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신화
한승원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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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작가들의 스승이자 한국 문단의 거목인 한승원 작가의 50년 작품 활동 중에서 직접 가려 뽑은 중․단편의 소설들이 <야만과 신화>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바다(그것이 실제의 바다가 되었건, 여성으로 상징화된 바다가 되었건, 화엄의 바다가 되었건)’를 떠난 적이 없다. ‘신화’와 ‘역사’와 ‘여성성’을 ㅁㅊ떠난 적도 없다. 그는 줄곧 이 주제들을 깊이 파고 넓게 확대하고 달리 재해석하면서, 자신만의 광대한 소설 세계를 구축해온 예외적인 작가다.(p558)라고 말하고 있다.


 단편 <어머니>는 1974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바리데기 설화’의 모티브를 차용하고 있다. 감옥에 있는 막동이에게 면회를 가기 위해 늙은 노구에 천식을 달고 사는 어머니가 미역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윗마을로 향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젠 ‘면’자만 들먹여도 큰아들 일현은 눈살을 으등카리같이 싸짊어지고 “그놈으 반디 그만저만 댕기씨요. 그라다가 길바닥에서 죽으면 어짜실라우” 하면서 휙 돌아앉아 곰방대에 써레기나 쑤셔 넣곤 하였고, 며느리란 년은 궁상스럽게 축 처진 볼을 흐물거리며 이쪽의 늙은 마음을 위로해준답시고 “아제도 아제제마는 어마니가 살어사 안 쓰겄소?” 할 뿐, 노비를 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것 마련할 걱정 같은 것을 손톱만큼이라도 내비칠 엄두마저 내지 않는 것이니 어이할 것인가. 개잡놈 같으니라고, 주둥이에 퍼 넣을 술 한잔 값 아끼고, 노름판엘 한 번만 안 가면 그만한 돈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 아닌가.(p64)


 여기를 읽다가 웃기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에 물기가 어린다. 옛날 어릴적 풍경이 생각났다. 옛날 할머니들은 걸지게 욕도 잘했다. 가난에 절고 절어 힘든 나날을 욕으로 풀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큰 아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널빤지 위에서 올골골 떨고 있는 막동이’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부모야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고생하고 있는 막동이가 더 눈에 밟혔을 것이다. 형제들이야 부모 곁을 떠나면 제각각 사느라 바빠서 반은 남이 되는 것이나 진 배 없고...

쌀말 값이라도 얻으려고 큰 아들 일현이, 작은 아들 이현이, 바라대기 딸네 집으로 순례를 하는 것이다. 목수노릇을 하는 둘째도 겨울이라 일이 없어서 봄 해가 길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에라, 내가 독살스럽고 모진 년이구나, 시상에 즈그들이 나이 서른을 넘었닥 해도, 남 모양으로 출중나게 배우기를 했는가, (중략) 그 위에 못된 창아지가 더 독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내가 모진 년이다. 내가 독사다’(p68)


 그걸 마련 못해주겠다고 앙탈을 하는 자식들의 소행이 못내 섭섭하고 노여워, 늙은 어머니는 그 저수지 둑 밑에 주저앉아 다리를 죽 뻑도 통곡이라도 해버렸으면 시원할 것 같은 심사를 억누르고, 부지런히 활갯짓을 하면서 오른손에 든 지팡이를 옮겨놓았다.(p82)


 다행인지 딸네 집에 가서 그나마 착하고 곰살맞은 사위 덕에 돈푼도 얻어오고 애를 가져 배부른 딸이 미역을 얻어 김으로 다 바꾸어다 준 덕분에 바리바리 이고 지고 막동이를 만나러 간다. 이제 스무 살 밖에 안 된 그 보름달 같이 하얗고 예쁘던 딸. 야위고 거칠어진 딸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지만, 그래도 차디찬 곳에서 떨고 있는 막동이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는 마음으로 딸의 도움을 뿌리치지 못한다. 보성으로 향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쇠고기국을 끓이고 따뜻한 우유를 사서 식을까봐 당신의 가슴속에 품고 부르기를 기다린다. 제일먼저 접수했는데, 열두 명이나 부르도록 막동이는 보이지 않는다. 애가 닳고 닳아 있는데, 그제야 면회자를 찾는다. “목포로 갔단 말이오, 어제. 빨리 그리로 가보시오” 하는 퉁명스런 대답만...


