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트리뷰트와 심벌로 명화의 수수께끼를 풀다
히라마쓰 히로시 지음, 이연식 옮김 / 재승출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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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화라 하면 대부분 그리스 로마 신화나 기독교의 주제를 다룬 그림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명화의 세계는 평소에 의식적으로 관심을 갖고 자주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렵게 느껴진다. 그림 속의 인물과 배경에서 무엇을 말하려 함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겉도는 사람들의 관계처럼 말이다. 문학작품을 접하다 보면 화가와 그의 그림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배경지식을 모르는 상태로 읽어나가는 것은 그 작품에 몰입의 여지를 빼앗기는 느낌이다. 작년 1월에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많이 들었다. 물론 주석에 설명이 나와 있지만, 상세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금세 머릿속에 새기기엔 무리가 따른다.

 

 이 작품의 저자 히라마쓰 히로시는 회화를 읽는 수사학인 어트리뷰트와 심벌을 중심으로 명화를 읽어내는 법을 알려준다. 사실 그림에 거의 문외한이라서 어트리뷰트(Attribute)''심벌(symbol)'을 이용하여 명화의 내용을 해석한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꼭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 책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해 준다.

 

 

 

  위의 사진처럼 네 가지 아이콘을 정해놓고 있어 그림의 정보와 해설을 매치시키며 읽으면 된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대상은 , 과일, 수목, 동물, , 환상동물, 물건과 신체까지이다. 또한 각 장 사이사이에는 저자 나름의 도상 해석을 제시하는 칼럼이 있어서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한층 더 유용하게 느껴진다. 물론 정설은 아니니까 비판적으로 읽어주면 좋겠다는 저자의 조언이다. 어트리뷰트와 심벌은 서양 회화에 등장하며 이는 독일의 미술사가인 파노프스키가 말한 이코노그래피(도상학)의 일부라고 한다. 이 책에서 소개한 여러 가지 심벌리즘은 미술 외에도 게임과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같은 서브컬처에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여타의 책이 집합적인 어트리뷰트를 다루지 않는데 비해, 이 책은 ’, ‘과일등 유() 개념을 두어 집합적으로 어트리뷰트를 구성한 것도 유용하게 다가온다.

 

   신기하게 생각된 점은 귀속물을 통해서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방식이다. ‘귀속물어트리뷰트의 의미이며 어떤 인물에게 주어진 속성과 부속물을 의미한다. 해당 인물이 누구인지 나타내기 위해 관용적으로 그 인물과 결부되어 표현된 동식물과 사물을 말한다. 그러므로 어트리뷰트는 항상 그것이 가리키는 인물이 필요하며 심벌은 개체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위의 사진은 예수가 세례를 받는 장면인데, 머리 위의 비둘기는 성령을 나타내는 심벌이지 예수의 어트리뷰트는 아니라는 거다. 비둘기는 수태고지성령강림의 장면에도 등장하는데, 이 경우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는 심벌이다.

 

 또 한 가지만 살펴보자.

월계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고대 그리스의 제전 경기가 한창 성대할 무렵, 우승자의 명예를 나타내기 위해서 태양신을 숭배하는 아폴론의 신목(神木)인 월계수의 잎을 엮어서 만든 관을 수여한 데서 유래한다. 또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는 에로스가 아폴론을 놀려주려고 사랑에 빠지는 황금화살을 아폴론에게 쏘고, 거꾸로 사랑을 거부하게 되는 납화살을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 다프네에게 쏘는데, 붙잡히게 되자 아버지에게 자신을 월계수로 바꿔달라고 하자 변신하기 시작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폴론은 시와 노래의 신이기도 하며, 시를 짓는 시합에서 승리한 이에게 월계관이 주어졌고 이런 관습 때문에 일류 시인을 계관 시인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외에도 신화와 어울어진 이야기가 풍부하다.  얕게 알고 있던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명화와 그에 얽힌 유래를 상세히  알게 되어 스토리의 세계가 확장됨을 느끼는 것도 큰 수확이며 기쁨이다.

