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장훈의 노래 중 난 남자다를 제일 좋아한다. 그 가사의 앞부분만 옮겨본다.

 

 

넌 모르겠지만 사랑했다

비정한 척했던 것 사과한다

남자란 이유로 널 떠나보내며

행복해지기를

바보처럼 기도했었다

흔들리는 날 잡던 두 손 이젠

독한 소주잔만이 날 위로해

두 눈 꼭 감고

입 맞추던 내 입술엔

해로운 담배 한 개피로

널 추억해 본다(후략)

 

 

만일 가사만 본다면 어떤 남자의 실연을 다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수 김장훈이 경쾌한 리듬에 맞춰 노래 부르는 순간, 그 실연이 흥겹게 구현되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작은 거인’‘찬란한 슬픔’‘소리 없는 아우성같은 모순형용의 맛이나 다름없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그 사랑을 잃었다면 세상에 그 슬픔만 한 것이 어디 또 있을까. 문제는 사내대장부인 남자의 처지다. 남존여비 의식이 빛바랜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이 땅에서 남자가 그깟 실연의 아픔따위에 눈물 흘리거나 울 수 없는 일. 결국 속으로는 울지만 겉으로는 애써 담담한 모습을 가장할 수밖에. 그런 상황이 아주 잘 나타난 김장훈의 노래난 남자다.’

애써 담담하다 못해 유쾌한 리듬을 타기까지 하니, 사실 포복절도할 노릇이다.

 

 

김장훈의 난 남자다를 이따금 TV나 유튜브 동영상으로 보다가 이번 55일 가평에서, 실제 공연으로 보았다. 공연 첫 노래로 그 경쾌한 슬픔을 김장훈이 노래 부르자 객석은 이내 뜨겁게 달구어졌다. 어린이날이므로 어린이에 한해 입장료를 1000원 받은, 역시 유쾌한 가수 김장훈.

 

 

 

대한민국 1호 음악도시, 가평 뮤직빌리지에서 아내와 함께 본 김장훈 콘서트

며느리가 잊지 않고 표를 마련해줘 두 시간 동안 유쾌하게 보냈다. 슬픔은 자리 잡을 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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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풍경이 아니다.

춘심산촌에서 바라본, 바깥세상의 저녁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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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화백을 처음 만난 건 지난가을 어느 날 밤이다. 8호 광장에서 만났다. 얼굴을 잘 모르므로 우리는 휴대폰으로 서로 통화하면서 만난 것이다. 이랬다.

서 화백. 내가 지금 8호 광장에 왔는데어디 있어요?”

선생님. 지금 서 계신 데가 무슨 건물 앞입니까?”

예전에 프랑스제과인가 하는 빵집이 있던 건물 같은데.”

가만 있자. 선생님. 거기서 건너편을 똑바로 보면 무슨 건물이 보입니까?”

예전에 강원은행 지점 건물 같은데 지금은 무슨 신협건물이 됐던가?”

   

 

그 날 밤의 어둑한 8호 광장은 서 화백과 나 사이의 오랜 인연이 확인되는 장면을 상징화한 것 같다. 자동차 전조등들 불빛만 해도 눈부신 광장인데 이상하게 어둑하게 느껴지던 것은 ‘30여 년 긴 세월 동안 소식이 두절된 모습이 아닐까 싶다.

 

30여 년 전 서 화백과 나는 春川高에서 사제지간이었다. 서 현종 학생이 내게 국어수업을 받았다. 그 날 밤 8호 광장에서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그런 인연의 확인이었다.

그 두어 달 후 나는 두 번째 작품집 ‘K의 고개를 내면서 서 화백의 그림들을 삽화로 쓰는 기쁨을 맛봤다.

 

서 현종 화백.

그가 여는 이번 개인전에 나는 가 볼 것이다. 30여 년 인연이 계속되고 있다 

https://blog.naver.com/zigum02/221521599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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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9-04-2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인연입니다. 부럽습니다. ^ ^

무심이병욱 2019-04-29 22:32   좋아요 1 | URL
제자 서 현종 화백은 30여 년 전 ‘국어를 아주 재미나게 잘 가르치던 선생님‘으로서 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정작 저 자신은 그리 열심히 가르치지 못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입니다. 뒤늦게 ‘아! 나도 한 때는 열정이 있는 국어교사였나 보다‘하는 자긍심을 갖기도 했지요. ^^^
 

 

772월말이다. 동해안의 소읍에 있는 양양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 발령받은 때가.