어머니는 “어따 어메, 어째사 쓸꼬!” 탄식하며 쿨룩 쿠울룩 터져나오는 기침에 주저앉고...우유병 하나가 떨어져 박살이 난다.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낙지같은 여자>는 로렐라이 전설 설화를 차용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 ‘나’의 집에 아기업개로 들어와 살던 이름은 순한녜. 힘이 센 그녀는 두 살 먹은 동생을 등에 업은 채로 거의 모든 놀이 상대가 되어 주었다. 멱감는 것을 좋아하고 팔과 다리가 길고 키도 후리후리한 얼굴도 예쁜 그녀다. 그녀의 오빠는 ‘나’의 큰집에서 머슴살이를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해녀라고 했고 아버지는 상 장수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중학교 생물 선생이 되고 바쁘고 지친 삶을 풀기 위해 술꾼이 되었고 어린 시절의 낙지같은 여자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씻은 듯이 없어진 지 오래다. 그런데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갔다가, 친구로부터 우연히 알게 되는 사실...


“가끔 말이시잉, 배를 타고 지내가면 배를 대라고 손을 이렇게 까부른닥 하드란께.”

“분명히 귀신이 들리기는 들린 모양인 것이 말이시, 순한녜가 손짓하는 데로 배를 댄 남자치고 썽썽하게 남어난 사람이 없다네. 참말로 도리섬에 배를 대고 그렇게 된 것인지 어쩐 것인지 알 수는 없제마는, 모두가 그런 소리를 해쌓대.(p251)


"또 묘한 것은 말이시, 그 여자가 시방 서른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될 것인디, 가까운 디서 똑똑히 봤다는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시방도 영락없이 처녀 같닥 하드란께.(중략)그러고 나도 금년 봄에 그물을 보러 갔다가 옴스롱 한번 봤는데 말이시, 이 예펜네가 바위 앞에서 따뜻한 볕을 받고 앉어 있데. 껌정 치마 하나만 허리에다 두르고, 위통을 활랑 벗고 말이시. 머리를 빗고 있등만. 참으로 이상스럽단 말이시. (중략)그런디 이 여자 살결은 꼭 백새 한가지여.(중략) 그 놈의 머리는 어찌께나 길다란지, 아마 거짓말을 보태면 한 발은 되겄데.“(p253)


그리고 마을에서는 순한녜를 도리섬에서 쫓아내자고 했다고. ‘나’는 순한녜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하고 약을 사가지고 도리섬으로 들어간다.


“뭣 하러 왔소? 죽일라면 얼릉 죽이씨요. 당신네 성은 술만 묵으면 칼로 찔러 죽일란다고 쫓아댕겼제, 당신은 내 팔자 망쳐놓기만 하고 한 번도 집에 얼씬을 안 해뿌렀제, 당신 어메 아부지는 애기 띠어뿔자고 독한 약이라고 생긴 것은 죄다 쓸어다 먹였제,(중략) 당신네 식구들은 모다 내 웬수여라우, 뭣 하러 왔소? 나 미쳤다는 소리 들은께 춤추겄습디여?(p261)


"낳아논께 낯바닥은 흰떡같이 이쁩디다마는, 병신이었어라우, 열 살이 넘도록 번듯이 눠서 일어나 앉을 줄도 모르고, 누운 채로 똥오줌 퍼싸고, 말을 할 줄도 모르고, 어메가 누군지도 모르고...“(p216~262)


"그래서 별수 없이 쥐약을 사다가 멕였지라우.“(p262)


순간, 그녀가 내 목을 끌어안았다. 두 다리로 내 아랫도리를 휘감아버렸다.