 

 오랜만에 풍성하게 실린 명화를 보면서 처음 접한 어트리뷰트심벌로 설명하는 글을 읽는 동안 조금씩 눈에 익히고 이해하게 되면서 아! 하는 감탄을 자아내는 시간이었다. 초반부는 좀 어리둥절했지만, 차츰 가독성이 나아졌다고 할까.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명화를 보는 눈이 명확해지려면 아직 멀었지만, 적어도 첫걸음은 내딛었다고 자부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배경지식이 풍부하다면 더욱 흥미롭게 몰입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껏 명화를 감상하면서 어딘가 미흡했다고 느꼈거나, 궁금한데 그것이 확실히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혼란했던 적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만나보면 어떨까. 서양 회화에 좀 더 선명하게 다가갈 수 있는 지침이 되리라 믿는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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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김동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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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눈을 감지 않는 생선처럼 살아가면서 모든 순간을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지은 생선으로 더 많이 불린다는 김동영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책을 지독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가의 꿈을 꾸거나, 작가를 동경한다. 하지만 여러 책을 통해서 글을 쓰는 작가로 산다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아주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입지를 다진 사람은 온전히 글쓰기를 전업으로 삼아 살 수 있지만, 상위 몇 프로 외에는 다른 일까지 겸업을 해야만 겨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안다. 무엇이 된다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부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꾸준히 무엇이 되고 싶어 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부모님과 친지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뭔가 되라고 은근히 강요당하고 강요함으로써 우리는 첫 발걸음부터 힘겨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자꾸 내일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여행 작가답게 많은 곳을 여행했다. 미국, 러시아, 아이슬란드, 독일 베를린, 태국, 프랑스 파리와 우크라이나 등 여러 나라를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반년이 걸리는 여행을 했다. 이만 하면 매여 있는 직장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살 만하다. 그의 이력을 봐도 특이하다. 보통 사람들이 꺼리는 일을 하면서 경력처럼 쌓아왔다. 머리를 쓰는 것보다 몸을 움직여 하는 일이 좋아서 주방 보조, 자동차 정비, 음반과 공연 기획, 밴드 매니저 등 다양한 일을 했다는데. 그래서일까, 더욱 글에서 진솔함이 느껴진다. 공황장애도 앓았고 사랑에도 좀 서툰 모습이 느껴진다. 하긴 혼자 산다고 해서 사랑에 서툴고 가정을 이루고 산다고 해서 능하다는 잣대는 없다. 살다보면 자신의 뜻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니까.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는가와 살아가는 환경의 여건에 따라 자신의 삶의 여정은 흘러가는 것이므로.


 여행이란 일상의 반복된 생활에서 숨통을 트이게 해 주는 활력소임에 틀림없다.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행지에서 경험한 일들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황홀한 풍경을 만난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여행길에서 몸이 아플 때도 있다. 지독한 외로움을 처절하게 느끼기도 한다. 같은 여행자로 만나서 누구보다도 그 외로움을 잘 알기에 마주치는 순간 이야기꽃을 피우며 따뜻한 동료가 되기도 한다.


 내게 여행은 떠남과 돌아옴이다. 어딘가로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참 좋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나 자신이 좀 더 정리되고 풍부해진 기분이 든다. 더 먼 곳으로 갈수록, 더 길게 갈수록 내가 느끼는 그런 감정들도 더 크고 강해진다. 그렇게 돌아와 나의 집 현관문, 그리고 내 방문을 열었을 때 밀려오는 익숙함을 나는 진정 사랑한다. 모든 것이 내가 돌아오길 기다려준 듯한 기분이다. 이런 기분 덕분에 나는 일상의 지루한 반복과 자극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나마 버텨낼 수 있다. 그리고 내 솔직함을 글로써 내려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여행 작가다.(P95)


 어떤 삶을 살 것이냐를 나름대로 정하고 실천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결단력과 용기일지도 모른다. 보통사람에게 만족할 만큼의 돈과 시간의 여유는 평생토록 염원해도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건이 될 때 까지 기다리다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는 일이 다반사다. 문제는 안정적인 직장, 그 틀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나약함이라고 생각된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세월을 보내고 언제나 마음속에 미련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여행길에 오르는 사람을 보면 부러움을 넘어 위대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역시 아무나 할 수는 없는 것.


 우리는 계속 떠나야 한다. 우리에게는 두 다리가 있고, 두 눈은 앞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여행을 통해 배우길 바란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우리 안에 있던 더럽혀진 마음과 필요 없는 생각을 씻어내고, 그곳에 버려두고 오길 바란다. 또 그곳에서 우리에게 결핍된 무엇인가를 슬쩍 주워 품에 담아오길 바란다. 그것을 받아들여 잘 익은 사과 알처럼 탐스럽게 살아간다면 좋겠다.

