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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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은 엉겁결에 하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것저것 조건을 따져서 계획적으로 결혼에 성공한 이가 얼마나 될까 싶다. 반면, 그런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몇 년 전 어떤 책을 읽었는데, 이런 결혼이 있었다. 그 책의 저자인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남자의 상을 버킷리스트처럼 작성을 했다. 그 사람의 성격은 물론이고, 취미, 삶의 철학, 가치관, 술과 담배는 하지 않을 것 등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하였다가, 그 기준에 딱 맞는 사람을 만나 교제를 하다가 결혼에 골인한 사람이었다. 와! 이런 결혼관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고 세상에 흔한 조건을 따지는, 이를테면 무조건 재산은 많아야 하고 학력을 따지는 등의 결혼은 아니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러한 노력도 필요하겠구나 하고 새삼 느꼈었다. 이런 경우라면 얼결에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어쩔 수 없이 결혼이라는 틀에 묶이는 경우보다는 삶의 질이 훨씬 낫지 않을까.


 결혼이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도 세간에 떠도는 진리 같은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진리이기만 할까. 이 작품은 여대생 매들린이 19세기 문학으로 ‘결혼 플롯’을 연구하며 연애를 배우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몹시 심취해 있다. 글쎄 상상과 현실은 다른데, 공부하는 공식처럼 연애와 결혼을 대입할 수 있을까.


 기호학 강의에서 만난 레드너, 미첼, 주인공인 매들린의 대학생활과 삼각구도의 연애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 틀은 좀 약하다. 211번 기호학 강의실의 분위기는 제법 열기가 느껴진다. 페터 한트케의 『희망 없는 슬픔』(한국어판은 『소망 없는 불행』이라고 함.) 등 여러 명작과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이 등장하며 토론이 진행된다. 마치 대학 강의실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초반의 분위기는 뭐랄까, 학생들이 수업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마음같이 좀 지루하게 여겨질 정도로 잘 안 읽힌다.


 이제는 더 이상『오만과 편견』『제인 에어』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낭만적이고 순수한 사랑으로 결혼에 성공하는 이야기는 좀 낯선 이야기가 되었다. 그만큼 남녀의 사회적인 이분법적인 역할도 무너진 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변화, 급변화된 시대상의 반영으로 이른바 결혼, 취업, 연애 등을 포기하는 삼포, 오포세대라는 용어까지 등장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미국의 80년대 캠퍼스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지금의 우리의 현실 풍속도와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결혼은 필수라는 시절이 있었다. 과년한 딸이 있으면 안절부절 못하고 중매쟁이들을 내세워 결혼이라는 인륜지사에 사활을 걸었던 우리 부모님 세대이다. 지금의 현실은 과연 결혼을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이 깊어지고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다.’는 생각에 표심이 늘고 있는 실정이다.


 미첼은 매들린을 좋아하지만, 매들린은 레너드를 좋아한다. 미첼은 몰래 매들린과의 결혼을 꿈꿀 정도로 좋아했지만, 그의 연애에 대한 적극성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결국 교수의 권유로 종교학에 관심을 보인다. 래리와의 유럽여행을 마치고, 인도에는 혼자 들어간다. 콜카타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많은 노력을 하지만(매들린을 잊어보려는 노력까지도 포함하여) 결국은 도망치게 된다. 그곳에서 본 많은 부조리, 자신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만 얻을 수 있는 숭고한 삶 속에 제대로 동화되지는 못한다. 레너드와 결혼하지 말라는 편지 답장을 쓴다. 마음속에 아직 매들린이 남아있다는 증거다.


 매들린은 원래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또 부모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는 교제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신이 불안하지만,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레너드에게 점점 빠져든다. 알코올 중독자였고, 이혼한 부모를 둔 가난한 이공대생 레너드에게. 소문난 바람둥인데도, 여자들은 그와 잠자리를 못해서 안달이다. 일단 사랑에 빠지면 판단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주변에서 반대를 하면 할수록 둘은 더욱 결속하게 된다. 평생의 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해야 하는데, 이미 연정으로 가득한 마음은 그가 리튬을 복용하는 조울증 환자라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았다. 매들린의 언니의 말대로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게 되었다.