우리는 물속 깉이 가라앉아 들어갔다.(중략) 나는 거대한 낙지한테 휘감겨 허우적거리고 있는 한 마리의 문저리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는 오지 마씨요잉... 그때는 이 섬에서 한 발도 못 걸어 나가고 죽을 것인께.”(p265)


 자신이 저지른 죄를 없앨 수가 있을까. 그것을 없애려고 여자를 죽이려고 한 밤중에 도리섬을 찾아간 사람. 자식을 죽이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어 광기에 빠진 여자. 인간의 쾌락과 도덕성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참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소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고, 다른 책도 그렇겠지만... 실제로 보여주는 듯 한 소설적 묘사의 진수를 보고 구수한 지방 사투리 속에서 촌민들의 삶 속을 엿볼 수 있었다. 해방 전후 시대에 살았던 민중들의 삶의 궁핍함, 동족끼리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의 안타까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신화’적 배경이 들어있는 다른 작품도 찾아 읽는 등 배경지식을 넓힌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삶에 지치고 울적할 때 한 권의 소설 속에 빠져 보자.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 책은 위즈덤 하우스 서평단에 당첨되어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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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나 부인과 두더지 손님
에르네스토 페레로 지음, 파올라 마스트로콜라 그림, 김현주 옮김 / 재승출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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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퀴리나 부인은 이탈리아의 명문가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고, 학창시절 도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부인이 이곳 롬바르디아 지방 산동네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에 과부가 되면서부터였다.

퀴리나 부인의 정원에는 로즈마리와 세이지, 차이브, 바질, 토마토, 치커리밭, 호박이 주렁주렁 열린 밭도 있었다. 잔디밭에는 커다란 수국, 모란, 백일초 한 다발이 앤티크 장미들과 거의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조화로웠다. 이 세상의 모든 가정과 단체에서 본받아야 할 만한 완벽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대문만 닫으면 혼란한 세상과 차단되는 공간. 정기 구독한 신문으로 매일 일어나는 재해와 폭력, 불행한 사건을 담고 있는 세상을 알 수 있었다.


잔디밭 한가운데에는 안네타 대고모님이 심은 최소한 백 년이 넘는 늙은 배나무가 있었다. 배들은 해마다 열매를 맺었고 근처 수녀들이 주워다가 잼을 만들어 구호소 수용자들에 제공하곤 했다. 이렇게 부인은 정원을 가꾸고 정리하며 그 반듯한 질서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곤 했다. 부인은 외로움도 별로 느끼지 않았으며, 혼자 지낼 수 있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건강상태도 최고였다. 스스로도 완벽하게 만족할 만큼. 자신은 농부들이 좋아하는 소 품종인 ‘브루나 알피나(Bruna alpina)'에 속한다며 으스댔다. 브루나 알피나는 16세기 이탈리아에 서식하던 힘 좋고 수명도 길고 젖도 많이 나오는 암소 품종이다.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규칙에 따라 정원을 다스리는 한 죽음 따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오직 눈부신 5월의 아침 풍경만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아침, 부인의 고요한 규칙을 깨는 풍경이 있었으니.

부드럽고 푹신한 잔디 양탄자를 밟으며 걷다가 풀밭을 지나왔을 때 화가 치밀고 증오심이 끓어올라 참을 수 없어 폭발하는 듯 했다.

땅이 파헤쳐져 원뿔 모양으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퀴리나 부인의 비명은 30미터나 떨어진 식료품점까지 들렸고, 이에 위풍당당하고 친절한 안토니에타 부인이 달려왔다. 일명 ‘숭고 부인’이라고 불렸다.