계속 꿈꾸길 바란다. 그게 하룻밤의 꿈이거나 평생 말로만 떠벌리는 꿈일지라도 우리는 꿈꿔야 한다.(P116)


 어쩌면 여행과 인생은 닮지 않았을까. 살아가고, 떠나고, 돌아온다는 것이. 붙박이 장롱처럼 항상 고정되어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집을 떠나 보아야 그 소중함을 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기쁨을 느끼기 위해 떠난다는 말처럼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올라갔다 내려오는 수고를 반복한다. 문제는 실행으로 옮기면서 능동적으로 사느냐, 용기가 없어 주저하고 체념하며 사느냐 그것이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5년 후에는 낫겠지, 10년 후에는 훨씬 더 상황이 나아지리라 막연한 생각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고, 10년 뒤에는 더 대범해지고 더 현명한 어른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김동영 작가의 말을 들어 보아도 변한 건 별로 없단다.


 결국은 어쩌면, 우리는 늘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결핍이 있어야 우리 안으로 새로운 것이 들어올 틈이 생기지 않을까?(P209) 충분하지 않아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조금이라도 틈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야, 라고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어쨌든 인간이란 결코 현실에 만족할 수 없는 동물, 그래서 계속 뭔가 하려하고, 되려 하고 그런 과정에서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리라. 지금 무엇이 되어 있지 않더라도, 내일이 어찌될까 불안하더라도 괜찮다.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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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마지막 오랑캐
이영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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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이웃 블로그에서 주최한 훈훈한 이벤트 덕분이다. 책의 제목을 보고 얼마나 웃겼던지. 어릴 적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불렀던 ‘무찌르자~ 오랑캐’ 하는 노래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머리말에서도 이 노래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어, 남자분이 이 노래를 어떻게 기억하지, 신기해하며 정겨움에 흠뻑 젖어들기 시작한다.

 

 몽골, 하면 끝없이 펼쳐지는 모래사막, 드넓은 초원, 칭기스칸, 말을 타고 달리는 유목민들이 생각난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몽골 여행기라기보다는 몽골의 문화, 정서, 몽골인의 삶의 태도 등 여러 가지를 담고 있다. 작가는 2000년 여름, 멋모르고 찾아간 몽골 초원에서 안내인이자 유목민인 두게르잡 비지아를 만나게 된다. 몽골은 화장실이 따로 없다 한다. 문명인으로 살아온 여행객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냥 넓은 초원이 모두 화장실이란다. 하지만, 강물은 모두 쓰는 생명수니까 안 되고, 작은 쥐구멍에 오줌을 누니, 왜 저 넓은 땅을 놔두고 하필 쥐가 사는 구멍에다 그러느냐고 타박하더란다. 이 얼마나 민망한 일인지. 오랑캐로 알고 있던 그는 나쁜 오랑캐가 아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없어서 힘들었던 좌충우돌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펼쳐진다.

 

 그 후 그 대지와 사람에 반해 몽골을 공부하고 여행하며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한다. 한국에서 교수로 지내고 있다는 알타이산의 마지막 오랑캐 친구 비지아와 함께 했던 초원 이야기이다. 학창시절에 배운 바로는 오랑캐는 아주 나쁜 적으로 통했다. 종류도 다양해서 동이(東夷), 서이(西夷),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불렸는데, 이는 중국과 한통속이 되어 그대로 따라 했다는 것이다. 비지아는 알타이산의 주봉 이름을 딴 뭉흐 하이르항 솜(郡) 출신인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오리앙카이 부족민이다. 칭기즈칸의 정복전쟁 때부터 청나라와의 독립전쟁까지 활약한 몽골 기마병 중에서도 가장 용맹했다고 한다. 맞붙을 때마다 선봉에서 달려오는 오리앙카이 부족 때문에 무서워서 만리나 되는 장성을 쌓았다고 하니, 그 용맹함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저주와 분노의 뜻이 담겨진 오리앙카이는 ‘오랑캐’가 되었다고.