 레너드는 자신의 병을 자각하고, 약 복용의 양을 조절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거기서 떨치고 나오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한다. 약을 복용함으로 나타나는 무서운 폐해도 알 수 있었다. 의사들에게 환자는 어쩌면 임상실험용이었다. 갑자기 사라지거나,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면서 매들린을 불안에 떨게 한다. 청혼을 하고 결혼을 했다가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이혼하자는 뜻을 내비쳐도, 그렇게 된 상황에 후회도 하지만, 매들린은 그러지 못한다. 아마도 그런 상황이라면 거의 그러지 않을까. 이미 사랑하고 있는데, 차마 그러지 못함은 인간의 기본 심리에 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결국 미첼이 종교학에 관심을 두고 자원봉사를 경험했던 것도 매들린과 이루지 못한 사랑의 도피를 시도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자신의 정신적인 병증과 경제적으로 가난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묘수’로 매들린에게 청혼을 레너드, 앞날을 계획하며 실천하기보다는 사랑에 탐닉하고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매들린은 모두 이 시대 젊은이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연애와 결혼은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인류의 불완전한 영원한 숙제가 아닐까. 책임을 감수하든 못하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삶의 과정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협조정신과 배려 없이는 검은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 해로할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가족과 많은 지인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하지만, 도중에 헤어지는 커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마지못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더욱 그렇다. 예전에 다소 파격적인 제목의『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소설이 있었다. 아마도 결혼생활의 이런저런 부조리를 대변해주는 스토리는 아니었을까. 인생은 연습이 없다. 결혼도 물론 연습할 수 없다. 삶의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새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혼자 사는 것이 맞거나, 혼자 살아야 할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결혼을 하면 반드시 불협화음이 생긴다. 환경이나 성장 배경이 다르고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의견의 합치를 이루고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연예인 중 누가 이혼을 하면 성격차이 때문에 헤어졌다는 말이 자주 나왔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에이, 그건 아니겠지, 하며 색안경을 끼고 딴죽을 걸곤 했다. 하지만, 그 ‘성격’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마음이 착한 것 외에도,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 위기에 대처하고 극복하는 능력, 좋은 삶으로 마무리 하려는 능력 등. 물론 이러한 능력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보는 안목이 필요하겠지. 어쩌면 그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훈련이나 교육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회사생활이나 학교생활만 교육과 계획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인생의 전부일 수도 있는 결혼생활은 더욱 더 소중한 삶이므로, 둘이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욱더. 그게 아니라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이 스스로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좀 더 성숙한 삶을 꾸려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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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작삼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이소영 옮김 / 봄고양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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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재까지도 일본 최고의 작가로 불리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생후 7개월째에 생모의 정신병 발작으로 외가에 입양되었으며, 35세에 치사량의 수면제로 생을 마감하였다. 전에 그의 단편선집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덤불 속>외에는 처음 접하는 작품이 많아서 반가웠다. 그의 친우이자 <문예춘추사> 설립자인 기쿠치 칸은 그를 기념하여 1935년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하였고, 오늘날까지 일본 최고 권위의 순수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1.덤불 속

도둑 다조마루는 거울이나 날붙이를 오래된 무덤에서 파내어 덤불 속에 묻어 두었는데, 그것을 팔아넘길 거라며 말을 탄 부부를 유인한다. 욕심에 혹하여 남자가 도둑을 따라 들어갔다가 화를 당하는 이야기. 목격자들을 상대로 진술을 듣고, 죽은 원혼을 비롯한 용의자 즉 도둑과 아내의 자백과 참회를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각각 자신이 범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욕심으로 인해 위기에 빠지고, 그 과정에서는 오해가 빚어진 상황에 맞닥뜨린다. 수수께끼같은 이 상황, ‘덤불 속’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을까.


