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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 이미령의 위로하는 문학
이미령 지음 / 샘터사 / 2017년 9월
평점 :
몇 년 전, 언니를 잃고 충격과 상심에 휩싸였다가 1년 동안 하루 한 권씩 책을 읽는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 삶을 돌아보면서 마음을 치유했다는 니나 상코비치의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은 적이 있다. 이처럼 사람은 저마다 가슴 저 깊은 곳에 크고 작은 고민들, 슬픔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내 슬픔이 가장 큰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있다. 인간의 삶은 영원한 행복, 영원한 불행이 계속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누구나 삶에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치유하며 다시 나아가는 힘을 얻을까. 음악을 듣고, 여행을 떠나고, 친구를 만나는 등 여러 가지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아마 책읽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 속에서 다양한 삶의 주인공들을 만난다. 가난하거나 부자인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등 제각기 사연을 품고 있다. 울다가 웃기도 하고, 그러면 그렇지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편이구나, 그들이 처한 상황에 감정이입을 하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눈물의 카타르시르를 느끼며 새로운 힘을 얻곤 한다.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는데, 벌써 눈물이 앞을 흐린다. 아, 이건 뭐지. 커다란 감동을 줄 것 같은 예감에 허리를 바짝 곧추 세운다. 아닌 게 아니라, 눈물의 연속이다. 어쩌면, 슬픈 사연의 이야기만 모아 놓은 것인가. 슬픔만이 아니라, 분노, 절망이 있다. 인종차별, 여성에 대한 편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고통의 외침들이 가득하다.
프롤로그에 언급된 『레 미제라블』을 읽은 것은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장발장이 은 식기를 훔쳤다는 것 정도. 어린 소녀 코제트와 장발장이 만나는 장면은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 집이 가난하여 코제트는 하숙에 내맡겨진다. 하숙집 주인은 코제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양육비는 받아 챙기지만, 코제트를 하녀로 부려먹으며 온갖 학대를 일삼는다. 그 중에 가장 싫은 일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일이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밤, 이제 겨우 여덟 살의 소녀는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몸을 떤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큰 두려움인가. 무서운 하숙집 주인의 등살에 못 이겨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가엾은 코제트는 ‘머리를 긁기 시작’한다.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디선가 나타난 키다리 아저씨 장발장의 도움으로 순간 물통은 가벼워진다. 갑작스런 상황임에도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여린 소녀 코제트. 끝모를 두려운 상황에서 한줄기 빛과 온기를 만난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야기는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풀어놓은 것으로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전에『작가와 술』이라는 책에서 처음 접한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이 나와서 참 반가웠다. 제목도 참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 사연은 마음이 아프고 참 안타깝다. 아이의 생일 파티를 하려고 케이크를 맞추어 놓았는데, 생일이 지나기 전에 뺑소니차에 치어 아이가 죽는다. 젊은 부부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상황이 어떨지는 뻔하다. 장례식을 겨우 마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에 싸여 있는데, 한 밤중에 장난 전화 같은 것이 며칠 동안 계속된다. 그때서야 알아차린 부부는 너무 화가 나서 빵집 주인을 혼내주려고 찾아가는데...
아이가 죽었다고 말을 해도 이 무뚝뚝한 빵집 주인은 위로의 말이라든지, 슬픔의 그림자를 가득 안고 있는 이들 부부에게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드시지요. …… 이럴 때 뭘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P40)
이런 와중에 먹을 것이 넘어갈까마는,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서 허기를 느낄 수도 없었던 부부는 따뜻한 빵을 먹는다. 무뚝뚝한 사내가 내미는 빵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따뜻함을 나누기에는 큰 힘이 된다. 그리고 이 늙은 빵집 주인의 이야기가 밤새도록 펼쳐진다는... 이제 막 지독한 슬픔을 겪은 부부에게, 처음부터 슬프게 살아왔다는 사내의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데...
