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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민 옮김 / 마음산책 / 2023년 11월
평점 :
줌파 라히리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제목으로 예상했던 내용은 나와 타인 사이를 헤아리고 공감하는 그런 이야기인가 했다. 그런데 번역 그 자체에 대한 얘기였다. 줌파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를 사랑하게 되고 2015년에 로마로 이주한다. 매일 그 언어로 말을 하고 새로운 표현에 친숙해지고 새로운 사람과 문화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그곳으로 이끌었다. 그곳에 도착한 날부터 어떻게든 자주 이탈리아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한다. 과연 외국어를 배우는데 최정석이 아닐까. 그런 여건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이 이야기는 2015년부터 2021년까지 “번역을 사유한 글들”의 묶음이다.
이 책에는 열 편의 에세이가 들어있다. 이탈리아어 연설문으로 작성했다는 「왜 이탈리아어인가」는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고 글을 쓸 때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았는데 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당혹감과 이탈리아어에 대한 사랑, 이탈리아어를 향한 자신의 꿈과 각오가 들어있다. 그저 이탈리아어를 어떻게 하면 자기의 언어로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했지만 왜 이탈리아어를 선택했는지 스스로 질문한 적이 없었던 라히리는 그것을 사유하면서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쓰기에 이른다. 물론 이탈리아어로. 라히리는 자유로움을 느끼기 위해서 이탈리아어로 글을 쓴다고 했다. 언급한 이 책에는 세 가지 은유가 담겨 있는데 이탈리아 여성 작가 랄라 로마노와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 덕분이었다. 로마노의 첫 산문집 『변신 Le Metamorfost』에 나오는 「문 Le Porte」이라는 꿈 이야기를 통해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는 과정을 사유한다. 인용하고 있는 문장이 너무나 공감되었기에 일부를 언급해 보겠다.
‘문은 아직 열려 있지만 곧 닫힐 참이다. 높고 육중한 한쪽 문짝이 천천히 다른 문짝 위로 떨어진다. 나는 뛰어서 틈을 통과한다. 문 너머에는 첫 번째 것과 똑같은 또 다른 문이 있다. 이 문도 닫히기 일보 직전이고, 이번에도 나는 뛰어서 통과한다. 다음 문이 있고 또 다음 문이 있다. (중략) 문은 하나씩 차례로 나타나는데, 모두 똑같은 문이다. 나는 아직은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부질없다. 항상 또 다른 문이 있을 테니.’(p32)(로마노의 「문」에 나오는 꿈 이야기)
하나의 문을 통과하면 또 다른 문이 나오고 끝이 없이 빠져나가야 하는 악몽을 다룬 꿈이다. 이 꿈 이야기를 통해 라히리는 이탈리아어 공부를 하고 글을 써서 책이 나오면 독자라는 ‘문’을 통과해야 하는 과정을 사유한다.
‘어떤 외국어든 그 언어를 정복하려는 사람은 두 가지 주요한 문을 열어야 한다. 첫째는 독해력, 둘째는 입말이다. 중간에 놓인 더 작은 문들, 이를테면 구문, 문법, 어휘, 의미의 뉘앙스, 발음도 무엇 하나 건너뛸 수 없다. 그것들을 통과하면 비교적 숙달된 수준에 도달한다. 나는 여기서 나아가 감히 글말이라는 제3의 문을 연 것이다.’(p33)
두 번째 은유도 랄라 로마노의 마지막 책 『최후의 일기 Diario Ultimo』를 거의 실명에 가까운 시력으로 유고집을 냈다는데, 자신도 새로운 언어로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실명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이탈리아어를 선택하고 책을 썼지만, 태생적 한계에 대해 독자와 자기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굳이 선택한 이유를 대답하자면 ‘다른 눈을 키워보려고, 취약함을 실험해보려고’ 한다고 라히리는 말한다. 세 번째 은유 ‘접목’은 엘레나 페란테의 세 번째 소설 『잃어버린 사랑』(2019년 번역본 출간됨)을 인용하며 이민 가정의 자녀로서 존재 자체가 아슬아슬한 지리적, 문화적 접목의 결실이라는 점, 글쓰기 주제도 그러한 경험과 트라우마였다. 접목이라는 단어는 줌파 라히리에게 있어 전진하게 해주고 자신의 과거, 시작점, 자신의 궤적을 서술해준다고 했다. 결국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문을 열고, 다르게 보려고, 다른 존재에 접목해 보려는 이유라고 글을 맺는다. 이 한 편의 에세이를 읽으며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지적 통찰과 감성이, 그리고 언어에 대한 사랑,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 밖에도 「통」과 「병치」는 도메니코 스타르노네의 작품에 발췌문과 서문으로 실린 글이고, 영문으로 쓴 「에코 예찬」, 「기원문에 부치는 송가」,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쓴「나를 발견하는 곳」 , 앞서 언급한 스타르네노의 소설 『트러스트』의 후기인 「치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이탈리아어 최신 완성판 출간을 기념해 에이나우디출판사와 그람시재단이 주최한 토론회의 발표문인 「그람시의 ‘트라두치온’」, 「언어와 언어들」, 「이국의 칼비노」가 들어있다. 모두 라히리의 열정과 진심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글이라 많이 소개하고 싶지만 읽을 독자를 위해 아껴 두려고 한다.