3. 희작삼매

목욕탕 풍경으로 시작한다. 지금이야 많이 희석됐지만, 전통적인 목욕탕의 풍경이란. 이웃들이 만나서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다. 그리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곳에 들어서면 누구나 평등한 몸이 된다. 이 작품에서도 비슷하다. 시키테이 산바의 <곳케이본>에 ‘하늘과 땅의 신, 석가의 가르침, 사랑, 무상, 이 모두가 뒤섞인 대중목욕탕’이라고.

여기서 주인공 바킨은 자신의 소설에 대하여 악평을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조금 더 수준 높은 상대’가 아니라, 사팔뜨기로부터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호평에 들뜨지 말고, 악평 또한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자신을 향한 관대함이 작가노릇을 하기에 수월하겠다.


희작(戱作)은 일본어로 게사쿠, 에도 시대 후기의 통속 오락 소설을 지칭한다. 작가들의 고뇌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자주 나온다.


“어떻게든 전진하지 않으면 금세 밀려 넘어집니다. 그러니 일단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기 위한 고민이 중요하겠습니다.”(P74)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를 직업으로 가진 사람이든 일반 직장인이든 치고 올라오는 후배와 선배의 등살에 끼어 마음고생 하기는 매 한가지다. 다른 분야보다 힘든 것은 관리의 도서검열을 예로 든다. 관청 직원이 뇌물을 받는 대목이 있으면 고쳐 쓰라는 명령을 받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언론, 출판의 자유가 옛날에 비하면 좀 낫겠지만, 옛 시대의 문인들은 참으로 고단하지 않았을까 싶다.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후 50년, 100년이 지나면 관리들은 사라지고 어르신의 <핫켄덴>만 남을 것입니다.”(P76) 그렇다. 바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진리. 인생의 무상함, 희노애락을 글로 담아내야 하는 작가들의 삶과 작품의 창작 과정에서의 고충, 그들의 마음을 세밀하게 엿볼 수 있는 이야기. 문득 찾아오는 기쁨어린 웃음도.


“힘닿는 데까지 계속 써라. 지금 내가 쓰는 것은 지금이 아니면 쓰지 못하는 것일지 모른다.”(P85)


4. 개화의 살인

주인공인 의사 기타바타케 기이치로는 첫사랑의 아키코를 잊지 못해 그녀의 남편을 독살하고도, 다시 그녀의 남편이 된 그의 친구 혼다 자작을 향한 분노와 살인의 의지를 깨닫고 자신이 자살하게 되는 이야기. 그가 남긴 유서에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회한과 도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절규가 절절하다.


6. 게사와 모리토

와타루에게 시집간 게사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모리토, 그 둘의 독백으로 인간의 욕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게사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일부러 노래까지 배우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한 와타루에게 귀여움을 느끼면서, 또 게사를 향한 마음은 순수한 사랑의 열정이 아닌 정복하려는 욕망이었음을 토로한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와타루를 죽이자고 합의를 하는데... 게사와 모리토의 내면의 심리를 통해서 남녀의 그릇된 사랑의 이해와 밑바닥에 깔린 비도덕적인 이기심을 잘 보여준다.


<보은기>는 일본의 대도(大盜) 아마카와 진나이가 교토의 유명한 부자인 호조야 야사우에몬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훗날 부도 위기에 빠진 야사우에몬의 은혜를 갚는다. 물론 돈을 훔쳐서. 야사우에몬의 노름꾼 아들 야사부로는 아마카와 진나이 대신 죽음으로써 가문의 은혜를 갚는 이야기.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대도 진나이가 화자가 되어 담담하고 유쾌하게 들려준다.