슬픔이나 고통이 계속된 채 살아가다보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될 것이다. 희망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고 그저 살아간다. 무표정으로 무장한 채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러니 남의 슬픔 따위는 알 바도 아니다. 자신의 슬픔을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퇴적화된 암석처럼 굳혀가며 살아온 인생이 아닐까. 사람은 행복한 순간에 불행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행복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여긴다. 늙은 빵집 주인의 밤새도록 계속된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은 셋이 어깨를 토닥이며 울었을 것이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치유된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를 외치며, 먹기도 거부하고 구치소에서 죽어간 『필경사 바틀비』는 소통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외침이었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나와 의견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와 다른 것은 인정하기 싫어하며, 정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언급한 이 문장은 매우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이 이상한 외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단서가 필요했다. 필경사 이전에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을 불태우는 일을 했다고 한다. 편지는 지인들과 얽히고설킨 생사고락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일이 읽고 분류해서 폐기처분해야 했던 바틀비는 사람들의 ‘희망을 불태워야하는’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소수는 다수에게 질 수밖에 없다. 약자도, 소수민족도 거대한 힘 앞에는 힘없이 무너진다. 그렇다고 소수인 약자가 비정상이라고 확정을 지을 수 있을까.
성공이란,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쉰다섯 살의 사내 엘제아르 부피에, 고독하게 살아가는 양치기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작은 오두막에서 양치기 개 한 마리와 살고 있다. 매일 아침, 튼실한 도토리를 백 개씩 갖고 다니며 황무지에 심는다. 자기 소유의 땅도 아니고, 싹을 틔우기 전에 들쥐나 산토끼의 밥이 되기도 한다.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는데, 그 중 2만 개만 싹을 틔웠다. 여기서 절반은 자연재해로 소멸되고 1만 그루만 떡갈나무로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딱 보아도 밑지는 장사를 하는 애달픈 사연이 있다. 아들 하나와 아내를 차례로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땅은 죽음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가고 있다.’
물론 그 사내가 열심히 나무를 심는다고 해서 이미 떠난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올 리는 없다. 뒤에 살아갈 사람을 위해서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푸르러지는 나무들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평화를 찾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실제 만난 인물을 다룬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더욱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작품의 첫 페이지의 내용은 이렇게 쓰여 있다 한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P171)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이렇게 해야 할까, 저렇게 해야 할까. 아니면 편하게 포기해 버릴까.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세월을 보내고 가슴 저편에 쌓이는 것은 후회뿐이다. 이럴 때는 조르바가 나와서 갑자기 호통을 칠 것 같다. 사람이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모두 조르바처럼, 초면인 사람에게도 선뜻 다가가 하고픈 말을 시원하게 다 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행하시오? 날 데려가시겠소?”
“왜요! 왜요! ……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무슨 생각을 하시오? ……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자, 젊은 양반, 결정해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이 얼마나 화끈하고 시원스런 말인가. 크레타 섬으로 출발하는 배를 타려고 항구 술집에 앉아 있는 책벌레 청년에게 떡 하니 나타나 다짜고짜 해대는 말이다. 일명 ‘자유인’으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다. 어쨌든 이렇게 청년 두목과 그의 매니저가 된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서 한 겨울을 나면서 보고 겪은 일과 갈탄광 사업을 벌였다가 쫄딱 망해버린 사연을 이야기한다. 읽다 말고 접어두었던 조르바를 다시 만날 때가 된 것 같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일단 해 보는 것, 을 배우려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화끈하게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얼음을 깨는 듯 쨍하게 다가온다.
존 버거의 『행운아』는 시골 의사 존 사샬이 환자와 삶을 함께 하며 ‘총체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다. ‘환자의 질병과 환자의 인간 전체를 분리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잘 살필 수 있는 눈과 가슴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단지 아픈 곳의 처방만 내려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을에 있는 단 하나의 의사로서, 주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회지도층 인사’이다. 병을 고쳐주는 ‘의사’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과 한계를 떠안고 운명과 불행에 맞서 싸워줄 대리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아픈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부를 이루었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고 존경해 마지않는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래서 그는 ‘행운아’라는 것이다. 그저 어느 날 어디서 툭 떨어진 행운이 아닌, 삶의 태도와 가치로 이루어진 행운이었다. 이 시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서른 네 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저자도 어린이용인 줄 알았다던,『어린 왕자』는 세속을 살아가는 어른에게 주는 힌트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 실려 있는 주옥같은 작품은 우리의 슬픔을 보듬어주고, 우리가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발자국이 되리라 믿는다. “말은 살아 있고 문학은 도피가 된다. 그것은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이다.”(시릴 코널리CYRIL CONNOLLY)『혼자 책 읽는 시간』-니나 상코비치)고 했다. 이처럼 문학은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