 

 책 속에 들어있는 사진들은 쉽게 갈 수 없는 몽골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탁 트인 몽골의 초원과 푸른 하늘, 석양을 배경으로 찍은 실루엣 사진,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의 사진 등... 하루하루 경쟁에 치어 지친 마음을 풀어주기에 더없이 황홀하다. 넓디넓은 초원과 광활한 자연 풍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후련해진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생각해보니, 그 풍경 속에 들어앉아 생활하는 유목민들의 삶은 감히 동경하고 흉내 낼 수도 없을 것 같다. 

 

 이동이 주된 삶의 방식인 유목민들에게도 이사는 그리 단순하지가 않았다. 게르를 철거하고 양떼, 말 등 가축까지 모두 끌고 가는, 몇 달씩 걸리는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다. 낮에도 기온이 영하 사십 도로 곤두박질하는 혹한의 겨울을 유목민들은 어떻게 보낼까.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울 만큼 추운데, 풀이 없어 고생하는 가축들, 굶주린 가축들에게서 젖이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도 배고픔의 연속이고... 몽골의 초원 낭만적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멀리서 바라보니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이다. 그 환경에 놓이게 되면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實戰(실전)이다.

 

 우리는 단 하루라도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씻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등 불편함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비지아는 싸우나, 목욕을 죽기만큼 싫어한다고 한다.(다른 몽골인들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우뚱 하게 된다. 욕조에 담긴 목욕물 일 뿐이지만, 들어가면 끝이라는 거다. 소위 ‘근대’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서 영원히 돌아 나올 수 없는 문명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습관이 되고 삶이 되고 그것이 문화로 형성된다는 것은 정말 간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문화의 차이가 생기고, 그것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몽골의 기후 조건은 연중 비, 눈 모두 합쳐도 이백사십 밀리미터의 강우량이라니... 물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우니, 씻지 않는 습관은 척박한 자연에서 저절로 터득한 지혜이며 삶의 일부분이다. 그러한 기후 토양의 조건을 알지 못하고는 야만이네, 비위생적이네 하고 감히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예전부터 유목민들의 식생활이 궁금했었다. 육식을 위주로 먹고 있는 모습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그랬다. 유목민들에 유명한 문구처럼, “동물은 풀을 먹고 사람은 고기를 먹는다.”고 한다. 평생 야채, 과일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젖을 짜서 만든 유제품을 먹기 때문에 고기만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의외로 돼지고기는 먹지 않는단다. 가장 큰 이유는 돼지가 반유목적 동물이란 점이다. 돼지는 인간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는데, 이로 인하여 식량 부족 문제로 이어지고, 사회 전체의 분열과 파괴를 부를 수도 있으니까. 유목생활에 대해 언급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어떤 때는 가뭄, 전쟁, 제방의 붕괴와 대홍수, 또 어떤 때는 강물이 불어나 밀려가듯 인구가 너무 불어남으로 해서 잉여 인구가 추방되기도 했다. 하지만 갈 곳이라고는 북부밖에 없었다. 북부는 사막이었다.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일단 사막 속으로 들어오면 살아남기 위해 유목민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사막에서 가능한 단 한 가지 생활 수단인 유목생활만큼 가혹한 생활 형태는 달리 없다.’(P162)-게오르규의 『마호메트 평전』中에서

 

 돼지가 살기 위해서는 습지가 있어야 하는데, 몽골은 사막과 반사막 기후로는 생존하기 어렵다고 한다. 소, 양, 말들이 먹어야 할 풀이 있는 초원을 짓밟는 돼지를 좋아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뚱뚱하고 걸음도 느린 돼지가 잦은 이사에 어떻게 걸어가겠는가. 생각해보니 참으로 애물단지 일 수밖에 없겠다. 가축도 기후와 토양에 맞아야 생육이 가능함을 알게 된다.

 

 이밖에도 오랑캐라는 이미지와 달리 몽골은 여자들의 지위가 매우 높다고 하는데, 놀랍고 흥미롭다. 그들의 사랑법은 더욱 더. 영하 사오십 도를 오르내리는 겨울밤 부부는 어떻게 사랑을 나눌까. 금쪽같은 새끼들을 나가 있으라고 할 수 없으니, 그냥 자연스럽게 사랑을 나눈단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로 무슨 유난을 떠느냐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오랑캐답다고 해야 할까. 우리에겐 좀, 아니 많이 민망해서 홍당무가 될 지경이다. 그들의 삶은 전통이 되고 문화로 형성된 것이니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만의 문화이니까. 전반적으로는 유쾌 발랄하면서도, 가끔은 찡한 먹먹함과 감동을 준다. 정말 소설만큼, 아니 소설보다 재미있다.

