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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 ㅣ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22
헤르만 헤세 지음, 김세나 옮김 / 별글 / 2020년 3월
평점 :
이 작품은 헤세의 다른 작품에 비해 비교적 쉽게 읽히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겪어보았을 학창시절을 다룬 이야기이고, 그 시기를 보내고 있는 자녀를 둔 학부모라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우쭐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어린 소년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부담을 주는지, 또 위험한 일인지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한스 기벤라트는 그 마을에서 이전에도 없던 ‘신비로운 불꽃’같은 존재였다. 학교 선생들이나 교장, 이웃 사람들, 목사 등 모두가 한스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고 특별한 인물이 될 거라고 믿었다. 해마다 주(州)에서 치르는 시험을 거쳐 신학교에 들어가고 튀빙겐 대학에 가서 목사나 선생이 되는 소위 안정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의 유일한 후보였다. 시험이 가까워지자 한스의 불안감은 가중된다. 시험을 치르고도 안절부절 못한다. 다행이 2등으로 합격한 한스는 모든 이의 축하를 받으며 그 보상으로 다른 학생보다 1주일 먼저 방학을 맞이하게 된다.
낚싯대를 만들어 낚시를 하며 오랜만에 맞는 해방감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전 날 잡은 물고기를 목사에게 주러갔다가 신학교에 가서 여유롭게 보내려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등 공부를 미리 해 두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듣는다. 또 교장선생이 집으로 찾아와서 신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려면 수학 공부를 해야 한다고 권유한다. 한스는 마음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거절하지 못한다. 더구나 왜 그렇게 공부해야 하는지 이유는 알지 못한 채 얌전하게 따르기만 한다. 오래전부터 기대를 받아왔던 터라 우쭐한 마음 또한 갖고 있다. 나중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신의 앞날의 꿈과 계획을 생각해 보았다면 무작정 어른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았을 텐데. 가엾게도 한스는 어머니가 안 계시고 아들의 앞날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자상하고 현명한 아버지도 아니었다.
신학교에서 들어간 한스는 9명의 동료와 헬라스 방에 배치된다. 슈바벤을 떠나 본 적이 없는 한스는 공부만 할 줄 알았지 몸도 너무 약하고 마음도 여리다. 금세 어울려 노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수줍은 성격인 한스는 다가가지 못한다. 누군가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기를 기다리는데... 이름난 슈바르츠발트 가문에서 온 헤르만 하일너는 한스에게 바보처럼 공부만 한다고 비난하지만 한스는 그가 싫지 않다. 주관이 뚜렷하고 열정적인 태도와 시인 기질을 보이는 자유분방함까지 지닌 하일너에게 점점 매료된다. 워낙 거칠 것 없이 자유분방한 하일너는 루치우스와 싸우다가 교장의 방에 넘어지게 하는 바람에 홀로 감금당하는 벌을 받게 된다.
하일너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하면서도 부끄러움 때문에 용기 있게 나서지 못하다가 배신하게 된다. 그 사이 같은 방 친구 힌딩거가 살얼음이 언 연못에서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이들은 충격에 빠진다. 친구의 죽음을 본 후 한스는 하일너에 대한 죄의식으로 더 불안한 마음이 되었는데 하일너를 찾아가 진정으로 사과를 하고는 둘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첫사랑에 빠진 연인 같은 사이가 된다. 당연히 성적은 떨어지고 더 이상 모범생이 아니게 된다. 교장은 성적이 떨어진 이유를 묻고 열심히 노력하라고 충고하며, 하일너와 멀어지기를 권하지만, 비겁하게 친구를 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 교장과 선생들은 한스에게서 관심을 거둔다.
그런 중에 하일너는 한스와 산책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감금되는데, 도주한 사실이 밝혀져 결국 퇴학 처분을 받는다. 이 무렵 한스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헛것이 보이는 등 건강 상태의 큰 변화가 찾아온다. 이제 공부에도 아무런 희망을 걸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으로 집에 돌아오게 된다. 너무나 여린 영혼인 한스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삶이었다. 어쩌다 하일너와 친해져서 공부를 망쳤을까. 자신이 갖지 못한 하일너의 강한 성격에 매료된 것일까. 따뜻한 사랑에 굶주렸던 한스는 무뚝뚝한 아버지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기 위해 맹목적으로 공부했던 것이 아닐까. 학교 선생과 아버지, 어른들이 자신의 명예와 욕심을 위해 한스를 혹사시켰고 병들게 한 것이다.
유년시절에 자주 놀던 곳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참 안타까웠다. 마음껏 뛰 놀고 쉬게 했어야 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마음이 싹트듯이. 가끔 희망에 차 있다가도 다시는 어린아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이야기는 낚시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강에서 한스의 주검이 발견되는 비극으로 마무리 된다. 지난날의 수치심과 자책으로 괴로웠던 마음,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온갖 비웃음을 흐르는 강물에 씻어 낼 수 있었을까. ‘착한 아이’를 강요받아야 했던 지친 영혼은 삶의 수레바퀴 아래서 고단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저기 가는 저놈들이 한스를 이렇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할 수 있죠.”
……
“이젠 아무 말도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나 저도 아마 이 아이한테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게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을까요?”(P237)
평소에도 한스를 아끼던 구둣방 아저씨가 던지는 말이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그럼에도 한스의 아버지는 아무런 뉘우침도 없이 선생들을 두둔한다. 자녀는 부모의 꿈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행복하게 살다 갈 권리가 있다. 자녀를 위해서라는 명제 아래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성적과 규칙만을 내세우기보다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며 우정을 나누는 일에도 관대했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하일너의 강한 성격이나 자유분방함이 선생들에겐 눈의 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개성을 고려하고 건강상태를 신경 쓰거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칠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읽으면서 학생시절의 나와 부모입장의 나를 돌아보았다. 나의 시절은 흘러갔지만... 나는 아이들의 개성과 그들의 꿈을 우선시 하였는가? 간혹 세간의 행복론을 들이대며 안정적인 삶이 최고라고 말하며 그것을 따르도록 해서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았는가? ... 몰아붙이기보다는 기다리고 지켜보며 믿어주는 태도가 자녀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라고 다시금 깨달았다.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들을 위하여 제대로 된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다. 헤세는 자신의 사춘기 시절의 경험을 이 작품에 투영하여 일률적이고 규격화된 인물을 길러내는 제도권 교육의 한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백년도 넘은 이 작품이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공감을 주는 이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