<한줌의 흙>은 8년간 투병하던 남편이 죽었는데, 시어머니 오스미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가하지 않은 채 남자 몫까지 일만 죽어라고 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는다. 오직 어린 아들에서 전답을 물려받기만을 바라며 쉬지 않고 일을 한다. 부를 일구어 놓았지만, 행복한 삶을 만끽하지도 못하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 오타미.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위에 언급한 작품을 포함하여 11편의 아쿠타가와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도둑, 작가, 평범한 시어머니, 젊은이 등 다양하고 개성 있는 사람들이다. 문체에서는 약간의 능청스러운 유머와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열정적으로 살다간 그의 작품세계와 삶의 내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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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 존재의 조건을 찢는 자들
신창용 지음 / 스틱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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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고 어떤 위기의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급박한 상황의 이야기인가, 예상했었다. 탈출까지는 아니어도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일탈을 꿈꾼다. 지금의 상황에서 탈바꿈하거나 시원하게 벗어나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자신의 상황이 무거운 상태라면 더더욱.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려는 M이 비상사태 발생으로 제대가 연기되었다고 소리치는 중사의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는 아마도 현실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경의 반영이 아닐까 싶은 부분이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파스란>국에서 <로만공화국>으로 건너왔을 뿐인데, 통행증도 없이 불법으로 국경을 침범했으니, 즉결심판을 받아야 한단다. 이 상황을 어디서 본 듯하다. 바로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리게 된다. 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체포된 요제프 K. 그로부터 1년 동안 밑도 끝도 없는 소송에 휘말리게 된다.


“여기서 나갈 수 없소. 당신은 체포되었소.” “그런 것 같군요. 그런데 도대체 이유가 뭐죠?” K가 물었다. “우리는 그런 걸 말해줄 입장이 아니오. 방으로 돌아가 기다리시오. 이제 소송 절차가 시작되었으니, 때가 되면 모든 걸 알게 될 겁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하긴, 뭣 때문에 왔든 그런 건 우리가 알 바 아니지. 일단 여기에 하룻밤 구금된 후 내일 경찰에 압송되어 판사한테 즉결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나 알고 있으란 말이오!”(P10)


 위의 두 문장의 내용의 핵심이 닮지 않았는가? 기묘하게 닮았다. 확실한 증거나 타당한 이유도 없이 당해야 하는 상황이. 정말 ‘운이 사납게 되었다!’ 그렇다면 분명 담당하는 관리국이 있을 터인데, 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산림감시소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느냐 말이다. M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해 하지만, 산림감시소 직원 앤은 오래된 관행으로 자신들이 통행증 확인이나 불법입국자를 검거한다고 했다. 특별입법조사위원 위촉의 문제로 왔다는 말을 듣고 앤은 놀란다. 고급관리, 돈에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호들갑을 떤다. 소문을 듣고 일자리를 찾는 것도, 비상식이며 엉성하다. 더구나 자국에서 분리 독립해서 나간 초라한 로만공화국으로 들어왔다니.


 긴 대화를 나누지만, 도통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각자 목소리는 높이지만, 서로 공감할 수 없는 허공에 떠도는 말이다. 이상한 분위기에 휘말려 3급 관리가 되어버린 M을 사랑한다느니, 몸종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넬리의 말도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다. 너도나도 안정적인 공무원을 선호하는 현실. 출세와 숫자의 만족을 위한 삶으로 치닫는 현실이 보인다.


 파스란에서 변호사라는 직업으로 살았던 M은 왜 타국 로만공화국으로 넘어왔을까? 유학에, 로스쿨을 나오고 법학박사 학위까지 가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으로서, 새 탈출지 로만이라는 외국에서 신분상승을 꾀하여 전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위한 상상의 나래를 펴느라 분주하다.


 앤, 넬리, 파비안 이 여성들은 관리라면 껌벅 죽는다. 빌붙어서 팔자를 고치려는 여자들 같다. 하나같이 관리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뿐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비굴하게 무릎을 꿇는다.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몹시 낮추며,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태연스레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어떻게든 ‘급’을 높여서 돈을 쟁취하려는 삶의 피로감이 보인다. 열심히 노력해서 한 계단씩 나아가려는 삶의 애착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그 어두운 삶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그들 나름의 몸부림일 수도 있다.