퀴리나 부인의 백과사전에는

‘모든 두더지가 낮이든 밤이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언제나 생기 있고 아주 활동적이다. 대부분의 두더지가 행동이 민첩하여 땅속에 굴을 파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일부 수중생활을 하는 습성이 있는 두더지들은 수영도 매우 잘한다’고.

딸인 마리아 피에라도 밤새 인터넷을 뒤져서 조사를 했다. 두더지들은 서로의 땅굴이 연결되도록 파고 악명 높은 원뿔 모양 흙더미는 땅굴 보수작업이 남았을 때 쌓아두는 것이었다. 이 흙더미로 땅굴을 깨끗하게 유지한다고 한다. 흙을 파다가 식물의 뿌리를 손상시키기도 하지만 먹지 않는다. 두더지들의 움직임이 빠른 것은 매일 자기들의 체중과 비례하는 영양분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즉 땅굴 파기는 먹이를 찾기 위한 활동이라고.

또 두더지가 외롭게 산다고 했다. 짝짓기를 하면 평균 세 마리에서 다섯 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고 젖을 떼고 나면 되도록 빨리 바깥세상으로 내보낸다. 그렇게 새끼를 떠나보내고 혼자 살면서 자신의 영역을 맹렬하게 지킨다.

퀴리나 부인은 불쾌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더지가 조금 지나치게 영리하고, 모범적인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새끼를 망치는 어미가 절대 없다.


“글쎄요. 두더지가 부모들은 못하는 걸 하더라고요. 요즘은 부모가 항상 대기하고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스마트폰이나 소셜네트워크 같은 것에 빠져 바보가 되게 만들기도 하죠. 아이들을 방치해두면 그렇게 점점 덜 스마트해지고 있어요. 이게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죠.”(p51)

“먹이 사냥이 너무 바빠서 서로 갈등이나 싸움을 만들지도 않아요. 요즘은 이런 것을 두고 자원의 최적화라고 부르죠.”(p52)

퀴리나 부인은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주고받는 것이 균형을 이룬다면 고독한 삶이 공생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일찍이 에피쿠로스도 숨어서 살라고 당부했었다. 시인들이 침입자 편에 서 있다는 것도 부인의 마음을 거슬렸다.


숭고 부인의 권유로 처음으로 통마늘로 두더지 퇴치를 시도한다.

두 번째는 땅굴 입구 근처에 병을 꽂고 그 위에 금속 막대를 올려놓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 때 부딪히는 진동으로 쫓아내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땅굴 입구에 호스를 끼워 넣고 하룻밤 동안 수도꼭지를 열어 놓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방법이다. 또 야생 고양이를 동원하고, 다음엔 금속 파이프. 모두 실패.

다음은 덫이다. 딸과 사위가 덫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여 최대한 부드러운 덫을 구입 했다. 숭고 부인과 함께 덫을 설치하고 두더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미운 적을 막상 마주할 준비가 안 됐는데... 드디어 적이 나왔다. 두더지는 파헤친 흙에 앞발을 올려놓고 미동도 하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부인쪽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브루나 알피나 암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려고 지팡이를 잡았는데도 두더지는 꼼짝을 하지 않는다. 마주한 두더지의 눈에서 왜 체키나의 눈이 보이는가. 체키나는 전쟁중에 부인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굶어죽지 않게 매일 알을 하나씩 낳아 준 암탉이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너희 언니’이며 가족처럼 지냈던.

퀴리나 부인이 지팡이를 들어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잠시 풀밭에 내려놓고 다시 돌아봤을 때는 두더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모두 패배로 끝났다.

이제 두더지와의 전쟁은 그만 두고 싶었다. 자신과 두더지가 공통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친구인 아델라이데에게 고백한다. 동료처럼 지내고 있으며, 애완동물이나 다름없지만 매일 먹이를 챙겨줄 필요도 없다고 말이다.


그 후 문득 두더지가 부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바로 ‘경쟁상대’였다.

