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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ㅣ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3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어떤 책을 선택하는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책의 제목이 끌렸다든가, 아니면 저자의 굉장한 유명세와 작품의 호평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든지. 아마도 내 경우는 두 가지 모두였다고 할까. 몇 년 전 이 책을 구입해서 읽다가 좀 지루하기도 해서 읽다가 말았는데, 다시 읽기로 마음먹고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는 좀 동떨어진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읽기 시작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하게 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우리 마을 젊은이들의 불행은 농장과 가옥, 헛간, 가축, 농기구들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데서 싹튼다고 생각한다. 그런 물건들을 얻으면 여간해서는 없애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리 드넓은 초원에서 태어나 이리 젖을 먹고 자라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인데, 그랬다면 자신들이 노동을 바쳐야 할 밭이라는 것의 실체를 좀 더 똑똑히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그들을 흙의 노예로 만들었을까? 인간이란 원래 한 줌의 육신을 소모시키면 그만인데 어째서 60에이커나 되는 땅을 부려야 한단 말인가? 어쩌자고 태어나는 그 순간 무덤을 파기 시작한단 말인가? 인간은 이 모든 것들을 내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p12)
바로 이 부분이다. 농장을 현대의 직장으로 바꾸면 된다. 회사의 직원이 되어 일하는 것이 ‘부품’ 운운하는 하는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세계적인 경제 전문가인 로버트 기요사키도 현대인들이 ‘은행’을 위해서 일한다고 했다. 빚을 갚기 위해 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정곡을 콕 찌르는 말에,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아이러니다. 예전에 읽은 <조화로운 삶>의 저자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이 버몬트의 산골짝에서 스무 해를 보낸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준으로 정하고 철저히 자급자족하는 삶, 그리고 남은 시간은 책을 읽으며 글을 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지만,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다. 문명의 이기를 내려놓아야 하고 그러한 환경에 놓이는 자신이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그들도 ‘삶은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 지는 이미 백 육십 년이 지났고, 산업화로 인하여 땅을 일구어 힘들게 일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신 기계화, 자동화된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도구들도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간단하게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할 수 있어서 일하는 시간을 단축시켜 준다. 그런데도 현대인은 늘 시간이 없어 바쁘다고 한다. 마음의 여유도 별로 없다. 오히려 조금 시간이 생기면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궁금해진다. 많은 이들이 <월든>을 찾게 되는 것은 아마도 나와 다르게 살았던 사람에 대해 동경하고, 그 삶을 들여다보며 어떤 위로를 받고 싶었던 마음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치품 대부분, 그리고 이른바 생활 편의품 이라고 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없어서 안 될 물건이 아닐 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에 확실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사치와 편의에 대해 말하자면, 현인들은 가난한 이들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빈약한 생활을 누려왔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그리스 등지의 고대 철학자들은 외적인 부라는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가난하면서 내적인 부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부자였던 계층이었다.’(p25)
사람들은 근심과 걱정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삶에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과정에 있다고 말 한다. 야생의 생명체들은 식량과 잠자리만 있으면 된다. 인간 또한 삶의 필수품과 식량, 주거와 의복과 연료 같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겉모습을 화려함으로 치장하지만, 내면은 절망감으로 감춰져 있다고 일침을 놓는다. 예로부터 열 가지를 갖고 있으면 열 가지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가문을 영락케 만들고 국가를 쇠약케 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사치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설파하고 있다.
월든 호수 옆에 땅을 가지고 있던 에머슨의 허락을 받아 숲으로 들어간 소로는 그 곳에 직접 집을 짓는다. 농사를 지어 수확물을 판매하기도 하고, 때로는 막노동도 한다. 그리고 지출과 수입을 비교한다. 자신의 소박한 식생활을 알려준다. 자급자족을 하면서도 경제적 효율에 초점을 맞춘다. 나머지 시간은 책을 보거나 몽상에 잠기기도 한다.
‘어른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은 깊은 공감이 간다. 제법 책을 읽는다는 이들조차도 최고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 어려운 그리스어를 마스터하고 그리스 시인의 난해한 시(詩) 정신을 마스터하고 나서도 기민하면서도 대담한 독자에게 자신의 지식을 나누어줄 만한 교수가 거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평생공부를 통해 교양을 쌓아 내면을 고양시키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무지를 깨닫는 일이야말로 성장을 위한 꼭 필요한 요소라고.
숲에서 살아가는 소로에게서 무한한 환희와 행복감이 느껴졌다. 새처럼 요란하게 지저귀는 기쁨이 아니라, 조용히 마음으로 되새기는 기쁨이었다. 누군가 의심한 것처럼 은둔자도 아니었고, 사람과의 교제를 좋아하였다.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와, 사상을 논하기도 하고 소박한 일상 이야기도 했다. 거기서 바라보는 호수와 동식물 등 자연을 묘사한 부분은 실물을 보고 있는 듯하다. 세밀한 관찰에 대한 이야기가 물 흐르듯 이어진다. 계절에 따른 변화를 온 몸으로 느끼며 일체가 되어 2년 2개월을 보낸다. 콩코드의 주민들은 소로를 마을의 박물학자로 간주했으며, 많은 학자들은 미국 자연보호 운동의 선구자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결국은 소로의 삶을 동경하더라도 그렇게 살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진정 원하는 삶이라면 몰라도. 하지만, 현재 있는 자리에서도,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거기서 빚어지는 복잡다단한 생활을 조금이라도 단순화 시키는 방법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마차가 지나가던 시절이니까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시대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근본은 ‘단순하게, 단순하게 살아라.’이다. 그리고 여유 있는 시간을 벌어서 '나‘가 오롯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라고 한다. 오늘날 ’나‘는 내가 아닌, ’타인‘으로 살아가는 시대이다. 외관으로 비교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성취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성취하고 성공하려는 마음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다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가. ‘좀 더 많이, 좀 더 빨리’를 외치는 이 시대에 월든 호숫가의 이른 아침의 정경은 딴 세상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평온한 고독과 정적 속에서 몽상에 잠긴 소로의 모습, 안개와 거울같이 매끄러운 수면, 사방에서 지저귀는 숲개똥지빠귀의 울음소리... 현실 세계와는 다른 삶의 여백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삶은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다른 삶이 궁금해서 엿보기도 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쉽고 간단한 삶은 없는 것 같다. 각자에게 어울리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의 본연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속도와 다른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 삶의 터전이 되는 곳과 그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한 부분이 많기에 좀 지루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천천히 느긋하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음미하듯이 읽어보면 좋겠다.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였다."
-P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