 여자들을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는 또 뭔가. 저속하기 짝이 없다. 장난감 다루듯 하며, 그것을 즐기는 모습이라니. 어쩌면 스스로를 귀히 여기지 않는 태도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현실은 너무 각박하다. ‘갑’이 되고 싶은 수많은 ‘을’들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바꾸고 싶지만,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루기에는 녹록치 않은 현실을 보여준다. 무릇 국가나 관리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해야 마땅하나, 제각각 권력의 아귀다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민생은 뒷전이 되고. 그들도 살아야 하니까 온갖 비리와 부조리는 반복된다.

 

 새로운 삶을 원했던 M의 야망이었던, 출세도 행복의 길도 열리지 않은 채 지리멸렬한 시간이 흐른다. 좀 더 나은 세계로의 탈출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삶의 태도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편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여성들은 남자에게, 급이 높은 관리와 가까운 사이가 되어 신분을 높이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당당하게 나아가려는 노력을 했다면 어땠을까. 구덩이에서 벗어나려는 집착이 강할수록 그 구덩이를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는 의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근본적인, 좀 더 문제 상황의 근본적인 것을 끌어내어 해결해야 한다.


 무수한 오자와 어법에 맞지 않는 엉성한 문장, 그리고 너무 긴 대화체는 읽어내기 힘들었다. 사회 곳곳의 의혹투성이를 바라보는 복잡한 시선을 문장에 담으려고 했던 것일까. 게다가 화자의 불확실한 상황의 불안감이나 심경을 반영하려는 설정이라 해도 좀 심하다. 죽음으로써만 ‘탈출’을 이루게 된 일은 심히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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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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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 수 년 전 지방에 살고 있는 동생네 집을 가다가 한 밤중에 짙은 안개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동네까지는 수월하게 도착했고, 몇 분만 더 가면 동생네 집이 지척에 있는 거리였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아주 짙고 새하얀 안개,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였다. 그 속에서 몇 시간을 헤맸는지. 여긴가 하면 아까 그 자리, 그것이 반복되면서 얼마나 섬뜩했는지 모른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느낌이 드는 책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영어회화 학원 동료였던 오하시, 나카이, 다나베, 다케다, 후지무라, 하세가와가 교토 ‘구라마 진화제(鞍馬の鎭火祭)’에 갔다가 하세가와가 홀연 사라진다. 그 후 10년이 흘렀고, 나머지 다섯 명이 모여 다시 그 곳에 가기로 하고 모였다. 밤의 이야기는 왠지 으스스하다. 빛이 차단된 밤은 시야도 짧아서, 아주 작은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등골이 오싹하다.

 

 약속장소 교토역 주변을 걷다가 나(오하시)는 어디서 본 듯한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간다. 옆얼굴이 하세가와를 꼭 닮은 여자다. 종종걸음으로 쫓아간 곳은 ‘야나기 화랑’이었다. 분명히 여기로 들어갔는데, 그 여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화랑주인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고. 이렇게 이야기의 시작부터 묘한 일이 생긴다.

 

 저자의 고향인 교토를 비롯하여 사건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 실제 지명으로 언급한다. 이는 더욱 현장감을 느끼게 해 주고 묘사되는 장면들도 압권이다.

나카이는 갑자기 집을 나간 아내를 찾으러 오노미치에 간 일, 다케다군은 직장 동료 마스다 일행과 오쿠히다에 간 일, 후지무라는 남편과 남편의 동료 고지마군 함께 쓰가루 철도 여행을 한 일, 다나베는 열차 여행에서 독심술을 하는 사에키와 한 여고생을 만난 이야기를 한 가지씩 풀어 놓는다. 이들 이야기 모두 기묘하고 섬뜩하다. 나카이는 오노미치의 가게에서 아내와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물건도 샀는데, 그 사람은 온데간데없다. 또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차를 태워달라는 초로의 낯선 여인은 사람의 얼굴만 보고도 미래를 볼 수 있다면서 마스다 일행을 섬뜩하게 한다. 얼굴에 사상(死想)이 보이니까 지금 당장 도쿄에 돌아가라고, 내일이면 늦는다면서. 이들의 체험 이야기는 하나같이 오싹하고, 마치 단편의 조각을 모아놓은 느낌도 난다.