 

 또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우리는 ‘비가 온다’라고 하는데, 몽골어는 ‘비가 들어 간다’고 한단다. 이는 문장의 주인공을 ‘하늘과 대지’로 보는 것이다. 스스로 우주의 주인이라는 짐을 덜어내고 그만큼 가볍고 그만큼 자유롭게 살아가는 유목민이다. 아, 정말 하늘과 대지 속으로 비가 들어가는구나... 이들의 자연을 경외하는 태도와 삶의 방식은 우리 정착민과는 현저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우리 정착민들은 보통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정말 그렇게 자부할 만할까 싶다.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문화가 많이 자리잡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부자들은 묘지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몽골인들은 아예 묘지가 없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도 우리로서는 좀 섬뜩했다. 손자의 힘을 빌어서 죽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없다고 한다. 중국의 유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고, 지금까지도 견원지간이라고 한다. 그냥 땅에 묻혀 자연과 일부가 되는 것. 이것이 그들의 삶과 죽음이다.

 

 

 

 

 친구 비지아를 통해서 바라본 몽골인의 삶과 죽음, 문화는 정주민(定住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귀한 그들은 외지인이나 여행객들이 오면 얘기를 하고 싶어서 물고 늘어진단다. 반가워서 인사를 하려고 수 십 킬로미터를 말을 타고 달려온다는 그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람 귀한 줄을 모른다. 경쟁하느라고 점점 지쳐간다. 사람에 치여 혼밥, 혼술, 혼영 등 혼자族(족) 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물건에 치여 산다. 좀 더 가뿐한 삶이 그립다.

 

 수백 번 몽골을 드나들며 유목민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배운 이영산 작가는 관광객이 아닌 이웃의 시선으로 재미있고 맛깔 나는 어조로 이야기한다. 야만이란 이름으로 폄훼되어왔던 유목민의 삶을 새롭게 들여다 볼 수 있어서 매우 유쾌한 시간이었다. 몽골이 궁금한 사람,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총체적인 몽골 이야기이다. 수많은 몽골 관련 책을 참고하여 상세하게 쓴 이야기로 그들을 삶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몽골에 한걸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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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 이미령의 위로하는 문학
이미령 지음 / 샘터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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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언니를 잃고 충격과 상심에 휩싸였다가 1년 동안 하루 한 권씩 책을 읽는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 삶을 돌아보면서 마음을 치유했다는 니나 상코비치의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은 적이 있다. 이처럼 사람은 저마다 가슴 저 깊은 곳에 크고 작은 고민들, 슬픔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내 슬픔이 가장 큰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가 있다. 인간의 삶은 영원한 행복, 영원한 불행이 계속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누구나 삶에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치유하며 다시 나아가는 힘을 얻을까. 음악을 듣고, 여행을 떠나고, 친구를 만나는 등 여러 가지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은 아마 책읽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 속에서 다양한 삶의 주인공들을 만난다. 가난하거나 부자인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등 제각기 사연을 품고 있다. 울다가 웃기도 하고, 그러면 그렇지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편이구나, 그들이 처한 상황에 감정이입을 하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눈물의 카타르시르를 느끼며 새로운 힘을 얻곤 한다.


 이 책의 프롤로그를 읽는데, 벌써 눈물이 앞을 흐린다. , 이건 뭐지. 커다란 감동을 줄 것 같은 예감에 허리를 바짝 곧추 세운다. 아닌 게 아니라, 눈물의 연속이다. 어쩌면, 슬픈 사연의 이야기만 모아 놓은 것인가. 슬픔만이 아니라, 분노, 절망이 있다. 인종차별, 여성에 대한 편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고통의 외침들이 가득하다.