에세이마다 라히리의 이탈리아어에 대한 애정과 번역에 대한 사유가 진하게 묻어있다. 이중 「그람시의 ‘트라두치온’」에 대해 잠깐 언급해 보겠다. 이 글을 통해서 이름만 들었던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립하고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11년을 살았는데 그 당시 주고받은 편지 일기 등을 읽으며 라히리는 그람시의 삶을 조명하고 번역한다. 맞다. 번역이다. 낱낱이 해부하여 분석하고 해석하고 사유하는 과정은 그가 말하는 번역과 닮았으며 번역 그 자체였다. 이 글은 여러 핵심 단어를 주제로 하여 번역이 지니는 특성을 자신의 해석으로 설명해주는데 라히리가 얼마나 번역에 대해 열정이 있는지, 나아가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던 그람시를 향한 오마주라고 할 정도로 그와 그의 인생을 세세하게 되살려낸다. 번역이라는 텍스트를 얼마나 깊이 꿰뚫고 있는지 통찰이 엿보여서 전율이 일었다.
처음 읽은 줌파 라히리의 글 정말 좋았다. 이탈리아어를 사랑하게 되고 작품과 작가들과 친밀해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얼마나 언어를 사랑하는지 외국어 공부에 진심인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스타르네노, 안토니오 그람시 등 작가의 작품과 편지글을 읽고 그들과 깊이 교유하는 모습은 한 편의 서정시를 보는 듯했다. 읽은 작품의 훌륭한 서평가였고 독자였고 번역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인간의 삶, 관계를 감지하는 통찰력에 정말 감탄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람시의 ‘트라두치온’」에서 그람시가 옥중에 있었기에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기에 편지글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그람시의 사회적 존재를 번역이라는 텍스트로 사유한 문장이다.
‘번역은 두 텍스트, 개념, 현실, 순간 사이에 맺는 친밀하면서도 불완전한 관계를 암시한다. 그람시의 편지를 읽다 보면, 부인, 어머니, 처형, 형제, 자식을 비롯한 가까운 인물들과 그람시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면서도 불완전한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람시의 편지를 읽으면서 모든 대인관계가 번역의 한 형태로 읽힐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p157)
뱅골어와 영어를 썼던 다섯 살 때부터 이미 언어와 번역의 딜레마를 경험했다는 라히리에게 어쩌면 이탈리아어 공부는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어를 배워서 그 텍스트를 번역하는 것과 그 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까지도 공부하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번역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는 줌파 라히리에게 한없는 존경심과 경외감이 들었다. 라히리는 이탈리아어로 읽고 쓰고 살면서 더 주의 깊고 적극적이며 호기심이 많은 독자, 작가,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문’이 없는 세상에서 살거나 글을 쓰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당당하고 결연하게 나아가는 줌파 라히히를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일본어 번역에 뜻을 두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떼고 있는데 나는 이만큼 번역에 진심이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공부하는 여정에서 내게 커다란 힘이 되어줄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