 

 각각의 이야기의 배경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공통점은 동판화가 기시다 미치오의 ‘야행’이다. ‘야행’은 연작으로 하나하나의 작품에는 실명(實名)의 지명이 붙어 있다. 오노미치, 오쿠히다, 쓰가루, 나가사키 등등. 그런데, 그 지역을 여행하고 그린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더욱 섬뜩함이 느껴진다. 다섯 사람이 한 가지씩 이야기를 하는데, 그의 동판화 ‘야행’의 얼굴 없는 여자가 손을 흔드는, 똑같은 모습이 나온다. 한때 기시다의 작업실은 여러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살롱이었다. 방문객들은 주로 밤에 모여서 그림을 감상하고, 모두는 여행의 추억을 수다로 풀어 놓았다. 기시다는 그들에게 요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으며, 항상 커피 냄새가 났다. 방문객들의 이야기와 암실의 명상이 서로 연결되어 ‘야행’이 탄생했다는데.

 

“이 어둠은 어디든 연결되어 있어.”라는 기시다의 말처럼 거짓말처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사람들의 인연은 이렇게 이어지는 걸까.

 

 환상인지 꿈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속은 것 같기도 하다. 돌다가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점. 헷갈린다. 각각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어떤 틀에 묶여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걸까.  어린 시절 똑같은 모습의 친구와 마주치기도 하고, 현재와 과거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다. 예술가의 눈으로 본 밤은 신비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서광이 다가오면 밤은 그 속에 묻히고 새 날이 반복이 된다. 내가 어제의 내가 아니듯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일까.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던 퍼즐이 하나하나 꿰어 맞추어지듯이 스토리가 제자리를 찾아간다. 게다가 마지막의 반전은 또 다시 현실과 환상을 뒤집어 놓는다. 나중에 다시 교토를 여행하면 많은 생각이 겹칠 것 같다. 열차여행 이야말로 낭만의 극치. 밤의 열차를 탄 여행길에서, 차창에 비친 얼굴들도 예사로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산나이마루야마 유적( 三内丸山遺跡 さんないまるやまいせき)은 일본 아오모리 현 아오모리 시에 위치한 조몬 시대 중기(후기신석기)의 대규모 취락지 유적이다. 1994년의 조사에서 직경 1미터의 거대목주열이 6개가 출토되면서 각광을 받아 현재 관광지가 되어 있다. 길이 30미터의 대형 건물이나 굴립주 건물 자취, 약 500기의 수혈주거 흔적, 무덤, 성토 고건축의 잔존물 등이 35ha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네이버에서 퍼온 사진과 정보임.)

세 번째 이야기-후지무라의 쓰가루 여행에 나온 배경

 

‘교토의 천재’ ‘21세기 일본의 새로운 재능’ 등의 찬사로 수식되는 작가, 모리미 토미히코의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밤의 세계를 환상의 세계로 열어주고 무더운 여름날을 서늘하게 식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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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도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 적령기가 되면 많은 여성들의 관심은 내 반쪽 ‘백마 탄 왕자’는 어디 있을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고 꿈을 꾼다. 영화배우 같은 매력적인 외모에 지적이며 재미있고 직업도 근사한 저명한 변호사 잭은 여성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지인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친절하고 배려 넘치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동석한 여성들은 부러움과 시샘을 하기에 바빴다. 잭 엔젤은 완벽하게 ‘백마 탄 왕자’였다.