 프롤로그에 언급된 『레 미제라블』을 읽은 것은 중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장발장이 은 식기를 훔쳤다는 것 정도. 어린 소녀 코제트와 장발장이 만나는 장면은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 집이 가난하여 코제트는 하숙에 내맡겨진다. 하숙집 주인은 코제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양육비는 받아 챙기지만, 코제트를 하녀로 부려먹으며 온갖 학대를 일삼는다. 그 중에 가장 싫은 일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일이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밤, 이제 겨우 여덟 살의 소녀는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몸을 떤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큰 두려움인가. 무서운 하숙집 주인의 등살에 못 이겨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가엾은 코제트는 머리를 긁기 시작한다.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디선가 나타난 키다리 아저씨 장발장의 도움으로 순간 물통은 가벼워진다. 갑작스런 상황임에도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여린 소녀 코제트. 끝모를 두려운 상황에서 한줄기 빛과 온기를 만난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야기는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풀어놓은 것으로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전에작가와 술이라는 책에서 처음 접한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이 나와서 참 반가웠다. 제목도 참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 사연은 마음이 아프고 참 안타깝다. 아이의 생일 파티를 하려고 케이크를 맞추어 놓았는데, 생일이 지나기 전에 뺑소니차에 치어 아이가 죽는다. 젊은 부부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상황이 어떨지는 뻔하다. 장례식을 겨우 마친 후, 식음을 전폐하고 슬픔에 싸여 있는데, 한 밤중에 장난 전화 같은 것이 며칠 동안 계속된다. 그때서야 알아차린 부부는 너무 화가 나서 빵집 주인을 혼내주려고 찾아가는데...

아이가 죽었다고 말을 해도 이 무뚝뚝한 빵집 주인은 위로의 말이라든지, 슬픔의 그림자를 가득 안고 있는 이들 부부에게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드시지요. …… 이럴 때 뭘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P40)

이런 와중에 먹을 것이 넘어갈까마는,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서 허기를 느낄 수도 없었던 부부는 따뜻한 빵을 먹는다. 무뚝뚝한 사내가 내미는 빵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따뜻함을 나누기에는 큰 힘이 된다. 그리고 이 늙은 빵집 주인의 이야기가 밤새도록 펼쳐진다는... 이제 막 지독한 슬픔을 겪은 부부에게, 처음부터 슬프게 살아왔다는 사내의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데...


 슬픔이나 고통이 계속된 채 살아가다보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될 것이다. 희망도 없지만, 그렇다고 죽지도 못하고 그저 살아간다. 무표정으로 무장한 채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러니 남의 슬픔 따위는 알 바도 아니다. 자신의 슬픔을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퇴적화된 암석처럼 굳혀가며 살아온 인생이 아닐까. 사람은 행복한 순간에 불행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행복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여긴다. 늙은 빵집 주인의 밤새도록 계속된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은 셋이 어깨를 토닥이며 울었을 것이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치유된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를 외치며, 먹기도 거부하고 구치소에서 죽어간 필경사 바틀비는 소통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외침이었다.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나와 의견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와 다른 것은 인정하기 싫어하며, 정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언급한 이 문장은 매우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

이 이상한 외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단서가 필요했다. 필경사 이전에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을 불태우는 일을 했다고 한다. 편지는 지인들과 얽히고설킨 생사고락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일이 읽고 분류해서 폐기처분해야 했던 바틀비는 사람들의 희망을 불태워야하는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소수는 다수에게 질 수밖에 없다. 약자도, 소수민족도 거대한 힘 앞에는 힘없이 무너진다. 그렇다고 소수인 약자가 비정상이라고 확정을 지을 수 있을까.


 성공이란,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주인공은 쉰다섯 살의 사내 엘제아르 부피에, 고독하게 살아가는 양치기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작은 오두막에서 양치기 개 한 마리와 살고 있다. 매일 아침, 튼실한 도토리를 백 개씩 갖고 다니며 황무지에 심는다. 자기 소유의 땅도 아니고, 싹을 틔우기 전에 들쥐나 산토끼의 밥이 되기도 한다.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는데, 그 중 2만 개만 싹을 틔웠다. 여기서 절반은 자연재해로 소멸되고 1만 그루만 떡갈나무로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딱 보아도 밑지는 장사를 하는 애달픈 사연이 있다. 아들 하나와 아내를 차례로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땅은 죽음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나무가 없기 때문에 이곳의 땅이 죽어가고 있다.’

물론 그 사내가 열심히 나무를 심는다고 해서 이미 떠난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올 리는 없다. 뒤에 살아갈 사람을 위해서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푸르러지는 나무들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평화를 찾았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실제 만난 인물을 다룬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더욱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이 작품의 첫 페이지의 내용은 이렇게 쓰여 있다 한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P171)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이렇게 해야 할까, 저렇게 해야 할까. 아니면 편하게 포기해 버릴까. 이리 재고 저리 재다가 세월을 보내고 가슴 저편에 쌓이는 것은 후회뿐이다. 이럴 때는 조르바가 나와서 갑자기 호통을 칠 것 같다. 사람이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모두 조르바처럼, 초면인 사람에게도 선뜻 다가가 하고픈 말을 시원하게 다 하지는 못할 것이다.