“우리의 인생에는 경쟁상대가 필요해요. 그래야 제자리에 멈춰 서지 않고 해이해지지도 않죠.”

성탄절을 앞둔 퀴리나 부인의 생일에 손자들로부터 두더지 박제 인형을 선물로 받았다. 두더지의 털은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어리시절 체키나와의 추억이 물밀 듯이 밀려옴을 느낀다. 겨울이 오고 눈이 두껍게 땅을 덮었는데, 퀴리나 부인은 전혀 흔적이 없는 땅 속의 두더지가 걱정이 된다. 딸과의 통화도 화제거리가 없어서 짤막하게 끝났다. 다시 여름이 오고 화려하게 핀 수국 아래 신선한 흙더미를 발견한다.


“돌아왔어!”

두더지의 흔적에 퀴리나 부인은 마냥 생기가 돌았다. 경쟁상대가 돌아온 것이다.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경쟁상대 말이다. 우리와 공존하는 삶의 동반자인 것이다. 어린시절 시골에서 밭고랑에 죽어 있는 두더지를 본 적이 있다. 무서웠었다. 몸집은 뭉뚝하고 통통하며 발바닥이 분홍색이었던. 날렵하지도 않은 그 몸으로 어떻게 땅을 파고 다닐까 궁금했었다. 그 후 두더지는 볼 수 없었다. 땅 속의 광부 두더지는 아직도 어디선가 밭을 갈고 있을까. 세상의 만물은 모두 존재의 이유가 있겠지.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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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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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은 영국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올라 대히트를 친 <이니미니>시리즈의 연속작품이다. 범죄 추리스릴러 소설은 미스테리한 사건의 연속과 반전이 있어 속도감 있게 읽혀지는 것이 그 묘미라고 생각한다. 이 책도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등장인물의 심리묘사가 탁월하여 금세 몰입하게 된다.


 

 인형이나 인형의 집은 본래 어린 아이들이 즐겨하는 놀이도구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섬뜩한 연쇄살인범이 그들보다 나약한 여성들을 꼼짝 못하게 가두고 생명을 앗아가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물리적으로 대항하거나 저항하기 힘든 여성, 어린이들이 범죄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헬렌 그레이스는 여자 경찰로서 불우하고 어려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건 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다. 경찰관은 보통은 남자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거의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점도 흥미롭다. 투철한 직업의식과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 하나하나 사건을 풀어가는 모습에서 멋지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반면에 위험한 상황에 처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기도 하는데 그것을 초월하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느껴졌다. 또 그 내부에서도 남을 밟고 출세하려는 비열한 야심을 품은 세리 하우드 총경같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분야나 악의 끝은 좋지 않다. 결국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게 되고 그동안 쌓아올린 명예도 모두 실추되고 마는 것이다.

 

 

 짧은 호흡으로 여러 인물의 시점으로 사건을 연속으로 배열한 구성법은 추리게임을 하듯 두뇌회전을 하게 된다. 여기서 읽기의 묘미을 더해 준다.