새 학기는 32일부터 시작되니 사나흘 양양읍 사거리에 접한 모 여관에서 하릴없이 머물러야 했다. 그 여관에서 첫날 밤 잠잘 때다. 얼마나 강풍이 밤새 부는지 나는 놀라서 잠 한 번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밤새, 양동이 세숫대야 깡통 화분 등등이 강풍에 날아가거나 뭐에 부딪쳐 깨지거나 하는 소리들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밖으로 나와서 그런 광경을 목격한 건 아니다. 하지만 밤새 그런 소리들을 들으면 누구라도 그 정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양양에서의 첫날을 그리 보낸 후 나중에 알았다. 그 강풍이 양강지풍이라고. 낯선 한자성어에 어리둥절한 내게 동료교사가 설명해 줬다.

예로부터 봄철마다 태백산맥을 넘어 부는, 양양과 강릉 사이로 부는 바람이 유명하다니까! 그래서 양강지풍 하면 알아주지.”

 

이번 4월초에 간성, 속초 지역을 강타해 주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바람을 양간지풍이라 하여 나는 처음에는양강지풍을 잘못 말하는 게 아닌가우려했다. 설명도 따랐다. ‘양간지풍은 봄철마다 태백산맥을 넘어 부는, 양양과 간성 지방 사이로 부는 바람이란다.

양간지풍이라 하거나 양강지풍이라 하거나 어쨌든 우리 마음을 속상하게 만든 자연현상이다.

지금 양양에는 40여 년 전 제자들이 지역의 원로가 돼 살고 있다. 내 젊은 날 사제지간의 연을 맺어 작년만 해도 양양중고총동창 모임에 나를 초대하기도 했다.

태백산맥을 넘어 부는 건 못된 강풍만 있는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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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를 처음 본 건 1973년이었다.

모두들 잠 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혼자 잠 못 이루나

하면서 시작되는그건 너노래가 전국을 강타하던 그 해 봄, 흑백 TV에서 처음 본 것이다.

이장희 그는 등장부터 남달랐다. 대개의 가수들이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고 TV화면에 나오는 데 비해 그는 오토바이를 타다 막 내린 차림 그대로였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콧수염까지 길렀으니.

 

그건 너가 전국을 강타하면서 뒤늦게 나는 그의 뛰어난 다른 노래들까지 알게 되었다. ‘그 애와 나랑은’‘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촛불을 켜세요.’ ‘한 소녀가 울고 있네.’ 등등.

어떻게 거친 오토바이 사내가 그런 감성 풍부한 노래들을 만들고 심지어는 자신이 직접 노래 부르기도 하는지, 참 불가사의했다.

 

그런 그가 2019330, 내가 사는 춘천의 이웃동네 가평에 왔다.

가평뮤직빌리지 음악역에서이장희 콘서트, 나 그대에게콘서트가 열린 것이다.

우리 며느리가 그 귀한 표를 두 장이나 마련해 줘, 나는 아내랑 오랜만에 부부동반으로 이장희를 보았다. 아니 다시 고쳐 말하겠다.

나는 아내랑 오랜만에 부부동반으로1970년대 감성을 만났다.”

 

이제는 오토바이 대신 기타를 곁에 둔 변한 모습이지만 그 마초적인 감성은 여전했다. 해거름의 노년에도 지칠 줄 모르는 이장희 감성.

이 짧은 단상만으로는 그의 감성을 다 표현 못한다. 그렇다고 마냥 표현하자니 끝이 없을 듯싶다.

어제 그의 콘서트를 보고 뮤직 빌리지를 나왔을 때 가평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룻밤이 지난 이제도 그 말밖에 못하겠다. 벅찬 감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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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2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심이병욱 2019-04-02 11:31   좋아요 0 | URL
가수 이장희는 천재입니다. 노랫말도 짓고 곡도 쓰고. 그리고 그 노래도 잘 부르다니, 정말 기가 막힙니다.
어언 해거름 나이에 다다른 그를 보며 인생의 짧음을 한탄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 자신도 만만치 않게 늙었으니 나 참!-----.