여행하시오? 날 데려가시겠소?”

왜요! 왜요! ……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무슨 생각을 하시오? ……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 젊은 양반, 결정해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이 얼마나 화끈하고 시원스런 말인가. 크레타 섬으로 출발하는 배를 타려고 항구 술집에 앉아 있는 책벌레 청년에게 떡 하니 나타나 다짜고짜 해대는 말이다. 일명 자유인으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이다. 어쨌든 이렇게 청년 두목과 그의 매니저가 된 조르바가 크레타 섬에서 한 겨울을 나면서 보고 겪은 일과 갈탄광 사업을 벌였다가 쫄딱 망해버린 사연을 이야기한다. 읽다 말고 접어두었던 조르바를 다시 만날 때가 된 것 같다.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일단 해 보는 것, 을 배우려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화끈하게 내뱉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얼음을 깨는 듯 쨍하게 다가온다.


 존 버거의 행운아』는 시골 의사 존 사샬이 환자와 삶을 함께 하며 총체적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이야기다. ‘환자의 질병과 환자의 인간 전체를 분리하는 일이 없기때문에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잘 살필 수 있는 눈과 가슴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단지 아픈 곳의 처방만 내려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을에 있는 단 하나의 의사로서, 주민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회지도층 인사이다. 병을 고쳐주는 의사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과 한계를 떠안고 운명과 불행에 맞서 싸워줄 대리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는 아픈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부를 이루었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고 존경해 마지않는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래서 그는 행운아라는 것이다. 그저 어느 날 어디서 툭 떨어진 행운이 아닌, 삶의 태도와 가치로 이루어진 행운이었다. 이 시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서른 네 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저자도 어린이용인 줄 알았다던,어린 왕자는 세속을 살아가는 어른에게 주는 힌트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 실려 있는 주옥같은 작품은 우리의 슬픔을 보듬어주고, 우리가 발을 내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이해하는 발자국이 되리라 믿는다. 말은 살아 있고 문학은 도피가 된다. 그것은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삶 속으로 들어가는 도피이다.”(시릴 코널리CYRIL CONNOLLY)혼자 책 읽는 시간-니나 상코비치)고 했다. 이처럼 문학은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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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3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어떤 책을 선택하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책의 제목이 끌렸다든가, 아니면 저자의 굉장한 유명세와 작품의 호평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든지. 아마도 내 경우는 두 가지 모두였다고 할까. 몇 년 전 이 책을 구입해서 읽다가 좀 지루하기도 해서 읽다가 말았는데, 다시 읽기로 마음먹고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는 좀 동떨어진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읽기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하게 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우리 마을 젊은이들의 불행은 농장과 가옥, 헛간, 가축, 농기구들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데서 싹튼다고 생각한다. 그런 물건들을 얻으면 여간해서는 없애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넓은 초원에서 태어나 이리 젖을 먹고 자라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인데, 그랬다면 자신들이 노동을 바쳐야 할 밭이라는 것의 실체를 좀 더 똑똑히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그들을 흙의 노예로 만들었을까? 인간이란 원래 한 줌의 육신을 소모시키면 그만인데 어째서 60에이커나 되는 땅을 부려야 한단 말인가? 어쩌자고 태어나는 그 순간 무덤을 파기 시작한단 말인가? 인간은 이 모든 것들을 내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p12)

 