루비의 감금과 피파 브리어스의 사체 발견으로 시작되는 사건의 전개, 범죄를 숨기려고 피해자의 휴대폰으로 트윗을 올리며 교묘히 경찰의 눈을 피해 따돌리지만, 결국 범인은 약물중독자인 엄마의 학대와 무관심 속에 자란 벤 프레이저로 밝혀진다. 급박해진 범인은 불을 질러 루비를 죽이려고 시도한다. 한편 헬렌은 그녀를 구하러 적진으로 돌진하여 적과 대치하는 장면에선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에 땀이 흐를 정도였다. 아, 헬렌이 죽으면 안되는데. 어쨌든 루비와 헬렌이 살아남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항상 엄청나고 엽기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성장과정은 불우하고 사랑을 받지 못하고 폭력과 무관심 속에서 자라 온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충격적인 살인 사건이나 자녀의 학대, 살인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세상이다. 성장과정의 결핍이 어떤 사람에는 성공의 밑거름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범죄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좀 더 나은 세계, 조화로운 삶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 볼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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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 5대 OLI게임의 서막
중세 : 종교, 경제에서 태어나 경제를 낳다.
근세 : 인간은 어떻게 돈의 노예가 되었는가
근대 : 머니게임 후반전, 경제와 과학과 종교의 분립
현대 : 하나로 움직이는 세계 경제와 그 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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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무거울 때 채근담을 읽는다
사쿠 야스시 지음, 임해성 옮김 / 안타레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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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근담(菜根譚)은 중국 명나라 말기 홍응명(洪應明)이 지은 책이며, ‘채근(菜根)’풀뿌리’, ‘나물뿌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채근담(菜根譚)에 대해서 많이 듣긴 했지만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어서 이 책을 만난 것이 반가웠다. 하얀색 표지 디자인이 단아하고 깔끔해서 마음에 든다. 요즘 코로나19 사태가 1년 넘게 계속되고 있어서 왠지 마음이 붕 뜬 듯한 느낌이었는데, 읽으면서 잊고 있던 소중한 메시지를 되새겨 주어서 좋았다. 마치 명상하는 듯한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을 엮은 지은 사쿠 야스시는 1944년 도쿄에서 태어나 게이오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중문학과 일문학을 전공한 동양 고전 해설 전문가다. 게이오고등학교에서 좋아하는 선생님’, ‘존경하는 선생님’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첫 책 고교생이 감동한 논어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논어해설가로서 이름을 높였다. 저서로 맹자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등 다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은 1장 사람의 품격을 생각하다 제2장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생각하다 제3장 삶의 무게를 생각하다 제4장 더불어 사는 삶을 생각하다 제5장 잘 되고 싶은 나를 생각하다

 


 이렇게 다섯 가지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전집(前集) 225장과 후집(後集) 134장으로 되어있는 채근담(菜根譚)에서 전집 90장과 후집 29장을 뽑아 주제에 맞게 분류하여 119장으로 엮은 책이다. 목차를 찬찬히 훑어보니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볼 수 있는 주제의 이야기가 많아서 기대감을 갖고 읽었다.

 


 한 주제의 이야기가 두 쪽으로 되어있다. 한쪽에는 원문과 직역한 내용이 있고, 옆에는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깊이 있는 해석을 곁들인 내용이 들어있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주제별로 5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읽고 싶은 주제를 먼저 선택해서 읽어도 좋고 아무 곳이나 펼쳐서 마음이 가는 대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내려놓아야 나아갈 수 있다

 

공적과 명성, 부와 지위에 집착하면 오히려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도덕과 인의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비로소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전집33 (P25)

 


이 문장의 해설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베개의 서두에 나오는 문장이 인용되고 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다른 사람들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이 발목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내세우면 옹색해진다. 어쨌든 사람 사는 세상은 살기 힘들다.”

 


 일본인들도 좋아하는 명문장이라고 하는데 소세키의 팬인 나도 이 문장이 아주 좋아해서 글쓰기에 인용한 적도 있다. 적당한 선에서 중용을 지키며 인간관계에서도 원만함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건 알지만 모든 일에 사람의 욕심이 들어가게 되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힘든 부분이다. 원래 사람 사는 세상 자체가 살기 힘들다고 인정하고 있으니 묘하게 위로되는 기분이다.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너무 세세한 곳에 감정을 소비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돌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도 속이거나 숨기지 않는다.

궁지에 처해서도 자포자기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전집114  (P80)


 

이 이부분의 해설에서 중국 명나라 말기에 최선(崔銑)이라는 학자가 남긴 여섯 가지 처세훈이라는 육연훈(六然訓)으로 소개하고 있다.


