런 아이가 하츠 말고 니나가와라는 남자아이가 더 있다. 이렇게 ‘나머지’ 아이들이 같은 조가 되었는데, 니나가와는 수업시간에 여성 패션 잡지에 빠져 있었다. 그 속엔 하츠가 중학생때 우연히 MUJI(무지:일본의 대중적인 잡화점)에서 만났던 패션 모델인 올리짱의 사진이 있었다. 그것을 아는 척 했다가 엉겹결에 니나가와의 집에 초대되어 가게 된다. 오래된 집의 풍경이다. 낡은 가구, 어둠침침한 방. 어떻게 덥석 따라오긴 했는데,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머릿속 생각과 달리 니나가와는 올리짱을 만났던 곳의 약도를 그려달란다. 올리짱의 팬인데, 죽을 만큼 좋아한다고. 올리짱을 진짜로 만난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에 감격해 한다. ‘사랑스러운 듯이’ 바라보던 니나가와의 눈길에 헛다리 짚은 하츠는 갑자기 어수선한 기분에 빠진다. 올리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닮은 사람이라든지, 뭐든지 얘기해 달라는 니나가와의 말에 하츠는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먹먹하다.



 어느날, 니나가와는 그려준 약도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며 같이 가자고 부탁한다. 육상부원인 하츠가 달리기를 연습하다 넘어져서 다친 상처를 보고 반창고를 붙여주며. 하츠는 니나가와의 손길을 느끼며 기분이 좋아진다. MUJI에서 니나가와는 올리짱이 앉았던 의자랑 테이블의 사진을 정신없이 찍어댄다. 현장학습 나온 초등생처럼 하츠가 말해준 것을 뭐든지 메모한다. 이것을 보며 하츠는 시식용 콘플레이크를 아침식사로 하던 자신과 비교하면 둘 중 누가 더 해괴망측하고 민폐를 끼치는 행동일까를 생각한다. 뭐든 지기 싫어하지만 이런 승부에서는 이기고 싶지 않다고. 돌아오는 길에 니나가와에게 너네 집에서 잠깐 쉬었다가 가도 되느냐는 말이 쉽게 나오는 자신을 깨닫고 놀란다. ‘다른 사람에게 편하게 말 걸기’ 조차도 힘들었는데, 니나가와에게는 이것이 가능하구나. 이런 간단한 대화도 오랜만에 했다는 걸 깨달으며 메말랐던 감정에 물기가 배어듦을 느낀다.



 니나가와는 올리짱의 방송시간이라면서 하츠를 내버려두고 혼자 이어폰을 꽂고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이상한 분위기. 이상한 존재감. 이 아이의 사교성은 아마도 유치원생때 멈췄을 것이라며. 그렇게 니나가와가 올리짱의 세계에 빠져 있는 동안, 하츠는 커다란 상자를 탐색한다. 향수, 티셔츠, 가방, 옷, 잡지 등 올리짱과 관련된 물건으로 가득하다. 파일 속에는 올리짱의 상세 프로필은 물론 올리짱의 얼굴과 완전히 다른 소녀의 나체를 합성한 누더기 사진까지...그리고 나를 인간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 듯한 저 차가운 눈빛. 감정이 울컥한 하츠는 자기도 모르게 니나가와의 등짝에 정확히 펀치를 날린다. 이야, 실제로 이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발로 차이고도 그의 눈빛은 동경하는 어른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니나가와가 올리짱의 세계에서 조금 빠져나오게 된 것은 올리짱의 공연을 보고 나서다. 키누요, 하츠와 셋이서.



“감전된 거 같았어. 전신의 땀구멍이 다 열린 거 같은 느낌이랄까.…… 아아, 나, 대기실 앞에서, 미친놈처럼 굴어서 욕먹고, 그저 한낮 변태 같았겠지.”

“아까 올리짱 가까이 갔을 때, 나,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그 사람이 가장 멀게 느껴졌어. 그녀의 흔적들을 긁어모아 상자를 채울 때 보다 훨씬 더.”(P142)



 동경했던 스타는 그냥 스타일 뿐이다. 나는 그를 잘 알지만, 스타는 나를 모른다. 당연한 거리감. 그 거리감은 현실을 깨닫게 해 준다.


내 앞에 보이는 저 등을 아프게 하고 싶다. 발로 차 주고 싶다. 안쓰러움보다 더 강한 이 느낌은 무엇일까. 자신의 얘기를 쏟아 놓기만 하는 아이. 그러다가 생기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도 어색하다. 자신의 마음에 낀 ‘검은 실오라기’를 누가 버려주었으면 싶다. 남에게 해주고 싶은 것은 생각나지 않고, 바라기만 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이 남녀 고교생은 잘 성장하였을까. 이 작품은 와타야 리사가 2004년 와세다대학교 국문과 재학 중에 발표한 소설로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제130회 아쿠타가와 상을 역대 최연소로 수상했다. 벌써 13년이나 흘렀으니 이제 성인이 되었겠다. 평범할 수 도 있지만, 학창시절 겪을 수 있는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다. 자신만의 세계에 사로잡혀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시한폭탄과 같은 사춘기.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면서 마음이 성장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던가. 마음이 짠하지만 은근한 귀여움도 느껴지는 재미있는 성장소설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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