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9
막스 베버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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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분야의 고전이다.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볼 때면 이런저런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데, 옛날식 사고의 한계로 인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려 하거나, 오늘날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철 지난 내용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 책을 손에 들기 전에, 이미 이 책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담은 책을 먼저 읽었던 지라, 처음부터 좀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문장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하나 오류가 있으면 단번에 잡아내면서 ‘그럼 그렇지’, ‘역시’ 같은 말을 할 준비를 한 채로. 그런데 저자는 앞서의 내 선입관을 상당부분 흔들어버리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우선 가장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쉽게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은 번역의 이슈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이 주장이 어떤 한계 안에서 주장되는 것인지, 또 자신의 주장과 상충되는 것 같은 다른 의견들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폭넓게 인정한다. 사실 이렇게 써 내려가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우선은 공격적인 태도도 좀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


또, 많은 고전들이 오늘날의 글쓰기 방식과는 좀 달라서 읽어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만드는데 반해, 이 책의 경우 (물론 확실히 예스러운 글쓰기 방식이 묻어나오긴 한다) 의외로 핵심 주제를 파악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건 글의 구성이 괜찮았다는 의미다.




책의 내용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저자는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에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노동관)가 큰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프로테스탄트가 나오기 이전에도 자본주의가 이미 존재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전의 자본주의와 이후의 자본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 기준은 탐욕의 무제한적인 허용을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인 것 같다.


무제한적인 탐욕은 분명 자본주의 발전의 한 동인일 수도 있으나, 필연적으로 전체 시스템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신교의 노동관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금욕주의’는 이런 문제를 제어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꼽는 개신교 노동 윤리는 주로 칼뱅주의와 그 영향을 짙게 밭은 청교도 쪽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 윤리는 애초의 칼뱅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어떤 주장이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특정한 요소가 강조되거나 약화되면서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칼뱅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저자가 말하는 개신교 노동윤리의 핵심 중 하나는 예정론인데, 정작 칼뱅 자신은 이 예정론을 자신의 신학의 말미의 ‘송영’으로 사용하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칼뱅주의자들은 이 주장을 핵심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다.


예정론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지 그렇지 않을 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각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기로 예정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여기에서 일종의 예정 판별법이 생겼다. 내가 어떤 일을 열심히 했을 때 그것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다면(즉 많은 돈을 벌게 된다면) 그건 (구원으로) 예정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사실 칼뱅이 들었다면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반문했을 만한 이야기지만(cf. 60), 아무튼 그런 식으로 칼뱅의 주장은 사용되었고, 이 또한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동인이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다만 이 모든 주장을 하는데 있어서 과학적인 통계나 분석 작업이 부족했다는 점은 지적될 수밖에 없다. 책 전체에 걸쳐서 통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건 처음의 몇 개의 장뿐이었고, 그 중 하나는 헝가리의 개신교인과 가톨릭교인들 사이의 각급 학교 진학률과 관련되어 있는 내용이었는데, 물론 종교에 따라 어떤 분야에 관심을 더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통계이긴 하나, 헝가리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은 아니다.


또, 저자 자신도 언급하듯이, 어떤 지역에서 소수파는 상대적으로 정치보다는 경제 쪽으로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49),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발달한 지역들은 애초부터 어느 정도의 자본이 축적되어 있는 지역이라 자본주의 발달에 유리한 정황을 가지고 있었고, 그 후에 개신교를 받아들인 것(독일의 경우)라는 주장(43)도 무엇보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강한 반론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또 하나,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생각해 볼만 한 부분은, 어떤 지역이 특정한 종류의 개신교가 지배적인 상황이 되었다는 것과, 그 지역에 속한 사람들이 그 신앙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주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에를 들면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가 주류였던 시대 영국의 시민들이 정말로 일상생활에서도 국교회 신앙에 충실하게 살았을까?


오히려 남아 있는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 시민들의 교회 출석률부터가 매우 낮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학적인 내용에 무지하거나, 오히려 교회를 조롱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어떤 지역의 주류 신앙에 따라 그 지역의 자본주의 발전이 달라졌다는 저자의 주장의 타당성은 상당 수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책 후반으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면은, 이 책이 사회학 분야의 고전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역사신학 쪽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개신교 각 분파들의 주장에 관한 세밀한 비교와 대조, 그 차이점들에 대한 높은 수준의 고찰 같은 면들은 훌륭하다. 사실 이 책이 근대의 다양한 개신교 분파들의 노동윤리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면 오히려 신학 쪽에서는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물론 “사회학 분야의 고전” 쪽이 좀 더 유명해 지는 데 유리했겠지만)


이 책의 주장과 관련해 많은 종류의 오해들이 양산되는 경향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개신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경제가 발전했다는, 책의 결론을 아주 살짝 비튼 주장이다. 이 주장은 다양한 차원에서 저자와는 상관이 없는데, 우선 저자가 책에서 꼽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전체 개신교회중 매우 일부(후기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적 신앙)에 한하며, 다른 종류의 금욕주의적 개신교 분파들은 비슷한 노동윤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 개신교 윤리를 만들어낸 신앙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변화를 겪었기에, 오늘날 그 신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신앙이 그 나라의 경제발전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책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저자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여는 특정한 시기, 특정한 지역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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