  • 혼자 있을 때는 초연할 것
  • 사람을 대할 때는 온화할 것
  • 유사시에는 단호할 것
  • 평상시에는 잔잔할 것
  • 성공할 때는 담담할 것
  • 실패할 때는 태연할 것    -(P81) 

 


 참 심플하고도 담백하다.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의욕에 차서 어떤 계획을 세워놓고 작심삼일 하는 것도 해당되지 않을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이야말로 작은 것을 이루는 가장 기본일 것이다. 혼자 있을 때나 여럿이 어울릴 때도 이러한 태도로 살아갈 수 있다면 괴로울 일도 없고 맑은 수채화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마음을 차분히 하고 갈고 닦는 자세가 필요하겠지.

 


채우지 말고 덜어낸다

 

인생에서 한 푼을 덜어내면 곧 한 푼을 초월한다.

사귐을 덜어내면 분란을 면한다.

말을 덜어내면 허물이 줄어든다

생각을 덜어내면 정신이 소모되지 않는다.

총명함을 줄이면 본성이 보전된다.

사람들이 날로 덜어내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더하기를

구하는 것은 스스로 삶을 속박하는 것이다.

                -(P102)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라도 더 채우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것 같다. 집안에 물건을 들이는 것도 그렇다. 그렇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나중에 쓸모가 있겠지 하면서 여분을 비축하려는 생각들. 덜어내고 줄이는 것은 정리의 기술에만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이 문장들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사귐과 말, 생각 등에도 미니멀니즘을 적용할 수 있다면,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은 생각은 결정 장애를 일으키고 말이 너무 많으면 실수가 따르니 덧셈보다는 뺄셈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

 

새와 벌레가 우짖는 소리는 모두 마음을 전하는 비결이다

꽃과 풀의 빛깔은 모두 도를 전하는 무늬다.

배우는 사람은 마음을 맑게 하고 가슴속을 영롱하게 해서, 듣고 보는 것마다 깨달음을 얻고자 애써야 한다.

                 -후집7 (P242)

 


 항상 새소리를 듣고 살면서도 큰 관심은 갖지 못했다. 그들끼리 서로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자연의 꽃과 풀들은 돌보아주지 않아도 때가 저마다의 예쁜 자태로 피어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자연 만물을 보면서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그것들만 제대로 받아들여도 인생은 훨씬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한다. 뭐든 빨리빨리 하려고 서두르느라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사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누릴 줄 아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아야겠다.

 


사람의 마음은 채우기 어렵다

 

눈으로 서진(西晉)의 가시나무와 개암나무를 보면서도 칼날의 푸른 서슬을 뽐낸다.

몸은 북망산의 여우와 토끼의 몫이건만 여전히 황금을 아낀다.

속담에 이르기를, “사나운 짐승은 길들일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은 굴복시키기 어렵고, 깊은 골짜기는 채울 수 있어도 사람 마음은 채우기 어렵다.”고 하였다.

참으로 그렇다.

             -후집65 (P250)

 


 위나라를 빼앗아 세운 나라가 서진(西晉)인데, 그 나라가 망했는데도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땅속에 묻힐 텐데 평생 돈만 좇는 세태를 비유한 문장이다. 99석을 가진 사람이 1석을 채워 백석을 만들려고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사나운 짐승 길들이기와 사람의 마음을 비유한 것이 참으로 절묘하다. 이런 마음의 본성을 알고 각자 스스로 욕심을 줄이고 지금 현재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남들을 의식하기보다는 자기 본연의 삶에 충실해지지 않을까.

 


 이 책에 들어있는 짤막한 문장들은 잘 알면서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채근담이 오래된 이야기라서 어른들이 읽는 책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많은 피로감을 느끼고 산다. 경쟁과 비교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짧은 시간에 성과를 보려는 조급함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인 처세는 물론 조직생활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폭넓은 독자층에서 읽을 수 있겠다. 짧지만 깊은 뜻을 담고 있는 문장들을 만나면서 옹달샘 같은 맑은 기운을 느껴보기 바란다.

 

 

 

 

59~99189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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