 바로 이 부분이다. 농장을 현대의 직장으로 바꾸면 된다. 회사의 직원이 되어 일하는 것이 부품운운하는 하는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세계적인 경제 전문가인 로버트 기요사키도 현대인들이 은행을 위해서 일한다고 했다. 빚을 갚기 위해 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정곡을 콕 찌르는 말에,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아이러니다 예전에 읽은 <조화로운 삶>의 저자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이 버몬트의 산골짝에서 스무 해를 보낸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준으로 정하고 철저히 자급자족하는 삶, 그리고 남은 시간은 책을 읽으며 글을 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다. 문명의 이기를 내려놓아야 하고 그러한 환경에 놓이는 자신이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그들도 삶은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 지는 이미 백 육십 년이 지났고, 산업화로 인하여 땅을 일구어 힘들게 일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신 기계화, 자동화된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도구들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간단하게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할 수 있어서 일하는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늘 시간이 없어 바쁘다고 한다. 마음의 여유도 별로 없다. 오히려 조금 시간이 생기면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궁금해진다. 많은 이들이 <월든>을 찾게 되는 것은 아마도 나와 다르게 살았던 사람에 대해 동경하고, 그 삶을 들여다보며 어떤 위로를 받고 싶었던 마음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치품 대부분, 그리고 이른바 생활 편의품 이라고 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없어서 안 될 물건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에 확실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사치와 편의에 대해 말하자면, 현인들은 가난한 이들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빈약한 생활을 누려왔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지의 고대 철학자들은 외적인 부라는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가난하면서 내적인 부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부자였던 계층이었다.’(p25)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삶에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말 한다. 야생의 생명체들은 식량과 잠자리만 있으면 된다. 인간 또한 삶의 필수품과 식량, 주거와 의복과 연료 같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겉모습을 화려함으로 치장하지만, 내면은 절망감으로 감춰져 있다고 일침을 놓는다. 예로부터 열 가지를 갖고 있으면 열 가지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가문을 영락케 만들고 국가를 쇠약케 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사치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설파하고 있다.

 

 월든 호수 옆에 땅을 가지고 있던 에머슨의 허락을 받아 숲으로 들어간 소로는 그 곳에 직접 집을 짓는다. 농사를 지어 수확물을 판매하기도 하고, 때로는 막노동도 한다. 그리고 지출과 수입을 비교한다. 자신의 소박한 식생활을 알려준다. 자급자족을 하면서도 경제적 효율에 초점을 맞춘다. 나머지 시간은 책을 보거나 몽상에 잠기기도 한다.

 

 ‘어른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은 깊은 공감이 간다. 제법 책을 읽는다는 이들조차도 최고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 어려운 그리스어를 마스터하고 그리스 시인의 난해한 시() 정신을 마스터하고 나서도 기민하면서도 대담한 독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줄 만한 교수가 거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평생공부를 통해 교양을 쌓아 내면을 고양시키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무지를 깨닫는 일이야말로 성장을 위한 꼭 필요한 요소라고.

 

 숲에서 살아가는 소로에게서 무한한 환희와 행복감이 느껴졌다. 새처럼 요란하게 지저귀는 기쁨이 아니라, 조용히 마음으로 되새기는 기쁨이었다. 누군가 의심한 것처럼 은둔자도 아니었고, 사람과의 교제를 좋아하였다.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와, 사상을 논하기도 하고 소박한 일상 이야기도 했다. 거기서 바라보는 호수와 동식물 등 자연을 묘사한 부분은 실물을 보고 있는 듯하다. 세밀한 관찰에 대한 이야기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계절에 따른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며 일체가 되어 22개월을 보낸다. 콩코드의 주민들은 소로를 마을의 박물학자로 간주했으며, 많은 학자들은 미국 자연보호 운동의 선구자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결국은 소로의 삶을 동경하더라도 그렇게 살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진정 원하는 삶이라면 몰라도. 하지만, 현재 있는 자리에서도,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거기서 빚어지는 복잡다단한 생활을 조금이라도 단순화 시키는 방법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마차가 지나가던 시절이니까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시대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근본은 단순하게, 단순하게 살아라.’이다. 그리고 여유 있는 시간을 벌어서 '가 오롯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라고 한다. 오늘날 는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가는 시대이다. 외관으로 비교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성취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성취하고 성공하려는 마음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다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가. ‘좀 더 많이, 좀 더 빨리를 외치는 이 시대에 월든 호숫가의 이른 아침의 정경은 딴 세상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평온한 고독과 정적 속에서 몽상에 잠긴 소로의 모습, 안개와 거울같이 매끄러운 수면, 사방에서 지저귀는 숲개똥지빠귀의 울음소리... 현실 세계와는 다른 삶의 여백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삶은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다른 삶이 궁금해서 엿보기도 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쉽고 간단한 삶은 없는 것 같다. 각자에게 어울리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의 본연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속도와 다른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 삶의 터전이 되는 곳과 그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한 부분이 많기에 좀 지루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천천히 느긋하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음미하듯이 읽어보면 좋겠다.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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