『오만과 편견』의 도입부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는 말.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잭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 사랑하는 반려자를 만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호색한도 아니다. 오로지 ‘공포에 질린 인간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기 위해’ 대상을 찾는다. 이리저리 사냥감을 찾던 잭은 야외 공원에 앉아있는 그레이스를 발견하고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온갖 감언이설로 접근하는데 성공한다.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6개월 만에 부모님을 만나 인사하고 결혼식까지 초단기로 성사되었다. 너무 친절하고 너무 잘 생긴 남자가 재력도 있어서 집을 결혼선물이라고 사 주는 남자가 접근한다면 한 번쯤은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다운증후군이 있는 여동생도 같이 살자는 제안에 감동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세상에서 최고로 운이 좋은 여자라는 환상에 들떠 행복감에 젖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척척 진행된다.


 이 글은 나(화자)가 과거와 현재를 돌아다보며 사건의 추이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말이 있다. 겉에서 드러난 평가와 안에서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이 많다. 가볍고 심한 정도의 차이로 누구나 약간의 이중성은 있다. 하지만, 안팎의 정도가 심할 때 감쪽같이 속았을 정도로 격차가 심할 때 사이코패스 성향을  의심하기도 한다. 타인의 공포로 얼룩진 얼굴을 보며 재미를 느끼다니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왕자가 사이코패스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신혼여행지 태국에서, 아니 그보다 먼저 결혼식을 마친 당일 밤 부터였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그레이스는 잭이 없는 빈 방에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첫날밤을 고스란히 홀로 보내고...


“유감이지만 꿈은 끝났어”

소름이 돋는 오싹함이다. 지금까지 그레이스가 알던 잭이 아니었다. 뒤늦게 괴물과 결혼했구나, 뼈저리게 느끼지만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여권, 휴대폰, 신용카드, 지갑 등을 모조리 빼앗아 감추고 돌아갈 길을 차단한다. 그때부터 아름다운 저택은 감옥이 되고, 그레이스는 포로가 되어 일상생활 일체를 감시당한다. 꼭두각시처럼 그의 지시대로 행동해야 했다. 보여주기 위해 연출사진을 찍고, 행복한 모습을 연기한다. 탈출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잡히고 점점 수위 높은 괴롭힘을 당한다. 거의 동물이 사육당하는 만큼 참혹할 정도다.


 게다가 놀라운 사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영리했던 밀리에 의해 결혼식 당일, 계단을 굴러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것은 잭이 밀었던 때문이라고 알려준다. 이 사실은 그레이스의 숨통을 조이는 것 같은 공포심으로 번지고. 야수 같은 잭은 너 그레이스가 아니라, 밀리를 도구삼아 그레이스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조급해진 그레이스는 어떻게든 그 소굴을 벗어나려고 애쓰는데...


 이럴 때는 조급함보다는 차분한 마음이 우선이다. 두려움을 눈치 채게 하는 것은 이미 지는 것이다. 포기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상책이다. 그레이스는 맞서지 않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찾기 위해 무던히 애쓴다. 테스트하는 잭에게 지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스릴 넘치는 치밀한 두뇌 게임이다.


 악의 끝은 없다더니, 잭의 죽음으로 그레이스와 밀리의 고통은 끝난다. 어쨌든 후련한 마무리다. 부모의 극단적인 무관심, 폭력은 잭이라는 괴물로 키웠다. 그렇다고 그러한 환경이 모두 사이코패스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가정환경, 부모에 대한 적개심을 함부로 발설해서는 아니 된다. 제 2의 잭이 나타나 그것을 역이용하여 범죄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문 뒤에 싸늘한 웃음을 띠고 잭이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 완벽해 보이는 커플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소설 『비하인드 도어』는 B. A. 패리스의 데뷔작으로, 아마존 킨들 독립출판 후 3일 만에 10만 부가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영화판권도 계약되었을 만큼 올여름 무더위를 확 날려줄 스릴 만점의 몰입도 높은 작품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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