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
문태준 지음 / 마음의숲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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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후략)

-문태준 시인의 시 <맨발>의 일부-

 



10년 전 맨발이라는 시로 문태준 시인을 처음 만났다. 개조개의 삐죽이 나온 속살을 보고 맨발로 표현할 수 있었다니, 시인의 탁월한 은유와 관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은 슬피 우는 제자들의 모습, 사랑을 잃고 가슴 아파하는 이들,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 견뎌내는 이들을 하나하나 소환시키며 그들의 가장 아래에는 맨발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것을 맨발이라는 단어로 치환시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그때 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따뜻한 위로처럼 다가왔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 조금 있으면 지나가리라는 것을.

 



수백 권의 시집을 읽고서 시에 대해 조금 눈을 떴다고 했다. 너무 겸손한 시인이지 않은가. 그 시가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어서인지 문태준 시인의 산문집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다. 이 책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어있다. 서문 저자의 말에서 시인은 문장을 얻는다는 것은 새로운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새로운 마음을 얻는다, 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인은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 이사와 살면서 새로운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돌밭과 해안, 오름과 숲에서 해녀와 대양의 어부, 귤밭의 농부와 산인(山人) 이웃들, 여객선, 섬들, 자연에서 문장을 얻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4계절 이야기는 시인이 시의 첫 문장을 만나기 위해 사유하며 보낸 과정의 여정이기도 하고 몸과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난 시와 음악, 미술, 영화와 사람들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시가 만들어지는 그 경과보다 시가 내게 찾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더 마음을 쓴다고 했다. 또 문태준 시인이 시를 짓는 이유도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려는 마음에서고 사람이 전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한다. 이 말을 접하고 보니 시 맨발과 사람에 대한 인정’, ‘애정이 있었기에 탄생한 시라는 걸 알게 된다. 이러한 시인의 시 철학은 문장들 속에 따뜻하고 선명한 색깔로 그려진다.

 



봄은 여러 가지 색실을 바늘에 꿰어 봄꽃을 수놓고 그것으로 자연의 옷감을 장식할 것이다. (중략) 농부는 밭에 새로이 곡식의 씨앗을 뿌리고 한 해 농사를 시작할 것이다. 발아를 앞둔 씨앗들은 고운 이가 돋아나는 아가의 잇몸처럼 근질근질할 것이다. 바야흐로 생기의 봄이 오고 있다.’(P58)

 


요즘 가을볕은 금모래처럼 곱다. 잠깐씩 햇살 속에 앉아 있기도 한다. 무언가를 노란 보자기에 싸서 놓아둔 것처럼 마루에 내려앉는 가을빛은 따사롭기만 하고, 푸근한 마음을 일으킨다. 이 햇살을 저장할 수 있다면 두고두고 아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P184)

 



어쩜, 산문이 이렇게도 시 같고 그림 같은지! 글을 읽는 내내 눈앞에 그림이 그려질 정도다. 발아한 씨앗들은 곧 돋아나려는 아가의 잇몸처럼 근질근질할 거라고 한다. 씨앗과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인가. 앞부분에서 문태준 시인은 시인은 세상의 모든 생명 존재가 서로 듣는 존재라고 했다. 서로 잘 듣고 들어주어야 하는데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이러한 소통이 잘 안 되어서 상처를 주고받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도 끊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서로 듣는마음이 아닐까.

 



시인의 온갖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나를 옛 추억의 한때로 데려다주어 희미하던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고향의 그리운 것들을 상기시켜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우리는 햇살 한 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존재다. 비대면을 요구하는 시간이 오래 계속되다 보니 북적이는 사람들의 인파가 그립다. 마주 앉아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시절이 그립다. 이렇게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사소한 일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면 내 가까이에 널려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살면서 자주 과거를 떠올리곤 한다. 그 시절의 따뜻한 기억, 후회스러운 일, 떠나간 사람과의 추억 등. 어떤 이는 현재에 집중하며 살기 위해서는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태준 시인은 굳이 과거의 시간을 회피하거나 부정할 이유는 없다고 한다. 땅으로부터 뿌리가 뽑힌 꽃나무가 더 자랄 수 없듯이, 우리는 과거의 시간으로부터 줄기와 잎과 꽃을 얻게 된 꽃나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옛 시간을 옛사람의 시간을 함께 살면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 지나갔다고 어제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오늘은 어제이며 내일이기도 한,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 시인은 이렇게도 시를 많이 읽는구나 싶었다. 이야기마다 시가 나왔다. 시가 나오면 소리내어 읽었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문장을 읽으며 그림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왠지 천천히 음미하듯이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시인이 한순간 한순간을 살면서 사유했던 순수함과 맑은 마음이 글에서 전해져 왔다. 계절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자연과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끝에서 시가 만들어지는구나 싶었다.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한 편의 시로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시를 잘 완성하려면 참 나를 만나며 살아가는 태도야말로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 산문집을 읽고 느낀 건 나도 새벽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한동안 쓰다가 말았던 미라클 모닝모닝 페이지가 생각났다. 오늘 할 일 메모도 좋고 뭐라도 좋을 것이다. 시인이 항아리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공부와 수행의 대상으로 여기듯이, 나도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통해서 좀 더 충만한 날들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인은 행복의 꽃들이 생활 곳곳에 피어나길바란다고 했다. 시인이 첫 문장을 만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사유했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나로 나아가고 싶은 독자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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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3-06 0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백권의 시를 읽어야 시에 눈을 뜰 수 있군요~!! 산문인데 시처럼 느껴지네요. ‘햇살을 저장할 수 있디면‘ 이 표현 너무 멋져요~!!

모나리자 2022-03-07 10:07   좋아요 1 | URL
네, 역시 시인은 시를 많이 읽더군요.
문태준 시인이 시를 만나기 위한 과정은 자신의 마음 들여다보기, 그리고
자연과 사물과의 교감, 그 자체였어요.
시적인 문장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한국의 ‘서정시인‘이라는 칭호가 붙었나봐요.

새 한주도 화이팅 하세요. 새파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